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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알 자지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했고 여러 매체에 칼럼과 사회비평을 쓴다. 지은 책으로 <소수의견><우파의 불만><지금, 여기의 극우주의><88만원세대> 등이 있다.

박권일

2018.03.06 23:03

견적이 안나오지만 다시 차근차근 설명드리겠습니다. 애당초 내가 썼던 블로그 글은 "개인 경쟁인데 한명이 희생하는 대신 다른 한명이 성과를 독차지 했잖아. 그건 나빠!" 라는 반응에 대해서 '틀렸다'고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내가 썼던 블로그 글은 '금메달 따기 위해서 희생할 수도 있는 거지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쪽으로 몰아갔던 것은 블로그 글에는 등장하지조차 않은 유시민 얘길 꺼낸 댓글이었지요.

블로그 글의 논지는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대략 다음과 같죠. '이번 매스스타트 결승전의 경우, 무조건 이승훈과 빙상연맹을 파렴치하다고 비난하기 어렵다, 다른 측면들도 종합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승훈-빙상연맹만을 지탄하는 것은 그런 행동을 하게 유도한 다른 '구조적 유인'들이 있음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다. 그 구조적 유인들에 대해 논하지 않으면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구조적 유인에 해당하는 요소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매스스타트라는 종목은 개인경쟁을 표방한다. 하지만 현재 규정대로라면 같은 국가에서 두 명이상 경기에 참가할 경우, 한 명이 희생하며 팀플레이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지는 경기다. 에이스-도메스티크 전략이 절대적으로 유효한 투르드프랑스와 유사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한국팀은 결승에 두 명이 올라갔다. 그 중 한명은 매스스타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빙상스타이고, 한명은 그에 비하면 신진급 선수였다. (구조적 유인요소 1)

둘째, 한국사회는 금메달 개수로 국가순위를 정하고 그걸 올림픽 기간 내내 언론이 떠들어대는,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다. 한 마디로 '올림픽 금메달에 환장하는 사회'다. 금메달 가능성이 높은 종목일 경우, 해당 선수는 물론 관련 단체까지 엄청난 사회적 압력을 받는다. (구조적 유인요소 2)

셋째, 금메달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선수에게 별다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반면에, 희생하지 않을 경우 그 선수가 받아야할 불이익은 상당 수준으로 예측된다. 빙상연맹의 전력과 한국 빙상계 상황은 그 예측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구조적 유인요소 3)

구조적 유인요소 1, 2, 3이 동시에 작용하는 상황이라면, 사실 이번에 우리가 목격한 사건이 일어날 확률은 굉장히 높아지죠. '올림픽 헌장' 같은 소리해봐야, 현장에서 스트레스 받으며 경기하고 경기운영하는 사람들한테는 뜬구름잡는 소리일 뿐입니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잘했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런 모습이 연출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놓고서 고고한 소리나 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좀 무책임한 것 아니냐는 거죠. 게다가 올림픽 헌장에 따르면 저기 구조적 유인요소 2에 해당하는 것은 제 6조 1항에 완전히 위배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 유시민씨가 매스스타트 사태만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던가요? 올림픽 헌장 제 6조 1항: 올림픽 경기는 국가 간 경쟁이 아니라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한) 선수들 간의 경쟁이다.

성선설을 믿는 원리원칙주의자라면 그래도 이해의 여지는 있죠. "그래도 선의를 가지고 노력하고 원칙과 도리는 지켜야지!"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유시민씨는 그 반대편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거든요. 정치 할 때도 이 양반은 자기보다 원칙적인 이야기 하는 좌파 정치세력한테 비현실적이라는둥 거기 찍으면 사표라는 둥 혼자 현실주의자 행세 다하던 양반이었는데 올림픽헌장 같은 걸 들고나와서 원칙 운운하니까, 보는 내가 참 민망한 것이죠.

아무튼 유시민 씨 얘기는 내가 꺼낸 것도 아니고, 뭐라 떠들든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번 매스스타트 결승에서 일어난 사태에는 그렇게 될만한 구조적 유인요소들이 꽤 많았다는 것입니다. 개인들을 비난하고 욕해봐야 문제는 잘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죠. 매스스타트 규정이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일 테고, 그렇다면 만약 다음번에 결승에 두 명 이상 올라갈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겠지요. 개인전이니 그냥 각개전투하고 각자도생하자? 메달 못따고 선수들도 실망하고 좌절하게 될 확률이 높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대안을 고려해야죠. 블로그 글에는 그 얘기도 포함되었죠.

그리고 이건 추신이랄까 보론.

'단체전'이라고 공식화되지 않은 개인 경주에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합니다.

a) 시간기록을 견주어 개인순위를 가리지만 경로를 구분하는 등 가능한 상호 영향을 가급적 최소화하며 팀플레이 여지가 거의 없는(은 없애고자 하는) 케이스.
예) 일반적 스피드 스케이팅, 수영 등 대다수 기록경쟁 개인전.

b) 시간기록이 중시되며 개인 순위를 가리고 팀플레이의 여지가 있으나 경기결과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케이스.
예) 마라톤 등의 경우.

c) 선착순으로 개인 순위를 가리고 팀플레이(가 가능할 경우) 영향이 큰 케이스. 시간기록은 덜 중시됨.
예) 투르드프랑스, 기타 프로페셔널 레이스 스포츠 등

d) 선착순으로 개인 순위를 가리고 팀플레이 영향이 크지 않거나 규정에 의해 제한되는 방식. 시간기록은 덜 중시됨
예) 쇼트트랙 등

매스스타트는 여기서 c) 유형에 가깝고, 개인간 담합 등 팀플레이를 제한하는 규정도 없기 때문에 투르드 프랑스와 유사하죠. 투르드프랑스는 소속팀 뿐만 아니라 브레이크어웨이 그룹 내에서도 얼마든지 각자 다른 팀 소속 개인들이 일시적 담합을 통해 유리한 레이스를 펼치는 게 가능하고, 또 활발히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님은 "팀수상없이 개인수상만 하는 매스스타트에서 희생을 사이클에서의 희생을 통해 이야기하는 점은 잘못된 예를 들었다"는 지적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투르드프랑스에서 팀상은 첫째, 개인상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비중이라는 것, 둘째, 팀상이 우승 도움선수나 우승자가 속한 팀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기준으로 선정된다는 것 등에 비추어볼 때, 적절한 반박이 될 수 없습니다. 팀상은 우승에 기여했다는 이유에서만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희생선수에 대한 보상 차원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실제로 2015년 투르드프랑스 우승자는 팀 스카이 소속 크리스 프룸이지만, 우승팀은 모비스타 팀이었죠.

기록 중시 레이스와 순위 중시 레이스의 상대적 차이도 중요한 지점이죠. 이게 큰 전략의 차이를 가져오거든요. 물론 기록 중시 레이스라도 배정된 코스마다 조금씩 유불리의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걸 최소화하려고 노력합니다. 반면 순위 중심 레이스는 상대적으로 그런 노력을 (안하는 건 아니지만) 훨씬 덜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