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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알 자지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했고 여러 매체에 칼럼과 사회비평을 쓴다. 지은 책으로 <소수의견><우파의 불만><지금, 여기의 극우주의><88만원세대> 등이 있다.

소년의노래

2016.04.24 00:26

흥미로운 논쟁. 잘 봤습니다. 트위터에서 이와 관련한 글 중 인상적인 게 있어 복붙해봅니다.(아이디는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그(손이상)가 제기한 기준에서 보면 노동자란 아마 조직 노동자에 한정하는, 정치적-세력화, 조직화된 노동자를 의미하는 것 같다.

그 경계가 차츰 희미해지고 있고, 일상 생활, 개인적인 영역에까지 시장주의적 노동 형식은 일상화된 현실이다. - 모든 것이 다 노동인 것은 아니다라는 말은, 그래서 정당화될 수 없는 말이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의심스러운 것이다.

시대적 변화를 예견하는 형태로 생각하보면 노동보다 실업이 일상화될 것이다. 사실 현재 모두의 현실은 그것을 앞두고 있다. 어떤 정당의 문제를 지적한다는 목적하에 자신의 편견을 너무나도 많이 노출한 것이다.

심각한 것은 그러한 편견을 마치 다른 이들의 인식에 비해 시대적으로 앞선 인식인 것처럼 사기를 친다는데 있다. 내가 보기엔 대단히 고리타분한 생각에 불과한데 말이다.

정당은 '어떤 정체성'을 대변하는 조직이 아니다./실상 그 정체성 문제로 정당이 망가지고 있고 망가진 것인데, 유일하게 정치적 지향이나 정치적 정체성은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정당에 '어떤 페미니즘 논쟁'은 그리고 내부적으로 발생하는 당원들 간의 '사생활 폭로' - 당의 공식적이고 공적 기구를 그에 전용하는 행태는, 바로 그 정당의 정체성의 곤란으로부터 빚어진 사태라고 봐야만 한다.

데이트 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어떤 점에서는 정파적 희생물이었다고 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 개인의 인간관계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니었다는 거다.

그 정당의 사회 '정치적 노선'의 문제와 그 오랜 갈등의 문제, 당내 필요의 권위란 그것을 종합하거나 수렴하거나 우선 순위를 결정하거나 하는 필요의 권위였고, 그런 권위의 실현이 매번 실패했던 것이다.

동시에 그 권위를 실현할 실천할 인물이 당내 대표로 선정되는 것이 아니라 소위 명망가들이 자리를 메워왔던 문제 역시 - 그러나 그것은 당내 노선 갈등이 그만큼 심화된 형태였음을 의미하고 - 당내 갈등을 해소되지 못하고 유지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 상태라면 어떤 정당도 와해되는 것은 불문가지다.

그 기간동안 그 정당은 갈수록 쪼그라들었는데, 그러면 그럴 수록 과거로부터 지신들이 행해왔고 관련되어 왔던 모든 운동의 분야들 모두가 이제 자신들의 정당 내부를 향해 권리 요구를 행사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이 망상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여전히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 당시 정치적 역량을 기준으로 자신들의 현재를 이해하고 있다는데 있다. 어찌면 그 당내의 페미니즘의 문제들도 그 정치적 퇴행에 대한 자기보복일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정치적 주의주장 대부분이 민주노동당 시절의 정치적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한다면 그들이 이런 말을 단순하게 부정할 수 있을까?

최저임금이 뭐니? 그 법적 기준이 모든 임금 노동자의 임금 책정의 기준이라는 거니? 기준이어야 한다는 거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거니? 최저임금이라는 이슈 자체가 모든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걸 3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최저임금이 인상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정책 변화에는 당연하게 후유증이 뒤따른다. 그런 인상으로 인해 노동자의 해고가 발생할 수 있다.-실제 일어난 사례를 통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상황을 가치 판단을 하기 이전에 그 상황은 발생할 수 있다.

동시에 자영업, 중소기업에는 최저임금 인상이라는 정책이 어떤 위협으로 - 그것도 당장의 비용증가에 따른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임금 인상이라는 정책, 정치적 주장 자체의 불안정함에 대한 지적의 유효함은 사회 운동이 애초에 사회 관계 형성의 관념을 결여한 운동의 한계에 대한 지적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데 있다.

즉 어떤 사회 정책적 주장이 자영업자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서지 못하는 부분은 그 사회정책적 주장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 서로 상충되는 다른 이해관계의 문제를 이해 관계 그 자체의 문제로 대리하고자 했던 문제에 기인하는 것이다.

상상적 자아니 실제 자아니 언급하는데, 동시에 어떤 무지를 가정하는데, 그들은 무지하지 않으며, '이미 알면서도 그것을 한다.'

노동대자본이라는 어떤 전통 마르크스적인 대당관계 안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나는 이 부분에서 모두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서울이라는 대도시의 시정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차원에서 모든 운동이 동원되고 있는 상태다.

그런 점에서 정당의 정책적 문제지기 주장들이 일관성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여기저기 개입은 하지만 아무것도 만들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미시적인 단위의 권력 관계 안에서 - 일정한 과정을 염두해두고, 일정 기간의 문제 상황 상정했을 때, 모두가 생각하는 어떤 일관성 - 그것도 아무런 갈등이나 모순도 없는 정책적 내용의 일관성 자체로 나타내는 것이 가능할까?

애초에 룸펜 정당이라고 규정했으면 그들에게 노동자성 자체를 요구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고,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렇게까지 어떤 사회 운동이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들은 이제 '노동당'이란 이름만 버리면 되는 것이다.

노동당이라는 정당이 어떠해야 한다라는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 그들이 어떤 것을 해왔었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며, 결국, 이름만 노동당만 남았다는 어떤 형태로 조롱은 단순한 의미의 조롱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정상적인 경로에서 일탈한 이들을 탓하는 의미로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그들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을 조롱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착각하면 안된다. 친구야 말로 가장 위험한 존재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서 친구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 경로 의존성이든 경로 이탈성이든

세상엔 친구와 적 외에 아무것도 없다.

내가 화가 났던 것은 정당 내적 모순을 왜 그런 방식으로 해소하려 했는가이고, 무의미한 공적 폭력을 남용했는가이다. 지금에 와서 어떤 사건의 제도적 완비나 준비 미비같은 것을 지적한다는 것도 무의미하고, 설득력도 없다는데 있다.

너희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노노 갈등은 '이론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론적인 해소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노동대 자본의 관계의 우위성이 아니라 노노간의 충분한 갈등 이후에야 분명한 전선의 형성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정치적 대의에 고착되는 형태는 불충분한 갈등의 결과다.

모두가 같은 대의를 표방해도 서로 다른 이야기나 서사를 논의하는 부분을 단순하게 소통이라는 상징 행위로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는 버리는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