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알 자지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했고 여러 매체에 칼럼과 사회비평을 쓴다. 지은 책으로 <소수의견><우파의 불만><지금, 여기의 극우주의><88만원세대> 등이 있다.
시민의회라는 것을 명망가들이 제안했고, 거기에 대한 반발이 거센 모양이다. 그분들의 선의를 의심하진 않는다. 진심으로 뭔가 좋게 만들어보려고 일을 추진했을 것이다. 난 오히려 시민의회 주장보다 그 진의를 의심하는 목소리-'순수시민'에 대한 저 집요한 강박이 더 문제적이고 징후적이라 생각한다. 물론 시민의회 비판이 전부 진의를 의심하기에 나온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같은 형태의 시민의회에 회의적인 이유 또한 그것이 '불순'하다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이 기성질서에 대한 순종에서 나온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모종의 능력과 자격으로 대표를 뽑으려 한다. 그래서는 기껏해야 의회정치의 열화복제판일 뿐이다. 국회의원 개개인이 민의를 제대로 대의하지 못하는 것이 유일한 문제라면 대표성을 개선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노력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정치는 정당정치/의회정치로 번역될 수 없으며 제도적 개선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정치란 개인 이해관계들의 조정, 갈등의 중재 등을 통한 '정치적 파레토 최적', 그러니까 어떤 테크니컬한 해법(이 정치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넘어서는 실천이다.
김제동 씨는 국민이 곧 국가라고 했지만 천만에, 인민은 늘 국가를 초과한다. 그 '초과'는 평균적 다수, 어떤 대단한 능력자, 고귀한 지도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고통받는 자, 배제당해서 국민으로 호명되지도 못한 자, 그래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존재를 걸고 싸우는 소수에 의해 현현한다. 민주주의란 다수가 그 소수에 결합할 때 비로소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민의회 같은 유사의회주의(pseudo parliamentarism)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
촛불의 광장, 깃발의 광장에는 다양한 열망들이 모였다. 그 열망을 특정 정치인 및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로 훤원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촛불을 단순히 박근혜와 최순실에 대한 증오로 축소시키는 것에도 반대할 수밖에 없다. 분명히 광장에는 체제 정상화의 열망, 체제 수호의 의지들이 존재했다. 그것을 보수성이라 규정할 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체제 '너머'를 향한 열망 또한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기성세대보다 훨씬 오래 이 땅에서 살아가야할 다음 세대의 눈빛에서, 그들의 연설에서 분명히 나는 어떤 '초과'를 감지했다. 우리에겐 여전히 더 많은 상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