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알 자지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했고 여러 매체에 칼럼과 사회비평을 쓴다. 지은 책으로 <소수의견><우파의 불만><지금, 여기의 극우주의><88만원세대> 등이 있다.
글 수 36
사퇴와 탄핵, 투 트랙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합의했고 실제 그렇게 흘러왔다. 대통령은 자리에서 스스로는 물러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사퇴 압박은 계속되어야 하고 아마 그리될 것이다. 의회의 탄핵 움직임도 하나씩 진행되고 있다. 분명한 것은 현실권력으로서 박근혜는 이미 끝났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대 대한민국’이라는 전선의 효용은 거기까지다. 그 구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얼추 다 했거나 지금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제 전선을 확대해야 한다. 방금 나는 ‘확대’라고 썼는데, 이는 박근혜와 측근 몇몇의 일탈로 사태가 축소되어선 안된다는 걸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단어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 이 글은 전선의 ‘확대’라기보다 전선의 ‘심화’에 관한 것이다. 이를테면 바리케이드를 넓게 치는 게 아니라, 땅 밑을 파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암흑의 핵심’으로 다가서서, 그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씨앗을 심어야 한다고 믿는다. 암흑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지배자들이 있다. 뿐만 아니다.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 않게도, 거기엔 우리 자신도 있다.
죄 묻기와 책임 묻기
우리가 지금 망연히 바라보는 이 폐허를 앞으로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일은 두 가지다. ‘죄를 묻는 것’과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일찍이 어떤 현생인류도 박근혜 같은 대통령을 겪어보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류는 상상의 지평을 넘어서는 거대하고 끔찍한 국가 범죄를 여러 차례 경험했고, 몇몇 현자들은 그런 사태를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출해왔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중에서도 손꼽힐만한 사람이다. 그는 “모두가 유죄인 곳에선 누구도 유죄가 아니다”라고 했다. 모두가 죄인이란 주장은 ‘죄의 희석’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아렌트는 ‘죄’의 층위와 ‘책임’의 층위를 구별한다. 그는 나치 범죄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시민에게 법적 의미에서 죄를 물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집단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했다. 우리 상황에 적용해보면 이런 이야기다. ‘우리는 박근혜의 공범이 아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집단적 책임을 공유한다.’
사실 집단적 책임의 문제는 죄(법적 책임)보다 파악하기 어렵다. 사람들 마음속에 내면화되고 일상화되어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책임은 죄보다 더 해결하기 어려운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자칫하면 대중혐오(국민이 미개해서 그렇다는 식의, 이른바 ‘국개론’)로 흐를 위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난제를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책임 문제는 뒤에서 논하기로 하고, 먼저 ‘죄’부터 이야기해보자.
핵심은 재벌
최근 김종인이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삼성이 최순실을 매수해 대통령을 농락했다.” 몇 가지 공적 이유에서 저 노회한 책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지만 이 말만큼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종인은 삼성이 최순실을 매수했다고 하면서 노무현 정권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재벌들은 이런 식으로 역대 대통령들을 농락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삼성경제연구소가 정책을 만들어줬다. 뒤에서 보이지 않게 해준다.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에게 맞춤 서비스한다. 그러면서 자기 잇속을 다 챙긴다. 이 본질의 원인을 발본색원하지 않는 한 누가 대통령이 돼도 마찬가지다.” 『로이터』의 표현은 사태의 핵심을 더 명료하게 요약한다. “박근혜 스캔들의 본질은 정경유착이다.” 그렇다. 몸통은 재벌이다. 최저임금 백 원 인상에 온갖 앓는 소리와 협박과 엄포를 뿜어내던 재벌들이, 최순실에게는 몇 백억 원을 척척 가져다 바쳤다. 2009년 대졸초임삭감 사태를 떠올려보자. 경제위기의 고통을 분담하자며 사회초년생의 봉급을 뭉텅이로 잘라낼 때 자기 연봉도 같이 삭감한 재벌 회장과 임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한국의 재벌이란, 위기가 닥치면 솔선수범은커녕 약자들의 팔 다리를 뜯어 먹으면서 “상생전략”이라 지껄이던 자들이다. 그런 재벌들이, 그 탐욕스런 무리가 아무 이유 없이 돈을 냈을 리가 없다. 특히 이번에도 삼성의 행적이 매우 심상찮다. 삼성-국민연금 의혹의 경우, 여러 매체가 각자의 경로로 취재한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국민연금이 국민의 돈으로 삼성 손을 들어주고, 삼성은 그 대가로 최순실에게 돈을 줬다는 것.
이재용을 처벌할 수 있는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은 이재용 지배구조 확립에 결정적이었다. 제일모직 대 삼성물산의 합병비율(1 대 0.3500885)이 알려졌을 때 크게 논란이 벌어졌다. 삼성물산 주식은 지나치게 저평가되고, 제일모직 주식은 지나치게 고평가됐다는 것이다. 자산, 시가총액, 수익가치로 따지면 삼성물산이 제일모직보다 높지만, 합병은 합병비율 산정 시점에서 이상하리만치 낮아진 삼성물산 주가를 기준으로 추진됐다. 이재용 씨 일가는 제일모직 주식(지분율 42.2%)을 삼성물산 주식(지분율 1.4%)보다 훨씬 많이 갖고 있었기에 의혹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모두의 이목은 국민연금으로 쏠렸다. 삼성물산 최대주주가 국민연금이기 때문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양쪽 지분을 다 갖고 있었지만 삼성물산 지분을 두 배 가량 더 갖고 있던 국민연금은 지분가치를 극대화하려면 합병에 반대해야 합리적이다. 게다가 국민연금은 (주)SK와 SK C&C의 합병 비율을 문제 삼아 합병에 반대했던 전력이 있었기에 대부분 이번에도 반대할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뚜껑이 열리자 모두가 놀랐다. 찬성이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삼성은 최순실의 회사 코레스포츠에 35억 원을 보낸다. 최 씨 딸 정유라의 승마훈련 비용과 말 구입 비용 명목이었다. 삼성은 승마협회를 통해 최씨측에 180여억 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1월 20일자 『연합뉴스』에 따르면, 국민연금이 삼성 합병에 찬성표를 던지고 나서 지금까지 본 평가손실액이 5천9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를 위한 돈이다. 그 돈을 가지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결정이 내려졌다. 이를 둘러싼 정황은 고약하다 못해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법적으로는 대가성을 명확히 입증해야 하겠지만, 이미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삼성과 이재용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들어가야 했다.
박근혜 정권과 재벌의 유착은 삼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미르·K스포츠재단에 돈을 준 재벌들은 롯데, SK, 한화, 포스코, 현대자동차, LG 등 사실상 굵직한 대기업을 망라한다. 지배권력의 본질이 '강탈'이라는 것,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한몸이라는 것을 이만큼 간명하게 보여준 사례가 있을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죄 묻기’의 진정한 시작은 당연히 박근혜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박근혜 사퇴를 외치며 광장에 모이고 있는 이유다.
하지만 ‘죄 묻기’의 최종적 성패는 재벌을 처벌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박근혜, 최순실, 그 측근들 몇몇 무력화시킨다고 해서 이 사태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저들이 그렇게 나라를 ‘해먹었다’는 것은, 단순히 저들이 부패하고 탐욕스럽고 파렴치하다는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다른 누가 그 자리에 가도 ‘짬짜미 먹고’ ‘해먹을’ 수 있다는 것. 그게 핵심이다. 요컨대 ‘해먹는 구조’가 문제다. 재벌들은 각종 특혜와 수혜를 받으며 이익은 자기 것으로 손실은 사회로 전가해왔다. 그 공고한 구조를 완전히 제거하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비가역적 균열을 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지금 싸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말하면, 삼성 오너 이재용을 수사하고 처벌할 수 있느냐 여부다. 그 정도도 할 수 없다면 ‘죄 묻기’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시민의 정치적 책임
‘죄 묻기’ 못지않게 중요한 일, 어쩌면 근본적인 차원에서 더 시급한 일은 박근혜 정권을 만들어낸 기저의 ‘힘’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소멸시키는 것이다. 아렌트가 죄와 책임을 구별했지만, 이건 논리적인 구별일 뿐, 실제로 양자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 침묵 같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권력자들의 범죄가 일어나기 수월한 환경을 만들고, 또한 이미 벌어진 범죄를 은폐하는 환경을 조성한다. 시민은 정권의 언론장악에 백만 시위는커녕 십만 시위로도 저항하지 않았고, 삼성의 무소불위적 전횡에도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은커녕 심지어 동조하기도 했을 것이다. 착취와 억압과 폭력은 단지 권력자의 힘과 의지, 공포감의 조성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피지배자 다수의 동의와 묵인, 혹은 (지배자와의) 동일시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전통적으로 그 메커니즘은 ‘이데올로기’라는 말로 설명되어왔다. 월터 리프먼의 말(훗날 이 말은 노암 촘스키 등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을 빌자면 ‘동의 생산(manufacturing consent)’일 게다.
강자의 논리를 내면화한 시민들, 감시자들(언론과 진보단체 등)이 탄압받을 때 침묵했던 시민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권력집단들은 스스럼없이 저런 짓을 할 수 있었고, 실제 그렇게 해왔다. 시민, 국민, 민중, 인민이라는 성긴 말로 모두를 싸잡을 수는 없다. 그들은 단일 주체가 아니며 각자의 삶과 생각은 제각각이다. 예컨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을 테고, 다른 누군가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을 테다. 아예 투표장에 가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다. 만약 박근혜 정권을 만들어낸 유권자의 책임을 논한다면, 박근혜를 찍은 유권자들은 찍지 않은 유권자들에 비해 더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난 찍지 않았습니다”라는 말로 모든 책임에서 면책될 수는 없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범죄와 관련해 ‘죄를 저지른 자’, ‘죄를 피하려 하거나 해악의 확산을 막으려 한 자’, ‘정치적 책임을 다한 자’를 각각 구별했다. ‘죄를 저지른 자’는 홀로코스트를 실제로 결정하고 수행한 나치당원과 부역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엔 ‘사적 현존’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포함된다. 쉽게 말해 정치니 뭐니 관심 없이 그저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부양에만 신경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열심히 자기 생업에 종사하고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통 우리는 ‘좋은 사람’이라 부른다. 그런데 아렌트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죄라고 말하고 있다(단, 여기서의 죄는 죄와 책임을 구분할 때의 죄, 즉 사법적 범죄와는 다른 의미다). 그가 보기에,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조직적으로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대다수 독일인들이 타자의 삶과 고통에 눈길을 두지 않은 채 묵묵히 자기 일만 수행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런 사람들을 “가족남성”과 “가족여성”이라 불렀다.
‘죄를 피하려 하거나 해악의 확산을 막으려 한 자’는 이를테면 오스카 쉰들러(『쉰들러 리스트』) 같은 이들이다. 아렌트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책임을 다한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정치적 책임을 다한 자’는 사태가 흘러가는 흐름을 완전히 거슬러서, 그러니까 시류와 대세에 정면으로 반하면서 정치적 의견을 조성하고 정치집단을 조직하는 사람이다.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은 요컨대 유대인을 숨겨주는 것 같은 도덕적 행위를 넘어서는 무엇이다. 아렌트가 ‘정치적 책임’을 다한 사례로 드는 것은 나치 치하의 뮌헨에 살던 어느 남매다. 그들은 나치에 반대하는 책자를 뿌리는 등 공공연한 대중 선동과 조직화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실패를 무릅쓰고 한 발 더 나아가는 것, 실패가 뻔한 데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감행하는 것. 진정 윤리적인 행위란 그런 것이다.
‘우리 안의 박정희주의’와 그 너머
명백한 죄의 경우, 일단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는 구체적인 절차가 따른다. 하지만 정치적 책임 혹은 집단적 책임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저 “가족남성”“가족여성”으로 살아가지 않고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한 마디로 그것은 ‘궤도이탈’이다. 지금껏 별 생각 없이 따라온 경로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다. 그럼 우리에게, 즉 한국사회라는 시공간에서 ‘지금까지의 경로’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박정희주의다. ‘대체 언제적 박정희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우린 반세기 동안 박정희주의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었고, 박정희주의자로 살았고, 여전히 박정희주의자다.
물론 ‘오늘의 박정희주의’,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20년을 거친 박정희주의는 박정희 정권기의 박정희주의와는 다른 변종이다. 그것은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주의, 관치경제라는 요소가 상당 부분 탈색되고, 신자유주의로 ‘트리밍’된 박정희주의다. 분명한 건 소위 ‘87년 체제’가 과대평가되어왔단 점이다. ‘87년 체제’를 통해 넘어섰다고 믿은 박정희 레짐, 박정희주의가 실은 전혀 극복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전히 한국인의 삶을 가장 강력하게 규율하는 마인드셋(mindset)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박정희주의는 박근혜 정권, 그 이전 이명박 정권을 만들어낸 힘이었다. 개혁정권의 시대이자, 신자유주의 시대였던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도 큰 틀에서 박정희주의의 자장 속에 있었다.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주류는 ‘산업화 세력’과 격렬히 대립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경제논리와 충돌하지 않는 영역에서만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민주주의를 성장주의의 하위가치 내지 보조적 가치로 여겼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성장주의자이긴 마찬가지였다. 현실정치세력으로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보다. 절대다수의 유권자들이 실제로 분배보다 성장을 원하고, 경제발전만 된다면 노동탄압, 언론억압 같은 건 눈감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경제발전이 일정한 지점을 지나면 물질주의 성향이 약해지고 탈물질주의 성향이 강해지지만 한국은 비슷한 수준의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들에 비해 물질주의 성향이 2~3배 높게 나타나는 기이한 나라다. 생명보다 돈, 인간보다 성과나 이윤에 집착하는 사회의 민낯은 통계수치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하다 죽는 사람의 비율, 즉 산재사망률이 10만 명당 18명으로 세계 최고수준이다(2008년 세계노동기구 통계). 경제규모는 일본의 3분의 1인데, 임금체불금액은 일본의 10배다(2015년 고용노동부 통계).
박정희주의는 또한 뒤처지면 버리고 가는 강자생존의 논리이고 약자우대를 사회적 낭비 내지 역차별로 여긴다는 점에서 승자독식의 정신이다. 능력을 물신화하고 무능력자와 저능력자를 멸시하는 과잉능력주의(hyper-meritocracy)도 박정희주의와 관련이 깊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말은 부정의를 개선하고 교정하는 대신 (능력자가 되어) ‘초월’하라는 명령이다. 일간베스트저장소, 그리고 한국의 많은 웹 커뮤니티에서 분출되는 약자 혐오의 기저에 깔린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요컨대 ‘우리 안의 박정희주의’는 ‘우리 안의 일베주의’의 원형이다.
"헬조선"은 고도 성장기에 맞춰진 습관, 제도, 문화가 적절한 대안을 찾지 못한 채 신자유주의로 다시 뒤틀린 결과 탄생한 지옥도의 어떤 이름이다. 박근혜가 대통령에서 물러난다 하더라도 우리 안의 박정희주의가 극복되지 못한다면, 헬조선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끊임없이 우리는 박정희주의 너머를 상상하고, 이야기해야 한다. 물론 박정희주의 극복을 이야기하는 것과 실제 그렇게 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물질주의, 성장주의에 반하는 삶은 지금보다 고통스럽고 수고스럽다. 에너지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박정희주의를 넘어서려면 핵발전에 반대해야 한다. 그러려면 기업은 물론이고 시민 각자가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 고도성장기처럼 전기를 펑펑 쓴다면 핵발전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핵 마피아들’, 성장주의자들은 소비를 줄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국민들이 전기가 부족해지는 사태를 인내할 수 있겠냐고 협박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냐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전기를 펑펑 쓰면서, 핵발전소를 지어대면서, 생태계를 교란하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차츰 말소해가면서.
대다수 정치인들은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자고 말하지 못한다. 겉으로는 “그런 생각이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라 답하겠지만 실은 그것이 유권자의 욕망을 거스르는 것이고 정치적 자살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대안사회를 설득력 있게 그려낼 수 있는 진보정당과 정치인이 필요한 이유다. 그들이 유의미한 현실정치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들 스스로 실력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누구보다 시민들이 궤도를 이탈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 과거와 작별하려면 스스로 미래가 되어야 한다. 변화를 원한다면 스스로 변화가 되어야 한다.
‘순수’ 강박
장면 #1
여러 대규모 시위에서 등장했던 경찰의 ‘차벽’은 분노의 대상이었다. 시위대는 꽃을 달기도 했고 스프레이로 반정부 구호를 칠하기도 했다. 하지만 19일 “박근혜 하야”를 외친 시민들은 경찰버스의 스티커를 자진해서 떼냈다. “경찰분들 힘들까봐” (“의경이 뭔 잘못 있나” 차벽 스티커 뗀 시민들, 『오마이뉴스』, 2016.11.19.)
장면 #2
11월 12일 집회 다음 날. 마포 인근 삼겹살집에서 촛불시위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많이 모이니까 선동질하는 새끼들이 또 슬슬 기어나오더라고. 사람들이 ‘프락치 꺼져라’ 계속 소리 지르니까 쫄더만. 하여간 한국은 불순분자들 때문에 민주주의가 안돼.”
장면 #3
11월 21일 오전 서울고법에서 열린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검사는 8년을 구형하며 이렇게 말했다. “최근의 평화적인 집회와 비교해보면 작년 총궐기집회는 더욱 엄격히 다뤄져 폭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 피고인에겐 5년 선고도 지나치게 가볍다, 살수차는 적법이다.”
비폭력‧평화집회를 덮어놓고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대개 폭력을 싫어한다. 최루탄, 화염병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지난 10여년 넘게 촛불집회가 한국의 거의 모든 시민저항을 규율하는 형식이 되면서, ‘비폭력’이니 ‘순수’ 같은 말이 모종의 강박 내지 억압으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경찰이 시민들의 정당한 집회와 행진을 가로막고 차벽을 세웠다면, 불법은 경찰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역풍’이 불까봐, ‘불순분자’로 낙인 찍힐까봐 ‘순수한 시민’을 강조하고, 경찰버스의 스티커를 떼고, 과격한 발언과 행동을 하는 이들을 ‘프락치’로 몰아세웠다.
집회를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에 관한 정답 같은 건 없다. 폭력 없이 목표를 관철할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게 없겠지만, 세상일이 그렇듯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촛불을 들 수도, 횃불을 들 수도, 죽창을 들 수도 있다. 저항권에는 저항할 권리 뿐 아니라 그 저항의 수단을 선택할 권리도 있다. 다른 시민들의 저항권을 무시하고 그들을 프락치로 몰아가면서까지 순수한 촛불시민들이 관철하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런 걸 과연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단지 '국가가 허락한 시위'일 뿐이다. '사장님 결재 받은 파업',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같은.
경찰과 『조선일보』가 촛불집회를 침이 마르게 칭찬한 이유는, 그것이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일보』는 박근혜라는 ‘꼬리’만 잘라내는 수동혁명을 원하기 때문에, 집회가 격렬해지고 타격대상이 확장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120만 여명이 ‘정권 즉각 퇴진’을 외치며 한 곳에 모였는데 아무런 충돌이 없었다는 건 ‘세계에 자랑할 기적’이 아니라 너무나 기묘한 이야기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인의 이 순수 강박이 아주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길게는 일제시대 ‘불령선인’부터 최근의 ‘외부세력’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지배세력은 ‘불순’과 ‘순수’라는 허구적 구별을 통해 저항자들을 분열시키고 무너뜨렸다. 피지배자들이 이런 지배자들의 논리를 내면화한 면도 있지만 동시에 ‘메시지’의 정당성을 다투어 문제가 해결된 경우가 극히 드물다보니 메시지보다 ‘메신저’의 순수성을 앞세우게 된 면도 있다.
혹자는 비폭력 시위가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통계적으로 맞는 말일지 모른다. 하지만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비폭력 시위가 그렇게나 효과적이라면, 왜 2008년 촛불시위는 그렇게 끝나버렸는가? 비폭력 시위가 주류가 된 2002년대 이후 왜 민주주의의 조건은 더 악화되고 혐오는 확산되고 있는가? 오히려 ‘정상적 다수’가 내부의 다른 목소리를 억압하며 순수성을 과시하는 지금의 저항 형식이 문제이고, 그것이 어느새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매너리즘이 되어 저항의 잠재력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문제다. 권력의 뒤통수를 쳐야 저항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먼저 순수한 시민이라는 자기현시적 강박을 떨쳐내야 한다. 중요한 건 비폭력이 아니라 저항이고 그 저항을 어떻게 창안해나갈 것인가이다. 다행히도 최근의 집회들에서 ‘창조적 저항’의 단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권력 감시 시스템의 회복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만들어낸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중요한 하나가 사회적 감시기능의 약화다. 『한겨레』 등 극소수 언론사가 역할을 십분 발휘해주었기에 이 추악한 권력 사유화의 전말이 밝혀졌고 그들의 노고는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라지 않지만, 다양한 권력감시기구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어쩌면 훨씬 이른 시점에 사태를 인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특히 지난 10년간 공영방송이 철저히 정치권력의 도구로 전락한 것이 뼈아프다. 이명박 정권 시기부터 시작된 우파세력에 의한 언론장악의 효과는 2012년 대선 때 큰 힘을 발휘했고, 과거보다 더 기울어진 언론환경에서 국정원은 일베 등을 통해 저열한 여론공작을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종편방송 등으로 하향 평준화된 언론은 신뢰를 잃어갔다. 좋은 기사는 묻혀버리고 혐오와 증오를 증폭시키는 기사들은 많이 읽혔다. 언론이 망가지니 공론장이 건강할 리 없었다. 트래픽만 보장된다면 어떤 헛소리도 용인되었다. 사회 전체 차원에서 담론의 윤리적 한계선이 한참 내려갔다.
권력 감시는 언론의 주된 기능이지만 언론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진보적 시민단체, 진보정당, 노동조합 등도 비슷한 기능을 한다.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 뿐 아니라 자본권력에 대한 비판도 해왔던 곳들이 이런 조직이었다. 하지만 10년간 이들은 언론사보다 훨씬 더 심대한 타격을 입었고, 사실상 빈사상태에 빠져 있다. 지난 10년 간 철저히 무력화된 권력 감시 시스템을 하루 빨리 회복해야 한다. 우선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인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공영방송을 더 이상 권력자 마음대로 망가뜨릴 수 없게 해야 한다.
촛불집회는 축제다. 광장에서 평소 보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보고 그들과 함께 움직이다보면 황홀해진다. 세계가 바뀌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축제가 끝나고 일상에 돌아오면 세상은 어제와 마찬가지다. 우리를 마모시키고 순치시키고 지배하는 건 현실권력이 아니라 일상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그것이 체제의 진짜 얼굴이다. 민주주의는 축제만으로 지탱되지 않는다. 박근혜 하나 물러난다고 박정희주의가 일거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체제를 바꾸는 것은 우리 일상을 바꾸는 것이고, 지금껏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든 것을 질문에 부치는 것이다. 세계를 바꾸려면 그 세계를 구획하는 법 너머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계를 구체적으로 떠들고 논쟁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과 축제를 역전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우리는 정말 이 모든 수고와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변화를, 세계를 변화시키길 원하는 것일까.
댓글 '2'
글이 좀 많이 길죠? 모니터상에서는 긴 글을 집중해서 읽지 못하는, 저 같은 웹 시대의 저능력자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ms워드 파일. 혼자 읽으려다 출력해 놓은 모양새가 너무 아름다워, 혹 필요한 분 계실까 싶어 공유합니다.
https://www.dropbox.com/s/e794vw43irtjw6r/%EC%A0%84%EC%84%A0%EC%9D%80%20%EC%8B%AC%ED%99%94%EB%90%98%EC%96%B4%EC%95%BC%20%ED%95%9C%EB%8B%A4%28%EB%B0%95%EA%B6%8C%EC%9D%BC%29.docx?d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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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 글이 이상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비현실적'이라는 말도 싫어해서요. 그럼 기존의 세계는 어지간히도 현실적이라서 사회가 이 모양 이 꼬라지가 됐겠습니까!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