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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알 자지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했고 여러 매체에 칼럼과 사회비평을 쓴다. 지은 책으로 <소수의견><우파의 불만><지금, 여기의 극우주의><88만원세대> 등이 있다.

싱가포르를 31년 동안 통치했던 독재자 리콴유가 세상을 떠났다. 한국의 지상파와 종편은 온통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해외조문까지 떠난다고 한다. 생전에 ‘박정희의 빅팬’이었다는 리콴유에게 보이는 그 정성과 열의의 십분의 일만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에게 보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만 역시 씁쓸히 고개를 젓고 만다.

싱가포르가 과연 ‘선진국’인지 아닌지는 차치하자. 리콴유는 자기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한국 우파와 상당수 중도층(그러니까 절대다수 국민들)에게도, 선진국은 숭고한 대상이었다. 선진국이란 무엇인가?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많은 정의가 존재할텐데 문제는, 설명하자면 말이 너무 길어진다는 거다. 뭣보다 한국은 선진국이었던 적이 없으니 그게 뭔지 다들 잘 모른다. 그래서 표상이 필요하다. 예컨대 대학 중의 대학은 하버드요, 과학의 상징은 NASA(혹은 MIT)요, 상(賞) 중의 으뜸은 노벨상이라는 식의 구체적인 표상들 말이다. 

그렇게 서열화되고 물화된 표상들을 통해서만 선진국을 이해하게 된 이유는 한국 시민들이 ‘미개’해서가 아니다. 과거 한국의 위정자들이 선진국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이며,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권력을 잡고 지키는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선진문물’은 당연하게도 물질적 성장과 자본의 이익에 치우쳐 있었다. 집회와 언론의 자유, 노동권은 ‘선진문물’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강력한 반공주의 체제는 자유와 평등 같은 사회적 가치를 모조리 ‘빨갱이의 선전선동’으로 딱지붙이고 처벌했다. 선진국을 욕망하면서 정작 선진국의 복지와 사회적 가치는 받아들이지 않게 된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이 대목에서 더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민주주의를 진전시켜왔다는 점이겠다.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노동자의 투쟁을 통해 노동권을 쟁취해낸 경험 말이다. 실은 이것이야말로 ‘아시아적 가치’나 ‘한국적 민주주의’ 같은 레토릭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박살내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남한의 기적’이다.

“아시아적 가치”라 부르든 “한국적 민주주의”로 부르든, 본질은 같다. 독재권력의 편의대로 취사선택된 이데올로기라는 것. 선진국을 갈망하면서 정작 선진국의 강한 복지와 자유롭고 평등한 문화를 배척하는 이율배반이 극단화된 국가형태가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에 이르는 부국이다. 범죄율은 세계최저 수준으로 '여성과 어린이가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나라'로 유명하다. 실제로 거리엔 흔한 쓰레기 하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청결하고 쾌적하다. 실제로도 그런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어쨌든 리콴유는 ‘청렴한 리더’의 아이콘으로 알려졌다. 대외 이미지라는 측면에서는 부정축재를 일삼은 한국의 군부정권과는 확실히 차이가 있긴 하다. 여기까지가 잘 알려진 싱가포르의 ‘밝은 면’이다. 

자, 이제 어두운 면-솔직히 말해서 이쪽이야말로 싱가포르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만-을 한 번 살펴보자. 싱가포르는 유례없이 가혹한 치안국가다. 이 나라에는 아직도 고대의 형벌인 '태형'이 남아있다. 말 그대로 '두들겨 패는 형벌'이다. 수형자는 ‘불시에’ 방문한 집행관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채로 형틀에 묶인 다음, 항생제에 절인 등나무 채찍으로 흠씬 두들겨 맞는다. 살이 터져나가고 유혈이 낭자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쇼크로 실신해 응급실에 실려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싱가포르는 시민들의 섹스 라이프도 꼼꼼하게 감시하고 규율한다. 2007년까지 오럴 섹스는 싱가포르에서 ‘불법’이었다. 동성 간의 섹스는 예전에도 불법이었고 지금도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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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는 빈부격차가 어마어마한 사회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2009년 발표한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의 빈부격차는 홍콩에 이어 세계 2위였다(한국은 16위). 초대 총리 리콴유는 31년간 독재자로 군림했고 아들 리셴퉁은 2004년 3대 총리가 됐다. 리콴유는 "아시아인에겐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 싱가포르는 독재국가일 뿐 아니라 언론·집회의 자유가 질식된 나라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2012년 언론자유도 순위에서 싱가포르는 135위를 차지했다. 1위는 핀란드였고 일본 22위, 한국 44위, 북한 178위, 중국 174위였다. 언론 자유라는 면에서 싱가포르는 한국보다는 중국이나 북한에 가까운 사회다. 

'싱가포르적인 것들'은 한국인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강력한 치안, 일벌백계의 가혹한 엄벌주의, 높은 국민소득, 분배보다 성장, 카리스마적 독재자에 대한 향수…. 저런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면 인권이나 표현의 자유 같은 건 조금 희생해도 된다고 답할 사람이 아마 한국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멘탈리티를 나는 몇 해 전 ‘싱가포르 판타지’라고 명명한 적이 있다. 

그 판타지가 꿈꾸는 사회는 ‘도금한(gilded) 치안사회’1)다. 경제적 부유함과 사회문화적 억압이 정치의 진공상태와 공존하는 곳.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힘도 싱가포르 판타지에 있었던 게 아닐까. 2015년인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좌우파를 떠나 이 판타지의 위력은 여전해 보인다. 이를테면 리콴유를 추모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트윗을 보라. 
“리콴유 전 총리님의 타계 소식에 삼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고인은 가셨지만 청렴을 통해 일류국가를 만드신 그 뜻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도시 지도자의 모범적 전형이 되어 살아 있을 것입니다.”


1)  치안사회(police society)는 치안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여기서 '치안(police)'은 세 겹의 의미를 지닌다. 첫째, 물리적 경찰력. 둘째, 대중의 안전욕구에 부응하는 모든 형태의 사회통제 기술. 셋째, '정치 없는 통치'. 첫 번째 층위는 글자 그대로이므로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두 번째 층위는 국가의 엄벌주의 정책과 자본에 의한 사회적 배제와 분리의 테크닉을 포괄한다. 형량의 강화가 범죄율을 낮춘다는 근거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에서는 처벌의 수위만 높아지고 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 생체인식기술 등의 발달로 개인정보나 인권이 침해될 여지가 커져 가고 있음에도 이런 우려와 저항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이 바로 치안담론이라 할 수 있다.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반공주의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대중의 안전욕구를 자극하는(“내외부에서 체제를 위협하는 이념적 적대자”) 사회통제기술이다. 셋째 층위인 '정치 없는 통치'의 현실적 상관물은 오늘날 입법권력(의회)과 사법권력(법원)을 압도하는 비대한 행정권력이다. 다시 말해 정치가 사회적 적대의 반영이자 충돌의 현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담론의 시녀가 되어 통치행위를 그저 사후 추인해주는 역할에 머무르는 현실이야말로 치안사회의 본질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 글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4'

피넛

2015.03.29 13:58:44

링크가 페이지를 찾을수없대요ㅠㅠ

대통령

2015.03.29 16:22:38

왠지 모르지만 고쳐드렸습니다...

돈데에스타

2015.04.03 20:12:01

권일이형 예전에 민하형이 적은 치안국가론이랑 이거 연결되는 이야기네요. ㅋㅋㅋ

박권일

2015.04.03 20:47:16

네, 예전에 제가 황해문화에 썼던 치안사회론과 직결되는 문제의식입니다. 근데 민하찡도 저 얘길 했던가요? 가물가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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