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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알 자지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했고 여러 매체에 칼럼과 사회비평을 쓴다. 지은 책으로 <소수의견><우파의 불만><지금, 여기의 극우주의><88만원세대> 등이 있다.

지옥의 연대는 가능한가 [하]

조회 수 3115 추천 수 0 2015.09.08 10:09:35
지옥의 연대는 가능한가 [하]
<경향신문> ‘헬조선’ 커버스토리에 부쳐


‘왜 그 단어인가’라는 질문

경천동지할 새로운 현상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결과물이 산출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진부하고 낡은 소재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혹은 은폐되었던 사회적 의미를 건져냈을 때 그렇습니다. 이것은 곧 담론분석의 마지막 단계이자 핵심이라 할 분석적 재구성이 잘 수행되었단 뜻입니다. 분석적 재구성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하필 그 단어인가?’입니다. 의미망 분석 툴을 돌린 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질문도 아마 이것일 거라 생각합니다. 왜 그 단어가 그토록 많이 언급되었나, 그리고 왜 하필 이 단어가 그 단어와 같이 묶여 언급되고 있는가 등등. 

‘헬조선’이라는 이슈에서 그 질문이 던져져야할 급소는 어디일까요? 단언컨대 “미개”라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왜 ‘미개’라는 말이 그토록 ‘헬조선’에 많이 붙어 다녔을까? “미개”는 기사에도 언급되고는 있습니다만 정밀한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편 “헬조선”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맥거핀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대한민국의 ‘을’들이, 그리고 숱한 대중문화상품들이 이 사회를 “헬(지옥)”이라 불러왔고 그렇게 묘사해왔죠. ‘지옥 같은 대한민국’은 너무 보편적인 인식이어서 별로 해석의 여지가 없어져 버린 ‘텅 빈 말그릇’입니다.

“미개한 헬조선”이라고 할 때, “미개한”은 자체로 하나의 판단이면서 ‘헬조선’의 근거입니다. 즉, ‘미개해서 지옥’인 것이죠. 지옥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왜 하필 이곳은 ‘미개지옥’일까. 여기에 청년세대 현실인식의 고갱이가 들어있다고 봅니다. “미개한”이라는 말이야말로 "헬조선"이라는 인식이 어떤 좌표에 자리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서 어떤 동일화/타자화의 논리를 통해 작동하는지 정확히 보여줍니다. ‘여긴 너무 후져서 지옥’이라는 인식은 ‘탈출해서 문명사회로 가고 싶지만 능력이 안된다’라는 자기모멸로 귀결합니다. 결론은 “죽창”으로 서로를 찌르는 자멸입니다. 이런 인식의 틈바구니에서 정치와 민주주의의 자리를 찾아보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집단의 수준에서 미개 대 문명 프레임은 선망과 혐오의 식민주의로 수렴하기 쉽고, 개인의 수준에서 미개 대 문명 프레임은 ‘타락한 능력주의(능력자엔 특권을 주고 무능력자엔 배제와 차별을 당연시하는 망딸리떼)’와 링크되기 십상입니다. 모두가 반(反)정치의 풍경들입니다. 


[1]증오의열쇠.jpg


제가 미개라는 말을 이렇게 비판적으로 보는 반면, 박은하 기자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박은하 기자가 저의 페이스북 코멘트(‘헬조선’이라는 기획들이 최근 많이 나오는 경향에 대한 의문)를 공유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근대교육 시작 이래 학교에서 폭력과 체벌이 없었던 적은 없었겠지만 이 자체를 "미개하다"로 받아들이는 (심지어 사립학교법 개정이나 학생인권조례처럼 시민참여와 정치를 통한 제도적 개선/시도가 있었음에도!) 한국 사회 진보의 결과 나타난 세대의 감각과 그들이 겪는 취업, 노동현실이 결합한 것이라고 파악했습니다. 그런 현실이 어찌 청년들에게만 적용되겠습니까마는, 중장년층은 윗세대를 탓하지도 못하고, '싸가지 없는 젊은이'나 '출세못한 자신'을 탓하는 것이겠지요.”

적어도 저에겐 상당히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먼저 “한국 사회 진보의 결과 나타난 세대의 감각과 그들이 겪는 취업, 노동현실이 결합한 것”이라는 말에서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말한 근대세계의 특징으로서 “기대지평과 경험공간의 괴리”를 떠올립니다. 저는 그 말을 살짝 틀어 ‘인식지평과 경험공간의 괴리’라 부르고 싶습니다. 명목상 권리에 대한 인식은 상향되었지만 경험하는 현실은 불평등한 상황. 한때 꿈높현시창(‘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란 말이 유행했습니다. 지금은 꿈이 높지도 않은데 현실은 더 시궁창이 됐지만요. 

오늘날의 청년세대 뿐 아니라 거의 모든 세대는 이전 세대가 만들어놓은 세계의 문제를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인식지평과 경험공간의 괴리를 경험합니다. 1990년대 초반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 중 학교의 전근대성에 힘껏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고운세대’죠. 1990년대의 ‘새로운 세대’ 눈에 비친 당시의 학교는 ‘막장’이었습니다. 20세기도 아닌 19세기 교실이란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였지요. 이 뜨거웠던 세대가 벌인 싸움의 결말은 또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만, 각설하고요. 아무튼 당대 청년들의 눈에 사회가 후진적으로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자기를 둘러싼 세계가 아름답고 세련되고 긍정적으로만 보이는 청년들이야말로 연구대상이라 생각합니다.

박 기자는 중장년층이 “윗세대를 탓하지도 못하고, '싸가지 없는 젊은이'나 '출세 못한 자신'을 탓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중장년층을 모르거나 중장년층에게 속았거나 둘 중 하나예요.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낙후되었다는 인식에는 세대가 따로 없습니다. 많은 기성세대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죠. “한국은 아직 선진국 되려면 까맣게 멀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낙후했다 판단하는 것은 딱히 청년세대만의 특성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는 지옥’이라는 현상인식 자체는 유사하지만, 그 인식에 들어있는 주체성(subjectivity)의 농도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온 것 같습니다. 주체성을 어렵게 생각할 건 없습니다. 내 자신이 세계에 연루되어 있고 언제든 개입할 수 있다는 감각, 그게 바로 주체성입니다. 제가 “미개한”이라는 말에 주목한 이유도 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미개한”이라는 말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 내지 목적은 ‘타자화’입니다. 즉,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가리키는 대상의 분리입니다. 어떤 사람을 향해 “참 미개하다”고 말할 때, 발화자는 ‘난 (문명화된 사람이라) 네가 얼마나 미개한지 안다. 너와 나는 다르다’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따라서 “미개한 헬조선”이라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헬조선에서 살아가야할 경우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은 피해자-방관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쩌다 이 미개한 지옥에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 개고생하고 있다는 거죠. 그게 싫고 능력이 되면 탈출하는 것이고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인식이 내면화된 사람은 스스로 사회에 개입해 뭔가 변화시켜보겠다는 의지가 희박합니다.

‘미개 대 문명’이라는 구도는 주체성을 소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프레임입니다. 물론 기성세대라고 해서 ‘미개 대 문명’ 구도에서 자유로운 건 결코 아닙니다. 세대의 속성이라기보다 이른바 ‘시대정신’과 더 관련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구한말-일제시기를 거치면서 식민주의를 내면화한 선조들이야말로 이 ‘미개 대 문명’ 프레임에 갇혀 평생을 살았다고도 볼 수 있죠. 

‘지옥연대’의 가능성

저는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헬조선 관련 기획이 쏟아지는 것에 대해 이렇게 코멘트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류의 담론이 너무 청년세대에 편향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옥불 반도"에서 탈출하려고 한 사람들, 그러다 실패해 다시 지옥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들은 청년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청년세대 이야기만 나오는 것은 그들의 유행어들이 웹에 주로 나돌고 기자들에게 과잉 인지되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그 글은 꼭 <경향신문> 기사를 ‘저격’한 건 아니었습니다. ‘불쌍한 청년세대’와 관련된 새 유행어가 인터넷에 돈다 싶으면 무조건 달려들어 활자화시키고 보는 세태에 대한 전반적 우려였습니다. 박은하 기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편향'에 대해 동의하지만 '편향'이란 표현이 자칫하면 '너네만 힘드냐? 우린 더 힘들어. 너네가 뭔데 관심을 독차지 해?'라며 자타를 가르는 시선과 제로섬 고생경쟁으로 오인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페이스북) 

제로섬 고생경쟁으로 가지말자는 데 한 치의 이의도 없이 동감합니다. 제가 아주 오래 전부터 즐겨하는 말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우리, 불행을 경쟁하지 말자.” ‘불행경쟁’이란 제목의 글도 쓴 적 있습니다. “현재는 연옥이고 미래는 지옥”이라는 표현을 쓴 적도 있습니다. 박 기자도 페이스북에 농반 진반으로 이렇게 말했지요. “중장년층이 "청년들 너희만 힘드니? 우리야말로 헬조선의 진짜 피해자야!"라고 선언하면서 싸우다 보면 세대전쟁이 아니라 중장년층의 탈민족주의화 + '헬조선으로 대동단결'이 가능하지 않을까 #망상”

고생경쟁이 아닌 세대동맹, 세대연대로 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쉽지 않죠. 재벌과 정권은 작정하고 세대 이간질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벌어들인 돈 중에 노동소득만 뚝 떼어놓고선, 상위 10% 노동자가 나머지 노동자의 몫을 빼앗아간다고 선동합니다. <동아일보>같은 신문들 보세요. 심지어 “민주노총이 비정규직을 만들어내는 온상”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어떻습니까. 2011년 기준 노동소득분배율(부가가치액 대비 인건비 비율)을 보면 한국은 59.7%에 불과해 70% 선을 넘나드는 OECD 주요 국가와 엄청난 격차가 있습니다. 20대 기업으로 범위를 좁히면 더 처참하죠. 49.9%입니다.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미래에 상황이 좋아지지 않고 더 나빠질 거라는 예감 때문에 우리는 더 고통스럽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됩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두가 지옥에서 사투중입니다. 과연 ‘지옥의 연대’는 가능할까요.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습니다. ‘나는 미개한 헬조선의 피해자’라는 인식, 그 정도의 감각만으로 지옥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것. 주체성의 농도가 높아질 때 인식은 집단행동-정치로 전화하고 비로소 세계는 극적으로 변모합니다. ‘담론은 의미를 둘러싼 투쟁’이라는 스튜어트 홀의 가르침을 다시 곱씹어 봅니다. 가짜 적대를 폭로하고 진짜 적대를 가시화하는 것, 즉 좋은 담론분석은 주체성의 농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 '8'

박은하

2015.09.08 16:50:26

잘 읽었습니다. 기획 끝내놓고 휴가 중이라 공식답변은 천천히 달게요. 꼼꼼한 리뷰 감사합니다. 일단 망상은 그냥 웃자는 망상이니 심각하게 분석의 대상에 올려놓지 않으셔도. . . ^^

박은하

2015.09.08 16:57:37

제 페이스북에서 끌어온 몇몇 대목은 기사비평인 줄 알았는데 살짝 당혹스러운데 대화 와중에 생성된 맥락도 있고 sns에 쓰는 글이니 형식을 엄격한 논증에 구애받고 썼지 사고의 전체 체계를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페이스북에서 말한 부분은 기사 내 언급과는 구분되도록 확실히 표기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권일

2015.09.08 21:02:14

출처를 페이스북이라고 밝혀두었는데, 지금 보니 안밝혀놓은 부분도 있네요. 수정하였습니다.

소년의노래

2015.09.09 08:57:16

http://begray.tistory.com/290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이)함께 읽어보면 좋을 듯해서 링크 걸어봅니다.

박권일

2015.09.09 17:05:21

링크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적으로 너무 나태한 글이라 코멘트는 생략하려 합니다. "이거봐 우리안의 절망이 이만큼 커졌어!"만 반복해봐야 논의가 진행되질 않죠.

소년의노래

2015.09.09 18:10:16

아..네. 권일님의 코멘트를 바라고 쓴 글은 아닙니다.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든 건 아닌가 우려되지만 제가 좋아하는 두 필자의 상반된 글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해서 그랬습니다. 뭐 결국은 '각자에게는 각자의 가치가 있다.'는 하나마나한 결론이지만...;;

발뒤꿈치

2015.09.10 11:59:19

하나마나한 결론이라뇨- 어떤 사안이든 다양한 생각과 반응이 있다는걸 보여주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힝힝

2015.10.05 02:06:29

잘 읽었습니다. 이 사이트에서 제일 읽음직한 글이 박권일씨 글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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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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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국사회] 후각사회 / 박권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84606.html 여름이 가을로 바뀔 무렵 불어오는 바람 냄새, 어릴 적 어머니가 끓여준 시래기 된장국 냄새, 아버지의 품에서 나던 희미한 파이프 담배의 향, 연인의 살결이 풍기는 달콤한 내음…. 나의 내밀한 냄새 목록에 영원히 각인된 것들의 일부다. 물론 저건 ‘좋은 냄새들’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끔찍하게 싫어하는 냄새들의 목록도 존재한다. 아무튼 목록에 오른 것과 같은 냄새를 맡는 순간, 나는 특정한 감정상황 속으로 빠져든다. 논리와 분석 따...

아시아적 가치, 싱가포르 판타지, 성공적? -리콴유 사망에 부쳐 file [4]

  • 201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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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를 31년 동안 통치했던 독재자 리콴유가 세상을 떠났다. 한국의 지상파와 종편은 온통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해외조문까지 떠난다고 한다. 생전에 ‘박정희의 빅팬’이었다는 리콴유에게 보이는 그 정성과 열의의 십분의 일만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에게 보였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만 역시 씁쓸히 고개를 젓고 만다. 싱가포르가 과연 ‘선진국’인지 아닌지는 차치하자. 리콴유는 자기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한국 우파와 상당수 중도층(그러니까 절대다수 국민들)에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