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알 자지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했고 여러 매체에 칼럼과 사회비평을 쓴다. 지은 책으로 <소수의견><우파의 불만><지금, 여기의 극우주의><88만원세대> 등이 있다.
글 수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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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시민의 논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이명박과 박근혜가 당선된 것이리라. 뉴라이트가 만든 "재인식"이 시장에서 졌으니 승복하란 유시민의 논리는 곧 "재인식"이 만약 시장에서 승리하면 인정해야 한단 논리다. 시장에서 성공한 삼성과 현대와 기타 재벌의 혹독한 착취와 악행을 우리는 용인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된다. 유시민은 그 마지노선을 진보의 이름으로 서슴없이 넘어서고 있다. 난 결코, 결단코 이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댓글 '9'
발뒤꿈치
소년의 노래님 말씀을 들으니 (소년의 노래님이 생각하시는 사례와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떠오르는 기억이 있기는 합니다. 대학시절 조별로 토론수업을 준비했었는데, 주제가 통일이었어요. 저는 통일이 되면 서로 다른 체제 속에 살던 사람들이 어울리는 과정에서 혼란과 불편도 있을 수 있지만 고정된 것이 흐려지는 만큼 제도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국가 전체로는 시장경제를 유지하되 지방분권을 확대시켜서 일부 지역은 자발적으로 계획경제체제를 운영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종교적 공동체를 비롯해서 그런 소규모의 시도들이 있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지역간 교류가 자유로운 상황에서 그런 체제를 원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살 수 있게 하면 권력의 부패도 적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그런데 같이 준비하던 한 분이 얼마나 웃으시던지.... 그렇다고 그게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시장 자유주의자들 내지는 합리적 우파들은 언제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상대의 위선을 폭로하며 스스로의 현실성을 추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감정이나 이념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철저히 합리적이고 정의로운(때때로 이 정의는 합리에 의해 후순위로 밀려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편에 서 있다 자부하는 그들에게 아마 님의 그러한 세계관은 너무나도 순진하고 순박한 동화 속 이야기일 겁니다. 일전에 권일님께서 블로그에 쓴 글 중에 '자기보다 오른쪽이면 속물주의고 자기보다 왼쪽이면 이상주의인가?'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딱 날려주고픈 말입니다.
발뒤꿈치
공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소년의 노래님께서 그런 이야기가 "순진하고 순박한 동화 속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니 다시는 그런 말을 입에 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년의 노래님께서는 크게 부정적인 뜻이 없으셨겠지만, 제가 악에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보다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소년의 노래님도 댓글로 보아 연배가 있으신듯 한데요) 더 많이 경험하셨겠지만, 큰 소리로 이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의도가 순수하기 때문에 결과야 어쨌든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 속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이기심과 악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성찰하지 않는 모습을 저도 많이 봐왔습니다. 스스로 특별히 순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공정한 대우를 바랄 뿐이예요. (롤즈를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공정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제 의견을 들으셨던 조원분이 자신은 여차저차해서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시고 그에 대해 저도 뭐라 말할 수 있었다면 저는 그 분에 대해서 아무런 나쁜 인상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를 공격적으로 추궁하셨다고 해도 그렇게 웃는 것 보다는 좋은 인상을 받았을 겁니다. 사실은 자기 생각외에 다른 생각을 고려하는 것이 귀찮아서 "비현실적"이라고 단정짓고 일방적으로 저를 깎아내렸던게 공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착하고 순진하니까 보호받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공정한 대우를 바랄 뿐이예요. (롤즈를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공정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제 의견을 들으셨던 조원분이 자신은 여차저차해서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시고 그에 대해 저도 뭐라 말할 수 있었다면 저는 그 분에 대해서 아무런 나쁜 인상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를 공격적으로 추궁하셨다고 해도 그렇게 웃는 것 보다는 좋은 인상을 받았을 겁니다. 사실은 자기 생각외에 다른 생각을 고려하는 것이 귀찮아서 "비현실적"이라고 단정짓고 일방적으로 저를 깎아내렸던게 공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착하고 순진하니까 보호받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이 짧은 글에 자꾸 댓글 달아서 좀 그렇지만, 스스로를 자칭 자유주의자라 여기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픈 글이 있습니다.(글쓴이가 누군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성자들의 자유주의
자타칭 "자유주의자"들은 결국에는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부정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든 결국에는 '경제적 자유주의'로 수렴될 수밖에 없고, 바로 그렇기에 엘리트주의를 표방하고 인민을 불신하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은 이 말에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성자들"에게 이것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성자들에게 트로츠키의 말을 다시 한번 들려줘야 한다. "성자들이여,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우리가 설명해주리라." '자유주의'는 원래 그 기표의 모호성을 통해 지배전략을 구사해왔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는 구별되는 것 같으나 실상 그들은 시장경제에 대한 지지를 공통으로 하고 있으며, 서로에 대한 적대를 통해 공모를 이뤄낸다. 가령 경제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면 정치적 자유주의는 "자유주의" 자체를 구하기 위해 정치적 다원주의와 문화적 다양성이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를 근거로 내세우며 반박한다. 동시에 정치적 자유주의는 좌파의 영역을 침식하며 자유주의의 영역을 넓힌다. 이 '부르주아 소셜리스트'들의 자기분열적 태도를 보라.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시장경제는 건드리지도 않으면서 그 불평등을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해결하기 위해 매번 고민하는 이 시지프스들. 이 신화적 존재들은 오늘도 바위를 밀어올리며 자신들은 좌파와도, 경제적 자유주의자들과도 다르다고 중얼거린다. 물론 이 애매성이야말로 자유주의의 승리를 가져온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며 자유주의의 부족을 한탄하는 "민주주의 이론가" 최장집의 말은 얼마나 '영리'하면서도 '기만적'인가? "자유주의는 그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될 수도, 사회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 자, 우리의 성자들이여.. 이해가 되는가?
정규재의 글에서 나오듯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자유주의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를 포장하는 좋은 재료이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훌륭한 '시민'을 죽였고, 포퓰리즘으로 인해 쇠망하게 되었다는 논리는 꽤나 보편적이지 않나. "개개인의 뻔뻔함을 은폐해주는 것이 민주주의다. 사람들은 투표장에 들어서면서 근엄하게 이죽거리고, 엄숙하게 비열해진다." 자유주의야말로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뻔뻔함을 은폐"해준다. "노무현 정부 이후 벌써 10년 이상을 놀고먹는 나라 만들기에 온 국민이 몰입해 왔다. 그리스에도 한국에도 슬픈 민주주의의 종말이 다가온다."를 읽어보라. 이 얼마나 "근엄하게 이죽"거리며 "엄숙하게 비열"해진 사람인가? 아마도 그는 끝에 "시장경제를 위해 민주주의를 최소화, 아니 폐지해야 한다."는 말을 빼먹었을지 모른다. 그의 위대한 스승인 하이에크는 박정희 유신과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축복해주지 않았던가? 이 위대한 성자께서는 "이죽"거리며 민주주의가 다수의 자유를 억압할지도 모른다고 오늘도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그는 실제 아테네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그저 소크라테스라는 위대한 -어쩌면 은연중에 자기 자신을 대입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인이 어리석은 다수에게 핍박받았다는 신화가 필요할 뿐이니까. 이 역거운 엘리트주의를 보라. "지성적이거나 명망 있는 소수란 한낱 신기루와 같다."는 윌리엄 포레스트의 일갈을 떠올려보자. 그의 책, <그리스 민주정의 탄생과 발전>은 이러한 인식을 비판하는 유용한 도구이다.
우리의 또다른 성자, 복거일의 엘리트주의는 또 어떤가? 평생 "소수의 자유"를 옹호했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지만 그가 말하는 "소수"는 언제나 힘있고 돈있는 이들이었다. 전두환이라는 "소수"가 시장경제를 활성화시켰다며, 그 업적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라는 건 얼마나 희극적인가? 자유주의란 원래 그런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를 누릴 자의 조건을 정하면서 장애인, 노동자, 배우지 못한 자 등의 사회적 약자들을 통째로 배제해버렸다. 자유주의는 이처럼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며 성공해왔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 나오는 흑인노예는 팔과 다리가 잘린 흑인노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유럽인'인 캉디드와 마르틴에게 "이렇게 나리들이 먹는 설탕이 만들어지죠."라고 차갑게 일갈한다. 자유주의가 노예제도를 어떻게 옹호했는지를 안다면 아마 우리의 성자님들께서는 놀라 자빠지실 것이다.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기도를 올릴지도 모르겠다. 오 신이시여, 오늘도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었나이다. 그러나 성자들이여, 당신들이 모르는게 있나니 그 억압은 당신들 때문이라. 경제적 자유주의의 비조, 애덤 스미스는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노예제의 확대를 비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여자 사촌에게 노예제에 의해 생산된 설탕을 달라고 징징거리는 노인네에 지나지 않았다. 설탕을 그리도 사랑하실 줄이야!
오해하지 말라, 성자들이여. 내 그렇다고 해서 그대들이 전율하는 전체주의라는 '또다른 근대성'을 불러내지는 않나니. 나는 오히려 근대성 내부에 있는 보편주의를 더 확장하고자 하니라. 성자들이여, 이제 꿈에서 벗어나 현실을 보시라. 그대들의 분열적인 정신세계로부터 벗어날지어다.
성자들의 자유주의
자타칭 "자유주의자"들은 결국에는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부정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든 결국에는 '경제적 자유주의'로 수렴될 수밖에 없고, 바로 그렇기에 엘리트주의를 표방하고 인민을 불신하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은 이 말에 반발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성자들"에게 이것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성자들에게 트로츠키의 말을 다시 한번 들려줘야 한다. "성자들이여,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우리가 설명해주리라." '자유주의'는 원래 그 기표의 모호성을 통해 지배전략을 구사해왔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는 구별되는 것 같으나 실상 그들은 시장경제에 대한 지지를 공통으로 하고 있으며, 서로에 대한 적대를 통해 공모를 이뤄낸다. 가령 경제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면 정치적 자유주의는 "자유주의" 자체를 구하기 위해 정치적 다원주의와 문화적 다양성이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를 근거로 내세우며 반박한다. 동시에 정치적 자유주의는 좌파의 영역을 침식하며 자유주의의 영역을 넓힌다. 이 '부르주아 소셜리스트'들의 자기분열적 태도를 보라.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시장경제는 건드리지도 않으면서 그 불평등을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해결하기 위해 매번 고민하는 이 시지프스들. 이 신화적 존재들은 오늘도 바위를 밀어올리며 자신들은 좌파와도, 경제적 자유주의자들과도 다르다고 중얼거린다. 물론 이 애매성이야말로 자유주의의 승리를 가져온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며 자유주의의 부족을 한탄하는 "민주주의 이론가" 최장집의 말은 얼마나 '영리'하면서도 '기만적'인가? "자유주의는 그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신자유주의가 될 수도, 사회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 자, 우리의 성자들이여.. 이해가 되는가?
정규재의 글에서 나오듯이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자유주의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를 포장하는 좋은 재료이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훌륭한 '시민'을 죽였고, 포퓰리즘으로 인해 쇠망하게 되었다는 논리는 꽤나 보편적이지 않나. "개개인의 뻔뻔함을 은폐해주는 것이 민주주의다. 사람들은 투표장에 들어서면서 근엄하게 이죽거리고, 엄숙하게 비열해진다." 자유주의야말로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뻔뻔함을 은폐"해준다. "노무현 정부 이후 벌써 10년 이상을 놀고먹는 나라 만들기에 온 국민이 몰입해 왔다. 그리스에도 한국에도 슬픈 민주주의의 종말이 다가온다."를 읽어보라. 이 얼마나 "근엄하게 이죽"거리며 "엄숙하게 비열"해진 사람인가? 아마도 그는 끝에 "시장경제를 위해 민주주의를 최소화, 아니 폐지해야 한다."는 말을 빼먹었을지 모른다. 그의 위대한 스승인 하이에크는 박정희 유신과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를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축복해주지 않았던가? 이 위대한 성자께서는 "이죽"거리며 민주주의가 다수의 자유를 억압할지도 모른다고 오늘도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그는 실제 아테네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에게는 그저 소크라테스라는 위대한 -어쩌면 은연중에 자기 자신을 대입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인이 어리석은 다수에게 핍박받았다는 신화가 필요할 뿐이니까. 이 역거운 엘리트주의를 보라. "지성적이거나 명망 있는 소수란 한낱 신기루와 같다."는 윌리엄 포레스트의 일갈을 떠올려보자. 그의 책, <그리스 민주정의 탄생과 발전>은 이러한 인식을 비판하는 유용한 도구이다.
우리의 또다른 성자, 복거일의 엘리트주의는 또 어떤가? 평생 "소수의 자유"를 옹호했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놓지만 그가 말하는 "소수"는 언제나 힘있고 돈있는 이들이었다. 전두환이라는 "소수"가 시장경제를 활성화시켰다며, 그 업적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라는 건 얼마나 희극적인가? 자유주의란 원래 그런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를 누릴 자의 조건을 정하면서 장애인, 노동자, 배우지 못한 자 등의 사회적 약자들을 통째로 배제해버렸다. 자유주의는 이처럼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며 성공해왔다.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 나오는 흑인노예는 팔과 다리가 잘린 흑인노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유럽인'인 캉디드와 마르틴에게 "이렇게 나리들이 먹는 설탕이 만들어지죠."라고 차갑게 일갈한다. 자유주의가 노예제도를 어떻게 옹호했는지를 안다면 아마 우리의 성자님들께서는 놀라 자빠지실 것이다.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기도를 올릴지도 모르겠다. 오 신이시여, 오늘도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었나이다. 그러나 성자들이여, 당신들이 모르는게 있나니 그 억압은 당신들 때문이라. 경제적 자유주의의 비조, 애덤 스미스는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노예제의 확대를 비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여자 사촌에게 노예제에 의해 생산된 설탕을 달라고 징징거리는 노인네에 지나지 않았다. 설탕을 그리도 사랑하실 줄이야!
오해하지 말라, 성자들이여. 내 그렇다고 해서 그대들이 전율하는 전체주의라는 '또다른 근대성'을 불러내지는 않나니. 나는 오히려 근대성 내부에 있는 보편주의를 더 확장하고자 하니라. 성자들이여, 이제 꿈에서 벗어나 현실을 보시라. 그대들의 분열적인 정신세계로부터 벗어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