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알 자지라>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월간 <말>에서 기자로 일했고 여러 매체에 칼럼과 사회비평을 쓴다. 지은 책으로 <소수의견><우파의 불만><지금, 여기의 극우주의><88만원세대> 등이 있다.
글 잘쓰고 말 잘하는 것, 정치인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특히 말을 잘하는 건 굉장한 강점이다. 정확한 발음과 발성, 적절한 비유와 제스처, 촌철살인의 요약... 어쨌든 이미지 정치의 세계다. 공개 토론회에 나가 버벅거리면 대중에게 실망을 안기고 지지자에게 불안을 주기 십상이다.
재미있는 것이, 이게 정치인의 지지율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보긴 또 어렵다는 점이다. 차밍 포인트지만 크리티컬 포인트는 아니라 할까. 안철수는 엄청난 눌변이고, 문재인도 달변은 아니다. 이들에 비해 유승민과 심상정의 언변은 그야말로 구름 위 용, 산중 호랑이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선권에 있는 두 사람은 문재인과 안철수다. 사실 나는 말 잘하고 글 잘쓰는 사람이 곧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무관하다고까지 여긴다.
토니 블레어의 연설을 몇 차례 영상으로 본 적 있는데, 정말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버락 오바마의 완성형'이 거기 있었다. 그러나 그가 좋은 정치가였나 물으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는 영국 노동당을 완전히 신자유주의에 굴복시킨 장본인이고 여러 정치 현안에서도 오판과 실수가 잦았다. 반면 에이브러햄 링컨은 말 못하기로 유명했지만 지금까지도 존경받고 있다. 요컨대 말과 글의 기예는, 좋은 정치인의 충분조건일지 몰라도 필요조건은 아니다.
내 생각에 정치인의 덕목 중 으뜸은 말솜씨 따위가 아니라 '일관성'이다. 중심에는 지향의 일관성이 있고 그것이 정책과 태도의 일관성으로 드러나야 한다. 자가당착을 범하지 않으며 초지일관한 공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 그것은 자체로도 가치 있지만 정치 전반의 질을 높인다는 점에서도 최고의 미덕이다. 물론 격동하는 현실정치에서 일관성을 강하게 관철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때로 모호한 입장을 보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좋은 정치인은 그럴 때 곤궁한 처지에서 당장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보다 유보적 표현을 선호한다. 지론과 모순되는 입장을 보이면 당면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결국 그것이 쌓여 정치인과 정치 전반의 신뢰를 깎아낸다. 여기서 일관성은 무조건 하나의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다. 환경과 상황이 변하면 입장을 바꿀 수도 있다(현실 정치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고). 문제는 그걸 합당하게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느냐이겠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성' 같은 낭만적 용어로 정치인의 미덕을 표현한다. 정치 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진정성'이란 단어가 즐겨 사용되는데, 이현령 비현령 식의 이런 애매모호한 개념이 사회에 널리 안착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지독히 불투명하고 권위적이라는 의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진정성이란 기준이 일관성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본다. 저널리즘은 정치인 발언의 팩트를 체크하는 걸 넘어서 그의 과거 발언까지 전부 털어 일관성을 검증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물론 공적 사안에 한해서다. 일관성이 정치인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때, 한국 정치도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이건 정치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관성은 다양한 분야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시되어야 하며, 일관성을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은 지금보다 더욱 존중받아야 한다.
덧.
현재 대선 레이스에서 이 기준을 적용했을 때 가장 일관성 있는 후보는 누구일까? 그리고 널뛰듯 입장이 표변하는 후보는 또 누구일까?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객관적으로도 충분히 검증가능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