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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지젝은 평소에 “서로를 사용하는 것이 진짜 친구다”고 말하곤 한다. 파벨라의 지젝 월드는 이런 취지에서 그를 사용하기 위한 한국 친구들의 화답이다. 한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이 당대의 석학이 앞으로 좀 더 깊숙하게 한국 사회에 개입하기 위해 특유의 사유를 펼쳐 보일 예정이다. 그의 세계를 통해 우리의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파벨라 동인 일동

-번역 : 팝아티스트 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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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예레반(radio Erevan)1)에 소련의 재밌는 농담이 소개됐다. 청취자가 “라비노비치가 복권에 당첨돼 새 차를 받았다는 게 사실입니까?고 묻자, 라디오 진행자는 “원칙적으로는 맞습니다. 그런데 새 차가 아니라 낡은 자전거입니다. 그리고 원래 도난당했던 겁니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 농담은 맑스 출생 후 2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가르침에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라디오 예레반에 물어보자. “맑스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가요?” 답변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맞지요. 맑스의 가르침은 한 세기 반2)이 지난 지금에서야말로 극에 다다른 자본주의 역동성의 미친 춤을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지요. 그러나...”

제랄드 코헨3)은 고전적 맑스주의가 정의하는 노동계급을 구성하는 특성으로 다음 네 가지를 들었다. (1) 사회의 대다수를 형성한다. (2) 사회의 부를 생산한다. (3) 사회로부터 착취받는다. (4) 사회의 빈곤 계층이다. 이 네 가지를 결합하면 두 가지 특성이 더 나온다. (5) 노동계급은 혁명으로부터 잃을 게 없다. (6) 노동계급은 혁명적 사회 변혁에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엔 처음 네 가지 특성 중 어느 것도 노동계급을 대변하지 못한다. 이것이 (5), (6) 번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이다(설령 부분적으로 적용되는 특성이 있더라도, 그들은 더 이상 단일한 행위자로 통합되지 못한다. 사회의 빈곤층은 더 이상 노동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의 역사적 교착은 자본주의의 최종 위기에 대한 예언 때문도 아니고, 자본주의가 어떻게 위기를 통해 더욱 강력해지는지에 대해 포착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볼프강 슈트렉4)이 정확한 용어로 기술했듯이 고전적 맑스주의에는 더 비극적인 실수가 있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의 ‘최종 위기’(final crisis)에 대해선 맞았다. 우리는 지금 확실히 최후에 접어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위기는 부패와 붕괴의 장기적 과정일 뿐이다. 자동적인 헤겔적 지양(止揚, Aufhebung)5)의 과정이란 없으며, 더 높은 수준의 사회 구성이라는 장을 향해 이러한 부패에 긍정적인 뒤틀림이나 변형을 가할 행위자도 없다.

“맑스주의자(보다 적절하게는 모더니스트)들의 편견은 자본주의는 더 나은 새로운 사회가 가시화되고 혁명적 주체가 인류의 진보를 위해 그것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그 역사적 시대로서 종말을 고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혁명의 시대에 집단적 행위주체의 붕괴 이후, 그것을 진심으로 원하지만 꿈조차 꿀 수 없는 우리의 공통적 운명을 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맑스의 비전은 사회가 점점 최종 위기로 치닫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회적 혼란은 자본가와 다수 프롤레타리아라는 하나의 커다란 적대로 단순화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공산주의 혁명을 살펴 봐도 이런 단순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래디컬한 공산주의 운동은 항상 소수의 선봉으로 제한되었고,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위기 상황(주로 전쟁)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기회를 엿봐야 했다. 그러던 순간 마침내 진정한 선봉이 인민을 동원해 상황을 장악한다. 코뮤니스트는 절대 독단적일 수 없다. 대지와 평화를 사랑하고(러시아의 경우), 부패를 철폐하고 민족의 해방과 통합을 도모한다(중국의 경우)는 주제와 함께 가야한다. 그들은 인민동원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기구를 주의 깊게 준비하고 있었다(노골적으로 농민을 부차적 연대로 취급한 10월 혁명과 대조적으로, 중국 혁명은 프롤레타리아인 척 조차 하지 않고 농민을 곧장 혁명의 기초 세력으로 호명했다).

서구 맑스주의(또는 맑스주의 전체)의 문제는 혁명주체의 부재였다. 노동계급이 그 내부로부터 그 자신을 스스로 위하는 통로를 완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그들 스스로 혁명적 주체로 구성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사회적 실존으로서 노동계급)의 형성을 방해하는 무의식적 리비도의 메커니즘을 설명할 수 있도록 적절한 레퍼런스를 제공하는 정신분석의 존재 이유(raison d’etre)가 된다. 정신분석을 통해 맑스주의 사회경제 분석의 진실은 구원받는다. 여기에 중간계급의 부상따위의 수정주의적 이론같은 것은 필요없다. 같은 방식으로 서구 맑스주의는 혁명주체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또 다른 사회주체(노동계급으로 불리는 것을 꺼려하는)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제 3세계 농민들, 학생과 지식인들, 소외된 주변인들... 이 아이디어의 최신 버전은 난민 문제로 연결된다. 엄청난 수의 난민 유입이 유럽의 래디컬 좌파들에게 다시 행동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급증하는 반대자들의 폭력에 맞서 이민자들을 혁명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해외에서 아웃소싱하자. 이민자들이 잃어버린 노동계급의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외설적이고 냉소적인 이런 아이디어는 완전히 정신나간 얘기로 들릴 지도 모른다.

혁명주체로서 노동계급의 실패라는 문제는 이미 볼셰비키 혁명의 핵심이었다. 레닌의 기지(Lenin’s art)는 실망한 농민들의 ‘잠재적 분노’(슬로터다이크6))를 감지했다는 것이다. 10월 혁명의 승리는 방대한 농민들이 급진적으로 분노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들에게 헌사된 ‘대지와 평화’라는 슬로건에 기인한 것이었다. 레닌은 이 문구를 이미 십 년 앞서 생각했다. 이것이 레닌이 독립 농민을 새로운 강력한 계급으로 창조하는 걸 목표로 하는 스톨리핀 토지개혁(the Stolypin land reforms)7)의 성공을 예상하며 공포에 질린 이유다. 스톨리핀이 성공한다면 혁명의 기회는 수십 년간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쿠바에서 유고슬라비아까지 모든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은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민족 해방’과 ‘자본에 대한 분노’를 흡수하는 모델을 따랐다. 물론 헤게모니 논리의 선봉대(partisan)는 이것이 ‘정상적인’ 혁명의 논리이며, ‘비판적 대중’은 언제나 특정한 급진적인 상황에서 터져나온 요구들에 부합하는 일련의 등가성이 준비될 때만 형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혁명은 모든 적대가 하나의 큰 지점으로 붕괴될 때가 아니라 적대가 힘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결합될 때 일어난다.

요점은 혁명이 더 이상 역사의 기차에 올라타거나 역사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는 없다. 역사는 우발적인 요소들이 마주치며 열려있는 과정이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혁명은 마치 역사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지배적인 역사발전의 중심이 있는 것처럼, 시류를 거스르는 역사의 틈새에서만 일어난다. 혁명가는 인내심을 가지고 시스템이 공개적으로 오작동하거나 붕괴할 때(보통 아주 짧은 순간인)를 기다리고, 기회를 포착하고, 그 순간 마치 거리에 널려있는 것마냥 권력을 거머 쥐고 힘을 강화하여 권력기구를 설립해야한다. 그리하여 혼돈의 시간이 지나 다수의 주류가 정신을 차려보면 새로운 체제가 나타났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할 것이다. 확고히 자리잡은 그것을 제거하기엔 이미 늦었다. 코뮤니스트들은 또한 대중 동원을 끝낼 정확한 순간을 신중히 계산해야 한다. 유토피아를 실현하는데 의심할 바없는 요소를 지녔던 중국 문화혁명의 경우를 보자. 혁명의 막바지, 마오가 동요를 제압(이미 상층 노멘클라투라의 경쟁을 제거하고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다)하기 전에, 백만 노동자들이 국가와 심지어 당 자체도 없애고 직접 소통하는 사회조직을 요구하는 상하이 코뮌8)이 존재했다. 마오가 군대를 개입시켜 질서를 회복하라고 명령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하다. 역설은 통제되지 않은 대변동을 촉발시킨 지도자의 역할이다. 그는 극단적인 독재와 대중의 극단적인 해방이 겹치는 완전히 개인적 권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맑스의 정치경제 비판이 여전히 타당한가에 대한 질문은 그래서 정확히 변증법적으로 답해야한다. 맑스의 정치경제 비판뿐 아니라, 그가 자본주의 역학에 대해 그린 윤곽은 지금도 완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것은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 더욱,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현실이 비로소 맑스가 그린 그 개념의 윤곽에 도달했다고 말해야한다. 그러나 여기서 정확히 변증법적 역전이 개입한다. 자본주의가 완전히 유효한 바로 그 지점에서 자본주의의 한계는 사라진다. 승리의 순간이 패배의 순간이다. 외부의 장애물을 극복한 후 새로운 위협이 내재한 모순의 신호를 보내며 그 내부로부터 출현할 것이다. 현실이 개념에 완전히 도달할 때 개념은 변화될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정확히 변증법적 역설이 있다. 맑스는 단순히 틀린게 아니다. 그는 종종 옳았지만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문자 그대로 옳았던 것이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 맑스의 텍스트들을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흘러간 시대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으로 일축해야하는 것일까? 정확히 변증법적 역설로 말한다면, 20세기 코뮤니즘의 교착과 실패, 그리고 맑스적 전망의 한계에 뚜렷히 놓여있는 난국과 동시에 그것의 유효함을 여실히 목격하는 것이다. 고전적 맑스의 해법은 실패했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오늘날 코뮤니즘은 더 이상 해법이 아니라 문제의 이름이다. 모든 차원의 공통적인 것, 삶의 핵심으로서의 자연이라는 공통적인 것, 생태유전이라는 공통적인 것, 문화적으로 공통적인 것(특히 지적 재산권),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인본주의적 보편 공간으로서 공통적인 것이라는 문제가 남아있다. 해법이 무엇이든 코뮤니즘은 이런 문제들을 다뤄야 한다.

맑스가 폴 라파그9)에게 한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10)이란 말을 소비에트어로 번역하면 “이게 맑시즘이라면 나는 맑시스트가 아니다”다. 이 오역은 변형된 맑스주의를 완벽하게 보편 담론으로 만들어 준다. 소비에트 맑스주의에서는 맑스 그 자신 조차도 맑스주의를 구성하는 똑같은 보편 지식에 참여하는 맑스주의자다. 그가 훗날 “맑스주의”라고 알려진 가르침을 창조했다는 사실은 확고부동하다. 따라서 그의 부인은 그 가르침 자체를 “맑스주의자”로 잘못 선언하는 경우를 일컫는 것이다.

맑스가 의미한 것은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어떤 갭이 그 자신이 창조한 가르침에 본질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맑스와 이 가르침을 따르는 맑스주의자를 분리시킨다. 유명한 맑스 형제(Marx brothers)11)의 농담을 보자. “당신은 임마뉴엘 라벨리와 꼭 닮았군요. 하지만 제가 임마뉴엘 라벨리인데요? 아 그래서 꼭 닮은 거군요.” 라벨리라 불리는 사내는 라벨리와 닮은 게 아니라 그냥 라벨리다. 이와 똑같이 맑스 그 자신은 맑시스트 중 한 명이 아니라 다른 맑스주의자들을 만들어 낸 준거점들의 핵심이다. 지금 맑스에 충실할 유일한 방법은 더 이상 맑스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맑스 기저의 몸짓(Marx’s grounding gesture)을 새로운 방법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역주

1) 라디오 예레반(radio Erevan): 20세기 후반 소련과 동구권 전역에서 유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가상의 아르메니안 방송국(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영어로는 Yerevan이다)에서 일어난 Q&A 방식의 농담을 소개해 인기를 끌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Q: 마야코브스키가 권총 자살한게 사실인가요? A: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말은 ‘쏘지 마시오 동무’였다더 군요”, “Q: 바다도 없는 아르메니아에 해군을 왜 만드는 건가요? A: 아제르바이젠을 보세요. 그들은 문화부를 만들었다고요”

2) 한 세기 반: 맑스의 자본론 1권은 1867년 출간 됐다. 올해는 맑스(1818~1883) 탄생 200주년이다.

3) 제랄드 코헨(Gerald A. Cohen, 1941~2009): 영국의 맑스주의 정치철학자. 대표작은 ‘칼 맑스의 역사 이론 옹호’(Karl Marx's Theory of History: A Defence, 1978)가 있다.

4) 볼프강 슈트렉(Wolfgang Streeck, 1946~ ): 독일의 노사관계 학자, 막스 플랭크 연구소 소장(1995~2014). 뉴 레프트 리뷰의 기고자이며 10개국어로 번역 된 ‘The Delayed Crisis of Democratic Capitalism’ (London: Verso 2014)의 저자이다.

5) 헤겔적 지양(止揚, Aufhebung): 헤겔이 변증법에서 주창한 개념. 독일어로 Aufheben(아우프헤벤)은 ‘부정하다’, ‘보존하다’, ‘높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변증법적 발전에 있어서 낮은 단계를 부정(否定)함으로써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데, 높은 단계 중에 낮은 단계의 본질은 그대로 보존된다.

6)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1947~): 독일 철학자. ’냉소적 이성 비판’(Critique of Cynical Reason, 1983)의 저자

7) 스톨리핀 토지개혁(the Stolypin land reforms): 니콜라이 2세 치하 러시아 제국의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1862~1911)이 도입한 토지개혁. 농지를 개인 소유지로 바꾸어 농민 개개인에게 분배하는 법안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개혁 정치가 혁명을 탄압하고 민심을 획득하자 레닌은 “내 생전에 혁명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보수세력과 혁명세력에게 동시에 미움을 받은 그는 결국 황실 보수 세력에게 암살 당한다. 그의 죽음으로 혁명세력은 다시 민심을 얻고 러시아 혁명에 다가갈 수 있었다.

8) 상하이 코뮌: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이 점차 고조되던 1967년 1월, 상하이 지방의 노동자들이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거부하고 자체 코뮌을 선언한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상하이 코뮌은 설립된 지 단 18일 만에 마오쩌둥의 지시에 의해 붕괴하고 만다.

9) 폴 라파그(Paul Lafargue, 1842~1911): 맑스의 사위. 쿠바 산티아고 출신의 사회주의자.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맑스의 둘째 딸과 결혼했다.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프랑스에 보급하는 데 공헌했다. 노동자는 하루 3시간만 일하고 놀아야 한다고 주장한 ‘게으를 권리’(The Right to be Lazy, 1880)는 국내에도 번역됐다.

10)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의 영문 번역은 “What is certain is that I myself am not a Marxist”

11) 맑스 형제(Marx brothers): 뉴욕 베이스의 가족 코미디 그룹. 1900~50년대에 코미디 영화로 인기를 끌었다. 이들이 만든 13개 장편극 영화는 미국 영화 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 약칭 AFI)가 100대 코미디 영화 가운데 하나로 선별하였는데, 이 가운데 두 개(Duck Soup, A Night at the Opera)가 탑 12 안에 들었다. 지젝은 정신분석이 정의하는 인간 심리의 세가지 상태(이드, 에고, 슈퍼 에고)를 설명하기 위해 맑스 형제의 세 캐릭터(치코, 하포, 그루초)를 종종 예로 든다.

원문

Marx Today: The End Is Near… Only Not the Way We Imagined It

Slavoj Žižek

There is an old delicious Soviet joke about radio Erevan: a listener asks “Is it true that Rabinovitch won a new car on lottery?”, and the radio answers: “In principle yes, it’s true, only it wasn’t a new car but an old bicycle, and he didn’t win it but it was stolen from him.” Does exactly the same not hold for the fate of teaching of Marx today, 200 years after his birth? Let’s ask radio Erevan: “Is Marx still actual today?” We can guess the answer: in principle yes, it describes wonderfully the mad dance of capitalist dynamics which reached its peak only today, more than a century and a half later, but… Gerald A. Cohen enumerated the four features of the classic Marxist notion of the working class: (1) it constitutes the majority of society; (2) it produces the wealth of society; (3) it consists of the exploited members of society; (4) its members are the needy people in society. When these four features are combined, they generate two further features: (5) the working class has nothing to lose from revolution; (6) it can and will engage in a revolutionary transformation of society. None of the first four features applies to today’s working class, which is why features (5) and (6) cannot be generated. (Even if some of the features continue to apply to parts of today’s society, they are no longer united in singe agent: the needy people in society are no longer the workers, etc.)

The historical deadlock of Marxism resides not only in the fact that it counted on the prospect of capitalism’s final crisis, and therefore couldn’t grasp how capitalism came out of each crisis strengthened. There is a much more tragic mistake at work in the classic body of Marxism, described in precise terms by Wolfgang Streeck – Marxism was right about the “final crisis” of capitalism, we are clearly entering it today, but this crisis is just that, a prolonged process of decay and disintegration, with no easy Hegelian Aufhebung in sight, no agent to give to this decay a positive twist and transform it into the passage to some higher level of social organization:

“It is a Marxist – or better: modernist – prejudice that capitalism as a historical epoch will end only when a new, better society is in sight, and a revolutionary subject ready to implement it for the advancement of mankind. This presupposes a degree of political control over our common fate of which we cannot even dream after the destruction of collective agency, and indeed the hope for it, in the neoliberal-globalist revolution.”

Marx’s vision was that of a society gradually approaching its final crisis, the situation in which the complexity of social life is simplified into one great antagonism between capitalists and the proletarian majority. However, even a quick look at the XXth century Communist revolutions makes it clear that this simplification never took place: radical Communist movements were always constrained to a vanguard minority, and in order for it to gain hegemony, it had to wait patiently for a crisis (usually war) which provided a narrow window of opportunity. In such moments, an authentic vanguard can seize the day, mobilize the people (even if not the actual majority) and take over. Communists were here always utterly “non-dogmatic,” ready to parasitic on another issue: land and peace (Russia), national liberation and unity against corruption (China)… They were always well aware that mobilization will be soon over, and were carefully preparing the power apparatus to keep them in power at that moment. (In contrast to the October Revolution which explicitly treated peasants as secondary allies, the Chinese revolution didn’t even pretend to be proletarian: it directly addressed farmers as its base.)

The problem of the Western Marxism (and even of Marxism as such) was the absence of the revolutionary subject: how is it that the working class does not complete the passage from in-itself to for-itself and constitute itself as a revolutionary agent? This problem provided the main raison d’etre of its reference to psychoanalysis which was evoked precisely to explain the unconscious libidinal mechanisms which prevent the rise of class consciousness inscribed into the very being (social situation) of the working class. In this way, the truth of the Marxist socio-economic analysis was saved, there was no reason to give ground to revisionist” theories about the rise of the middle classes, etc. For this same reason, the Western Marxism was also in a constant search for other social agents who could play the role of the revolutionary agent, as the under-study replacing the indisposed working class: Third World peasants, students and intellectuals, the excluded marginals… The latest version of this idea relates to the refugees: only an influx of a really large number of refugees can revitalize the European radical Left. This line of thought is thoroughly obscene and cynical: notwithstanding the fact that such a development would for sure give an immense boost to anti-immigrant brutality, the truly crazy aspect of this idea is the project to fill in the gap of the missing proletarians by importing them from abroad, so that we will get the revolution by a surrogate outsourced revolutionary agent.

The failure of the working class as the revolutionary subject lies already in the very core of the Bolshevik revolution: Lenin’s art was to detect the “rage potential”(Sloterdijk) of the disappointed peasants. October Revolution won due to the slogan “land and peace,” addressed to the vast peasant majority, seizing the short moment of their radical dissatisfaction. Lenin was thinking along these lines already a decade ago, which is why he was horrified at the prospect of the success of the Stolypin land reforms, which aimed at creating a new strong class of independent farmers – he wrote that if Stolypin succeeds, the chance for a revolution chance is lost for decades. All successful socialist revolutions, from Cuba to Yugoslavia, followed this model, seizing the opportunity in an extreme critical situation, co-opting the national-liberation or other “rage capitals.” Of course, a partisan of the logic of hegemony would here point out that this is the very “normal” logic of revolution, that the “critical mass” is reached precisely and only through a series of equivalences among multiple demands which is always radically contingent and dependent on a specific, unique even, set of circumstances. A revolution never occurs when all antagonisms collapse into the big One, but when they synergetically combine their power.

The point is not just that revolution no longer rides the train of History, following its Laws, since there is no History, since history is a contingent open process; the problem is a different one: it is as if there IS a Law of History, a more or less clear predominant main line of historical development, and that revolution can only occur in its interstices, “against the current.” Revolutionaries have to wait patiently for the (usually very brief) period of time when the system openly malfunctions or collapses, seize the window of opportunity, grab the power which at that moment as it were lies on the street, IS for grab, and then fortify its hold on power, building repressive apparatuses, etc., so that, once the moment of confusion is over, the majority gets sober and is disappointed by the new regime, it is too late to get rid of it, they are firmly entrenched. Communists were also always carefully calculating the right moment to stop popular mobilization. Let’s take the case of the Chinese Cultural Revolution which undoubtedly contained elements of an enacted utopia. At its very end, before the agitation was blocked by Mao himself (since he already achieved his goal of reestablishing his full power and getting rid of the top nomenklatura competition), there was the "Shanghai Commune": one million workers who simply took the official slogans seriously, demanding the abolition of the State and even the Party itself, and the direct communal organization of society. It is significant that it was at this very point that Mao ordered the army to intervene and to restore order. The paradox is that of a leader who triggers an uncontrolled upheaval, while trying to exert full personal power - the overlapping of extreme dictatorship and extreme emancipation of the masses.

The question of the continuing relevance of Marx’s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in our era of global capitalism has thus to be answered in a properly dialectical way: not only is Marx’s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his outline of the capitalist dynamics, still fully actual, one should even make a step further and claim that it is only today, with global capitalism, that, to put it in Hegelese, reality arrived at its notion. However, a properly dialectical reversal intervenes here: at this very moment of full actuality the limitation has to appear, the moment of triumph is that of defeat, after overcoming external obstacles the new threat comes from within, signalling immanent inconsistency. When reality fully reaches up to its notion, this notion itself has to be transformed. Therein resides the properly dialectical paradox: Marx was not simply wrong, he was often right, but more literally than he himself expected to be.

So what is or result? Should we write off Marx’s texts as an interesting document of the past and nothing more? In a properly dialectical paradox, the very impasses and failures of the XXth century Communism, impasses which were clearly grounded in the limitations of Marx’s vision, at the same time bear witness to its actuality: the classic Marxist solution failed, but the problem remains. Communism is today not the name of a solution, but the name of a problem, the problem of commons in all its dimensions – the commons of nature as the substance of our life, the problem of our biogenetic commons, the problem of our cultural commons (“intellectual property”), and, last but not least, commons as the universal space of humanity from which no one should be excluded. Whatever the solution, it will have to deal with these problems.

In Soviet translations, Marx’s well-known statement to Paul Lafargue “Ce qu'il y a de certain, c'est que moi je ne suis pas marxiste,” was rendered as »If this is Marxism then I am not a Marxist.” This mistranslation renders perfectly the transformation of Marxism in a university discourse: in Soviet Marxism, even Marx himself was a Marxist, participating in a same universal knowledge that composes Marxism; the fact that he created the teaching later known as “Marxism” provides no exception, so his denial just refers to a specific wrong version that falsely proclaims itself “Marxist.” What Marx meant was something more radical: a gap separates Marx himself, the creator who has a substantial relationship towards his teaching, from “Marxists” who follow this teaching. This gap can also be rendered by the well-known Marx brothers joke “You look like Emmanuel Ravelli. – But I am Emmanuel Ravelli. – So no wonder you look like him.” The guy who is Ravelli doesn’t look like Ravelli, he simply is Ravelli, and, in the same way, Marx himself is not a Marxist (one among the Marxists), he is the point of reference exempted from the series - it is the reference to him that makes others Marxists. And the only way to remain faithful to Marx today is to no longer be a “Marxist” but to repeat Marx’s grounding gesture in a new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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