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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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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워릭 시절


마크 피셔(Mark Fisher)는 나에게 각별한 비평가이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의 워릭대학교(University of Warwick)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곳에서 박사 과정 막바지를 보내고 있었다. 당시 내가 입학한 철학과 대학원은 사디 플랜트(Sadie Plant)와 닉 랜드( Nick Land)가 남겨 놓은 펑키한 분위기를 유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피셔 역시 이들이 만든 사이버네틱 문화연구부(Cybernetic Culture Research Unit)의 일원이었다. 대학에서 정식으로 인준한 연구단체는 아니었지만, CCRU로 통했던 이 단체는 기본적으로 제도권 철학에 대한 비판을 주요 활동 내용으로 삼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알게 된 피셔는 나에게 1980년대에 닐 에릭슨(Neil Eriksen)같은 이들이 주장했던 펑크록과 마르크스주의를 연결시키려는 문화비평가로 비쳤다. 

그도 나처럼 1968년생이었고, 대처리즘의 한가운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탈-마르크스주의화가 본격화하던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다. 아시아에서 온 이방인이 보냈던 마르크스주의적이었던 1980년대와 상당히 다른 대학시절을 보낸 셈인데, 그럼에도 후일 발표한 그의 글들을 보면, 관심사항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블로그 활동을 시작한 2003년에 나는 박사논문을 끝마치고 이듬해인 2004년에 학위를 받았다. 다소 한가해진 틈을 타서 나 역시 그 해에 블로그를 개설하고 ‘사이버 글쓰기’를 시작했다. K-Punk라는 그의 블로그는 내 ‘블로깅’의 모델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블로그 명인 K-Punk에서 K는 cyber의 어원인 κυβερνήτης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의 의미는 키잡이 또는 조종자를 의미했는데, 1950년대 이후 인공두뇌학을 지칭하는 용어로 통하게 되었다. 피셔가 굳이 고대 그리스어로 사이버펑크를 지칭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블로그 글을 모아놓은 유고집에 보면, 이 명칭이 앞서 언급한 사이버네틱스 문화연구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사이버펑크 문학과 다른 맥락에서 고안된 “리비도적 대체”로서 단순한 문학 장르라기보다 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퍼져나가고 있는 “새로운 문화적 경향”이라는 의미에서 C가 아닌 K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장르라기보다 하나의 개념으로서 피셔는 사이버펑크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했다. 이런 개념화는 당시에 다소 주변적인 것으로 취급당했던 기술을 대안적 세계의 수단으로 인준하려는 시도였다. 1990년대 워릭대학교 대학원은 온갖 실험과 열정으로 들끓는 분위기였다. 닉 랜드가 주창한 가속주의(accelerationism)와 막 등장하기 시작한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은 이미 표준화한 강단철학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동지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실제로 닉 랜드는 요즘 객체지향존재론으로 알려진 그레이엄 하먼(Graham Harman)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를 비판했다. 이런 실재주의는 워릭대학교 특유의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공명하면서 좌파적 정치기획에 대한 혼동을 초래하기도 했다. 물론 닉 랜드의 행보는 결국 파시즘적인 신우파(alt-right) 운동으로 귀결되었고, 오늘날 가속주의는 숱한 좌파적 입장에서 제기되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지만, 당시에 닉 랜드는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사표처럼 보였다. 

CCRU에 참여하긴 했지만, 피셔는 닉 랜드의 파시즘과 다른 길을 걸었다. 그에게 펑크문화는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나타난 프롤레타리아의 문화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문화비평은 정확하게 1960년대 문화 마르크스주의의 자장에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기성 좌파들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좌파 일반을 때때로 시대착오적인 레닌주의자나 신종 아나키스트로 부르면서 비판했다. 보기에 따라서 이런 비판은 동어반복처럼 들리고, 엄밀한 고찰이 누락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그는 대중과 접점을 상실한 무기력한 기성 좌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개념화하는 사이버펑크는 창조적 프롤레타리아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하위문화의 정치성을 옹호했던 1960년대 영국 문화연구의 노선을 피셔가 계승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2. 자본주의 리얼리즘

블로그 활동을 병행하면서 그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라는 책을 2008년에 출간한다. 81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책이었지만,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피셔의 작업은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과 결을 같이 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짧은 지젝의 추천사가 이 책의 겉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피셔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부제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자본주의 대안에 대한 고민을 이 책에서 드러내고자 했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eric Jameson)이 <시간의 씨앗>에서 맨 처음 언급한, “자본주의의 종언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이 첫 장의 제목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사실상 이 문제에 대한 피셔의 분석이자 진단이라고 할 수 있다.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에서 피셔는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 시작해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인 <슈퍼내니>까지 ‘자연화’한 자본주의의 내성을 파고들어간다. 

특히 <칠드런 오브 맨>에 등장하는 한 장면에 대한 분석은 피셔가 어떤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지금은 진기한 인류의 유물을 보관하는 건물이 되어 있는 발전소 건물을 방문한 주인공 테오는 이 모든 것을 관람할 인간이 사라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관리자 친구에게 묻는다. 그 친구의 대답은 그런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것이었다. 이 허무주의적 대답은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우의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2050년에 지구의 온도가 섭씨 2도 상승할 것이라는 과학적 예측이 경고를 발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 신경은 쓰이지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심리상태는 무엇인가. 피셔는 과거의 모든 것을 이미 복속시키고 소비할 수 있게 만들어버리는 자본주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상태와 이를 유비시킨다. 

현실은 박물관에 존재한다. 물론 이런 피셔의 생각이 낯선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미 <자본> 1권의 부록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형식적 복속과 실재적 복속을 구분했다. 피셔의 개념은 다분히 이런 마르크스에 빚지고 있다. 형식적 복속은 공장의 규율처럼 노동자가 아니었던 이들을 노동자로 재탄생시킨다. 여기에 시계와 같이 인공적인 시간을 규제하는 기계장치는 필수적이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개념화한 “인공사실성”(artifactuality)이 바로 이런 기술의 결과물이다. 기술은 주체를 주조해내는 매체이다. 피셔에 따르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1960년대 독일의 팝아티스트들을 통해 처음 제기되었고 미하엘 슛슨(Michael Schudson)이 광고의 효과에 대해 다루면서 세공했다. 그러나 피셔는 이런 예술과 광고의 차원을 넘어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훨씬 더 광범위하게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피셔의 용어법에서 이 개념은 노동과 교육, 그리고 사유와 행동을 결정하는 물질적 기반에 가깝다. 

한 마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 자체가 하나의 자연이자 환경으로 주체에게 받아들여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피셔는 이음새 없는 철통같은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저항은 가능한지 고민한다. 자본주의의 불평등이나 빈곤의 상태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강화하는 수단이라고 피셔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피셔의 대안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리얼’한 것이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날 때, 자본주의는 위기에 빠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리얼리즘의 해체는 이데올로기의 자연성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이데올로기의 자연성은 가치를 사실로 전도시킬 때 일어난다. 이런 맥락에서 피셔는 신자유주의를 “비즈니스 존재론”으로 명명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비즈니스로 만들어버리는 상품구조이다. 피셔에게 해방의 정치는 이런 자연적인 질서처럼 보이는 구조를 파괴하는 행동이다. 

이 지점에서 피셔는 현실성(reality)과 실재(the real)를 구분하는 지젝의 라캉주의를 인용한다. 실재는 현실성을 구성하는 핵이지만, 실제로 재현에 저항하는 공백의 존재이다. 존재하지만, 설명하거나 드러낼 수 없다. 달리 표현하자면, 현실성은 이 실재의 부재라는 부정신학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 부재의 자리가 바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지점이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인류의 신생아가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진실을 외면하면서 유물들을 모아두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기후 변화의 진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플라스틱 대란이 닥쳐오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런 미래를 상상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상상의 자리가 바로 부재함으로써 존재하고 있는 대안의 실체이다. 피셔의 말을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대안의 부재, 또는 불가능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그 불가능성을 환기시킴으로써 지속하게 된다. 

3. 정상성과 해방의 상상력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합리적인 대안을 주문한다. 그러나 이 합리적인 대안에 대한 강요야말로 대안의 출현을 가로막는 최대의 저지선이다. 합리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조소와 조롱의 대상이 되는 해방적 상상력을 생각해보자. 김미례 감독이 만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볼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대학생들이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미쓰비시에 폭탄테러를 가한 사건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이어진 질의응답시간에 패널과 관객은 이들이 채택한 ‘폭력’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시민과 함께할 평화로운 방법을 찾지 않았기에 이들의 투쟁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적은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일리가 있는 생각이지만, 당시 1970년대의 상황으로 돌아가면, 오늘의 시선으로 과거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문제점을 노출시킨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를 돌이켜보면 쿠바 혁명을 비롯해서 제 3세계에서 무력을 사용한 도시게릴라전은 그렇게 특별한 투쟁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후 경제발전을 통해 풍요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던 일본의 안락을 거부하고, 일본의 청년들이 제국주의 반대 투쟁에 나섰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오늘의 시각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비폭력을 정상성으로 인준하는 태도야말로 피셔가 말하는 ‘리얼리즘’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말은 실질적으로 자본주의의 현실원칙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때 리얼리즘은 문화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차원도 포괄한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현실원칙을 전제하는 개념이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현실원칙을 강요하는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K-Punk는 자본주의의 현실원칙을 넘어가는 죽음충동의 형식인 셈이다. 사이버네틱스가 기술의 작동방식에 대한 용어라고 한다면, 피셔의 ‘카이버네틱스’는 이 작동방식을 파괴하고 혼란에 빠트리는 리비도의 투여인 것이다. 이 리비도의 투여를 방해하기 위한 필사적인 공작이 매일 벌어지는 장소가 바로 대중문화라고 피셔는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블로그와 문화비평은 자본주의의 현실원칙에 저항하는 최전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현실성의 관리 방식 중 하나가 바로 냉소주의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관리는 낯설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개혁’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신의 조장이다. 언론인과 정치인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분칠하는 것은 얼핏 급진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냉소주의를 조장해서 공론의 장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더욱 굳건하게 현실성을 구축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중반에 갑자기 최대의 지상 과제로 부상한 “검찰개혁”은 표면 상 진보적 의제이지만,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확장하고 재생산하는 기능을 한다. 검찰이 옳든 그르든, 가치 판단을 떠나서, 검찰을 믿을 수 없는 집단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사모펀드와 같은 ‘새로운 자본 축적 방식’은 성공적으로 자본주의의 현실성으로 인준 받을 수 있다. 이런 탈진실의 과잉을 우리는 자본주의의 착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하수도에서 일하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그 하수도를 깨끗이 준설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진 않는다. 말하자면, 누군가는 그 하수도를 치워야하지만, 그 일할 사람이 나는 아니어야하는 것이다. 피셔가 간파한 냉소주의는 이런 책임 회피의 결과물이다. 이 회피를 정당화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경쟁이다. 이 경쟁을 통한 결과를 인정해주는 것을 ‘공정성’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피셔가 말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핵심이다. 나 역시 이 문제를 ‘평등의 고원’이라는 용어로 블로그에서 다룬 적이 있다. 말하자면, ‘평등의 고원’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이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스펙’을 자랑하는 젊은이들이 취업하고자 하는 곳은 다른 어디도 아닌 대기업이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수없이 많은 경쟁의 관문을 통과해 도달한 최종 지점에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있고, 공정한 경쟁을 거쳐 이런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정상성’의 기준이다 

이 ‘정상성’의 달성을 ‘평등의 고원’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고원’에 올라가야 우리는 ‘평등’의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 평등은 고원 위와 아래를 나누는 불평등에 대한 동의를 전제한다. 이 ‘평등의 고원’을 유지하는 것이 이를테면 한국의 경제주의이다. 고원의 위와 아래를 나누는 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합리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 정당한 노력을 했다면 ‘평등의 고원’에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 이렇게 ‘공정’하게 위와 아래의 차이를 구분해주는 것이 행정이라는 양적 근대성의 핵심이다. 이런 방식으로 경제주의는 첨예한 개인의 이해관계를 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억제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지나친 개별적 이익의 추구는 산업 자체의 존재 기반을 허물 수 있다는 경험이 여기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낸다. 

이렇게 경제주의는 개인의 이익에 근거한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를 ‘정치 과잉’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 삼성 같은 대기업이 국가를 제치고 가장 신뢰도 있는 기관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삼성이야말로 합리성의 기준이고 체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의회정치를 비롯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기업의 합리성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합의를 도출한다. 삼성이 이런 지위를 획득한 것과 한국 사회의 변화는 무관하지 않다. 한국의 민주화는 산업의 합리화를 추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국가정책을 결정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바로 현실원칙을 구성하는 원리라는 점에서 말이다.

피셔가 분석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사법 정치(juridico-politics)라고 할 수 있다. 피셔가 직접적으로 이런 사법 정치를 분석하고 있지는 않지만, 실제로 자본주의의 현실원칙이 관철되는 방식은 사법체제의 작동에 따른 것이다. 이런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현실원칙을 거슬러서 피셔가 제기하고자 하는 K-Punk의 대안은 무엇일까. 그가 남긴 공산주의에 대한 미완의 유고 “애시드 공산주의”(acid communism)에서 이 대안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애시드 공산주의는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 실험이다. 이 정치 실험은 자본주의를 부식시키는 산성과 같은 작용을 한다. 애시드 공산주의라는 개념은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문화의 유령학(hauntology)에 이어 고안해낸 정치적 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피셔는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한다거나 감금된 본성, 또는 깊숙한 진실 따위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으로 다른 수를 내는 것이 관건”이라는 푸코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위한 정치적 기획으로서 애시드 공산주의를 제시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주장을 부식시키는 발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지금 당장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4. 애시드 공산주의 

미완의 원고에서 개진된 생각이라는 점에서 애시드 공산주의는 정확하게 어떤 기획을 상정하고 있었는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피셔는 도입부에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를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애시드 공산주의라는 개념이 60년대 히피주의의 반복이 아닌지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피셔는 명확하게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라는 유령을 환기시킨다. 헤겔적인 의미에서 자본주의를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현실성을 구성하고 있는 실재의 위치이동이 애시드 공산주의의 의미이다. 아주 미미한 변화 같지만, 이 변화는 서서히 자본주의를 잠식해서 부식시킬 것이다. 이 개념은 급진주의와 점진주의를 하나로 통합한다. 가장 급진적인 것이 점진적이고, 가장 점진적인 것이 급진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피셔의 개념은 상당히 들뢰즈와 가타리의 구상과 겹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욕망은 대상도 주체도 없는 스스로 대상이자 주체인 흐름 자체이다. 욕망 자체의 말미암음이 욕망의 실체이다. 애시드 공산주의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공리적 재현과 경제적 합리성을 중심으로 단일하게 구성되어 있는 인공적 자연성이라면, 공산주의는 그 인공성을 허물고, 자연성을 다양체로 개방한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이들이 그 열정과 노력을 아주 조금이나마 다른 곳에 쏟을 수 있다면, 인간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의 확장을 위해 그만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삶 자체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형식이 가능한 삶의 역동성이 곧 욕망인 것이다. 

그렇다면 피셔는 왜 ‘애시드’라는 난해한 용어를 공산주의라는 평범하면서도 보편적인 용어와 결합시키고자 했을까. 어떤 이들은 애시드에 내포된 환각적인 측면을 부각해서, 피셔가 60년대 반문화운동의 부활을 꿈꿨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용어는 환각을 강조한다기보다 강렬한 산화성을 느끼게 한다. 그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침식하는 공산주의의 산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산성의 신맛은 우리의 정신을 깨울 뿐만 아니라, 모든 맛을 바꿔놓는다. 피셔는 현실원칙의 단맛을 뒤흔들어놓는 강렬한 신맛을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애시드 공산주의는 결코 달달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낫다는 환상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자유가 반드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을 위해 자유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지속 가능한 이유는 개인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쾌락을 주는 대신 그 자유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굶어죽을 자유마저 허락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자유가 없다는 뜻이다. 자신을 상품화하지 않으면, 개인은 죽는 수밖에 없지만 상품화는 개인의 인정욕구를 충족시켜서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피셔가 마르쿠제를 인용한 이유는 이런 자본주의의 복속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자유로워질 것을 주창한다. 

한 마디로 새로운 자본주의의 리얼리즘은 우리 스스로 자유를 헌납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이 쾌락원칙의 작동방식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 피셔의 정치기획이다. 이 기획의 핵심은 지금 현재의 현실성을 부식시켜서 그 자연성의 부자연스러움을 드러내는 것에 있다. 그렇다고 피셔가 자유의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애시드 공산주의는 완전한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자유는 스피노자를 변주해서 말하자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행위 자체이다. 기후변화의 미래가 어떠할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 펜데믹 이후에 무엇이 닥쳐올지 멈추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 이 자유의 핵심이다. 자본주의는 생각을 멈추고, 부동산을 사고 주식을 사라고 주문한다. 그 자산의 확보가 우리의 즐거움이라고 끊임없이 강변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은 자유보다도 복속이다. 복속을 자유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원리가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다. 이 달콤한 환상을 깨트리는 공산주의의 신맛을 배양하는 실험실이 바로 피셔의 블로그였고, 그 실험의 재료가 바로 문화비평이었던 것이다.


댓글 '2'

읽은이

2020.12.19 18:09:19

잘 읽고 가요

독자

2021.01.08 00:04:04

오늘도 많이 배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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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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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있는 영국 국립 미술관에 가면, <아르놀피니의 초상>이라는 그림이 있다. 지금 이 그림의 제목은 <초상>이지만 내가 맨 처음 이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아르놀피니의 결혼>이었다. 1434년 네덜란드 화가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의 주제에 대한 논란은 많은데, 플랑드르 브루제에 살던 이탈리아 상인 아르놀피니의 결혼을 그렸을 것이라는 주장이 한동안 우세했지만, 1997년 아르놀피니가 실제로 1434년에 결혼하지 않았고, 반 에이크가 죽은 지 6년이나 지나 결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발생했다. 제목이...

강남역 사건과 여성혐오 file [2]

  • 2016-05-26
  • 조회 수 5131

강남역에서 발생한 여성 살인 사건은 그 동안 한국 사회에 잠재해 있던 뇌관 하나를 터트렸다. 이 뇌관은 엄연히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 되었던 문제를 수면으로 띄워 올렸다. 바로 그것은 여성차별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문제는 ‘여성혐오’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속내를 파고들어 가보면 더 복잡한 층위들을 감추고 있다는 판단이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처음에 ‘여혐’에 근거한 증오범죄인지 아닌지 여부를 놓고 논쟁이 불타올랐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증오범죄보다는 조현병의 망상에 따른 ‘묻지마 살인’으...

한병철과 헬조선 file [3]

  • 2017-03-21
  • 조회 수 4725

한병철 교수의 특강이 모종의 '퍼포먼스'였던 모양이다. (▶참고 글) 이 문제에 대해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린 평가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철학자의 객기" 정도였는데, 이를 두고 벌어지는 풍경이 자못 심각해서 짧게 몇 마디 보태고자 한다. 참석한 관객들의 '증언'과 이후 알려진 정보들에 따르면, 저자는 출판사를 철저히 무시하고 본인의 강연을 그런 식으로 진행하고자 했던 것 같다. 피아노를 미리 주문해놓은 것을 봐도 무엇인가 특별한 계획이 그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과가 성공적이었다기보다는 일종의 해프닝...

100만 인파의 의미 file

  • 2016-11-16
  • 조회 수 4299

100만의 인파가 서울 광화문에 모여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서울이라는 장소성을 넘어선 ‘시민들’의 집결이었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된 집회는 인터넷은 물론 지상파 방송을 타고 생중계되었다. 누구는 봉기라고 했고, 누구는 거대한 콘서트 같다고도 했고, 누구는 엄청난 인파에도 폭력 없이 평화롭게 끝난 시위에서 대한민국의 힘을 느꼈다고도 했다. 여하튼 언론들은 100만이라는 숫자와 질서정연하게 끝난 비폭력 평화시위를 강조했다. 이렇게 100만 명의 인파가 청와대를 ‘포위’한 듯 연출한 보도사진이 지면을 장식했다. 장관은 SN...

미투 운동과 한국의 진보주의 file

  • 2018-03-17
  • 조회 수 4231

미투(#MeToo)라는 말이 처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폭발적인 운동으로 번져갈 것이라는 예상을 누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1월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들불처럼 퍼져나간 미투는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누구는 이렇게 한국 사회에 성범죄가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터져야할 문제가 지금에야 터진 것이라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 특히 남성이 저지르는 성 관련 범죄는 거의 먼지처럼 일상에 퍼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우리는 할리우드로 간다": "곡성", 어떤 '촌스러움'에 대한 혐오 file [14]

  • 2016-05-16
  • 조회 수 4141

* 이 글은 결정적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영화를 보신 분이나 아니면 보실 생각이 없는 분들에 한해 읽으시기 바랍니다.  <곡성>은 한 마디로 감독이 제대로 소재를 장악하지 못해서 우왕좌왕한 영화이다. 반짝이는 장면들도 없진 않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교과서적인 장르 영화 장면들의 오마주들이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감독 자신은 이 영화를 코미디에 장르물이고 상업영화라고 했지만, 코미디라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장르물이라기에는 너무 엉성하고, 상업영화라기에는 너무 예술적이다. 자기 장난감 자랑하는 아이 같은 ...

“기생충”을 보다 file [2]

  • 2019-07-04
  • 조회 수 3859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영화 <기생충>을 이제야 보았다. 바쁜 일정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덕분에 이 영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미리 알고 볼 수 있었다. ‘스포일러 공포’가 횡행했지만, 이 영화는 줄거리를 다 알고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다. 영화 <명량>을 보고 “이순신 장군 죽는다”는 사실을 알렸다고 스포일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여하튼 칸의 수상 덕분인지 이런 “스포일러 마케팅” 덕분인지 영화의 흥행은 성공했지만, 만일 이 둘이 없었더라도 이 영화가 이토록 관심을 끌 수 있었을지 ...

비트코인 신드롬 file [1]

  • 2018-01-27
  • 조회 수 3105

가히 비트코인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하다. 빌 모러가 2015년 <어떻게 결제하시겠습니까?>라는 책을 쓸 때만 해도 비트코인은 기술발전이 가져올 화폐의 미래 중 하나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암호화폐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비트코인은 갑자기 ‘투기’의 대상으로 비난 받게 되었다. 유시민 같은 이들이 앞장서서 비트코인 신드롬을 ‘광풍’으로 진단하면서 투기를 조장하는 ‘작전세력들’을 비난했다. 이런 비난은 비트코인에 대한 다소 과도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지만, 유시민 같은 이들의 주장을 문제 삼기 위해...

랑시에르를 만나다 file [1]

  • 2018-04-23
  • 조회 수 2752

자택 문이 열리자 자크 랑시에르는 변함없이 보랏빛 스웨터를 입고 나를 맞이했다. 처음부터 인터뷰를 기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 학술행사가 있어서 들른 차에 잠깐 찾아뵙고자 했던 것인데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길어져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도 청탁할 것이 있었고, 또한 다른 부탁도 이메일을 통해 주고 받고 있던 참이었다.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은 거실도 변함없었다. 아담한 살굿빛 소파가 놓여 있는 정경은 몇 년 전에 찾았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지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특강 때문...

그들은 왜 부채춤을 추었는가 file

  • 2015-04-09
  • 조회 수 2055

마크 리퍼트 주한 미대사 '피습 사건'은 이제 망각의 강을 건너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건의 '배후'를 의심했던 수사기관도 김기종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 내리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사건 당시에 목격했던 기이한 반응들은 쉽사리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특히 리퍼트 미대사의 쾌유를 빈다는 명목으로 등장했던 일련의 '퍼포먼스'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정상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들이 돌연 비정상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여기에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미 대사에서 ...

이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트럼프 현상을 다시 생각하자 [2]

  • 2016-12-25
  • 조회 수 1929

트럼프가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인’의 타락에서 기인했다기보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가치’를 만들어낸 전후 자유주의가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적인 배경으로 인해 트럼프 정권의 성공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미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는 미디어의 생리를 정확히 꿰뚫어 오바마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기층의 불만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경악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만큼 미국답지 않은 선택이라는 뜻일...

트럼프는 무엇의 이름인가 file [2]

  • 2016-11-10
  • 조회 수 1922

도널드 트럼프가 미 대선에서 승리했다. 클린턴의 승리를 예상했던 이들에게 혼란과 절망을 안긴 결과였다. 클린턴 지지자였던 폴 크루그먼은 트위터에서 생뚱맞게 샌더스 때문에 클린턴이 패배했다고 개탄하다가 나오미 클라인에게 반박을 당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지 않은가. 노무현 정부가 가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던 무렵에 벌어졌던 일들과 겹쳐지는 장면들이다.  오바마 정부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노무현 정부와 비슷한 정부였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과 오바마는 대통령으로서 훌륭했을지 몰라도, 그...

자코메티 file

  • 2017-12-09
  • 조회 수 1915

“나는 예술에도 관심 있지만, 본능적으로 진리에 더 관심이 많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말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작업을 하면 할수록 더 다르게 본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그러므로 ’다르게 보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자코메티는 ”미술은 보기의 일종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예술은 어떤 신비감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얼마 전 도쿄에 가서 봤던 자코메티 전은 띄엄띄엄 마주쳤던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을 일별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전시를 둘러보면서 종종 ‘현대인의 고독’을 표...

순수한 상호공생의 이론적 근거: 슬라보예 지젝과 한병철의 논쟁에 대해 file

  • 2020-04-25
  • 조회 수 1796

* 이 글은 Fall Semester에 기고한 "On The Rationale Of Pure Mutualism: An Intervention Into The Debate Between Slavoj Žižek And Byung-Chul Han"을 강영민이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이동할 수 없다. 코로나19(COVID-19)도 마찬가지다. 바이러스는 동물 같은 숙주를 필요로 한다. 라틴어로 동물(animal)은 숨이 붙어 있는 존재란 뜻이다. 인간의 의미 상징 체계 내에서 이미 바이러스 감염의 문화적 기원이 각인되어 있는 셈이다. 동물이 바이러스를 다른 동물로 이동시킨다. 오늘날 같이 동물이 다른 동물들과 빈...

2015년 신경숙 표절 논쟁은 무엇이었나 file [6]

  • 2015-12-13
  • 조회 수 1730

표면상 '표절 논쟁'이었지만, 2015년에 일어난 '신경숙 표절 문제'는 두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신경숙의 표절 여부이고, 두 번째 문제는 신경숙 자체이다. 둘은 서로 다른 사안이지만, 이른바 '표절 논쟁'을 경과하면서 서로 겹쳐 보이게 되었다. 이런 착종이 곧 증상이라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이 증상은 여러 가지 진실을 말해준다. 메시지를 읽을 것이 아니라, 이 증상의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문제, 그러니까 신경숙의 표절 여부는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석연찮은 논리이긴 했지만, 본인도 ...

소녀상 file

  • 2016-02-11
  • 조회 수 1722

인간은 상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20세기 구조주의 인류학자들은 이런 ‘상징 행위’의 의미에서 역사를 재구성하는 문화의 작동방식을 실증해서 보편이론을 만들고자 했다. 그만큼 상징은 보편적이고, 보편적인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물론 문화에 따라서 상징은 서로 다른 맥락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길조를 뜻하는 까치는 서양의 상징체계에서 보면 흉조이다. 상징의 문제는 상징물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성을 획득하는 순간, 다른 차원을 얻기도 한다. 상징물은 분명 추상적인 상징성을 실현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