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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기생충”을 보다

조회 수 2110 추천 수 0 2019.07.04 23:2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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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영화 <기생충>을 이제야 보았다. 바쁜 일정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덕분에 이 영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미리 알고 볼 수 있었다. ‘스포일러 공포’가 횡행했지만, 이 영화는 줄거리를 다 알고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다. 영화 <명량>을 보고 “이순신 장군 죽는다”는 사실을 알렸다고 스포일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여하튼 칸의 수상 덕분인지 이런 “스포일러 마케팅” 덕분인지 영화의 흥행은 성공했지만, 만일 이 둘이 없었더라도 이 영화가 이토록 관심을 끌 수 있었을지 의문이 이는 것도 사실이다. 흥행 여부가 영화의 가치를 결정하는 유일 요소는 아니겠지만, 이 영화가 흥행의 코드에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나는 봉준호 감독을 한국 최고의 감독 중 한명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영화의 문법을 가장 잘 장악하는 감독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 전작 <마더>는 100년이 지나서 한국인들이 지난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반드시 호명하게 될 영화라고 본다. 

그렇다고 봉준호의 영화가 사회적인 문제를 윤리적으로 다룬다고 보기는 어렵다.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만 하더라도, 개인과 가족의 안전 문제와 연결된 ‘좋은 국가’라는 의제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마더>에 이르면 그 구분이 사라진다. <마더>는 옳고 그름이라는 윤리적 범주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메타윤리적인 영화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멀찍이 배경으로 놓여 있던 “우리 안의 범인”이라는 테제를 매일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친밀한 ‘우리 동네’와 ‘가족’으로 옮겨놓은 작품이 <마더>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봉준호는 한국의 히치콕이라고 부를만한 면모를 발굴해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본 <기생충>은 봉준호의 ‘장르’ 중에서도 <마더>에 가깝게 놓이는 작품이다. 

<기생충>은 <마더>에 비해 아주 정교한 ‘그림’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스탠리 큐브릭의 <베리 린든>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살아있는 그림’(tableau vivant)이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바로크 회화 같은 격정의 응결을 세팅해놓은 느낌이 다분하다. 그렇지만, <기생충>의 플롯을 작동시키는 맥거핀은 다름 아닌 “산수경석”이다. 이 수석은 “풍경”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기생충>은 이 “산수경석” 같은 풍경이고, 이 수석이 민혁의 손에서 기우의 손으로 전해지면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다. 맥거핀이라는 점에서 “산수경석”은 이 영화의 부재원인(absent cause)이다. 인과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수석의 존재는 결말에 등장하는 기택의 행동에 대한 어떤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얼핏 이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보일뿐더러, 수미일관하지 않게 보인다. 차근차근 따져보자. 

흥미롭게도 이 영화를 둘러싼 많은 논의들은 빈부격차와 계급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 영화는 하나의 계급, 중간계급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계급투쟁”에 주목하기보다, 같은 계급 내에 있는 이들이 왜 서로 갈등하는지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박사장, 기택, 근세는 사실상 하나의 계급이 분화한 존재들일 뿐이다. 이 존재들은 상당히 상징화되어 있는데, 박사장은 성공한 벤처사업가이고, 기택은 은퇴한 후에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쫄딱 망한 자영업자이고, 근세는 사법고시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고시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고시생이다. 이 고시생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사장을 ‘존경’하는 시대착오적 인물이기도 하다. 세 인물은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상 닮은꼴이라는 점에서 데칼코마니 같은 존재들이다. 이 영화의 원제로 데칼코마니가 고려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셈이다. 

데칼코마니라는 원제를 버리고 기생충이라는 지금의 제목을 채택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데칼코마니라는 제목이 세 인물의 ‘모방욕망’(mimetic desire)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라면, 기생충이라는 제목은 세 인물의 ‘기생’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기생’한다는 것일까. 게다가 이 ‘기생’의 주체인 ‘기생충’은 한국의 맥락에서 ‘벌레’이다. 보통은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에 ‘기생’하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라고 이야기하고, 봉준호 감독 자신도 한 인터뷰에서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밝혔지만, 내가 보기에 영화는 박사장을 포함해 모두를 ‘벌레’로 그리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박사장은 쿨한 척하지만, 딸보다 아들을 더 중하게 여기고, 아내 연교를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상한 남편인 척하는 전형적인 ‘한남’이다. 이런 사실은 등장인물, 특히 기택의 가족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어떤 누구도 ‘벌레’에 자신을 투사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기택의 가족에게 감정이입을 했던 이들은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고, 박사장에게 감정이입을 한 이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존재가 바로 문광과 근세이다. 나는 이 이름을 듣자마자 상당히 ‘아재스러운 발상’이긴 하지만, 냉전시대의 잔여물이라고 할 “문세광”이라는 이름 석 자를 떠올렸고, 문광이 북한 중앙통신의 아나운서를 흉내 낼 때 유년의 기억을 다시 소환했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문광과 근세는 냉전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냉전이든 무엇이든 이제는 말끔히 잊힌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트라우마가 억압되었다가 돌아오는 것이 이 영화의 후반부를 구성한다. 이 억압된 것의 귀환은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의 동거라는 아슬아슬한 균형을 무너뜨린다. 

‘기생충’은 동거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동거는 공생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고, 그 반대인 천적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후자로 나아가는 ‘기생충’의 자멸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기생충’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들은 어디에 ‘기생’하는 것일까. 사실은 금방 드러난다. 이들은 다른 어디도 아닌 박사장의 집, 사실은 남궁현자의 집에 기생하는 존재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집 자체이다. 마치 빅톨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진짜 주인공이 노트르담 대성당인 것처럼, <기생충>에서 진짜 주인공은 남궁현자의 집인 것이다. 이 집은 남궁현자라는 산업화 세대가 남겨놓은 국가라는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상징한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중간계급이야말로 공통적인 것에 기생하면서 영양분을 빨아먹는 ‘기생충’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진짜 메시지 같다. 이 ‘기생충’은 공통적인 것을 나누면서 충분히 공생할 수 있음에도 자기 지분을 차지하겠다고 싸우다가 서로 죽고 죽인다. 유일하게 화해의 대책을 제시한 기정이 죽임을 당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를 지칭해서 “한국적인 내용”이라고 한 맥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내 식으로 해석하자면, 봉 감독이 염두에 두는 “한국적인 것”은 노동계급 없는 한국 자본주의를 가리키는 다른 말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영화는 계급 갈등 문제를 다루기보다 르상티망이라는 주체의 욕망에 더 집중하는 ‘심리극’에 가깝다. 영화의 주요 전개는 이런 심리적 대칭구조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대칭구조가 수목구조를 이루면서 상승하는 꼭짓점에 집이 놓인다. 모두가 집을 욕망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집을 소유할 수 없기에 이들은 내재적 매개자(mediator)를 만들어내고 이를 모방한다. 내재적 매개자는 라이벌 관계를 이루고 대상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다가, 르상티망으로 인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종결한다. 이 영화의 미스터리한 결말은 르상티망의 폭주로 이해할 수 있다. 기택의 라이벌은 박사장이었고, 그래서 기택은 딸을 공격한 근세가 아닌 박사장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세에게 라이벌은 기택도 박사장도 아닌 기우나 기정이다. 기우나 기정은 집의 지하에 평화롭게 기생하던 근세의 존재를 위협하는 경쟁 상대이기 때문에 근세의 타격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박사장은 집을 소유하고 있지만, 집을 관리하는 문광보다도 집의 구조나 내력을 모른다. 문광은 이런 박사장 가족을 경멸하듯이 “얘들”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 집을 지은 건축가와 특별한 관계였을 것이 분명한 문광이야말로 이 남궁현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문광에게 남궁현자는 신과 같은 존재이겠지만, 박사장과 연교의 가족은 “얘들”일 뿐이다. 그러나 문광은 기택의 가족 때문에 숙주에서 쫓겨난다. 기택의 가족은 어떻게 견고한 문광의 뿌리를 흔드는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들이 인터넷을 통해 온갖 정보를 얻어서 박사장의 집으로 진입한다는 점이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에 깔려 있는 반능력주의를 읽을 수 있다. 전문성 같은 것은 쉽사리 인터넷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집단 지성’의 산물일 뿐이라는 폭로가 은연중에 드러난다. ‘평등주의’의 메시지는 수석의 은유를 통해 계속 반복해서 환기된다. 폭우가 쏟아져서 반지하 기택의 집이 마치 수석처럼 물에 잠기는 것은 분리된 두 세계를 보여준다기보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증명한다. 박사장의 집과 기택의 집을 연결하는 긴 층계들이 “산수경석”의 색깔과 무늬를 연상시키는 것도 그 때문일 테다. 

말하자면, 기택의 집과 박사장의 집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긴 층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택과 박사장은 하나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지하, 반지하, 지상이라는 세 위계는 이런 의미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구조물이다. 박사장이 냄새에 집착하는 이유는 냄새가 끊임없이 이 사실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무말랭이 냄새”와 “행주 삶는 냄새,” 그리고 “지하철 냄새”를 기억하는 박사장의 과거는 기택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이 하나의 세계에서 박사장과 기택은 서로에게 라이벌 관계를 이루면서 대상에 대한 향유를 경쟁적으로 추구한다. 

그렇지만,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기우의 내레이션을 감안한다면, 이 영화에서 펼쳐진 모든 내용은 사실상 기우의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지하에 갇힌 기택은 기우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평행우주처럼 이 인물들은 각각의 가능성을 나누어 가진 같은 자아이다. 이 자아에 포함되지 않는 존재는 영화 초반에 잠깐 등장하는 민혁이다. 할아버지에 대한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민혁은 태생부터 중간계급에 속하지 않는 인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혁이 기우에게 자신의 과외 자리를 넘겨주는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민혁은 왜 기우에게 자신의 과외자리를 넘기는가. 이 질문은 기우가 민혁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관객을 대신해서 기우는 묻는다. 그러자 민혁은 뜬금없이 자신과 같은 대학을 다니는 “공대생들”을 비난하면서 기우만이 제대로 다혜를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한다. 민혁의 입장은 남궁현자나 박사장에 대한 비판처럼 들린다. 기우에게 민혁은 외재적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외재적 매개자는 라이벌이라기보다 동일화의 대상이다. 처음에 맥거핀을 작동시키는 민혁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기생충’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민혁은 존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에 등장하는 딘 모리아티와 같은 존재, 이른바 힙스터의 원형이다. 봉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민혁을 일컬어 “배포가 크고 부자 친구하고만 어울리는 게 아니라 가난한 집 친구들도 몰고 다니는 호방한 아이들” 중 하나라고 했다. 따라서 민혁은 부르주아의 반항아, 말 그대로 모더니스트적인 반영웅이다. 이 민혁에 동의하기 힘들다면, <기생충>은 상당히 반동적인 영화로 비칠 수도 있겠다. 

여하튼, 이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가 무엇인가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영화는 욕망의 지형도를 그 어떤 장르보다 잘 보여줄 수 있는 거울이다. 이 욕망의 운동은 선과 악이라는 도덕의 판단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목적 없는 운동으로서 삶은 무한하게 지속할 뿐이다. 이 의미 없는 지속성 자체를 봉 감독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그의 사상에 대한 내 판단은 유보한다. 다만 <기생충>은 초기작에서 이어지는 봉준호의 멜랑콜리를 더 정교하게 다듬은 영화라는 생각이다. 이 멜랑콜리가 낭만주의적 판타지로 귀결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정치성과 관련한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작품이다. 


댓글 '1'

코스모폴리탄

2019.07.06 06:47:53

역시 택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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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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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인’의 타락에서 기인했다기보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가치’를 만들어낸 전후 자유주의가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적인 배경으로 인해 트럼프 정권의 성공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미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는 미디어의 생리를 정확히 꿰뚫어 오바마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기층의 불만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경악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만큼 미국답지 않은 선택이라는 뜻일...

거기 '내가 있었다': 소셜미디어와 체감의 정치 file [1]

  • 2016-11-28
  • 조회 수 854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에게 문자는 인간을 게으르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문자로 무엇인가를 표기해놓으면 주객이 전도되어서 그 문자를 해석하느라 갑론을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문자에 담긴 이데아를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악명 높은 ‘시인추방론’과 일맥상통하는 논리인 셈이다.  그러나 인류 중에서 살아남은 우리 사피엔스는 플라톤의 우려와 달리 “돌에 정보를 새기는 능력” 덕분에 사회를 이루고 이렇게 지구 환경 자체를 변화시키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다.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 문자야말로 괴테가...

100만 인파의 의미 file

  • 2016-11-16
  • 조회 수 4243

100만의 인파가 서울 광화문에 모여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서울이라는 장소성을 넘어선 ‘시민들’의 집결이었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된 집회는 인터넷은 물론 지상파 방송을 타고 생중계되었다. 누구는 봉기라고 했고, 누구는 거대한 콘서트 같다고도 했고, 누구는 엄청난 인파에도 폭력 없이 평화롭게 끝난 시위에서 대한민국의 힘을 느꼈다고도 했다. 여하튼 언론들은 100만이라는 숫자와 질서정연하게 끝난 비폭력 평화시위를 강조했다. 이렇게 100만 명의 인파가 청와대를 ‘포위’한 듯 연출한 보도사진이 지면을 장식했다. 장관은 SN...

트럼프는 무엇의 이름인가 file [2]

  • 2016-11-10
  • 조회 수 1846

도널드 트럼프가 미 대선에서 승리했다. 클린턴의 승리를 예상했던 이들에게 혼란과 절망을 안긴 결과였다. 클린턴 지지자였던 폴 크루그먼은 트위터에서 생뚱맞게 샌더스 때문에 클린턴이 패배했다고 개탄하다가 나오미 클라인에게 반박을 당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지 않은가. 노무현 정부가 가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던 무렵에 벌어졌던 일들과 겹쳐지는 장면들이다.  오바마 정부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노무현 정부와 비슷한 정부였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과 오바마는 대통령으로서 훌륭했을지 몰라도, 그...

최순실이라는 균열 file

  • 2016-10-27
  • 조회 수 871

박근혜 정부는 인기를 잃어버린 보수가 극우의 포퓰리즘을 포섭하면서 탄생한 정부이다. 이 정점에 박근혜라는 이름이 있다. 박근혜라는 이름은 특정한 개인의 호명이라기보다 보수와 극우의 간극을 지우는 '국민'의 대리물이었다. 그러나 꽉찬 것처럼 보이던 이 이름이 사실은 텅 비어 있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폭로되었다.  이처럼 너무도 견고해보였던 보수-극우 연합전선에 결정적인 균열을 초래한 원인은 최순실이라는 변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상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균열을 이끌어낸 최초의 계기가 이대 투쟁이었다는 사실이...

강남역 사건과 여성혐오 file [2]

  • 2016-05-26
  • 조회 수 5008

강남역에서 발생한 여성 살인 사건은 그 동안 한국 사회에 잠재해 있던 뇌관 하나를 터트렸다. 이 뇌관은 엄연히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 되었던 문제를 수면으로 띄워 올렸다. 바로 그것은 여성차별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문제는 ‘여성혐오’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속내를 파고들어 가보면 더 복잡한 층위들을 감추고 있다는 판단이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처음에 ‘여혐’에 근거한 증오범죄인지 아닌지 여부를 놓고 논쟁이 불타올랐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증오범죄보다는 조현병의 망상에 따른 ‘묻지마 살인’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