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 대선에서 승리했다. 클린턴의 승리를 예상했던 이들에게 혼란과 절망을 안긴 결과였다. 클린턴 지지자였던 폴 크루그먼은 트위터에서 생뚱맞게 샌더스 때문에 클린턴이 패배했다고 개탄하다가 나오미 클라인에게 반박을 당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지 않은가. 노무현 정부가 가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던 무렵에 벌어졌던 일들과 겹쳐지는 장면들이다. 오바마 정부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노무현 정부와 비슷한 정부였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과 오바마는 대통령으로서 훌륭했을지 몰라도, 그들의 정부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거대한 포퓰리즘의 반동을 막아내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의 출현으로 반공과 유신의 잔재들이 사라지고 극우는 퇴출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를 거쳐 마침내 보수의 반동은 극우주의와 결합해서 박근혜 정부를 낳았다. 이전 정부가 실시했던 리버럴한 정책들은 보수-극우 정치 연합의 표적이 되었다. 주디스 버틀러가 트럼프 당선을 두고 "반여성주의와 인종주의가 끝났다는 선언은 성급했다"고 진단했지만 이런 주장은 반쪽의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논리는 자칫 페미니즘적이고 반인종주의적인 리버럴한 정책 때문에 극우가 힘을 받았다는 오류 판단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진실은 정반대이다.
극우가 준동하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과 반인종주의에 대한 보수의 관용도 협소해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문제는 극우의 부상인 셈인데, 이번 선거 결과가 보여주듯이, 전통적으로 리버럴 성향으로 분류되었던 '교육 받은 백인 엘리트'가 여기에 가담하게 된 것이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백인 엘리트'는 남녀 불문이었다. 클린턴이 여성후보였기에 트럼프보다 불리했다는 말은 정당한 분석이지만, 극우주의와 트럼프 현상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미소지니는 말 그대로 상수이다. 힐러리 지지자들 중에 미소지니스트가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여성이라고 해서 극우주의에 적대적이라는 법도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히틀러의 나치즘을 추동한 한 축이 백인 중산층 여성이었다는 것은 이번 미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한 '백인 여성'의 존재를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소지니가 주변적인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미소지니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로서 '정상성'의 규범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의 요소이다. 트럼프는 이 '정상성'의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입지에 맞게 이용했고, 클린턴은 여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왜 여성인 클린턴이 자신의 필드에서 고전을 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이라는 측면보다 '기득권'(establishment)이라는 측면이 더 강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클린턴이 정체성 정치에 힘을 쏟을 때, 역설적으로 트럼프가 계급정치의 논리를 구사한 셈이다. 물론 이런 편견은 클린턴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편견 강화 전략에 맞선 대응에서 보여준 모습은 분명 실망스러웠다. 전문가들은 백인 엘리트와 백인 노동자의 연대가 여성과 소수인종의 연대를 압도했다고 진단하지만, 이런 분석에서 빠진 것은 아예 투표 자체를 포기하는 저소득층 노동자들의 존재이다. 트럼프 당선을 미소지니나 인종주의라는 단일 원인으로 수렴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들 중에 일부는 공화당 골수팬이지만, 대다수는 어떤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말 그대로 미국 정치 자체에 낙담한 유권자들이다. 이들을 불러내기 위해 트럼프는 "헬-미국"을 외쳤고, 클린턴은 "웰-미국"을 외쳤다. 트럼프의 외침에 백인 엘리트까지 호응하면서 지지세는 급물살을 탔다고 할 수 있다. 팩트만 따지자면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이후 사정이 나아진 것은 자본가들이었지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트럼프와 힐러리가 똑 같은 '기득권'으로 보인다면, 현재의 미국을 '헬'이라고 부르면서 파격적 제스처를 취하는 정치인이 더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다. 무엇인가 변화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헬조선"을 이야기해온 우리들에게 익숙한 현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힐러리의 패배는 '미국의 종언'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종언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백인 엘리트와 백인 노동자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다.
한 없이 관대하던 미국 백인들이 트럼프에게 세뇌된 것도, 갑자기 미쳐버린 것도 아니다. 대의제는 기본적으로 '합리적 선택'을 위한 장치이고, 이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춰 유리한 후보에게 투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트럼프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 없이 이들은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이 추진해온 정책과 클린턴 후보의 전망이 자신들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문제는 수많은 모순을 봉합하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합리성'이다. 익히 박근혜 정부를 통해 확인되었듯이, 이런 '합리성'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이다.
트럼프의 출현은 '미국의 유럽화'를 보여주는 예증일 수도 있다. 분명 미국은 일국적 이해관계에 연연했던 전후 유럽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세계경찰이라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미국은 전후 자본주의 경제를 살려내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국가였다. 이것을 '전후 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후에 케인즈주의와 쌍을 이루었던 미국의 "뉴리버럴리즘"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수용한 급진주의적 가치를 발전시켰다. 이런 가치를 뒷받침한 것은 국제적 노동분업에 기초한 전후 경제성장이었다. 이런 전후 경제성장은 로버트 고든이 명명하는 "미국적 성장모델"의 연장이자 확산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래 개선되지 않은 불평등의 심화와 교육 정체, 그리고 노령 인구와 청년 세대의 부채 증가는 이런 "미국적 성장모델"에 빨간 불이 켜졌음을 의미했다. 트럼프라는 이름은 이렇게 오랜 시간 누적된 미국 경제의 위기를 해결하고 과거의 '공화국'을 돌려달라는 백인 엘리트와 백인 노동자들의 열망이 투사된 것이다. 고립주의는 이런 '전후체제'의 종언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당선에서 보듯, 위기의 국면은 극우주의로 더 쉽게 수렴된다. 지금 트럼프가 서 있는 자리에 클린턴이 있을 수는 없다. 클린턴은 트럼프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트럼프를 막을 수 있는 길은 변화를 갈구하면서 그에게 표를 던지려는 이들에게 더 근본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샌더스가 아닌 클린턴을 선택함으로써 민주당은 더 왼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물론 이런 민주당의 타협이 급진주의 자체의 폐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의제는 정치를 관리하기 위한 장치이지 정치 자체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노동계급으로 정치화할 수 있는 방안이 고민되어야하는 지점이다. 당연히 이런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투표를 포기하고 파편화되어 있는 개별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을 이번 미 대선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리버럴의 실패가 좌파에게 유리한 국면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 당선을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