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처음에 ‘여혐’에 근거한 증오범죄인지 아닌지 여부를 놓고 논쟁이 불타올랐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증오범죄보다는 조현병의 망상에 따른 ‘묻지마 살인’으로 규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경찰의 발표대로 이 살인행위가 증오범죄라는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여혐’과 조현병의 망상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조현병의 망상이 현실적 접촉을 누락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 망상의 구조는 상당 부분 상징계의 간섭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그 조현병의 망상이 왜 ‘여성’을 대상으로 삼은 페미사이드였는지, 이 문제를 질문하는 것은 사건의 진실과 무관하게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 이 문제는 ‘묻지마 범죄’인지 ‘증오범죄’인지 여부를 가리는, 이번 강남역 사건에 대한 진실공방의 차원을 넘어서서 진행 중이다.
나는 이번 사건의 현재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상이 일베의 행동이라고 본다. 내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일베는 왜 강남역에 갔는가”이다. 어떤 이들은 일베를 ‘여혐종자들’이 모여 있는 특수집단으로 간주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일베는 보통의 한국 남성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극단적으로 희화화해서 보여주는 사례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일베는 개그콘서트의 열화버전인 셈인데, 일베는 규범을 넘어서는 파격성을 통해 집단적 쾌락을 즐기는 '사디즘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논란이 되었던 ‘옹달샘 파동’ 역시 이런 관점에서 몇몇 정신 나간 개그맨들이 일으킨 문제라기보다 정규방송에서 규범적 제약 때문에 하지 못했던 여성 비하 발언들을 팟캐스트라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매체 특성을 이용해 마구 쏟아냄으로써 선정성을 노렸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올바름의 규범이 강화될수록 이런 선정성을 통해 얻는 해방감은 더욱 강렬해지는 법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이 미국처럼 전방위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이 관철되고 있는 곳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남성 중심적인 ‘해방의 코미디’는 상당히 문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파시즘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한 한국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자유주의적 규범은 여전히 넘치면서도 부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 가보자. 도대체 왜 일베는 강남역으로 갔을까. 말 그대로 강남역은 추모의 공간이었다. 그 추모의 공간에서 일베가 외친 것은 이 사건을 남녀 대결로 몰아가지 말라는 것이었고, ‘묻지마 살인’을 ‘증오범죄’로 포장함으로써 ‘남혐’을 조장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만, 남성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평소 당했던 수많은 여성차별의 사례들을 증언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보자면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여혐’이라는 것이 ‘매너 없는 일부 남성’의 문제일 뿐이고, 대다수 남성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이들은 ‘몇몇 꼴페미들’이 선량한 여성들을 선동해서 무고한 남성들을 미워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일베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여혐’이란 것이 단순히 ‘여성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사실 지금 통용되고 있는 ‘여혐’이라는 말은 misogyny의 번역어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 말은 단순하게 여성을 미워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Misogyny는 여성적인 것을 얕보고 무시하고 경멸하는 문화적 태도나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에 근거해서 살펴보면, 인류사 자체가 ‘여혐’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여혐’의 역사는 장구한 것이고, 이런 관점에서 ‘여혐’은 특정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인류 문명 자체에 내재한 구조적인 논리임으로 판명 난다.
그러므로 ‘여혐’에 대응하는 ‘남혐’이라는 개념은 사실상 난센스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워렌 패럴(Warren Farrel)이 만들어낸 이 개념은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여성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성인권의 처지를 감안해서 생각해본다면 이런 패럴의 주장은 남성 노동자가 처해 있던 계급적 불평등을 젠더 문제와 혼동한 결과물일 뿐이었다. 남성 중심주의가 계몽주의와 근대성의 근본 원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남혐’이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남혐’이라는 개념은 ‘여혐’에 대칭상인 것처럼 위장되어서 여성차별의 구조성을 은폐하고 문제를 남녀대결구도로 환원시키는 착시현상을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에 불과하다.
레이첼 보울비(Rachel Bowlby)가 지적하는 것처럼, 근대 자본주의는 여성을 소비와 여가에, 남성을 생산과 노동에 위치시키면서 이른바 ‘현모양처’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성차의 문제는 근대를 구성하는 본원적 축적에 구조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본질을 회피하고 여성차별 문제를 남녀대결로 수렴시켜서 이익배당의 경쟁구도를 강조하는 논리는 상당히 악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통해 불거져 나온 여성들의 발언들은 이 문제가 단순하게 남녀대결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여성차별과 여성대상 범죄의 경험을 성토하는 여성들의 발언들은 참으로 광범위했고, 다양했을 뿐만 아니라, 전형적이었다. 이 발언들이 전형적이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젠더 문제를 해결하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준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차별의 문제는 일상적인 것이지만, 그 일상의 평범성에 깔려 있는 ‘여혐’을 넘어서서 여성 문제를 돌아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한국 역시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페미니즘 활동가의 활약이 있었기에 이만큼이라도 젠더 감수성이 확립될 수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갈 길은 멀다고 할 수밖에 없다.
강남역에 간 일베는 ‘특수한 남성들’이 아니다. 마치 미국의 트럼프가 그렇듯이, 이들은 지지를 얻기 위해 어릿광대짓을 서슴지 않았을 뿐이다. 몰락한 백인 남성 노동자의 지지가 없었다면 트럼프도 없었듯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한국 남성’이 없다면 일베도 없다. 일베는 이런 ‘한국 남성’을 대표한다고 자처하기에 당당히 강남역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상대적 박탈감은 분명 ‘여성 때문’이 아니지만, 일베를 비롯한 ‘한국 남성’은 ‘여성 때문’이라고 믿는 것 같다. 내 생각에 이런 믿음은 일베 만의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평범성을 구성하고 있는 일상적 기제이다.
나는 한국의 가족구조와 생산관계가 결과적으로 이런 ‘여혐’을 통해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가장 핵심적인 증거는 바로 임금 차등이다. 동등하게 교육을 받고 입사해서 일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 노동자는 임금을 적게 받는다. 이 문제는 이미 일제 식민지시대부터 불거져 나온 것이다. 당시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는 남성 노동자와 똑 같이 일하면서도 임금을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았다. 이런 차별은 이른바 경제개발시대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성 노동자는 언제나 ‘임시’였고, ‘보조’였다. 남성은 큰일을 해야 하고 여성은 현모양처로서 남성을 뒷바라지해야한다는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런 경제구조를 재생산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였다. 여성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일베가 토로하는 상대적 박탈감은 여성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런 가부장제를 중심 이데올로기로 구축했던 근대적 경제모델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한국은 전후 국가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청년세대는 취업은커녕 결혼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리고, 성장제일주의는 경제구조를 지탱하는 ‘전통적 가족 구성’이라는 최후의 마지노선마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전체를 조망할 수 없이 파편적 사실만을 통해 진실을 추단하는 ‘편견의 사고’는 눈앞에 보이는 약자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게 된다. ‘한국 남성’에게 다른 소수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지금 ‘한국 남성’에게 가장 빈번하게 목격되는 약자는 바로 여성이다.
여전히 한국은 다문화적이지도 않고 인권을 중시하는 사회도 아니다. 장애인은 통행권을 얻지 못하고, 이주노동자들은 특정 지역에 밀집해 있을 뿐이다. 동성애는 강고한 도덕적 금지의 벽에 갇혀 일상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여전히 소수약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성은 ‘한국 남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거의 자신들과 대등하게 보일 수 있다. 빈번하게 자신들과 대면하면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은 그러나 일베를 비롯한 ‘한국 남성들’에게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여야 한다. 일베가 강남역에 간 까닭은 이처럼 ‘남성보다 열등한 여성’을 알리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베의 태도와 평상시에 여성을 대하는 ‘한국 남성’의 태도는 얼마나 다른 것일까. 강남역 살인 사건은 ‘묻지마 범죄’이든, ‘증오범죄’이든, 사실상 한국에서 여성이 소수약자라는 사실을 증명한 계기였고, 일베는 이 진실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베의 강남행이 증명하듯, 여성은 여전히 한국에서 소수약자이다. 이 소수약자는 소수약자이기에 다른 소수약자와 연대함으로써 ‘여혐’의 구조를 타파하고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정치적 주체인 것이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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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성들에게 여성들이 빈번하게 대면하면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처럼 보인다 ... 맞다. 근데 왜? 여성 경활참여율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의 밑바닥에서는 새롭게 진입한 여성과 고령 은퇴자들이 올라오고, 위로는 가족 부양에도 벅차하는 기성세대 남성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위협에 움츠러든 채 버티고 있다. 위아래로 짓눌린 듯 보이는 이 부분에나마 편입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거나 아예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거나(실업) 한다.
그리고 문제의 근원이 가족구조-생산관계이며 그 증거가 임금차등이라 하는데, 성별 임금격차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전통적 가족구성은 붕괴하는데, 가족임금 체계는 여전한 게 문제다. 가족을 구성한 경우에도 맞벌이 아니고는 버티기 어렵다. 게다가 청년층 남녀들은 노동시장 뿐 아니라 결혼시장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 다수가 루저일 수밖에 없다. 이는 온라인에서 남초 커뮤니티든 여초 커뮤니티든 간에 커플이 배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밖에도 가족구조-생산관계가 여혐을 통해 구성되어 있다는 시각은 구조에 대해서는 맞을지 몰라도 주체성에 대해서는 부족한 설명이다. 계급은 형성되는듯 하자 곧바로 해체되었고 이에 더해 분할통치(정규직-비정규직)되고 있다. 남성이 다수인 정규직에게 비정규직은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지고, 다수가 여성인 비정규직에게 정규직은 자본과 담합하여 차별구조를 유지하는 대가로 지대를 받아 챙기는 존재가 된다.
끝으로, 그렇다면, '한국 남성'의 여혐은 디폴트로 하고, 정말 여성과 소수자를 향한 일베의 박탈감과 공격적 언사는 '전체를 조망할' 능력을 결여한 '편견의 사고'의 산물인가? 천만에 말씀. 그들은 전체를 조망하고 잘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답이 없다. 이로부터 발현되는 위악적 히스테리가 바로 일베의 말과 행동이다.
"조현병의 망상이 현실적 접촉을 누락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 망상의 구조는 상당 부분 상징계의 간섭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분명 생각할 거리를 주는 좋은 글인 것 같습니다만, 곱씹어도 의미를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