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며칠 동안 때 아닌 집밥 논쟁이 뜨거웠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요리프로그램 때문인데, 그 중심에 백종원이라는 한 사내가 있다. ‘백주부’ 또는 ‘백선생’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사내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이 가히 ‘백종원 현상’이라고 부를만한 흥미로운 사건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발단은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이 쓴 백종원의 요리에 대한 논평이었다. 한 마디로 백종원의 요리프로그램은 맛있는 음식보다도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업소 레시피”를 소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요지였다. 여기에서 그쳤다면, 논쟁은 맛있는 음식과 먹을 만한 음식을 가리는 문제에 머물렀을 테지만, 황교익은 한 발 더 나아가서 ‘백종원 현상’ 자체를 분석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백종원 현상’을 낳은 원인으로 ‘엄마의 집밥’을 먹고 자라지 못한 젊은 세대의 결핍을 지목했다. 나름대로 현상의 원인을 분석한 것이지만, 이런 견해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글쓴이는 인지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집밥과 외식을 대립적인 관계로 놓고, 절대적으로 고유한 맛을 상정하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이런 입장은 규범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교과서적인 반론들이 쏟아졌다. 집밥을 반드시 ‘엄마’가 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여성차별적이라거나 요즘 젊은 세대에게 '엄마의 집밥'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기에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주장까지 반박의 논리는 다양했다. 분명히 이런 주장들은 타당한 문제의식들을 내포하고 있고, 나 역시 ‘엄마의 집밥’ 같은 낭만주의적 개념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 논쟁을 백종원 대 황교익이라는 대립구도로 설정해서 둘 중 하나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내버린다면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백종원 현상’은 독자적인 산물이라기보다 요즘 관심을 받았던 유사한 문화현상의 연장선에서 출현한 것이다. 특히 <삼시세끼> 같은 체험 요리프로그램에 대한 폭발적 반응과 이 현상은 무관하지 않다. 차승원의 인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삼시세끼>에서 중요한 요소는 ‘요리’ 자체라기보다 ‘요리하는 남자’였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요리와 관계 없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남자'가 요리를 한다는 사실이 이런 프로그램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쏠리게 만들었다. 이미 숱한 요리프로그램이 있었지만, 남자가 요리를 하거나 '체험'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래서 이런 프로그램들은 요리 과정을 '체험'하면서 우왕좌왕하는 남성들의 '실수들'을 웃음의 요소로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차승원의 성공은 이런 장르의 법칙을 전복시키면서 '요리 잘하는 요리사 아닌 남자도 가능하다'는 인상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요리사인 듯 요리사 아닌' 백종원의 등장은 성공적일 수밖에 없었다. 요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뽐내면서도 탈권위적인 백종원은 요리에 자신 없는 대중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워주면서 유용한 ‘비법’을 알려주는 멘토로 ‘발견’된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만 이런 대중적인 요리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경우에도 이미 제이미 올리버 같은 대중친화적인 요리사가 등장해 큰 인기를 구가한 적이 있었다. 다만 제이미 올리버가 요리 잘하는 ‘친구’ 같은 캐릭터였다면, 백종원은 요리를 가르쳐주는 ‘엄마’ 또는 ‘선생’ 같은 캐릭터라는 차이가 있다. 또한 “업소 레시피”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주는 백종원과 달리 제이미 올리버는 학교 급식에서 가공식품을 추방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백종원은 확실히 기존의 대중 친화적 요리사들과 뚜렷한 선을 긋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즐겨라!’라는 욕망의 해방을 설파하는 전도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 먹지 말아야했던 설탕이나, 다이어트를 위해 포기해야했던 진한 양념 맛을 찬양하는 그의 등장은 금기를 벗어난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하기에 족했다.
과연 이런 백종원의 특징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 한국이라는 장소성과 무관한 것일까. 더 정확하게 질문하자면, 현재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체제의 작동원리와 이 현상은 관계없는 것일까. 가만히 뜯어보면, 백종원의 ‘비법’이라는 것은 사실상 음식은 있되 요리사는 없는 프랜차이즈 외식산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랜차이즈 외식산업은 최소의 경비로 ‘먹을만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니라, 요리사라는 숙련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경영구조를 만들어낸다. 쇼핑몰이나 백화점에서 우리는 마치 옷 한 벌이나 구두 한 켤레를 고르듯이 ‘고향의 맛’과 ‘엄마 집밥’을 찾아서 구매한다. 우리 동네에 있는 한 프랜차이즈 국밥집은 ‘엄마의 손맛’도 모자라 ‘할머니의 원조 손맛’을 선전하기에 바쁘다. 이처럼 음식을 먹는 행위가 구매행위로 바뀐 상황에서 집밥이라는 것은 기호로만 기능할 뿐이다. 화려한 간판을 앞세운 프랜차이즈 식당들은 너도나도 전통과 원조를 내세우면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의 맛’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그런 맛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이런 공허한 음식문화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규범을 가르치려는 황교익과 달리, 백종원은 쿨하게 자본주의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선생’이다. 그에게 음식이란 것은 즐기기 위해 먹는 것이지 ‘엄마의 손맛’ 같은 기원적인 향수를 추구하는 제례행위가 아니다. 그에게 맛이란 것은 맥도날드처럼 평준화된 기호에 불과하다. ‘마리텔’의 백종원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고급진 요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시연하는 것이라면, ‘집밥 백선생’의 백종원은 외식업소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어떻게 집에서 해먹을 수 있을지 가르쳐준다. 김구라가 백종원에게 한신포차에서 먹던 그 통닭을 해달라고 조르는 장면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이다. 말하자면, 이제 집밥이라는 것은 평소 외식업소에서 먹던 그 음식을 저렴하게 집에서 해먹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이고, ‘백종원 현상’은 이렇게 바뀌어버린 집밥의 의미를 외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을 냉소하거나 긍정하면서 ‘엄마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집밥 따위는 없다고 선언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런 선언은 선언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수많은 프랜차이즈 외식업소가 있지만, 여전히 고유의 맛집을 찾아서 다니는 순례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굳이 ‘엄마의 손맛’을 느끼려면 그에 합당한 경제력을 갖추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백종원 현상’은 집밥의 부재를 보여준다기보다, 집밥의 계급화를 보여주는 사례에 가깝다. 예전 같으면 집에서 누구나 먹던 그 집밥마저도 경제력에 좌지우지되어야하는 현실이 집밥 논쟁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이제 황교익이 말하는 ‘엄마의 손맛’이 살아 있는 집밥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 이미 ‘평등의 고원'에 올라 안정적인 지위를 획득한 이들을 보증하는 장식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더 정직한 사태 인식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