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물론 내가 주목했던 것은 이런 영화적인 요소보다도,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희망과 구원이라는 다분히 관념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임모탄이나 퓨리오사, 또는 스플렌디드 같은 등장인물들의 이름들도 예사롭지 않다. <장미 이야기>나 <천로역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름 자체가 그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중세 알레고리 문학의 장치를 여기에서 읽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이런 까닭에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를 정치에 대한 알레고리 영화로 받아들이는 것은 크게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미래를 배경으로 차용한 중세적 판타지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중세적인 요소는 종말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설정이라는 혐의가 짙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형식 내적인 논리를 기술하는 것에 가깝다. 정치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이 영화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내포한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이 영화는 국가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점을 보여준다는 생각이다. 원래 <매드 맥스> 전편들은 국가의 부재 상황을 전제했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이야기했던 ‘늑대들의 정글’이 바로 <매드 맥스>의 무대였다. 전직 경찰 맥스는 ‘치안’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가체제의 붕괴를 상징했다. 그러나 이번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전편과 사뭇 다르게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는 국가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국가는 석유와 무기, 그리고 물이라는 희소적인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세 권력의 위계를 통해 구성되어 있다.
이 위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구원’이라는 종교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임모탄의 국가는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혈연적인 체제로서 전근대적인 종교국가를 암시한다. 이에 대조적으로 임모탄에 대항하는 퓨리오사는 근대적인 개인을 표상한다.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이 근대적인 개인은 여전히 희망을 품은 스플렌디드와 함께 임모탄의 국가를 탈주하지만, 또 다른 ‘구원’으로 굳게 믿었던 ‘어머니의 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절망에 빠진다. 남은 길은 160일 동안 소금 사막을 달리다가 절명하는 것. 하지만 이들을 설득해서 다시 국가로 돌아가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맥스인 것이고 이런 전개를 통해 영화는 극적으로 반전된다.
이 영화가 혁명에 대한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혁명의 모습은 ‘군중 없는 정치’이다. 국가의 무장인 ‘전쟁기계’를 탈취해서 국가를 전복시키는 퓨리오사가 60년대적인 게릴라 전사라면, 맥스는 보헤미안 혁명가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체 게바라처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뒤에 그는 떠난다. 맥스는 절단된 퓨리오사의 팔과 같은 잔여물이다. 그는 결코 국가로 수렴되지 않는다. 맥스는 이런 의미에서 '전쟁기계' 퓨리오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전쟁기계’는 국가에 속하지만 국가가 포섭할 수 없는 힘이다. 이 ‘전쟁기계’의 사령관이 여성으로 설정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이런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혁명의 문제는 여전히 ‘더 나은 엘리트 집단’이 군중을 계도하는 것이고, 이익집단들 사이의 충돌을 더 효율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는 혁명에 대한 자유주의적 환상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군중은 기형적이고 우매한 ‘떼거리’(mob)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분명 ‘혁명’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주체는 군중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영화가 정치에 대한 태도에서 명백한 한계를 드러낸다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군중의 ‘일반의지’가 혁명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가 결코 이해관계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진리를 암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맥스가 죽어가는 퓨리오사에게 피를 나눠주는 ‘우애’야말로 이런 정치의 실체를 우회적으로 증명하는 것일 테다. 물론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보여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이야말로 지금 현재 ‘그 시절’의 혁명이 어디에 멈춰 있는지를 명확하게 증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댓글 '3'
노바리
다만 이런 해석이나 의미 부여에 최소한의 개연성이 있어야겠죠. 영화에서 시타델 '윗쪽' 내부에서는 출산(육체적 아름다움의 유전자를 전제한 성 노예로서의 가임 여성과 이를 돕는), 그리고 대량의 모유 생산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여성만이 등장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형 전투트럭(영화에서는 워-릭이라고 하던가요)을 모는 전투 사령관인 퓨리오사는 시타델 체제가 요구하는 여성성과 상관없는, 시타델 내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존재 아닌가요? 그런 면에서 저도 이택광 선생님의 해석에 동의하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