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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인문학자의 빙하기

조회 수 316 추천 수 0 2018.12.21 12:00:25

'인문학자'라는 말은 참으로 이상한 한국식 명칭이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인문학을 일컬어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풀이해놓고 있으니 '인문학자'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자"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이 풀이에 따르면, "언어, 문학, 역사, 철학"을 모두 아울러 뭔가를 하고 있는 나도 '인문학자'임에 틀림없다.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지식>이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인문학이란 말이 일반 교양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렇듯 인문학과 일반 교양을 동일시하는 경향은 식민지 시기를 거쳐 해방 이후 '압축적인 경제 발전'이라고 불리는 박정희 체제의 근대화 과정에서 하나의 신화로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춘문예를 비롯해서 사상계에서 창비와 문지에 이르기까지 이 신화를 존속하게 만든 물적 토대는 그 무엇도 아닌 신문과 잡지였다.

이 신문과 잡지는 길게 보면 임마누엘 칸트 같은 유럽 지식인들이 '글로벌 정보'를 취득하던 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온 탐험가들을 만나는 한편으로 칸트가 당시의 신문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했다는 사실은 이른바 계몽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의 논리를 구성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실상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는 상당 부분 이런 지식생산과 유통체계의 붕괴에 따른 것이다.

빅토리아시대의 영국 작가들이나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미국 작가들과 프랑스 지식인들이 글만 쓰는 '전업작가'로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닌 신문과 잡지의 융성 덕분이었다. 헤밍웨이의 중편 <노인과 바다>는 당시 주간지인 <라이프>에 게재되어서 가판대에서 불티나게 팔렸고 작가에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라이프>는 1936년 '잡지왕' 헨리 루스가 창간한 포토저널리즘을 기치로 내세운 시사잡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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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들을 먹여살린 것은 신문과 잡지였다. 비록 식민지 시기였지만, 1930년대에 '문인논객'의 원고료는 120원에서 350원에 달했다. 당시 신문기자 월급이 70원이었고 의사 월급이 100원이었던 것에 비한다면, 정말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가 되는 것이 의사가 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득이었던 셈이다. 이런 물적 토대가 있었기에 인문학 또는 인문학자의 신화도 가능했다. 카프카처럼 공무원으로 복무하면서 글을 쓰는 비전업작가도 있었지만, 결국 그를 발굴하고 평가해서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는 작가로 만들어준 것은 근대의 신문과 잡지, 그리고 그에서 파생한 출판시장 덕분이었다. 

애석하게 오늘날 인문학에 황금기를 가져다줬던 전후의 풍요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억울하지만 냉정한 현실이다. 미디어의 중심이 신문과 잡지에서 인터넷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이제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글'은 계속 살아 있다. 이 사실이 인문학자의 명맥을 유지하게 만드는 근거일 뿐이다. 이 현실에 좌절할 수도 있겠지만, 빼박 인문학자라면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한때 대학이 인문학자의 온실 역할을 해줬지만, 신자유주의는 대학마저 교육소비자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기업으로 변신시켰다. 오늘날 대학은 기업과 같은 경영방식을 도입해서 무늬는 기업처럼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이윤과 무관한 이상한 기업으로 변화했다. 시장의 논리대로 한다면, 대학이라는 기업이 이윤을 올리려면 더 많은 소비자들을 매혹시켜야한다. 앞으로 3년 내에 닥쳐올 인구 감소는 이런 명령을 더욱 강화할 것이고, '질 높은 교육'보다 '학벌'이 고등교육의 목표인 한국 교육 시장의 특성상 대학 교육은 점점 '알쓸신잡' 같은 예능화의 길을 걸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여전히 한국 대학 교육의 문제는 좋은 교육을 받는 문제이라기보다 순위 높은 대학을 가는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대학들이 대학평가에 목을 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학벌의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한국 대학교육의 질이 나아질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학마저 인문학자의 온실이 되어줄 수 없는 빙하기라는 사실을 직시해야하겠다. 출판시장의 판도도 글을 써서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이 글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책을 쓰는 이유가 강연과 방송 출연이 되어 버린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방송에서 나를 봤다는 분은 많이 만났지만, 내 책을 읽었다는 분을 거의 만나 본 적이 없다. 이런 조건에서 원고료로 생계를 잇겠다는 '전업작가'는 쥬라기의 공룡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을까. 

'전업작가'가 될 수 없는 인문학자라면, 결국 국가나 조직에서 '녹'을 받아야하는 '비루한 월급쟁이'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런 인문학자의 모습은 작고한 김윤식 선생이 평생 마음 깊이 간직했던 그 낭만적 지식인과 달라도 한참 다른 상일 수밖에 없다. 하여 지금 인문학자의 처지는, 패트론의 지원 없이 생존할 수 없었던, 그렇기에 더욱 진리와 단독으로 대결할 수 있었던 중세의 학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단,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필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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