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미투(#MeToo)라는 말이 처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폭발적인 운동으로 번져갈 것이라는 예상을 누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1월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들불처럼 퍼져나간 미투는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누구는 이렇게 한국 사회에 성범죄가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터져야할 문제가 지금에야 터진 것이라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 특히 남성이 저지르는 성 관련 범죄는 거의 먼지처럼 일상에 퍼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여성들은 억압적인 젠더 위계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제대로 알리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설령 용기를 내어 문제를 알리더라도 가해자인 남성은 처벌 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인 여성이 고스란히 모든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는 불합리한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미투가 폭발력을 보이는 까닭은 이처럼 남녀라는 젠더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권력 관계를 통해 억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주목해야할 문제는 바로 이 한국적인 미투의 특이성이다. 미투는 미국에서 시작한 것이지만,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단순하게 특정 개인의 성범죄를 폭로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의 젠더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성의 억압 문제가 보편 인권의 문제와 결합했다는 점에서 한국적인 미투의 폭발력은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덧붙여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발언하지 못하고 인내해왔던 불평등의 구조가 존재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적인 미투에서 특징적인 양상은 특유의 정치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미투의 정치성이 아이러니하게 진보라고 자임해왔던 세력에게 더 큰 타격을 주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김어준처럼 진보에 대한 ‘공작’이라고 모종의 음모를 내세우는 이도 있다. 그러나 미투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한다는 발상은 이 운동에 내재한 정치성의 본질을 간과한 결과일 뿐이다. 미투는 특정 진영에게 유리한 사태라기보다 기존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대중의 분출이라고 봐야한다. 기존의 정상성 범주를 뒤흔드는 데모스(demos)의 정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진보, 그것도 리버럴이나 신좌파가 한국에서 미투의 대상으로 등장했을까. 

지난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기념 토론회에 토론자로 참가한 민주당 비서관 이보라는 “오히려 진보 진영에서 피해 고발이 이어지는 건, 피해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여건이 ‘그나마’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런 발언은 미투라는 데모스의 분출을 국회라는 제도 내로 안착시키기 위한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하다. 그러나 미투 운동을 보편적인 여성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한다면 이런 발언의 한계 너머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최근 기고한 글에서 1968년의 성해방과 2018년의 미투 운동을 대비시키고 있다. 지젝은 이 지점에서 미국의 미투 운동이 보편 정치적인 문제로 확장되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미투 운동은 이런 지젝의 기우를 일소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일단 한국의 미투 운동은 단순하게 특정인의 성범죄를 폭로하고 고발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근본적인 차원에 놓인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1960년대 이후 한국에 ‘선진 문화’의 일환이라는 명목으로 수입되었던 성해방 담론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이 성해방 담론의 기저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성해방을 사회해방과 동일시했던 프로이트주의적 좌파 이론이다. 한국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딱히 프로이트주의라는 자의식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이론을 통속적인 담론으로 수용함으로써 성적인 해방을 사회적 규범을 깨는 파격의 퍼포먼스로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미투를 통해 폭로된 몇몇 양상들을 보면 이런 추측은 확실해진다. 이윤택의 경우, 기성 시스템에 저항하기 위해 연극을 택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런 운동의 기획이 성범죄라는 문제에 관대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떤 시인은 이런 성적인 행위를 ‘파격의 용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빈민운동가로 이름이 알려진 한 목사는 성욕을 억제하지 못해서 충동적인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사과했다. 하일지는 자신의 성추행을 일컬어 “유럽이라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변명했다. 성적인 문제에 관대한 태도야말로 ‘선진 문화’라는 논리이다. 서로 다른 경우들이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일탈의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바 진보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이들이 성범죄에 대해 일정하게 공유하는 관점이 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사회해방과 성해방을 동일시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범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본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은 이런 진보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한국은 1980년대 초기 학생운동권 일부가 이런 경향성을 내보였고 이에 대한 반동이 그 유명한 김영환의 <강철서신>이었다. 김영환은 이 희대의 문건에서 다른 정파의 성적 문란을 비판하고 ‘품성론’을 제시해서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은 ‘품성론’과 같은 성적 문란에 대한 반동으로 치부해버릴 수 없는 측면을 가진다. 이 운동은 사회해방과 성해방을 동일시했던 프로이트주의적 좌파담론에서 정작 ‘여성’을 비롯한 ‘소수약자’가 소외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진보주의에서 소외되어 있던 존재, ‘여성’이 발언하기 시작하면서 미투 운동이 폭발력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소외되어 있었다는 말은 대상 또는 사물로 취급되었다는 뜻이다. 일련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른바 남성 진보주의자들의 입장 표명이나 사과 내용을 보면 자신의 성욕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취급하거나 더 나아가서 사회적인 해방을 도모하는 파격의 퍼포먼스로 간주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남성의 성욕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는 이런 관점은 상당히 뿌리 깊은 내력을 가지고 있다. 근대의 도래와 함께 성욕의 분출은 종종 기존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저항의 에너지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낭만주의는 바로 이런 이념을 근거로 출현한 사상이었다. 한때 일본에서 풍미했고 한국의 에로영화에 큰 영향을 미친 로망 포르노 역시 이런 이념적인 배경에서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로망 포르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젠더의 문제의식을 한국의 에로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처럼, 낭만주의와 60년대 성해방 담론은 한국에서 오히려 남성의 성욕을 ‘자연스러운 것’ 또는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기존의 남성 지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성해방에 부정적이거나 더 나아거서 해방의 문제에 내재한 여성의 소외를 지적하면 ‘선진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촌스러운 태도’라고 비난을 일삼는 일도 일어난 것이다. 

과거 나꼼수 비키니 사건이 드러낸 것도 바로 이런 문제였다. 진보주의를 표방한 매체에서 여기에 반발하는 여성의 항의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복기해보면, 이들 역시 성욕에 대한 ‘쿨한 태도’를 진보주의의 일부로 간주하고 소외된 여성의 목소리를 진보적 가치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90년대 대중문화의 본격화와 맞물린 이런 흐름은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게 된 자유주의적 경향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일정한 시차를 두고 되풀이되고 있는 담론의 지체 현상은 불균형한 모더니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성’은 자연의 일부이거나 아니면 해방을 감당하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물에 지나지 않는다. 성욕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여성’은 성해방을 통해 사회해방으로 나아가야하는 열등한 존재에 불과하다. 여성이라면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었을 여성비하 또는 여성혐오는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토대에서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이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비정상적인 존재’로서 조직의 분위기를 깨는 잡음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80년대가 지나고 90년대에 이른바 68년 이후 프랑스철학을 비롯한 다양한 이론들이 봇물처럼 수입되었지만, 정작 이런 진보주의의 근본 문제에 균열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68년 이후 이론들이야말로 성해방과 사회해방을 동일시하는 프로이트주의적 진보주의에 대한 비판을 내재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런 이론들은 진보주의를 화려하게 치장해준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미투 운동은 이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의 정치성을 한국 사회에 각인시키는 계기라고 볼 수 있다. 젠더라는 인식론적 토대를 통해 기존의 진보주의를 재구성할 필요성이 여기에서 제기되는 셈이다. 성해방과 사회해방의 문제가 동일하지 않다는 성찰은 이미 프로이트주의적 진보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미투 운동은 두 해방의 문제에 가로놓인 균열을 실천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공작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또 다른 오류를 되풀이하는 일이다. 특정 ‘진영’을 방어하기 위해 운동에 저항하는 것은 미투 운동의 긍정성을 왜곡하고 축소할 수 있다. 미투 운동은 기존의 도덕을 허물고 새로운 윤리를 요청하는 아우성이다. 이것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이 흐름을 돌려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 사회는 미투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임에 틀림없다. 

미투 운동은 특정한 세력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기존의 체제에서 인내할 수 없는 개개인들이 목소리를 낸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목소리를 내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진정한 ‘용기’였을 것이다. 그 방법이 폭로의 방식을 취한 것은 분명 언론의 선정성에 편승한 것이지만, 또한 테리 이글턴이 일찍이 지적했듯이, 황색저널리즘을 떠받치는 ‘국민의 알권리’라는 자유주의적 가치의 역전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투 운동에서 ‘특종경쟁’이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시장의 상업성과 언론의 투명성이 일정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난 촛불에 이어 이번 미투의 경우에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가 후진적이어서 발생했다기보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시장주의의 극단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미투 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가 글로벌 경제에 편입되면서 이루어진 미국적 가치의 대중화가 이번 미투 운동을 가능하게 만든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은 언제나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가고자 한다. 이데올로기가 누락한 진리를 끊임없이 제기함으로써, 더 나아가서 자유주의적 가치를 진정 자유주의적으로 실현하려고 함으로써, 운동은 이데올로기를 해체한다. 

미투 운동은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진보주의를 지배하는 가치들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효과를 초래하고 있다. 진보주의가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의 문제를 불평등의 관점에서 제기했던 것처럼, 그 진보의 가치를 체득한 여성들도 진보주의에 내재한 남녀 불평등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제기를 여성의 권익을 신장하고 소수약자의 문제를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법적이고 제도적인 균형 맞추기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여성을 대상화하고 사물화해온 진보주의의 관점들을 재구성하는 것도 응당 필요하다. 이 재구성은 사법적이고 제도적인 개선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지만, 또한 그 수준을 넘어선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혁신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정치적 실천의 문제를 젠더라는 근본적인 관점에서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인종과 계급, 그리고 민족이 지금까지 한국 진보주의의 논의에서 중요한 개념이었다고 한다면, 여기에 이제 젠더가 함께 놓여야한다는 것이 미투 운동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일전에 철학자 강신주는 페미니즘 이론을 일컬어 아직 덜 완성된 이론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런 발언 역시 철학사에 대한 편향적 인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근대 철학의 시조로 불리는 데카르트나 칸트의 서신들은 철학사 자체가 여성이라는 ‘숨은 독자’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하이데거와 아렌트는 어떻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어떤가. 여성이 없었다면 이들이 과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철학자일 수 있을까. 버지니아 울프 역시 ‘여류작가’라는 타이틀에 갇혀 있지 않고 끊임없이 당대의 남성 평론가들과 젠더적인 문제의식으로 대결을 펼쳤다. 근대에 이르러 여성들은 비로소 소설과 에세이라는 무기로 당당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감안한다면 페미니즘을 여전히 미숙한 이론으로 치부한다는 것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다. 페미니즘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흐름에서 한 축을 담당해온 사상이었던 셈이다. 

미투 운동 역시 진보주의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실현되어온 진보주의적 의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여성들이 더 이상 불평등 구조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사건으로 보아야한다. 따라서 이 운동이야말로 진보의 의제인 것이고, 때문에 보수에게 무관심한 문제인 것이다. 운동은 결국 인식과 관심의 외화이다. 인식과 관심이 없다면, 그리고 이것들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지지자들이 없다면 운동은 불가능하다. 미투 운동은 진보주의적 운동이다. 보수가 노동자의 계급해방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마찬가지로 여성해방 역시 그들에게 별 관심 없는 사안이다. 진영으로 논리로 본다면 이 폭로의 양상은 불균형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실은 또한 미투 운동이야말로 한국의 진보주의를 거듭 태어나게 만들 계기라는 것을 웅변해준다. 이제 바야흐로 새로운 출발의 지점에 와 있을 뿐이다. 이 미투 운동의 분출을 한국의 진보주의가 어떻게 내화하고 자기 혁신의 계기로 삼는지 여부에 진보의 운명이 걸려 있을 것이다. 

이 미투 운동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촛불에서 재점화되었던 데모스 정치의 귀환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데모스의 출현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가장 강렬하고 폭발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이미 이 사실은 2008년부터 확인되었던 내용이다. 거의 모든 진보적 의제가 퇴행하고 있는 요즘 미투 운동은 새로운 정치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 운동이 모든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을 대변하는 한, 지극히 정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00503885_20180308.jpg

*월간 <문학사상> 기고를 수정보완하여 게재함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36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애시드 공산주의까지: 마크 피셔의 문화비평 file [2] 2020-12-18 321
35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보다 file 2020-10-16 518
34 순수한 상호공생의 이론적 근거: 슬라보예 지젝과 한병철의 논쟁에 대해 file 2020-04-25 1799
33 조국 말고 검찰에 요구해야할 것 file 2019-09-07 974
32 “기생충”을 보다 file [2] 2019-07-04 3863
31 예술과 증언 2019-03-24 6029
30 박항서 매직 file 2019-02-22 328
29 인문학자의 빙하기 file 2018-12-21 316
28 랑시에르를 만나다 file [1] 2018-04-23 2752
» 미투 운동과 한국의 진보주의 file 2018-03-17 4231
26 비트코인 신드롬 file [1] 2018-01-27 3106
25 자코메티 file 2017-12-09 1917
24 청문회와 '문자폭탄' file 2017-07-20 1244
23 탄핵, 잔치는 끝났다 file [6] 2017-04-05 14172
22 한병철과 헬조선 file [3] 2017-03-21 4725
21 차기 대통령의 딜레마: '큰 정치'의 전망을 기대한다 file [2] 2017-02-05 6080
20 트럼프와 촛불, 두 개의 공화국 file [4] 2017-01-30 1503
19 이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트럼프 현상을 다시 생각하자 [2] 2016-12-25 1929
18 거기 '내가 있었다': 소셜미디어와 체감의 정치 file [1] 2016-11-28 925
17 100만 인파의 의미 file 2016-11-16 4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