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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자코메티

조회 수 1917 추천 수 0 2017.12.09 11: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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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에도 관심 있지만, 본능적으로 진리에 더 관심이 많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말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작업을 하면 할수록 더 다르게 본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그러므로 ’다르게 보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자코메티는 ”미술은 보기의 일종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예술은 어떤 신비감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얼마 전 도쿄에 가서 봤던 자코메티 전은 띄엄띄엄 마주쳤던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을 일별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전시를 둘러보면서 종종 ‘현대인의 고독’을 표현했다는 말로 치장되는 그의 조각상은 막연한 상실감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의 조각상이 보여주는 ‘고독’은 ‘불행한 인간’을 묘사한다기보다 오히려 키에르케고어나 베케트가 말하는 ‘신이 없는 사태’를 그리는 것에 가깝다. 사르트르는 이런 자코메티의 메시지를 일컬어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불렀다. 예술이 기원적으로 전제하고 있던 창작의 신비를 통쾌하게 해체하는 작가가 바로 자코메티라는 뜻이다. 

자코메티의 조각상은 ‘인간 존재’를 보여준다기보다, 역설적으로 그 인간이라는 존재가 ‘보는 것’ 이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말한다. 이 ‘보는 것’은 우발적인 마주침이다. 내가 본 것은 나의 시선에 잡힌 한 지점일 뿐이다. 자코메티의 조각상은 이런 생각에 천착한다. 가늘고 긴 인간의 육신은 보는 시선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그의 조각상은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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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가 말하듯이, 자코메티는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실존의 구조를 다루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가 조각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말 그대로 ‘진리’였던 것 같다. 도대체 이 ‘진리’는 무엇일까. 그의 조각상은 시선의 잉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가느다란 인간의 신체나 일그러진 두상은 시선이 만들어내는 조형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물체인 것이다. 단단한 금속은 물렁물렁한 밀가루 반죽처럼 그 시선의 가격을 받고 제멋대로 찌그러지고 납작해지고 가느다랗게 변한다. 


서로 다른 ‘보기’의 교차점에 남겨진 잔여물이 바로 자코메티의 조각상이다. 달리 말하면, 시선이라는 주형에 딱 들어맞지 않고 삐져나온 비재현적인 것들이 바로 그의 조각상이다.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조각상에서 절대적인 타자성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의 수동성을 보았지만, 나는 반대로 타자성에 포함되지 못하고 빠져나온 잉여적인 것을 보았다. 이 잉여적인 것이 곧 ‘실재’이자 ‘진리’일 것이다. 타자를 통해 만들어졌지만 타자에게 저항하는 것, 다시 말해서 타자에 누락되고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코메티의 조각상은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기보다, 그 인간으로 포섭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것에 대한 증거물이다. 구조에 복종해야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결코 구조에 집어넣을 수 없는, 구조의 법칙으로 교환 불가능한 것에 대해 자코메티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한국에서 자코메티의 조각상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회사와 일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일상이야말로 교환 가능한 나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러나 그 교환 가능한 나는 결코 내 자신에 속한다기보다 구조에 속하는 것이다. 나는 회사이고 또한 동시에 거기에서 맡은 일이다. 이런 나는 ‘진짜 나’라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 모두가 퇴근 시간과 주말만을 기다리는 까닭이 이 때문이다. ‘진짜 나’가 회사와 일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회사와 일을 때려치우려고 한다. 이렇게 일상을 벗어나려는 ‘진짜 나’를 지워버린 것이 정상적인 나인 셈이다. 자코메티의 조각상은 그 정상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다른 나를 보라고 주문한다. ‘나를 다르게 보는 법’을 그의 조각상은 넌지시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p12-tokyo-giacometti-a-2017061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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