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트럼프도 박근혜처럼 임기 중에 탄핵당했으면 좋겠다.” 힐러리 지지자였던 미국의 지인이 내게 보낸 메시지이다. 그만큼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많은 힐러리 지지자들에게 충격을 안긴 사건이었다. 트럼프의 당선이 한반도의 정세에 미칠 영향도 만만치 않을 것이지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역시 트럼프 당선 못지않게 극적인 것이다.
이 상황은 어떻게 극적인가? 2012년을 상기해보자. 박근혜 정부의 출현은 보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상화’를 의미했다. 이 ‘정상화’를 다른 용어로 번역하면 ‘정치의 종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이런 생각을 뒤집는 ‘정치의 귀환’이라는 사건이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정당 활동조차도 어떤 이들에게는 ‘쓸모없는 정치’로 비쳤다. 이런 생각의 근거는 무엇일까. 정치와 경제를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후자를 위해서 전자를 제거 또는 안정화해야 한다는 믿음은 고전적 자유주의 이래로 일관된 부르주아의 정치철학이었다.
데이비드 흄 같은 도덕철학자들조차도 국가 간의 분쟁을 억제하기 위해 무역을 장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무엇보다도 이런 개념이 하나의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여진 계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케인즈주의의 득세 덕분일 것이다. 케인즈야말로 평화의 조건으로 경제발전을 정식화한 장본인이다. 많은 오해와 달리 이런 케인즈주의적 믿음은 그와 정반대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신자유주의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 경제성장의 방식에 이견이 있을 뿐, 이들 자유주의 경제학들은 경제발전을 평화 유지의 필요조건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다.
경제민주화와 복지제도 구축이 핵심적인 의제였던 2012년에 박근혜라는 대통령 후보는 ‘카리스마 있는 인물’로 비쳐졌다. 박근혜 뒤에 최순실이라는 숨은 실세가 있었다는 사실이 당시에 폭로됐다면 박근혜라는 개인은 대통령의 자리에 가 있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시민들’이 분노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리버럴을 자처하는 미국 지인은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 ‘시민’의 열정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광화문 네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시민’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다시 말해서 전후 자유주의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87년 체제는 80년대의 급진주의를 자유주의로 대체하는 과정이었다. 이 자유주의의 이념을 신봉하는 이들이 바로 한국의 중간계급이다. 이 중간계급이야말로 한국에서 민주화를 추동했다. 이 중간계급을 만들어낸 구조적인 변동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박정희 체제와 그 뒤를 이은 군사독재의 경제개발이었다.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한국이 그토록 신속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독재를 거쳤기 때문이다. 고질적인 정경유착은 독재를 통한 산업화의 결과물이다. 독재가 직면한 민주화의 요구는 87년 체제로 고착됐고 민주화가 열어놓은 시장주의의 길은 80년대 급진이념으로 탄생했던 노동계급을 효과적으로 중간계급 소비자로 전환시켰다. 이들이 이제 스스로 ‘시민’이라고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광화문 광장에 나선 것이다. 경제발전이 평화의 전제조건이라는 케인즈의 정언명령은 이렇게 한국에서 훌륭하게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미국 지인이 부러워할 만한 ‘시민’의 저항은 이런 과거를 거쳐 형성된 87년 체제의 귀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의 ‘시민’에게 민주주의는 자명한 것이라기보다 이념적인 것에 가깝다는 뜻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를 단순히 제도적인 절차로 한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후 세계체제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제국의 질서는 민주주의라는 이념적 기제를 중심으로 구축되었고, 그 제도적인 실현을 "미국적 자유민주주의의 전지구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중화제국이 붕괴한 뒤에도 조선왕조가 여전히 "새로운 중화주의"를 내세우면서 이념적 본래성을 추구했던 것처럼, 제국의 중심부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지금 한국과 같은 전후 질서의 주변부 국가에서 그 이념은 '시민적 주체'를 재생산하는 이념적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 백인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이 위협받는 자신들의 처지를 보장받기 위해 ‘백인의 공화국’을 이야기하는 트럼프를 선택했던 것처럼, 대다수 도시중간계급을 자처하는 한국의 ‘시민들’ 역시 무너져 내린 공화국의 이상을 바로잡기 위해 촛불을 밝힌 것이다. 동기는 같지만 결과는 일정하게 다르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이 지점에서 제기돼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남신문> 기고를 보완해서 게재함
댓글 '4'
ㅋㅌㅊㅍ
"모든것을 한 시각에서 묶으려 하지마라." -> 오히려 본문은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라면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지 질문을 던지고 있음.
"이유가 있으니 역사는 움직이는거다. 그게 그동안 인류가 보여준 행보였다. 모든것을 한 시각에서 묶으려 하지마라. 좁은 시각이다. 세상은 변하고 100년 뒤 이념과 현상은 또 달라져 있을거다." -> 마치 자기가 글쓴이의 오류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가르치는 투로 말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글쓴이에게 "똑똑한척 하지마라" 라고 훈계질. 뭐 하자는 건지?
"탁상에 앉아서 이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며 똑똑한척 하지마라." -> 자기도 자기 나름의 이론으로 (간이 그동안 보여줬던 인류의 역사는 그동안 모두가 행복하길 원하며 다퉈왔고 진화해 왔다. [...] 공평하고 싶었고 각자 행복하고 싶었기에 왕권중심에서 시민혁명이 발생하기도 했고) 세상을 이해하고 있으면서 왜 다른 사람은 이론으로 세상을 이해하지 말라고 하는 건지. 내 이론은 이론이 아니라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