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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트럼프가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인’의 타락에서 기인했다기보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가치’를 만들어낸 전후 자유주의가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적인 배경으로 인해 트럼프 정권의 성공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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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는 미디어의 생리를 정확히 꿰뚫어 오바마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기층의 불만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경악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만큼 미국답지 않은 선택이라는 뜻일 것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 ‘미국다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미국다움’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생한 새로운 자유주의, 뉴리버럴리즘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뉴리버럴리즘은 보통 신 자유주의로 번역되는 네오리버럴리즘과 다른 것이다. 뉴리버럴리즘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수용한 새로운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에 따르면, 18세기 이래로 유럽에서 시작된 자유주의의 ‘통치 기술’은 20세기에 이르러 난관에 봉착한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대응책들이 겉으로는 자유주의를 표방했지만, 본질적으로 그 가치에 위배되는 실천을 행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최소 정부’를 주장하면서 시장의 진리를 이야기했던 원칙적인 자유주의는 퇴조하고, 뉴딜과 같은 복지정책이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복지정책의 명분은 실업으로 인한 가난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가져가려는 이런 경향이 새로운 자유주의를 미국적인 가치의 정수로 받아들여지게 만든 것이다.

트럼프의 출현 예견한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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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 중 하나인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 그는 자신이 제작한 몇몇 다큐멘터리를 통해 트럼프의 출현을 예견했다.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좌파는 이런 뉴리버럴리스트, 다시 말해서 전후에 형성된 새로운 자유주의자들이고, 우파는 공화주의자들로 분류한다. 줄여서 리버럴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60년대 반문화(counter culture)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는 이런 새로운 자유주의자들의 감수성을 표현한 대표작으로, 이른바 오늘날 도시에서 목격할 수 있는 힙스터 문화의 원조에 해당한다. 이 뉴리버럴리즘, 또는 새로운 자유주의를 나는 전후 자유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본다.

이 전후 자유주의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앞서 언급한 뉴딜 정책으로 대표되는 복지국가였다.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국가주도의 공공사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진행되던 때였다. 이 당시의 분위기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식코>와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에 잘 드러나 있다. 특히 무어 감독은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에서 전후 복지국가에서 가능했던 미국 노동자들의 경제수준을 자전적인 이야기를 통해 보여줬다. 중산층 수준의 풍요로움을 즐기던 노동자들은 1970년대 이후 미국 경제의 쇠퇴에 더불어 급속하게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트럼프의 출현을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한때 잘나갔던 디트로이트가 폐허가 되어 있는 광경을 쓸쓸히 비춘다. 디트로이트는 트럼프 당선에 중요한 역할을 한 러스트 벨트의 한 도시이다. 한국의 울산 같은 도시였고, ‘미드 웨스트 문화’를 대표하던 진보적인 고장이었지만, 이제 트럼프 지지자들이 넘쳐나면서 ‘꼴통’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과 더 많은 것>의 저자인 데이빗 포스터 월리스도 지적하듯이, 미 대륙에서 중서부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교양 있고 교육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런 지역이 순식간에 트럼프라는 ‘악당’의 손아귀로 떨어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한때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한 트럼프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기 전부터 막말과 기행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가 된 뒤에도 재산이 너무 많아서 재산 공개 양식에 숫자를 기입하는 칸이 좁다고 위악을 떨기도 했는데, 굳이 표현하자면 ‘졸부’라는 용어 한마디로 그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트럼프가 미국 바깥에 나가서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그가 돈을 번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다. 또한 그가 부를 축적한 방식 역시 전형적인 미국식이었다.

트럼프 자신은 그렇게 유능한 사업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하는 전략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피자나 햄버거 광고에 등장하는 방식으로 이름값을 올렸다. 대선 캠페인에서 보여준 파격적인 행보는 이런 경험에서 얻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트럼프의 인기를 끌어올려준 것은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이었다. 그가 진행해서 화제를 모았던 <어프렌티스십>은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프로그램이다.

트럼프는 부동산 재벌로 명성을 얻었지만, 사실상 연예사업을 통해 대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미디어가 만들어준 명사인 셈이다. 트럼프는 이런 미디어의 생리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직설적인 화법과 파격적인 행보로 오바마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기층의 불만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트럼프가 쏟아낸 인종주의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발언들은 이런 결집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트럼프에게 투표한 이들이 모두 인종주의자이거나 여성혐오주의자들은 아닐 것이다. 바꿔서 말하면 유권자들이 트럼프의 인종주의와 여성혐오 때문에 표를 준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무엇을 바라고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일까. 이들이 원했던 것은 과거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전후 복지국가에서 누렸던 중간계급 수준의 삶을 트럼프가 만들어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트럼프의 구호는 “다시 한 번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자”이다. 새삼스러운 슬로건은 아니다. 이미 로널드 레이건이 내걸었던 기치였다. 당시에도 미국은 경제적 침체의 원인을 일본과 아시아 국가들에 돌리면서 새로운 글로벌 자본주의를 위한 명분을 만들고자 했다.

세계 인구 10%의 과두정 멤버들의 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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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6월 영국을 국빈 방문했던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왼쪽)이 총리 관저 앞에서 감사 연설을 하는 모습. 오른쪽 마거릿 대처 영 총리가 그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라고 불려온 이 글로벌 자본주의의 진행은 전무후무만 결과를 낳았다. 세계는 완전히 다른 ‘전일체’로 만들어졌다. 지상의 부 46%가 지구 전체 인구의 1%에게 몰리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더 범위를 크게 잡으면 세계 인구의 10%가 전체 부의 86%를 가지고 있는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당연히 미 대선에 출마한 두 명의 후보도 이 범위 안에 들어갈 것이다. 그 외에 이른바 중간계급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지구 전체 인구의 40%로 부의 15%를 잘게 쪼개어 나눠가지고 있다. 이 중간계급이야말로 의회정치와 민주주의의 지지자들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유권자들은 왜 자신들과 부의 규모에서 비교 불가한 이들을 대표자로 선출하려는 것일까. 대체로 대의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체제는 권력 엘리트의 과두정을 마치 민주주의의 정수인 것처럼 포장한다.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사실 정치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인이라는 범주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들은 나름대로 ‘전문가’이다. 이 ‘전문가 집단’이 대변하는 것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이른바 ‘민의’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정치인 자신들도 나눠가지고 있는 기득권(establishment)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오웬 존스는 <기득권층>이라는 책에서 이들의 출발점을 전후 스위스에서 이루어진 ‘다보스 회의’에서 찾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른바 ‘다보스 계급’의 형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때에도 이들은 다보스에 모여서 대책을 숙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에 가장 많이 등장한 표현이 ‘자본주의는 끝났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기득권층이 모여서 정작 선언한 것이 자본주의의 종언이었다는 것은 상당히 징후적이다. 이런 발화는 말 그대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자본주의도 충분히 폐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존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들 세계 인구 10%의 과두정 멤버들은 실질적인 사회주의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들은 자기들끼리 이미 사회주의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다보스 계급’은 유력 정치인들, 은행가들, 정보산업기술로 부를 축적한 갑부들, 할리우드 스타들이 망라하고 있는데, 이 계급이야말로 ‘성공한 명사들의 멤버십’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멤버십에 초대받는 것이 곧 10%의 과두정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다는 의미인 셈이다. 그러나 이 10%의 자격을 규정하는 그 성공은 살아갈수록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 무기력한 장삼이사들, 자본주의가 최종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선언한 소외된 이들의 희생과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런 희생이 자격을 박탈당한 장삼이사들의 저항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을 개인의 무능함과 불성실함으로 치환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계발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개념화해온 ‘평등의 고원’을 작동하게 만드는 원리다. 평등이라는 이념은 내재적 위계를 통해 실현된다. 고원 위에 올라온 이들은 고원 아래에 머물고 있는 이들과 자신들 사이에 조성되는 불평등의 관계에 대해 문제삼지 않는다. 이들이 문제삼는 것은 정확하게 고원 위에 올라와 있는 다른 이들과 자신의 관계에서 불거지는 불평등이다. 과두정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심리상태 때문이다. 바디우가 언급한 전체 부의 15%를 나누어 가진 세계 인구 40%의 중간계급은 이런 심리에서 의회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이른바 ‘시민가치’를 공유한다. 40%에 들어야 한다는 강박을 모두에게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자기통치를 지상과업으로 삼은 자유주의의 이상은 이렇게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괴와 복수의 욕망이 낳은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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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미국의 중간계급 유권자가 트럼프를 지지한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폴 크루그먼 같은 경제학자가 주장하는 ‘미국의 가치’라는 것은 사실 알고 보면, 이런 미국 중간계급의 정체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크루그먼에게 충격을 안긴 것은 ‘레드 넥’이라고 불리는 ‘촌것들’의 트럼프 지지가 아니라 ‘미국의 가치’를 지탱해왔다고 믿었던 중간계급의 배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루그먼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파시즘의 태동을 추동하고 권좌에 오르게 만든 주역들은 그 누구도 아닌 중간계급이었다. 중간계급은 사회적으로 중간에 위치한 계급이다. 경제적으로 중간이면서 동시에 부르주아적인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바디우가 이야기하는 오늘날 목격할 수 있는 세 가지 주체성 중에서 ‘서구의 주체성’을 체현하고 있는 당사자가 바로 중간계급이다. 당연히 인구통계로 본다면 이 중간계급의 분포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 더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 ‘서구의 주체성’은 ‘착한 유럽과 미국에 거주하는 이들만을 인류’로 은연중에 확신하고 있다. 서구가 곧 인류라는 이런 계몽주의적 태도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규범으로 바디우에 따르면 2015년 11월 13일 파리 테러가 일어났을 때, 미 대통령 오바마가 했던 연설에서 이런 논리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연설에서 서구는 문명이고 이 서구를 위협하는 모든 것은 미개와 야만으로 도식화돼 있다. ‘서구의 주체성’과 변별되는 또 다른 주체성은 서구 국가에 이주한 이민자들이나, 비 서구국가에 비율적으로 더 많이 분포되어 있는 ‘서구적 욕망의 주체성’이다. 이 ‘서구적 욕망의 주체성’은 서구의 것을 사랑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린다. 유럽으로 오고자 하는 난민이나 헬조선을 탈출해서 서구에 가서 살고 싶어하는 이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중간계급이 되고 싶지만, 될 수 있는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이렇게 ‘서구적 욕망의 주체성’이 되어 꿈을 꿀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의 주체성은 두 주체성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허무주의적 주체성’이다. 바디우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주체성은 자본주의를 통해 ‘무’로 판명 난 인구를 통해 출현한다. 소비자도 노동자도 될 수 없는 무용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바로 이들이다. 이런 주체성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극단주의이다. 떠날 수도 없고 모방할 수도 없는 곤경이 만들어낸 이 주체성은 파괴와 복수의 욕망을 발산할 수밖에 없다. 크루그먼 같은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파괴와 복수의 욕망 자체를 범죄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쉽게 단죄하곤 하지만, 이 주체성은 서구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저항하는 것을 정체성으로 삼고 있는 실체적 존재이다.

‘미국의 가치’는 전후 체제의 수립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러스트 벨트’는 당시 미국 경제성장을 추동하는 엔진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런 미국식 경제 성장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생산수단을 소유하면서 제 3세계의 값싼 노동력으로 상품을 생산해서 수익을 올리는 구조가 어려워진 것이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초기 축적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지리적 차이를 소멸시켰다.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아프리카에 있는 소비자가 뉴욕 하이스트리트에 있는 상점에서 물건을 구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직구’는 바로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현상이다. 아마존닷컴의 출현은 시작에 불과했다. 스마트폰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형성된 글로벌 물류를 개별적 단위로 분산시키면서 결집하게 만드는 거대한 기계적 총체가 되었다. 이 기계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프로그램처럼 개별 주체성을 형성하는 내재적 논리로 전환되었다.

문제는 이런 주체성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주체성이다. 바로 허무주의적 주체성이 그것인데, 이런 주체성이 지향하는 것은 체제에 대한 반대이지만, 그렇다고 체제 자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내포하진 않는다. 다만 허무주의적 주체성은 억압된 서구적 욕망의 반동으로 정확하게 자신의 욕망이 대상으로 삼았던 것을 공격한다. 자살 테러는 이런 공격의 형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주체성의 발현을 파시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시즘은 결코 정신 나간 이들이 마약에 취해 벌이는 일탈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내재해 있다. 파시즘이 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시즘은 정치적인 경향성으로 봤을 때, 극우주의의 일종이다. 극우주의는 반공주의와 권위주의를 골자로 하는 역사적인 정치사상이다. 역사적이지만 여전히 현재적이라는 의미에서 극우주의는 트럼프 현상을 비롯해서 프랑스와 독일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듯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파시즘의 대명사격인 나치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유태인의 유물론이라고 동시에 비판하면서 주인 인종으로서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사실이 전하는 교훈은 중대하다. 왜냐하면 파시즘의 주장은 자본주의에 소외되고 억압된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삶은 ‘민족’이라는 절대적인 상상의 이미지를 통해 실체화하는 것이다. 트럼프 역시 자신의 지지세를 모을 때, 사용했던 수사가 “잃어버린 백인의 미국을 되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말에서 트럼프가 전제하는 미국은 ‘백인의 미국’이었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중간계급 이민자들에게도 이런 수사는 먹혀들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메리칸 드림은 다른 무엇도 아닌 ‘서구적 욕망의 주체성’을 작동하게 만드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타고 흐르는 강화된 소비주의의 이미지는 이런 ‘서구적 욕망의 주체성’에게 더욱 강한 좌절감과 시기심을 안겨주고 급기야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 분노가 파시즘적인 욕망의 엔진이라고 하겠다.

‘서구적 욕망의 주체성’을 체현한 이들은 결코 자신을 백인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프란츠 파농이 언급했듯이, “백인 노예는 인간이 되고자 하지만, 흑인 노예는 백인이 되고자 한다.” 한때 김연아 선수가 승승장구할 때, 국내 언론에 나온 보도 중에 ‘서구 선수에 버금가는 신체적 조건’을 가졌기에 김연아 선수가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는 분석이 있었다. 세계 챔피언이면 세계 정상이고 이미 서구의 수준에 도달한 선수임에도, 한국의 언론은 “우리도 백인과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인종주의는 진화주의적인 지식에서 기인한다. 이런 진화주의적 패러다임에 기초해서 출현한 파시즘은 약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깔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특징이 파시즘만의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회적 다윈주의 자체가 자유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한 것이라는 점에서 파시즘과 친화성이 높을 수밖에 없겠지만, 과거의 전통과 단절하고 산업문명이라는 물적 토대 위에서 진행된 자본주의적 근대화 자체가 이런 특징을 배태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계몽 이전의 세계를 미개하고 원시적인 것으로 대상화하고 경제를 중심으로 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내재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인 여성들도 트럼프에게 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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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1일 도널드 트럼프가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선거 유세를 했다. 이날 현장엔 유명 복싱 프로모터 돈 킹(오른쪽)이 참석해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푸코의 말처럼 자본주의적 근대화는 공동체와 정부의 관계에 대한 이론의 출현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공동체와 정부의 관계에 대한 이론이란 것은 통치술이나 방법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개인을 훈육해서 대상화하면서 동시에 주체로 만들어내는 방법에 대한 이론이다. 이전까지 통치의 문제는 군주의 권리였지만, 근대는 수직적 권력 관계를 수평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면서 국민이라는 새로운 집단에게 주권을 부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개인의 집합인 국민은 정치체제의 객체이자 동시에 주체로 새롭게 태어난다. 지배당하면서도 동시에 지배한다는 이런 생각은 분명 생래적인 것이 아니라 이론적인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이념은 이런 이론적인 고찰에서 출현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근대적인 정치체제는 위에서 아래로 권력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지식을 서로 결합시킴으로써 개인의 마음을 간섭한다. 위로부터 실행되는 입법의 과정과 아래로부터 이행되는 규범의 체득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민주주의적 권력의 작동방식이다. 따라서 근대에서 지배는 항상 복종과 쌍을 이룬다.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은 없다. 언제나 동의를 전제하는 근대의 민주주의는 실제로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합법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파시즘과 같은 극우주의는 이런 근대의 작동원리와 길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거칠게 말하면, 극우주의야말로 근대에 대한 열망 이외에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파시즘을 모태로 삼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은 파시즘을 광기나 광신으로 규정해서 전근대적으로 치부하는 인식에 반대되는 것이다. 분명히 미학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파시즘의 양상이 전근대적인 것에 대한 지향이나 향수를 간직하고 있더라도, 파시즘 자체를 싸잡아 전근대적인 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역설적으로 파시즘은 자본주의적 근대를 완성하기 위해 전근대적인 것을 복원해야 한다고 요청하는 욕망이다.

이런 기준에 의거한다면, 트럼프 당선은 분명 일정하게 파시즘적인 욕망을 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이들은 ‘러스트 벨트’에 있는 백인 노동자들만이 아니었다. 백인 여성들도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고, 중간계급 이민자들도 표를 던졌다. 크루그먼 같은 클린턴 지지자들이 자신했던 도시의 백인 엘리트조차도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 이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선거가 끝난 뒤에 의견은 둘로 나뉜 것처럼 보인다. 반여성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백인 노동자’가 ‘미국의 가치’를 저버렸다는 주장이 하나고,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을 유권자들이 표현한 것이지 트럼프의 인종주의와 여성혐오를 지지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다른 하나였다.

두 주장은 각각 부분적으로 맞다. 다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미국의 가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고, 두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그 기성정치에 대한 불만이 인종주의와 여성혐오라는 파시즘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분명히 트럼프 당선은 기성정치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고, ‘다보스 계급’의 파티에 초청받지 못한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분노와 고통이 표출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형태는 ‘백인의 공화국’을 재건하기 위한 극우적인 시도로 나타났다. 트럼프는 이들의 분노와 고통을 잘 이해하는 태도를 취해서 지지세를 획득했다. 그는 5%의 과두정에 충분히 속할 수 있음에도 40%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반란자’를 자임했다. 그는 분노한 계급의 목소리로 그들의 고통을 이야기했다. 이것이 전형적인 파시즘의 특징이다. 트럼프가 파시스트인지 아닌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파시즘적인 발화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장구한 극우화의 과정에서 출몰한 돌출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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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4일 ‘러스트 벨트’의 상징인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서 유세를 펼친 힐러리 클린턴. 그는 러스트 벨트 유권자의 마음을 되돌리는 데 끝내 실패했다.

트럼프가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인’의 타락에서 기인했다기보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가치’를 만들어낸 전후 자유주의가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 전후 자유주의 쇠퇴는 이들보다 더 왼쪽에 있는 급진주의의 몰락과 무관하지 않다. 바디우가 지적하듯이, 이 몰락은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라고 불리기도 하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책임이다. 급진주의를 범죄화하는 경향이 점점 더 노골화한 것이다. 자본의 지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기 위한 이런 책략은 결과적으로 파시즘의 창궐을 초래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런 결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트럼프는 장구한 극우화의 과정에서 출몰한 돌출 변수였을 뿐이다.

트럼프가 성공적으로 대통령 직을 수행할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표를 던진 이들은 트럼프를 통해 과거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절박하게 회수하고자 할 것이다. 트럼프가 그 욕망에 부합할 수 있을지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지금 한국의 박근혜 정부처럼 거대한 반격에 밀려 좌초할지도 모른다. 지금 승리자의 모습이지만, 앞으로 그의 대통령직 수행이 마냥 평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 이 글은 월간중앙 11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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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소년의노래

2017.01.03 11:46:47

멋진 글입니다!

띠요오오옹

2017.02.06 05:48:52

잘 읽었어요
사태 이해에 꽤 도움이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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