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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통은 사회적 구조와 의미망에서 발생한다는 전제 하에, 한 사람이 처한 사적고통을 공적언어로 해석하는 글을 인터뷰나 에세이로 쓸 예정이다. 말의 억압 시대,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글쓰는 사람. 학습공동체 '가장자리' 등에서 글쓰기 수업을 열어 자기경험에 근거해 읽고 쓰며 자기언어를 만드는 작업을 함께 한다. <글쓰기의 최전선(2015)> <쓰기의 말들> <폭력과 존엄 사이> 등을 펴냈다.

그날의 눈은 나를 멈춰세웠다

조회 수 1656 추천 수 0 2017.03.15 09:32:26


10년간의 프리랜서 생활을 청산하고 직장을 구한 건 고정 급여가 필요해서였다. 은행 대출금을 석 달 이상 갚지 못하면 집이 경매로 넘어간다고 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애들 데리고 이사 다니기 싫어서 마련한 궁여지책인데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다니 얼마나 두렵던지. 매달 대출 상환금만큼의 수입 확보를 위해 취직을 택했다. 근면 성실하게 일하니까 꼬박꼬박 통장에 돈이 들어왔고, 그 돈은 대출금으로 고스란히 빠져나갔다.

직장 생활 1년이 될 즈음 어느 날 출근하려고 집을 나섰는데 함박눈이 내렸다. 굵고 탐스러운 눈송이에 눈이 부셨다. 어머 이건 봐야 해!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치듯 눈 속을 살랑살랑 거닐었다. 회사로 향하는 길 저만치에 카페가 보였다. 지금 이 순간 저 창가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여왕보다 더 행복할 거라는 상상에 이르는 찰나, 카페 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버렸다. 그러니까 궤도 이탈.

진한 커피 향이 얼굴을 덥히도록 잔을 쥐고 천상의 자리에 안착했다. 허나 어찌된 일인지 내 눈길은 창밖 함박눈보다 핸드폰 액정을 향했다. 선을 넘어놓고 건너편만 바라보고 있는 꼴이다. 반차를 쓸까, 결근을 할까. 근래 사무실은 너무 바빴다. 정시 퇴근도 눈치 보이는데 정시 출근을 어기는 건 심한 반칙 같았다. 누구는 낭만을 몰라서 출근하니? 초자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안에 사장 있다. 예식장에서 도망가는 신부처럼 호기롭던 기세는 금세 누그러졌다. 문자를 보냈다. “사정이 생겨서 한 시간가량 늦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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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내 사정이란 대관절 무엇인가. 눈 내림이다. 눈사태로 열차가 멈추는 건 되어도 함박눈에 홀려 발걸음이 멈추는 건 안 된다. 그것은 문서로 옮기지 못하는 감정, 직장인에겐 가당치 않은 사정이다. 선한 동료들 덕에 그날은 얼버무리고 넘어갔으나 모종의 합의된 규칙으로 돌아가는 조직에서 한번 엇박자가 나자 내면에선 계속 ‘한량 충동’이 일었다. 그해 봄, 사표를 냈다.

내쫓김의 불안보다 소모됨의 불행이 컸다. 퇴근 후 독서와 집필이 힘에 부쳤다. 감정의 수문이 열릴까 봐 음악을 줄였다. 영화 관람에도 소홀했다. 반응 기회를 잃어가며 감응 능력도 퇴화했다. 도식화된 문서를 생산하며 관료적 언어에 길들여졌다. 돈이 들어오는 대신 체력, 생각, 감각, 음악, 언어, 몽상, 눈물같이 형체 없는 것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살리는 일

40대 중반에 돌아온 프리랜서의 삶. 다시 광야, 다시 빈손에서 2년을 버텼다. 단행본 위주의 집필 생활이 처음인 나는 또 허둥댄다. 생산성을 예측하지 못하고 사명감만 앞서나간 탓이다. 요 며칠은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나의 무지와 무모, 다듬어지지 않는 충동과 불안으로 주변에 폐를 끼쳤다. 덜 죄송하고 더 작정하고 ‘글’을 쓰겠다는 각오로 임하던 차에, 그날의 눈처럼 나를 멈춰 세우는 ‘불’같은 문장을 만났다. 

“창조가 단순히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면, 즉 실천을 향해 장님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예술은 (…) 일종의 재현으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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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글>
조르조 아감벤 지음
윤병언 옮김
책세상 펴냄
책 제목이 <불과 글>. 접속조사 ‘과’가 말해주듯 둘은 선택적 관계다. 인류에게 불이 있던 시절엔 글이 없었으나 글을 얻고 불을 잃어버렸다. 불의 속성인 신비, 신화, 영감, 비애가 사라지면서 글이 재현으로 추락했다는 거다. “현대 작가들은 언어의 심연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하고 언어를 하나의 순수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19쪽).”

나는 어떤 글을 그토록 쓰고 싶었을까. 세상에는 이미 너무 많은 글이 있고 논리가 있고 지식이 있다. 그것에 묻힌 너무 작은 목소리가 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살리는 일을 내심 과업으로 삼았다. 저자의 일침대로라면 육성만 담지 말고 울림과 떨림까지 담아야 하고 그것은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저항”으로 가능하다. 이 무위의 글쓰기라는 경지는 아득하지만 일단 쓰기에 대한 열망으로 조급해진 마음은 누그러뜨려준다. 무언가를 즉각적으로 수행하려는 욕심을 무너뜨리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힘을 다스리라는 글쓰기의 이정표 앞에서 나는 또 가던 길 멈추고 숨을 고른다. 

글이 불이 되는 글쓰기를 해낼 재주는 없지만 쓰면서 알아가고 싶다. 전업 작가가 되고 싶거든, 혹은 됐으면 하루에 이삼십 장씩 쓰라는 말보다 윤리적이며 매혹적이고 현실적이다. 이미 글이 범람하는 시대에 제면기에서 면발 나오듯 줄줄 써대는 게 능사는 아니며, 그렇게 능력을 행위로 소모하다간 4대 보험 적용도 안 되는 무명작가로 과로사하기 딱 좋다는 자각이 아주 세게 드는 조언이다. 고마워요, 아감벤 씨. 

이 글은 '시사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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