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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고통은 사회적 구조와 의미망에서 발생한다는 전제 하에, 한 사람이 처한 사적고통을 공적언어로 해석하는 글을 인터뷰나 에세이로 쓸 예정이다. 말의 억압 시대,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글쓰는 사람. 학습공동체 '가장자리' 등에서 글쓰기 수업을 열어 자기경험에 근거해 읽고 쓰며 자기언어를 만드는 작업을 함께 한다. <글쓰기의 최전선(2015)> <쓰기의 말들> <폭력과 존엄 사이> 등을 펴냈다.


나는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중3 초에 그 학교를 알게 됐고 '공부 잘해야 가는 학교' '취업 명문'이라는 말을 듣고 그냥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가까스로 합격했고, 잠실에서 무악재까지 왕복 서너 시간 등하굣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다녔다. 난 취업에 필요한 자격증을 일찌감치 따두었고 2학년 올라가서 5월에 국내 최대의 증권회사로 취업이 결정됐다. 그때부터 책 보고 시 베껴 쓰고 음악 듣고 학교 건물 뒤편 우애동산에서 낙엽 주우면서 한량처럼 놀았다. 금융권에서 여직원은 여상출신이 대부분이었는데, 여상 중에서도 서울여상 출신인 나는 어딜 가나 대접받고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기죽을 일이 없었다. 


고졸의 불편을 느낀 건 결혼할 때였다. 시가에서 노골적으로 내 학력을 문제 삼았다. 2세를 생각하면 엄마 머리가 좋아야한다면서 '그래도' 서울여상이니까 용납한다는 식이었다. 아이를 낳고 아이 또래의 엄마들과 교분이 생겼다. 남편이 목동지점으로 발령이 나서 이사를 갔고 그 동네 평균 학력이 높다보니 난 또 불편을 겪었다. "00 엄마는 몇 학번이야?" 유모차 밀다가 벤치에 앉아서 말문을 트면 그런 인사가 자연스럽게 오갔다. 그냥 멋쩍게 "고등학교 나왔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뭔가 서로 민망했다. 속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덜 무안한 대답의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고등학교만 나왔어요.' '고졸이에요. '대학 안 다녔어요.' '대학 안 나왔어요.' ' '여상 나왔어요.' '서울여상 나왔어요.' 그 어느 것도 상황이 산뜻하지 않았고 어딘가 구차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M1105131232019_1.jpg


평범함.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경험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일본의 사학자 기시 마사히코 말대로,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난 평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글을 쓴답시고 밥벌이를 하게 됐고 철학 공부를 하러 연구공동체에 다닐 때다. 나를 아끼는 선배가 말했다. 네가 앞으로 작가로 활동하려면 그래도 대학을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거기 다니며 공부할 시간과 돈과 공력이라면 대학을 시도해보라고 했다. 그건 나를 위하는 말이지만 옳은 말은 아니었다. 사회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비판하는 사회는 뭐지? 그때부터 유심히 지켜봤다. 지나가는 말로라도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거의 고학력자들이었다.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면서 학벌 중심 사회를 공고화했고 그 틀을 깨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를 내면화했고 자기 자식을 명문대 보내려고 애썼고, 자신이 어느 대학 몇 학번을 자연스레 노출했고 그로 인한 실리를 살뜰히 챙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학벌 세탁'에 드는 자원을 마련할 수도 없었다. 몰락한 중산층이 돼버려 월 백만원에 이르는 재수학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생계 노동에 나서야 하기에 책상에 붙어 앉아 미적분을 풀 시간이 없었고, 두 아이 양육과 살림만으로도 생체 에너지는 고갈됐다. 그 모든 한계를 떨치고 일어날 만큼 공부에 '한'이 맺혀 있지도 않았다. 지금 책장에 꽂힌 책만 다 읽기에도 남은 인생이 부족할 지경이었는데 내가 왜 굳이 또 그걸.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운이 좋은 고졸사람이었다. 비교적 문턱이 낮은 '자유기고가' 직업에 입문해 '열일'했고 전세자금도 올려줬다. 어쩌다 보니 지금은 글쓰기 관련 강의도 나간다. 학력 문제는 계속 따라다닌다. 내가 주로 강의를 나가는 곳은 시민단체다. 나랏돈을 받아 운영되다보니 강사료 지급 기준이 박하고 엄격하다. 다른 통로로 최저 강사료를 마련해주기 위해 활동가가 애를 먹기도 한다. 작년에 모대학 특강을 갔을 때는 강사료 지급 기준에 석박사는 있어도 고졸 학력 기준은 아예 없어서 새로 만들어야 했다고 했다. 


불편해도 괜찮았다. 나의 평범하지 않음, 소수성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여러 갈래의 경험은 내가 사회학이나 여성학, 철학을 공부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현실 문제에 부딪혀 본 것들이 이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여자라서 불편한 게 많다 보니 피곤하긴 해도 생각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고졸이란 신분도 그랬다. 덕분에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 있는지 늘 되묻고 깨어 있어야 했으니까. 얼마 전에는 '그것'과 관련해 꽤 불쾌한 일을 겪었는데 괜찮지 않았다. 나는 잊고 살아도 세상은 잊지 않으므로 ‘그것’을 자주 생각해야 한다. 나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댓글 '20'

바람돌이

2016.11.11 19:58:52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은유

2016.11.13 10:04:06

네. 마음 고맙습니다.

다름바름

2016.11.11 22:26:47

저는 대졸자입니다· 엄마가 되고보니 학부모 사회에 섞일 때 저도 모르게 제가 대졸자임을 너무나 자연스래 말할 때가 있습니다· 조심한다 했는 데 절로 나오는 편가르기와 장벽 치기 늘 반성합니다· 작가님의 평범하지 않음~비범하고 참 좋습니다· 저도 저 스스로 지방대 출신이라 말할 때가 있습니다· 똑똑하다는 소리 꽤 들었는데도~저 스스로 지레 고백아닌 고백을 할 때 저도 마음 한켠이 불편하더라구요· 그 정체를 작가님 글 통해 정확히 알게 됐네요^^

은유

2016.11.13 10:05:13

고백 아닌 고백이란 말이 와닿네요. 있는 그대로 말해도 아무렇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임상진

2016.11.12 01:20:14

지지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짝꿍있었는데 친하지만
라이벌이라생각했던 그녀가 생각납니다

잠실사는 서울여상졸업에 L모증권기업체

너무 똑같은 상황이라 자세히 읽다보니

1989년졸업이시네요

아마도 그친구도 똑같이 느꼈을거라생각이되어서 더더욱 공감이갑니다

감사합니다

은유

2016.11.13 10:06:32

잠실에서 서울여상 가는 친구들 거의 없었는데 신기하네요. 저 혼자였거든요. 고맙습니다.

김 민숙

2016.11.12 11:41:51

공부잘했고
또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최선이었음
절대 후회하지말아요
단지 허울좋은 학벌만 있을뿐
자신도 돌아보지못하고 무의미하게 사는
사람들 수두룩해요
이만한 고민 감정으로 힘들어하는자체도
어쩌면 성숙한 삶입니다

은유

2016.11.13 10:07:42

네. 고맙습니다.

김민

2016.11.12 12:49:31

저는 여상 나온 고졸인 20살 입니다 저랑 같이 여상 나온 친구들 다 대학 갔어요 그래서 알바를 구하러 가면 20살이라고 하면 다 대학생이냐고 몇학년이냐 어느 학교 다니냐 등등 묻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여상 출신이고 고졸이라니까 다 아...왜 대학 안갔냐고 이러더라구요 그럴때마다 너무 힘드네요

은유

2016.11.13 10:10:36

참 힘들고 귀찮은 일입니다. 그래도 숨기고 얼버무리는 것보다 말하는 게 스스로를 위해서 나아요. 자기미움과 부정은 결국 타인으로 향하고, 나도 똑같이 상처주는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요. 부디, 기운내세요.

신채은

2016.11.12 14:09:18

블로그에 글을 퍼가도 될까요? url 복사요! 출처는 당연히 기재하겠습니다.

plutos14@hanmail.net

2016.11.12 19:05:26

관리자입니다. 은유 선생님께서 댓글을 못 보고 계신 것 같아서 답 남겨요. url 복사로 퍼가셔도 됩니다~

은유

2016.11.13 10:11:06

어제 종일 정신없어 못 봤네요. ^^;

이진수

2016.11.13 13:08:21

마음이 가는 글이네요.

은유

2016.11.14 16:38:36

감사합니다.^^

김정한

2016.11.13 18:39:31

며칠 전 무악재고개를 넘으며 산책하듯 걷다가...
문득 서울여상이 생각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여상 다니는 여고생은 우리 남학생들에게는 가장 궁금한 대상, 가장 사귀고 싶은 대상이었거든요.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대나무숲같은 아파트단지에 가려 보이지 않더라고요.
서울여상 건물의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내려가 홍제역에 거의 다다라서야...
아파트 건물 사이로 슬쩍 보이는 그 건물...
많이 아쉽고 안타깝고 슬프기까지 하더군요.

쓰신 글 내용과는 관계가 없습니다만, 서울여상 사진이 반가워 몇자 남깁니다.

후배1

2016.11.13 20:32:38

안녕하세요, 서울여상 선배님이시네요. 저도 졸업한지 5년이지났습니다. 처음 취업을하고 재직자 전형으로(요새 기업근무 3년 이상이면 야간대를 진학할수있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고 내후년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최근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도 모르게 제가 여상출신, 대학도 수능을 본 친구들보다는 쉽게 들어왔다는 사실로 때때로 자괴감이 들때가 있습니다. 20살때 바로 취업을 하거나 재직자 전형을 통해 대학교에 입학한것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하지는 않지만 저도 모르게 제가 평범하지 않은 것에 부끄러워하고 있었나 봅니다. 선배님 글 읽으면서, 댓글도 보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하고 불편하지만 특별하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요즘 고민이 많았는데 그래도 약간 마음이 편해지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은유

2016.11.14 16:40:50

세월이 이렇게나 흘렀나 싶어 손꼽아보고 놀랐어요. 저는 어느덧 졸업 28년이 되어갑니다. 반갑습니다. ^^ 부끄러워하지 마시고요. 삶은 삶 그 자체로 온당하니까요.

은별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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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죽지 않는 자기 소개 file

  • 은유

"저는 나이가 많습니다. 70살인데 결혼을 안 했고 자식이 없고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지역 평생학습관 글쓰기 수업 첫시간, 한 여자 학인이 떨리는 음성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일흔 살에 비혼 여성? 내용의 희소성보다 그 사실을 서슴없이 터놓는 당당함에 처음엔 당황하고 곧이어 감탄했다.  일정한 나이에 학교 가고 취업 하고 결혼 하고 자식 낳고 사는 인생 행로를 가지 않으면, 한국 사회에서는 시시때때로 불편을 겪는다. (중년 여성은 무조건 ‘어머님’으로 불린다.) 왜 남들처럼 살지 않는지 설명을 요구받는다. 그 ...

  • 201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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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의 말 file [2]

  • 은유

“너희들보다 훨씬 더 상위에 있는 종족들이에요.” “무조건 남자들은 앞으로 살면서 여자 말을 듣고 산다 생각하면 중간은 간다.” “여자들이 불쌍한 남자 잘 보살펴 달라.” “사람이 아니고 개다 생각하면 싸울 일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말일까. 인터넷에 떠도는 김제동의 강연 동영상 자막이다. 김제동은 ‘연애할 때 싸우지 않는 법’을 특유의 입담으로 설파하고 객석을 채운 선남선녀 커플들은 물개 박수를 치면서 박장대소다. 화기애애한 강연장 분위기를 보는 나는, 웃자고 하는 말에 땅이 꺼져라 한숨 쉰다.  김제동의 말은...

  • 201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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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장애인 아버지가 된다 file

  • 은유

지하철 객차에서 장애인 아들과 비장애인 아버지를 보았다. 건장한 성인 체격의 아들은 천진난만한 어투로 목청껏 떠들고 크게 웃었다. 주변의 눈길이 일제히 쏠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조금만 작게 말해달라고 타일렀다. 자상한 눈빛이었다. 부자지간의 대화가, 그들의 외출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 아버지를 따라가고 싶었다. 직업정신인데, 무수한 이야기가 깃든 얼굴, 자기정리가 된 듯 편안한 기운에 끌렸다. 어떤 일로 웃는지, 속상한지, 불편한지, 실망하는지, 어떻게 기운 차려 하루를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매스컴에 소개...

  • 201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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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되지 않은 전태일을 기록하며 file

  • 은유

1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가 모인 글쓰기 수업에서 <전태일 평전>을 읽을 때면, 그의 생애 만큼이나 뜨겁고 척척한 말들이 오간다. 감응의 지점이 세대별로 조금씩 다르다. 60대는 ‘신발에 물이 새지 않으면 다행인’ 찢어지는 가난에 좀 더 공감하고 40~50대는 ‘비참한 현실을 바꿔내는’ 집요한 싸움에 반응한다. 20~30대는? 가장 열렬하다. 전태일이 그리는 생생한 노동 현장 실태에 맞장구 치며 목소리를 높인다.  “월급 받아도 교통비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전태일 말이 그때나 지금이나 틀리지 않구나 싶어요.” “먹고 살길이 ...

  • 201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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