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1

변종현실

 

1의 리얼리티가 있다. 1의 리얼리티는 제1의 리얼리티를 숙주로 한 기생 리얼리티와 그 변종을 무한증식한다. 리얼리티가 무한증식하는 줄기는 의식상에서의 범주에서이다. 그리고 숙주리얼리티 변종들 바이러스는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항상성을 지녀서 겉으로는 가시화되지 않는다.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것은 제1의 리얼리티가 개인이 해체, 파괴할 수 없는 구조로서의 현실 겉면이기에, 철의 장막이기에 무한증식하는 숙주 리얼리티는 의식 바탕 저 아래 깊이로 밖에는 변종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변종들간에 또는 의식의 심연 아래로의 지향가운데에 어떤 생명효과 혹은 리얼리티 인지양상 곧 생활효과요 또 하나의 다른 리얼리티 공간이 형성되는지는 그들간의 서클 안에서만 인지되기에 제3자는 알지 못한다.

모든 개별 변종생활의 언어는 그들만 공유하는 문법규칙에 따르기에 개별 숲이 은폐하는 비통과 타자에 대한 비난이 희생양을 선택하는 방식과 복수극 전모는 존재하는지 조차 알 수 없다.

이러한 변종들을 낳을 수 있는 습기차고 영양 풍부한 잉여생태의 절대조건은 자본이다. 부를 생산하는 자본의 무한증식가치가 일상으로 현현되면, 현현된 물성의 환상에서 전혀 지각은 탈피하지 못한다. 돈은 이미 바이러스로 변종현실을 재생산한다. 돈이라는 아열대림은 제1 리얼리티 시스템이 부패로 음습할수록, 음지자본으로 확대될수록, 다양성을 추구한다. 돈은 거대담론이라는 중앙집권체제를 혐오한다. 돈을 소유한 욕망의 창조와 다양성은 변종바이러스 생산의 최적모태이다.

1의 리얼리티는 특정 사회체제의 구성원 누구나가 속해 사는 기관이지만, 2,3,4 등등 무한계열로 생산된 비가시적 변종 리얼리티는 제1의 리얼리티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지 않는다. 인식을 공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존재를 부정하며 인식의 내용이 있다면 이를 다른 내용으로 갈아채우고 뒤집는다. 1 리얼리티의 존재를 부정하는 지식인들과 대중들은 이렇게 제1 리얼리티의 인지체계를 그들의 이념으로 영구화한다.

1 리얼리티를 제외한 모든 다른 파생 리얼리티의 숙주는 제1 리얼리티인데, 숙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변종의 파생리얼리티들은 그 자체 자율성체계로 바이러스처럼 기능한다. 그 바이러스몸 안에 기생한 자율성은 인신살해와 시신애완을 최첨단 주거공간이 주는, 그럼에도 더 비싼 주거공간이 아니어서 권태롭고 우울해지는 상태에 대한 자기보상으로 즐긴다.

변종 리얼리티들은 삶의 깊이를 심화시킨다. 1 리얼리티라는 객관적 진실은 표면일 뿐 깊이가 없다는 지각이론이 팽팽해진다.

변종 리얼리티의 차원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가설처럼 지각되지만, 서로 매개되어 있는 방식에 대한 가정, 가상 조차 변종 리얼리티이기에 그 방식들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변종 리얼리티 세계내 존재에게 다가갈 방법이 없다는데에 대한 지각은 예술작품처럼 콜렉션된다. 방법이 없어서 생기는 불안은 인문학 살롱에서 불안의 희화화로, 스펙타클로 소비된다.

깊이 사이로, 깊어지는 차원 저 아래에까지 도달하는 하나의 통로는 없다. 깊이의 차원들 사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통로가 없음으로해서 그 세포들 사이에서 병든 길냥이가 병을 고쳐 표면으로 올라 올 방법은 없다. 병든 길냥이라는 존재자 자체가 뫼비우스의 띠가 되어 우리 삶을 상투성의 차단벽 안으로 다시 밀어올린다. 인생의 상투성은 병든 고양이가 우주에서 사라질 유일한 무망해(無妄海)이다.

깊이는 인류의 인륜체계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깊이마다의 가상세계의 축에 매달린 허공이다. 깊이 속 잡목 그늘 차원마다 악의 평범성젊은이의 양지와 교직되며 그늘을 만든다. 악의 다양한 모양이 생의 무늬를 만든다. 깊이란 이런 일루전이다.

변종 리얼리티들이란 곧 깊이들의 계열화, 계보화 효과세계이다. 1 리얼리티의 도덕체계로 덮어씌워지지 않는 진화론적 생의 번뇌들인데, 돈의 진뜩진뜩한 자만과 영화로만 피가 돌고 살아있다. 역사는 이런 깊이의 심해에 떠있는 한줄기 흐름을 상징한다. 이 상징을 표상하는 시각체계가 곧 미술사이다.

 

 

2.

리얼리즘

변종 리얼리티들의 무수한 차원들을 일거에 퇴각시키는 방법은 리얼리즘 원리이다. 리얼리즘은 문화의 깊이, 부의 깊이처럼 보이는 모든 화려한 의식주를 제1 표면애착, 곧 리얼리즘의 재현폭력으로 덮는다. 무지막지하게 덮어버리는 액션은 그 무지막지함으로 계열화와 심도차원의 깊이를 무화한다.

사실 제1 표면애착은 재현에 종속되고자 하는 종속애착의 폭력징후로 대중에게 혐오감, 기시감을 일으킨다. 리얼리즘의 자기애는 제1 리얼리티에 대한 맹신에 연관되어있다. 1 리얼리티는 실제 사회의 현실 모양새이므로 제1 리얼리티 맹신은 사실상 맹신이 아니라 인식의 절대치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준거치임에도 불구하고, 맹신으로 보인다.

맹신으로 보이는 이유는, 인식 계열화 차원의 환영을 이미 부정부패의 역사로 보기에, 잉여의 가면으로 보기에, 돈과 권력의, 계급의 자기이해의, 계급 스스로의 도취거나 마취된 타자이해로 보기에, 리얼리즘은 제1 리얼리티를 전제로, 결론으로 하는 이외에는 다른 삶의 목적을 용인하지 않아서 맹신으로 보인다.

결핍을 하용하지 않는 일대일 인식론에 대한 강박적 윤리는 깊이를 추구하는 위계와 위계에 대한 취미의 관점에서 보면 폭력적이다. 야만도 그런 야만이 없다. 리얼리즘의 논지는 비문명화를 추구하는 문명 적대세력으로 간주된다. 표면에 드러난 현상과 본질의 변증법을 다 읽지 못한다면, 분명 인식과 실천상의 오류와 패퇴가 예견됨에도 우악스럽게 달겨든다 여기며 멸시한다.

리얼리즘은 왜 표면에 집착하는가? 다시 물어보게 된다. 현상과 본질의 변증법을 표면에서 볼 수 있다면 왜 변증법을 따라가지 않는가, 변증법으로 따라간다면, 표면은 이미 변증 속에 꿰어들어간 일시적 표상일 뿐인데도, 표면이라는 대지를 덮는 힘의 수량화만으로 삶을 대하는 방식은 이미 논란의 적합성을 잃는 것이다. 2, 3의 깊이의 차원이 끈질기게 들이미는 반리얼리즘 정서는 수량화된 인식론에 대한 비웃음에서 작동된다.

1 리얼리티에 대한 리얼리스트의 맹신은, 요지부동 깊이들의 차원에 깔린 적대가 계층상승 충동에서 나온 충성심의 오묘함이라는 것을 알기에, 사회제도로 매개된 중층적 삶의 맹목성을 알기에, 이에 반사해서 나온다.

변종 생활효과의 진화 측면에서 보면, 표면화 충동은 넌센스이다.

표면은, 예를들면, 젠트리피케이션 이전과 이후를 위상의 동시성으로 재현한다. 차이의 동시성 표상은 과거를 미래로 투사시키는 의지로, 말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언어도단이다. 제트리피케이션 이후의 이미지가 이미 미래이기에 부정된 과거와 미래의 동시 진행 우상화는 우상전쟁을 하자는 말로 밖에 안들린다. 지지부진을 보존하자는 것인가, 그래도 행복하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인가라고 억지로라도 성의를 갖춰 물어보는척 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지지부진을 염오하여 프로젝트 성과로 거대자본을 주체의 비빌언덕으로 전유하게 됐다 치자, 그리고 그 이후의 보람이 제2, 3 리얼리티 등 무한계열의 리얼리티 디자인을 장착하고 삼시세끼 그림 같은 밥을 먹는 희열은 물론이거니와, 머리 속에 무한히 떠오르는 잡다한 아이디어의 현실화 가능성이라 치자, 결국 뭐니뭐니해도 자기실현가능성을 움켜쥘 수 있게 된 것이 기쁨인 것인데, 그러면 돈만 있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는 조건에 올라타게 된 리얼리티와 젠트리피케이션 이전의 동네주민들의 지역에 대한 추억만 있지 자기 땅도 아닌 곳에서 인생공유를 말하면서도 그 말에서의 똥과 된장이 구별 안되는 리얼리티 사이에 어떤 우위논쟁의 심급이 이해관계의 간극의 본질에 존재하는가? 단지 임시적으로, 열등한자와 우수한자로 갈라지는 순간의 표면적 대립상으로 화면이 구성되어 있다면, 화면상의 분할구성의 언어로 무엇을 비판하는지 드러날 테지만, 그 순간의 역할의 잠정적 주체들간의 대립일뿐, 역할의 주인공이 잠시 이 사람이거나 저 살람일뿐, 역할극의 두 주인공, 소위계층 그것도 임시변통적인 계층의 얼굴역할이 잠시 무대위로 등장한 상황일뿐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제1의 리얼리티가 무대로 올린 극의 배우는 역할극에 충실할뿐, 젠트리피케이션의 제1 리얼리티 자체는 그 표면성에서 재현될 뿐이다. 재현의 미래 추동력은 배우의 역할 훈련과 숙련성에서 온다고도 볼 수 있지만, 상황의 표면성 자체로 정치가 충분히 가능하지만, 1 리얼리티의 변화가 일정하게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젠트리피케이선이후 들어서는 변종 환상의 존재론적 심급을 완전 차단시킬 수 없다. 1 리얼리티의 최종심급 자체가 자본의 창조성, 생산성에 축을 두고 있어서이다.

리얼리즘의 표면성 애착은 사실은 이 축의 깊이로 들어가기 위한 근대적 도구인데, 깊이는 일루전의 깊이요 핵심적인 것은, 깊이는 부귀라는, 부의 축적이라는 종의 기원의 역사로부터 진화한 것이기에 리얼리즘은 이 깊이를 짐승처럼이 아니면 타고 내려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기야 그래서 마술적 리얼리즘 범주도 있긴 하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표면성 애착증후군은 문화사적 표면성탐닉성향에 대한 적대행위이기도 하다. 전통이라는 물신이 남긴 유산 중 가장 골치아픈 범주 하나가 인격우상주의인데, 리얼리즘은 인격우상의 전통모델 다시말해 개인의 인간성 관점에 앞서 인격 전형으로 제1 리얼리티를 해체, 수용하기에, 이들에겐 제2, 3 등의 변종 리얼리티가 몰인격적인 표면성에 집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인격이 개인을 대변해 현실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리얼리즘이 보는 제1 리얼리티는 상징투쟁의 장으로 기능한다. 그것도 매우 고상하고 엄격한 도덕주의의 상징투쟁의 장인 것인데, 문제의 복잡함은 이런데서 발생한다.

2, 3 등의 변종 물신세계야말로 알고보면 물신상징들간의 이권경쟁으로, 상품미학으로 뒤범벅인 피바다인데, 이 실체적 피바다는 나비파의 나르시즘 정도로 은유적이고 멜랑코리 가득한 차원의 암거래 진화를 거듭하면서 네가 죽인 어린애의 예쁜 손가락 내게 선물해라는 명령으로 정착한다. 반면 제1 리얼리티의 상징투쟁은 전투병력들간의 깃발 선취하기 같은 상징규범 투쟁을 하고 있자니 사실상 피차간의 교전은 원래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런데도 리얼리즘은 스스로 교전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 변종 리얼리티는 수렁같은 밑도 끝도 없는 깊이의 늪에서 차원이 다르게 놀 계획이나 꾸민다. 소유물 리스트 만들기로 리얼리티의 새로운 차원들을 파내려간다.

이 지각구조야말로 자본과 권력이 내는 소리를 새겨 명품 LP판으로 가공하는 아트요, 생활의 아트화요 시대정신으로는 포스트모더니티인데, 이 깊이와 다양함의 세계에서 특정 차원은 이종생식으로 다른 차원을 낳고 차원의 다양성과 클래식함은 명품으로 재현될 수 있을 뿐 특정 차원의 리얼리티를 현현할 리얼한 다른 방법은 없다.

죽음에 이르는 스타일은 리얼리즘이나 변종바이러스 리얼리티에서나 다르게 진행되지만 죽음은 동일한 현상으로 둘 다에 공통적으로 왜곡이라는 본질의 현상이다. 둘 다에서 현실은 삭제되어 있다. 현실이 삭제되어 있다는 그리고 이 두 측면의 리얼리티 존재 양상들의 매개상을 얻는 것이 제1 리얼리티 의지의 궁극과제이지만, 리얼리즘의 상징규범인 인격개인과 변종 리얼리티 차원의 물신노예들 사이에서는 교접 가능성이 전적으로 서로 소외상태이다. 1의 리얼리티거나 그래서 리얼리즘이거나 변종진화의 가상은 완전히 별개의 즉물들 일뿐이다.

그래서 사실상으로는리얼리즘과 포스트모더니티의 정신상태는 이미 죽은 정신의 몰골이다. 인격체에게만 제1 리얼리티인 리얼리티와, 물신의 육체뿐인 제2, 3 등 무수한 계열차원의 피바다는 인격과 자본기계와의 대조 같은 것인데, 이미 모순의 대립각들로 기능할 수 없는 갈등 파트너들이다. 리얼리즘은 그래서 폭력으로 예술을 해체하고, 변종 차원 리얼리티 시장은 모든 류의 도덕을 인정투쟁의 기술로만 사용한다.

리얼리즘은 예술자율성에 기대어서 오는 절망을 폐기했다. 뛰어내릴 절벽 밖에 눈앞에 볼 수 없는 실천의 목표는 예술자율성과의 화해를 버렸다. 화해가 된다면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예술의 신화다. 인격은 개인성을 버리고 실천의 목표를 부각하거나, ‘위대한 양식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예술이라는 중간계에 발을 딛거나 할 수 있는데, 이런 것을 못 얻은채, 일상에 안착하지도 못한다면, 인격은 부서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부서진 인격을 주워담는 가족(=문화)의 희생 차원이 리얼리즘이라는 목표전선에 동참해 살고 있지는 않는다. 가족이라는, 개인에게 아직은 유예되어있는 친애능력은, 이미 환상자본 산업에 뛰어들어있다.

촛불집회 등에서 보듯 리얼리즘은 작품이 아닌 행동으로만이 자기 예술을 구원할 수 있다. 리얼리즘의 폭력은 자기 스타일에 대한 폭력이다. 그 폭력은 그럼에도 인생의 속살에 대해서는 폭력을 가할 수 없다. 인생의 속살은 깊이에 거주하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는 속민(俗民)들의 피바다에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기에 그렇다.

리얼리즘은 자기폭력이다. 자기화를 거부하는 폭력의 예술이다. 자기화를 거부하기에 리얼리스트에게 세계는 제1 리얼리티 곧 보이는 전부가 본질의 현상으로 인식된다. 본질의 현상이란 껍질로만 보이는 세계를 본질의 표현으로 구성해 나오는 표면성이다. 이 표면성을 해체해 속살을 보이되 속살에 작가의 자기의식 곧 자기화를 강제하지 못하는 정도로의 규범을 잃지 않는다. 사실은 그래서 약한 인격이다, 비폭력적 인격이다. 비록 그가 개인적으로는 폭력적 성향이 있을지라도, 그의 리얼리즘은 비폭력의 해체작업으로만 목적을 추구한다.

리얼리즘의 폭력은 내용과 형식의 조화라는 세상의 희망을 가지고서는 표면의 깊이의 문제에 대한 착시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서 나오는 행동강령이다. 리얼리즘은 폭력의 언어 다시말해 자기형식 해체로 얻는 에너지를 목표로 한다. 자기 스타일 해체로 얻는 이 힘으로 예술이라는 강령을 다시 획득한다. 사실 예술이라는 강령 자체도 이미 해체중이었는데, 강령을 버림으로써 해체를 막으려고 했으나, 기실 예술형식은 자기애에 대한 폭력을 감행하면서 강령인 예술의 내용을 다시 얻는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의 예술에는 이미 표면성이 사라졌다. 예술에서 형식이 해체돼 내용만 남았다면, 예술은 순수자율성의 기능을 가장 순수하게 보존하게 것이다.

예술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리얼리즘의 폭력을 통해 예술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리얼리티의 표면성을 해체하면서 내용과 형식의 조화 이념, 사회적이든 예술적이든, 그 조화이념을 파괴했고, 파괴과정에서 남은 것은 리얼리즘 언어로써 확보된 제1 리얼리티의 진심상황이다.

 

3

허영의 시장

 

1 리얼리티깊이의 차원이 서로 절대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리얼리티의 범주상 병치라면 이들 세계 간에는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 말고는 공유할 수 있을 매개가 없다. 하나는 도덕세계요 다른 하나는 돈 가진 부모한테서 태어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지각의 세계인데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대상적 세계관계로써만 인지된다.

대상적 세계 관계에서 제1의 리얼리티는 제1원인이고 깊이로 생성된 변종 리얼리티들은 제1 리얼리티의 속병같은 증후들인데, 즉 종속적 관계인데도 게다가 두 세계는 서로에게 인정되지 않는데도, 서로를 대상화해 계산하는, 등가적 대상의 속성을 지닌 세계들로 범주화된다.

일종의 인식오류인데, 인식오류는 존재론적 층위에 대한 잠시의 인식상의 어긋남 정도에서 오는 오류로만 여겨져 오류수정의 의지보다는 서로간의 약간의 참을성으로 그냥 견디거나 무시하거나 하면 상대가 도태될 것으로 본다.

이렇게 인식폭력은 모든 비전에 매개된다. 인식폭력은 인정투쟁을 결국 동반하게 되는데, 인정투쟁은 물신일수록 더 정신적 등급에 목을 맨다. 인간정신의 깊이에의 맹신은 시민사회의 상징자산이다. 정신의 흔적이란 전혀 갖지 않으면서, 정신의 위대함을 전혀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정신을 운운하는 깊이충동은, 그것이 소비충동으로든 자살충동으로 혹은 살인충동이나 혐오충동이든, 권력상층부, 거대자본의 상층부가 거주하는 성()을 주군으로 모시면서 깊어진다. 비너스의 아름다움처럼 깊어지지만 위대한 정신의 모양새만 갖췄을 뿐이다.

전통적으로는 성안의 문명에 성밖의 야만을 대립해 성안의 문명으로 진입하는 것을 깊이로 인정하는 식이다. 성을 숭배하는 철면피들로 이들의 물신은 궁성에 살며 이들은 궁성의 화려함을 권위로써 숭배한다. 이들 깊이의 우상은 표현할 수 없는 대상이다. 표현할 수 없는 대상의 간지러움을 즐기면서 우상의 우상의 우상들을, 그 무수한 뉴앙스를 깊이의 번뇌라고 표상한다.

사실 깊이에의 충동에는 번뇌가 없다. 번뇌가 없지만 번뇌를 스타일로 이해한다. 목적은 없지만 살인도 스타일(양식)로 이해된다. 스타일은 궁성 안의 살롱에서만 나올 수 있는 권위의 어드밴처로 인정한다. 깊이는 양식으로서만 우상의 모습으로 현현한다. 현상이란, 본질의 현상이란 이들 깊이주의자에게는 당연히 깊이로 표현되고 표현된 것이 우상화되는 것인데. 2, 3 리얼리티 등 변종계열 내 무수한 존재자들의 자체 리얼리티가 실제임을 반증하는 기관인증은 양식을 전거로 한다.

리얼리즘이 제1 리얼리티의 표면성에 달라붙으면서 오로지 실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목적만을 추구하고 그 추구를 정당하게 평가받기 위해 다시 말해 깊이에의 헌신같은 소리를 갈아엎고 인정투쟁에 승리하기 위한 관점을 세운 준거를 실제성에서만 본다면, 깊이에의 희생양이 될지라도 깊이주의자는 자신의 깊이주의에 대한 인정투쟁을 위해 차원이 다름을, 차원이 아름다움을 내세운다.

리얼리즘의 폭력은, 차원이 달라 차원이 아름답다는 상투성에 대해 실소이다. 반대로 이 실소를 차원이 아름답다는 지각방식은 전혀 인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서로간에는 서로가 폭력으로 보인다. 리얼리즘을 폭력으로 보는 깊이에의 충동 앞에 폭력은 반사회적 행동으로만 나타난다. 리얼리즘의 폭력이란 결국 리얼리즘의 행동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리얼리즘에 있어 유일한 아름다움은 행동으로 구축되는 도덕성에서만 나타난다. 그래서 폭력만이 사회를 새롭게 이상적으로 건설할 권위를 가질 수 있다.

주체미술을 깊이에의 충동 속성에서 보면, 1 리얼리티의 상징적 현현만을, 그것도 순수히 현상의 본질만을 시각화는 미술이다. 리얼리즘의 폭력, 리얼리즘의 행동미학을 최고도의 실체성으로써만 그려낸 미술이다.

폭력으로 리얼리티의 표면상을 해체하는, 자기희생을 도덕의 내용으로 하는 리얼리즘미학에서 더 나아가 리얼리티의 표면상을 하나의 상징규범, 소위 종자론으로 재구성하고 형상화하는 그야말로 피부이자 깊이가 일체화된 미학체계이다. 주체미술에서는 그래서 리얼리즘이 그간 파괴하고자 했던 내용과 형식의 일치조화 자체가 강력한 표면성이 된다. 그래서 내용과 형식의 일치가 그야말로 진실의 표면으로 화폭을 지배한다.

깊이가 행동을 의미하는 리얼리즘 미학에서 볼 때 그래서 주체미술에는 내부로 부터의 행동충동이 없다. 외부를 행한 행동지침은 있으나 내부로 부터의 행동동기화 기제는 도태된다. 주체미술에서는 상징자체가 자기의 역사로부터 나온다. 오로지 주체의 역사로부터만 리얼리즘이 인정된다. 양식 자체가 주체미술 리얼리즘이다.

깊이에의 충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생활의 여러 이해관계 차원들은 정당화 심급을 위한 절대명제를 필요로 하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간지대에 존재하는, 존재 자체가 기능인 바로 그런 지대는 예술 자체가 아니라 예술의 역사예술비평의 영역이다. 특히 미술사와 미술비평은 깊이의 차원을 현실용어로 적용하는데 가장 적합한 정신범주들을 생산하는 일이 역사적 과제였다.

미술사와 미술비평은 깊이가 궁정으로부터 나오되 미술제도라는 실제성에 갇힌 일종의, 1리얼리티에 속한다는 전제를 가지면서도 깊이에의 충동을 양식화한 영역들을 그들의 서술로 그려낸다.

이 지대는 궁정적 애완품이되 속세 한가운데서 그 양식으로 깊이의 값어치를 증명하는 기관의 역할 외에는 다른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런만큼 미술사와 미술비평은 자의적이다. 오로지 변종 리얼리티 승인을 위한 필수부속 기관으로만 범주화될 수 있는 영역이다. 이 기관이야말로 허영의 시장이다. 그런데 이 시장에서 팔리는 것은 있어도 판 것은 없는 그런 시장이다.

미술시장은, 미술은 미술사와 미술비평의 호위 아래 무엇인가를 팔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정신은 팔지 않았다고 하는 교만의 시장이기도 하다. 한국 근현대미술계와 미술사, 미술비평은 이렇게 돌아가는 시장안에서도 또 깊이모를 문화창조의 사명감이라는 상술로 변종 리얼리티 거품을 풀어내고 있지만, 거품이라고 생각지 않는 폭력을 자행하고 있지만, 우리 근현대미술사 자체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우리 생의, 우리 역사의 어느 중간지대에 유령처럼 이리저리 흘러 다니고 있기에 아무도 상관없는 폭력일 뿐이다.

 

 

장욱진작업모습_3388.JPG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깊이의 허영 리얼리즘 변종현실 file

  • 쾌활림
  • 2017-09-17
  • 조회 수 64

1 변종현실   제1의 리얼리티가 있다. 제1의 리얼리티는 제1의 리얼리티를 숙주로 한 기생 리얼리티와 그 변종을 무한증식한다. 리얼리티가 무한증식하는 줄기는 의식상에서의 범주에서이다. 그리고 숙주리얼리티 변종들 바이러스는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항상성을 지녀서 겉으로는 가시화되지 않는다.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것은 제1의 리얼리티가 개인이 해체, 파괴할 수 없는 구조로서의 ‘현실 겉면’이기에, 철의 장막이기에 무한증식하는 숙주 리얼리티는 의식 바탕 저 아래 깊이로 밖에는 변종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file

  • 쾌활림
  • 2017-04-01
  • 조회 수 323

월간미술 4월호 연재 글(그간 반년 가량 개인사정으로 중단 했다가 다시 시작)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1. 맥 컴퓨터와 윈도우 컴퓨터를 사용해 작업한 텍스트나 이미지들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호환을 위해서는 다른 장치를 연결해야 한다. 호환의 필요를 위해 고안된 특별한 수단은 결국 상품으로 구입해야 한다. 구글 시트(Google Sheets)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나 한글 워드로 쓴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호환이 안 되면 텍스트를 복사해서 옮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이 작업들을 메일로 전송하고자 ...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 쾌활림
  • 2016-08-28
  • 조회 수 58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월간미술 연재13) 1 이 세상에 실제하는 공론의 양대 축, 공론이 그 안으로부터 생성되는 원천은 제도와 인간이다. 세상의 저간에 떠도는 갖가지 공론들은 인간 개개인에게서, 그들 모두 간의 삶의 느낌에서 나온다. 이런 가지가지 개인감정과 이해(理解)의 시선들이 실제로 모아져 일정하게 객관화된 것이, 결국 인간의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 정착된 것이 ‘제도’이다. 제도는 제도의 정신으로, 관련된 법으로 움직여진다. 제도는 본질상 인간의 행위가 일으키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예측시스...

민중미술의 미학 file

  • 쾌활림
  • 2016-05-30
  • 조회 수 361

민중미술의 미학   1 미술가가 자신이 직접 본 광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동, 서양 모두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였다. 미술가는 이즈음부터 자신이 본 생활상의 장면에 자신의 감정과 세계에 대한 관심을 듬뿍 담아 일정한 틀 속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보다 더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밑바닥 인생들이다. 사실상 일반적인 사회경관 대부분의 광경들은 작가 주변의 일상생활 아니면, 사회 밑바닥 층의 헐벗고 남루하고 그럴 수 없이 가난한 삶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 자연스레 인생에 회의가 들고 인생의 고통 전반에 생각이 ...

악덕,공공성, 제도의 영혼 file

  • 쾌활림
  • 2016-05-28
  • 조회 수 124

악덕, 공공성, 제도의 영혼   1 인류에게 언어가 생긴 이래 악행(惡行)이나 악덕(惡德)을 묘사하는 숱한 어휘들도 생겨났다. ‘흉악하다’, ‘수전노 같다’, ‘냉혈한이다’ 같은 표현들과 ‘악덕 군주’, ‘악덕 자본가’, ‘악덕 계모’, ‘모리배’, ‘간신’ 등등 그야말로 각양각색, 천차만별의 ‘악덕’에 얽힌 이야기들이 인간언어의 중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덕한 행위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보편적이고도 특별한, 악덕에 관련된 형용어들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목숨을 걸고라도 간절히 기...

메타포, 정원, 공공영역 file

  • 쾌활림
  • 2016-01-29
  • 조회 수 148

메타포. 정원(庭園). 공공영역   1   우주의 역사, 자연의 역사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자연의 역사는 뇌의 생리 속으로 자신의 역사, 그 시간 속 공간 속 축적된 의미들을 전달한다.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된 생활의 고통의 역사는 예민한 신경의 공감적 능력에 자신의 고통을 풀어낸다. 자연이 삼킨 모든 생명체들의 죽음과 개체가 행한 생의 무리수, 공포와 착종된 비전을 그려낸다. 그래서 자연이 종국에서 드러내는 생활상의 과거, 산화(散華)된 경험의 소리와 냄새, 빛과 감각의 모든 스펙트럼을 얼마...

자연의 우울_사실성의 우울 file

  • 쾌활림
  • 2015-12-25
  • 조회 수 392

1 자연이 합법칙적이라는 관념은 근대화된 관내(管內) 학문, 곧 근대과학의 산물이다. 근대적 학문범주에서‘자연’으로 범주화된 세계는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서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자연’도 분명 존재한다. 곧 인간의 ‘생활세계’로 근대과학의 탐구 대상인 자연세계를 자원으로해‘인류 발전’이라는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인류생활로서의 세계이다. 사실상 개인이 몸담고 있는, 개인에 관여되어 있는‘자연세계’는‘자연’으로서의‘생활세계’이다. 과학 연구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자연세계는 추상적인 ...

전통_효과의 사다리, 무의미의 의미 file

  • 쾌활림
  • 2015-09-27
  • 조회 수 1423

1.   아프리카 해안가 어디에선가 부터 해협을 건너고, 지구 표면을 따라 방랑하기 시작한 인류의 족적, 이 발자취를 인류사의 시작이라고 말해도 좋지만, 전통이라고도 명명할 수 있다. 지구 위를 방랑하다가 삶의 터전을 세우고 발 길 닿는데까지 영토화한 일도 흔히 역사라고 불려지지만 ‘전통’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전통을 세운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어딘가로부터 한반도로 흘러 들어와 석기, 철기 시대를 열고, 삼한과 백제, 신라, 고구려를 세운 일도 역사이고,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세운 생활의 전...

자기만의 세계상 file

  • 쾌활림
  • 2015-07-29
  • 조회 수 1202

자기만의 세계상 _  새로운 체험의 초현실 1. 누구나 한번 쯤은 살면서 권태롭기까지 했던, 아귀다툼 같았던 일상이 지상의 행복이구나 하며 느낄 때가 있다. 누구나의 일상이 같은 정도로 만족스럽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힘이 반복되는 생활리듬에서 나왔던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별별 이유와 고통으로 상처받은 마음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은 무너지지 않고 벼터내는 것은 나날의 생계(生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목격하고 체험한, 피해 입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고 싶은, 세상...

제대로 사는 삶의 문제 file [1]

  • 쾌활림
  • 2015-07-03
  • 조회 수 413

1 인류는 ‘무엇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하는 아주 오랜 물음, 문명이라는 이름의 물음에 이끌려 살아왔다. 인간의 문명 특히 서구문명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고민할 까닭이 없는, 이런 물음을 갖지 않는 인간을 인간다운 생명으로 여기지 않아왔다. 제대로 사는 것이, 궁극에서 보면 사회의 공적 영역, 그 부산함에, 시끌벅적한 부(富)와 부를 창출하는 기술과 노동, 사업과 인간관계, 인정과 평가의 사회생활에 크든 작든 자신의 능력으로 끼어들어 살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갈구하는 것이...

예술과 생활2 file

  • 쾌활림
  • 2015-05-28
  • 조회 수 362

김성룡천일야화 프로젝트   1. 역사는 거창한 비전과 계획이 이룬 삶이 아니다. 민족이나 국가, 사회의 특정 계층이나 구성원들 일부가 대량살상으로 인해 혹여 절멸 된다고 해도, 나머지 개인들이 비참한 생활로나마 생존할 수 있다면, 역사는 생존자들의 핍진한 이해관계의 긴장으로 무장돼 미래만 바라보며 나가게 된다. 굶주림과 학대가, 살상과 모반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일상은 새벽위로 떠올라 밤사이로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일상에서 몇몇 극소수 개인들은 다른 공동체와의 전쟁도 기획하고 생의 미화도 만끽하면서 ...

미학이란 무엇인가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263

 1 일반적으로 '미학'이란 단어를 들으면 누구나 조금은 그 뜻을 막연해한다. 그래도 '미에 대한 학문'이니까 예술에 관한 전문지식체계를 다루거나 미용 등 구체적인 생활분야에서 무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과 관련될 때 미학을 언급한다는 정도는 알 수 가 있다. 사실 이런 차원에서의 미학 이해는 틀리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미학'은 얼핏 대하기 만만치 않은 아우라와 수수께끼로 가득 차 보인다. 통념이 과연 맞는 것인가 반신반의 하게 된다. 한편 미학에 대한 통념이 미학에서 실제 다루는 내용과 크게 다...

사회시스템과 미술2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68

1 개인이 자기자신에 대해 모르는 정도는 타인에 대해 모르는 그만큼 더 커진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모르는 정도가 클수록 한 사회가 지닌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불일치가 커진다. 세계화로 전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마치 전지구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이 정도로 나마 서로 인지하고 알고 지낸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뿐더러,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서로 간에 모르는 부분은 너무 많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

인문학의 정치,미술의 정치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487

이인철/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 순수예술과 참여예술 논쟁이 있다. 예술이 정치의 수단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말하자면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발언을 해야한다는 신념을 지닌 예술가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간 참여예술을 주장하는 작가는 보통 좌파진영에 속한 작가라고 추정, 분류되면서 80년대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서 보듯 전시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다. 순수냐 참여냐의 예술적 선택에서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를 예술적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온시하면서‘정치적 미술’로 문제시 한 것이다. 실제 정...

사회시스템과 미술1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96

서용선<단종복위모의>   최경태 <겨울 아침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1.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활로를 얻기 위해 움직인다. ‘생활’(生活)에 나서야 나날의 일상과 자신의 생애가 보장되고 생명의 잠재적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태어나자 마자 생활에 나서지는 못한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경험해야한다. 경험을 위해 배워야한다. 초기 인류라면 생활을 위해 무작정 걸으면서 보고 듣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역사 시대 접어들면서는 생활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배워야했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 체계(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가 경험하고...

경험과 판단의 아카이브_필요하지만 없는 것에 대한 단상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224

  조양규 <31번 창고> * 인간은 살면서 생활의 모든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감정은 어떤 생명체 보다 유별나고 복잡하다. 특히 삶의 감정이 단순히 수동적인 지각현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판단과 경험내용의 복합체이며 주관적인 반응이기도 하고, 지식의 결합물이며 의식의 총체물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어떤 것 보다 특수한 인간만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러한 표상들로 부터 사고와 관념의 상들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의식작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