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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월간미술 연재13)

1
이 세상에 실제하는 공론의 양대 축, 공론이 그 안으로부터 생성되는 원천은 제도와 인간이다. 세상의 저간에 떠도는 갖가지 공론들은 인간 개개인에게서, 그들 모두 간의 삶의 느낌에서 나온다. 이런 가지가지 개인감정과 이해(理解)의 시선들이 실제로 모아져 일정하게 객관화된 것이, 결국 인간의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 정착된 것이 ‘제도’이다.
제도는 제도의 정신으로, 관련된 법으로 움직여진다. 제도는 본질상 인간의 행위가 일으키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예측시스템이자 그자체 인간과 인간의 행위라는 ‘사건’의 아카이브이자, 아카이브에 대한 평가 곧 인간 행동이 일으키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 제어적이고도 평가적으로 존재하는 가치판단 수행성의 기관이다.
제도의 본질과 기능은 ‘평가적’인 데서 나온다. 제도를 통해 행해지는 모든 ‘수행평가’는 생활을 조직하는 ‘통어’ 시스템으로 인간의 비극과 최고의 기쁨을 평준화, 통속화로 일반화 한다. ‘수행성’이란 표면상 제도가 일으키는 ‘규칙운명의 방향성’이고, 그 최종심급은 인간의 ‘인간성’이다. 인간성은 아직 다 기억되지 못한, 규칙화되지 못한 그 무엇이기에 수행성은 예술적일 수 밖에 없다.
제도의 공공적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들을 ‘표면’으로 제어하는,그러면서 규칙화되지 않은 것들이 쓰레기로 떠도는, 바로 그 심연의 상의 미러링으로 행하는 조정기능이다. 일종의 제어기계로써 인간의 안과 밖, 인간 속과 겉, 인간의 위와 아래 생활을, 모든 이의 인생을, 인생 속의 자연과, 인생속의 사회를 움켜잡는다.
제도가 만들어진 다음에는 제도는 일종의 오토마티즘(Automatism) 기계로 작동된다. 하지만 기계는 소유가 가능한 물건이다. 지구도 그렇고, 인간이 인지가능한 모든 별들도 ‘자연’이라는 기계로 인지되면, 우주전쟁을 획책해 소유를 기획할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지구나 우주도 인간이 장악할 수 있는 서비스 매체로 위상이 바뀐다.
하지만 기계도 우주 그 자체처럼 전모가 파악되지 않으면 신으로 군림한다. 제도가 무엇 때문에 생성됐는지, 무엇을 하는 제도인지가 불투명하고 그래서 그 정체가 비가시적이 되면, 제도는 신처럼 기능한다. 제도가 마치 ‘정신’을 지닌 것처럼 인격화된다. 제도가 법의 정신으로 명백하게 ‘기능’으로 움직이면 제도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을 정신을 담지만, 제도가 ‘법의 정신’을 담지 못할 때, 제도는 자의적 정신 자체인양 돌아간다.
제도는 ‘평가’의 언어로 된 기관이다. 제도의 생성은 원래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곧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는 의미에서 자연발생적이라는 것인데, 인간에게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연발생하는 ‘분배와 할당의 필요’에서 생겨난다는 의미에서이다. 평가는 분배와 할당이라는, 인간의 인류학적, 자연사적 행위의 기본적 전제이기에, 제도는 평가적 언어를 그리고 분배와 할당을 명하는 언어로 기능한다.
제도는 이런 의미에서 자연의 정신을 닮는다. 법의 정신이 그렇듯 즉 가장 자연스럽게 법이 법으로 기능할 때 법의 정신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듯, 제도도 자연을 닮을 때 최선의 구체적 기능을 발현할 수 있다.
제도가 개별 인간들의 정신의 총합이거나 혹은 제도를 만든 인간의 정신을 담는 것이 될 때, 제도는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이 때의 제도의 정신은 자의적 성질의 것이 된다.
제도는 사실상 사회화된 자연이다. 사회화된 자연으로 천하위공(天下爲公)의 원리로만 진화하는 것이 제도의 운명, 필연이요, 법칙이다. 적자생존, 혹은 진화의 법칙이, 근대사회 이전 까지는 모든 생명에 적용되는 법칙이었다면, 근대 이후 인간의 생명은,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진화는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생명’은, 제도의 진화를 통해서만 진화가 가능해지고 있다. 이것은 제도가 분배와 할당. 평가의 원리로 전체 인간의 삶을 ‘수행성’으로 인식, 반영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알다시피 인류사에서 제도는 실제로는 권력적 힘들의 실질적 억압장치로 주로 작동됐다. 지배세력들간의, 지배능력있는 인간들간의 시기와 싸움, 찬탈과 사기, 살인과 모략이 인생사가 되고, 이렇게 승리한 자가 무력한 인간들을 지배하기 위한 우성학적 제어기관으로 제도가 이용, 군림됐고 성립했기 때문이었다.
현대의 사회에서는 권력적 능력으로 정당화된, 반공공적 지배도구로서의 ‘제도의 정신’과, 천하위공의 정신에서 자연발생됐고 자연에 따라 혜택을 분배하고 소여를 적정성과 보편타당한 원리로 할당해온 ‘제도의 정신’ 둘 다가 제도의 안과 밖에 존재한다. 인류의 역사에는, 인류사의 자연사에는 안과 겉이 존재하고 안과 겉이 맞물려 발달했고, 모든 제도에는 이 기억이 각인되어 있다. 인류사의 보수와 진보의 제도정신에는 모든 권력찬탈과 권력의 기쁨의 원칙이 피로써 새겨져 있다.

2
인류 개별, 인간 개개인은 모든 생명을 대표할 수 있는, 대표하는, 즉자적 공론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으로 대표되는, 모든 생명체들의 각각의 생명의 본질적 특성은 생명 자체가 공론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事實)에 있다. 그래서 생명체에 관련된 모든 사실(事實)은 ‘사실’로서 이미 공론적이다. 생명현상에 관련된 ‘사실적 관계’는 ‘생명적 관계’를 의미한다. ‘사실’ 자체가 생명의 현상이다.
그러므로 ‘사실성’은 즉자적인 상태에서의 ‘공론’(公論)이다. 생명의 상태란 사실적 상태에 놓인 그 어떤 상태이고, 그 어떤 상태는 생명적 관계의 사실적 상태로 ‘사실적 상태’는 자신이 처한 생명적 관계에 대한 ‘평가’로 자신의 삶을 전개해 나간다.
그렇지만 문명과 문화, 혹은 지배권력의 제도는 일종의 ‘가상의 공론적 생명체’로 그게 누구든가 하옇튼 권력의 중심부에서 만든 평가체계를 이 가상의 생명체의 가치라고 해왔고, 거기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의 존재의 요구는 매개될 수가 없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은 이같은 가상적 평가체계에 종속돼 살아왔고, 여전히 그렇게 살게 되겠지만, 모든 생명 하나하나는 자신의 원래의 생명 그 자체의 감각, 곧 자기만의 공론을 자신의 생명성으로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이 또한 자연사이기도 하다.
모든 개별 생명 속의 다 드러내지 못한 혹은 다 누리지 못한 생명 또는 ‘값어치’ 없는 삶은, 뭇 생명이 거쳐온 숱한 생명의 사실들에 관한 기억들의 ‘숨은 신’의 역사이자 생명에 간직된 공론으로, 바로 이렇게 자신의 생명이 놓여있는 상황을 또한 스스로도 평가하면서 자신의 목숨의 값어치를 침해당하지 않으려 해온, 당연히 저항적 일 수 밖에 없는, 다른 인문적 해석의 가능성을 탐구할 수 밖에 없는 자연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자연사는 민족과 국가, 사회와 문화의 역사와 그 제도사의 상위 역사이다.
사실관계를 규정하는 혹은 형성, 구조화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평가의 원리’이다. 자연사에서 사실관계는 분배와 할당, 나아가 분배되어야할 것과 할당되어야만 할 것에 대한 평가의 결과로 나타난 관계를 의미한다. 모든 ‘사실성’은 분배와 할당의 형평성의 ‘사실’로서 구성된다. 철학은, 철학에서의 진리와 진실 개념은, 혹은 ‘판단력 비판’, 혹은 ‘조화’, ‘중용’, ‘인’(仁)의 개념은 ‘분배와 할당’의 타당성에 일치하느냐의 관계진실을 논한다. 그리고 그 관계진실은 ‘평가론’으로 나타난다. 곧 가치론이다.
예를들면 미술에서도 대상평가, 대상 속의 부분들의 중요성과 그 관계들이 지닌 중요성의 가치를 어떻게 가치평가해 2차원 평면에 재맥락화하고, 그 재맥락화를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가치있는 구성(곧 제도)으로, 원근법적으로거나 혹은 탈 원근법적으로 재현하느냐가 그 화면의 ‘생명’을 살리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며, 그 화면을 새로운 개별성으로 돋움해내는 첩경이다. 화면을 생명성 있는 것으로 구성, 제도화 시켜내는 화가의 대상의 부분과 전체들에 대한 평가능력이 곧 화가의 능력이다.
인간의 ‘생명성’ 자체가 곧 ‘평가의 원리를 자연상태로 간직’하고 있다. 인류가 쌓아온 문화를 들여다 보면 평가의 원리에서 구축되지 않은 것이 없고, 철학과 과학 등 학문의 원리와 예술비평의 원리, 법의 정신이나 심지어 개인들간의 쑥덕공론도 평가행위요 그 결과물들이다.
생존에 필요한 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평가가 필요하다, 관찰하고, 경험을 축적하고 복잡한 현상들을 추론해 진위판단을 하고 그리고 각각의 결론방향을 두고 종합적 판단을 하는 과정이 평가의 과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자연과학도 인문과학도 사실관계를 평가하면서 성립한다.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규정은 정치적 규정이다.
평가행위는 아메바에서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의 진화와 생존법칙에 필요한 선행학습과정에 포함되어있다. 동서양 철학도 판단원칙과 판단에 따른, 가치의 위중에 대한 평가에 기반해 세워진 평가철학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관계에 대한 평가상의 궁극판단과 평가의 위력을 평가자 개인이나 평가조직의 결정판단만으로 수행하거나, 평가과정은 드러내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평가행위’를 초월적 주재자의 행위로 돌리거나 하면, 결국 평가를 평가권력의 자의적 이해관계 행위로 변질시키게 된다. 이렇게 평가결과상에서 시실관계를 왜곡, 은폐했던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하지만 생명이 처한 ‘사실관계’는 제도화된 평가과정이나 평가기준과는 다른 차원의 평가공론, 즉 개별자에 간직된 성향적 평가행위가 파악한 ‘특수한 사건’이자 ‘특별한 의미의 효과나 징후’로 읽혀진 ‘진실’을 담보한다.
서구 근대 법 정신의 시작과 끝은 ‘만인대 만인의 투쟁’이 벌어지는 사회관에서 시작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개별적으로 찾아나가야 하는 논리로 끝난다.
이러한 법 정신에서의 개인은 동일한 주체들이다. 동질적이요 평등한 생명체들이다. 이들은 마치 개미사회에서의 개미들처럼 동등하게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개별체들로 인식된다. 그래서 주어진 사회에서 전적으로 그 동질적인 값어치의 자기자신을 인정받아야만 하는, 찾아야만 하는 개인, 안되면 자신도 남과 같은 자격을 누리게끔 사회를 만들어야만 하는 개인, 그래서 사회가 이를 제공하지 못할 때 투쟁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찾아나가야 하는, 개인의 투쟁적 상태를 둘러싼 법철학에 기초한다.
이러한 법철학에 의하면, 개인은 모두 서로간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얼핏 매우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주체로 보이지만, 사실상은 개인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만, 국가가 보장해서만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만 값어치를 인정받는다는,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다는 전제적 사고가 깔려있다.
개인은 자유와 평등을 ‘얻기 위해’ 모든 공공조직을 동원해 국가와 싸우거나 공론을 움직여나가야 하는 피곤한 주체가 된다. 개인은 여기서 싸움의 주도적 주체거나 반대로 노예이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하에서만 개인으로, 인간으로 살수 있다. 인간으로 살기를 허락받는다. 주인으로써 인간이거나 노예로서 인간이다.
그렇지만 모든 생명체마다 각자의 선악의 감정, 좋고 나쁨에 관한 성향, 공감형성 능력이 다르고, 따라서 각각의 생명이 처한 사실관계에 대한 평가도 다르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각각의 감각도 개인 내부의 생명성 자체에 각자 다른 분배와 할당의 의미를 사실관계로 구성한다.
각양의 생명들은 질(質)들의 역능들에 대한 개인적 평가기관이다. 평가체계이다. 그래서 자기 생명의 주변 환경과 조건을 보며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능력과 감각이 다르고 결과적으로 사실관계를 다르게 파악한다. 이렇게 형성된 ‘사실성’의 위상은 생명체의 수 만큼 서로간에 다르다는 ‘구별짓기’를 한다. 느끼며 판단하고 생각하며 평가한다.
하지만 ‘개인’은 혹은 ‘개별 생명’은 그것이 사회 속의 ‘개인’으로 등록될 때 이미 개인은 하나의 ‘소외된 제도’이다. 그리고 실재로서의 사회제도는 이러한 차원의 구별짓기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도 수용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 국가라는 제도는 더군다나 일방적 하향적 ‘권력’으로써만 생성됐고, 이러한 제도가 행하는 평가는 결국 권력이 주입하고픈 사실관계 인식만을 확대, 재생산, 발전 시켜왔다. 무수한 생명체들이 담아내는 무수한 공론을 반영하는 보편정신, 분배와 할당의 새로운 조화관계는 예술과 학문 간 그 언저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3
학문으로서의 미학은 창시자 바움가르텐(G. Baumgarten 1714-1762)에 의하면 ‘저급한 감성적 인식의 학’으로 생겨났다. 다시말해 미학은 본능적 인식에 대한 학문인데, 당시에는 이러한 류의 인식을 저급한 것으로 평가했기에 ‘저급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나마 이때 이후로 미학도 여타 학문체계에 연계됐다.
감성적 인식이란 결국 직관적, 본능적 평가능력에 관한 것이고, 평가기관으로서의 개인들의 사실관계 반응능력에 대한 학문인데, 이렇게 발달되기 시작한 미학은 칸트에 이르러 판단력에 관한 비판철학으로 승급된다. 칸트(I. Kant 1724-1804)) 비판철학의 궁극원리는 판단력의 인식적 가치에 대한 것이다. 판단력에 결국에는 ‘비판’ 행위의 정당화, 모든 류의 인식 평가상의 더 이상 환원될 수 없는 합목적적인 기관의 성격을 부여한다.
미학은 이후 생명의 자기 치유 능력, 곧 개별자들의 생명으로부터의 공론인, 각자가 처한 사실관계에 대한 자체적 공감에 보편적 합리성을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학문으로 자리잡는다. 미학은 생명의 자기평가로서의 공론이 스스로를 보편적으로 치유해가는 과정을 고찰하는 학문이다.
비슷한 시기의 또 다른 미학자인 쉴러(F. Schiller 1759-1805)는 그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에서 예술을 매개로 개별적 인간이 소유한 고유한 생명성을 모두를 위한 ‘공공문화’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명마다 지닌 각자의 공론으로서의 가치를 보편적 인간성을 표상하는 문화로 승화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칸트나 쉴러에게 예술은 감각 훈련의 기관이다. 감각을 훈련하는 것은 결국 생의 감각을 갈고 닦는 다는 것이며, 감각을 갈고 닦는 과정은 평가경험과 평가가치관을 능력화하는 과정이다. 가치를 해석하는 과정이다.
문명과 문화, 제도와 나날의 일상은 평가된 것을, 평가하는 것을 경험하며 의미를 축적한다. 문명은 개별적 생명체의 공론 즉 사실관계 판단을 전체를 위한 공통감각의 사실관계 정립으로 바꿔 생명을 이어온, 문화적 의미화 체계를 구체화해온 결과물들이다.
문명은 이런 방식으로 개별 생명이 요구하는 바를 실현하지만, 아이디어의 구체화는 추상화를 통해서만 진전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구체화 과정이 추상화를 동반하면서 생명이 파악해온 본래의 사실관계들은 마치 이것이 추상화의 본래 작용인냥 소외되거나 은폐됐다.
사실관계의 속내가 사상(捨象)되고, 제도는 사실상 ‘법의 정신’의 딱딱한 껍질, 숱한 세월 물러터지고 아문 흔적의, 그래서 자기 보호본능으로만 기능한다. 개인의 공론과 제도의 공론 사이의 간극에는 ‘생활’이라는 외나무 다리만 걸려있다. 그 외나무다리가 인류 간의, 전체 생명 간의 유일한 공감각의 장이다.
알고보면 생명은, 생활은 주위에 대한 평가(Evaluation)로 시작하고 세계로부터 평가받으며 목숨의 활동을 유지, 보존한다. 기실 모든 문명과 문화, 역사는 거대한 평가체계를 유산으로 상속한다. 생활의 활동과 활동의 성과는 특정 사회와 제도가 만든 물화된 평가기준에 의해 가치평가된다. 그런데도 ‘평가’ 자체에 대한 과학적 연구나 인생이 이렇게 ‘평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 자체에 대한 철학은 없었다.
정책평가나 교육평가, 행정상의 업무평가등 전문영역별 평가기준 연구는 존재하나 평가의 철학(Philosophy of Evaluation)은 찾아 볼 수 없다. 모든 철학이 사실상 평가론의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철학 등 제반 학문에서는 평가행위를 수단으로만 파악했던 것이다. 이론적 정합성을 위한 혹은 가치평가를 위한 수단으로 ‘평가’를 하지만, 평가를 목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평가를 받기 위해 생활을 하고 연구 하면서도 평가는 할당된 몫과 기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과정상의 칼날로만 사용된다.
그렇지만 ‘평가’는 모든 생명체의 생명의 진보를 위한, 제도의 실질적 진보를 위한 정신의 근본지향이요 그래서 공공성의 보루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순수 평가적 행위로서만 실현되는 활동을 찾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술적 실천에서이다. 그리고 비평은 이러한 예술에 대한, 예술 속에서의 평가적 행위에 대한 해석과 비판으로 기능한다.
미술의 경우 미술시장이 미술작품에 덧씌우는 가치평가가 작품가치에 대한 순수 비평적, 예술적 평가가 아닌지는 이미 오래됐다. 이 사실관계는 매우 비교적 명료한 사실관계임에도 불구하고 미술교육과 미술사, 미술비평은 오히려 이러한 사실관계를 왜곡시키는 평가기준들을 만들었다. 미술시장의 역사는 시장의 역사, 시장에서 내린 평가의 역사이지 가치있는 작품들의 역사가 아니다. 미술사도 미술사가들이 내린 그들만의 평가의 역사이지 미술의 실제 역사가 아니다.
이런 상황은 근현대미술의 역사와 거의 동시에 시작된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미술을 유일무이한 독창적 가치를 지닌 예술적 ‘물건’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모든 순수미술관, 그러니까 미술을 순수하게 일품성의 새로운 창조(상)품으로 보는 인식과 태도는 미술을 미술제도 내의 예술상품으로 대하는 태도이다.
순수미술 개념이 미술을 상품화 시킨 이래, 사실상 오로지 예술이 되고자 하는 미술은 스스로를 ‘비평’으로 변화시켜왔다. ‘실재의 귀환’은 ‘비평’이 되어버린 예술에서 실현된다.
예술은 스스로를 탈상품화하면서 비로소 순수하게 예술이 되는데, 예술가는 작업을 정치적으로 탈상품화하면서 예술을 비로소 ‘현실’로 작동시킬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어떤 예술도 시장적 평가와의 간극 사이에서의 긴장과 우울을 극복하지 못한다. 예술에 대한 상품성 평가가 미술 제도 안의 모든 행위에 전체화되어 편재하고 있어서이다. 순수미술의 전체주의, 그 전체주의 안에서의 고립감을 감내하기 힘든 것이다.
현재 우리 미술계에서 예를들면, 민중미술 작가들처럼 아예 공공선의 의미를 확정적으로 전제하는 비판적이고 정치적인 ‘순수예술’과는 달리, 작가적 태도와 예술실천 자체가 미술시장의 전체주의와의 공론적 긴장을 드러내기에 그 우울함이 공론기능을 갖게 되는 작가들이 있다. 김용익과 최진욱, 서용선이 이런 작가적 태도를 보인다.
이 작가들은 각기 다른 개별적 공론차원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이들의 공론감각은 끊임없이 ‘비평’으로서의 예술을 시도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스스로의 성질이 ‘공론적 평가’ 성향을 드러낸다. 이들의 생명성의 본질이 공론적 가치를 강하게 선호한다.
이들의 작업은 일종의 ‘비평’이다. 이들의 예술은 물론 각기 조금씩 다른 사실관계 위에 유래해있고 그래서 사실관계들을 다르게 보지만, 각자가 인생 전반과 공공성의 문제에 대한 자기 관여와 자기평가로 스스로가 늘 동요하는 ‘개념’으로서의 비평인 작가적 스타일을 드러낸다.
김용익은 자기자신이 그 계보에 서있는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역사와 모더니즘 미술의 개념으로 인해 마음이 스스로 불편하다. 그렇다고 소위 공공미술이라는 이름의 미술적 실천에 대해서도 일정한 불신적 태도를 보인다. 이런 평가야말로 김용익의 ‘공론적 생명성’이다. 즉 그의 성질(Quality)이다.
서용선의 전선(戰線)은 매우 일상적인 장소에서 보이는 어떤 군상 혹은 군상들에 향해있다. 거리에서, 건널목에서, 회의실에서, 그리고 자신의 방안에서 만나게 되는 어떤 막연한 군상인데, 그의 그림은 이 군상과의 우연한 조우인 바로 그 조우의 순간, 이들과의 잠시만의 마주침에서도 자신에게 느껴지는 공론으로서의 일정한 긴장과 우울, 심하면 공포감을 드러낸다.
이 느낌은 그 순간 그 공간의 공기 전체를 채우지만 그 공기는 사실상 맹목적이고 실제상으로는 아무런 사실관계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느낀다. 그 장소에서 순간적으로 조우한 군상들 하나하나는 서용선이 절대 알수 없는 혹은 알아도 잘 못 안 것 일것이 뻔한, 그런 누구도 알지 못할 사실관계들의 표현임을 안다.
이 조우가 연출하는 모든 사실은 단지 이런 ‘사실’들 뿐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거기에 어떤 징후, 공론적 갈등의 징후, 터져나올 것 같으면서 아무 일도 없는 듯 서로 비껴가는 맹목적 공론적 개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미세한 동요로 감지한다.
이 조우가 내포한, 인간 군상들 개별이 간직한 공론적 평가의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음으로 인한 막막함과 이로 인한 자기만의 고통이 그에게는 있다. 서용선의 이런 공론감각을 일러 일종의 장소 특정적인, 분배되지 않고 할당되지 않은 장소의 몫에 대한 고통감각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서용선의 작품들도 일종의 자기 성질에 대한, 그리고 자기 성질 앞에 나타난 군상과의 조우에 대한 비평이다. 그의 그림은 이런 방식의 장소적 조우에 대한 기록이다. 기록은 반복되고 있지만 기록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기록 사이 어딘가에 있을 공론을 그는 기다리지만, 이미 이 기다림이 그의 업적이 되어버렸다.
정기현의 <닭장 설치>도 비평의 한 방식이다. 정기현의 작업 뿐만 아니라 근래의 공공미술 작업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미래의 예술을 선취한다. <닭장 설치>는 미술로서 행하는 비평의 일환이되 비평 너머 미술이 ‘제도의 영혼’이 되는 한 예를 선보인다. 미술은 제도가 영혼을 구비해야 된다는, 그 감각의 전치를 위한, 사실관계의 전치를 향한 알레고리가 된다. 알레고리로써 작가들의 개별적 공론감각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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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과의 인터뷰 file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176

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과의 지극히 사적인 인터뷰 강성원 (인터뷰는 민미협 30주년 기념 <인터뷰 집>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여차 저차한 이유로 못 실렸음. 이 글은 원래의 인터뷰 글에서 <인터뷰 집> 취지 관련 인터뷰 도입부는 삭제됐음. 그밖에 인터뷰 중간 중간에서도 <인터뷰 집> 관련 내용은 삭제됐음. sns에 올리는 일은 성완경 선생님의 허락 하에. 인터뷰 내용 중 성완경 선생님이 쓰신 글 내용에 대해 질문할 때 성완경 선생님이 쓰신 글 문장을 축약하거나 풀어쓴 경우도 있지만, 선생님이 쓰신 문장 그대로 드러내면서 질문...

<근현대 시각이미지와 여성>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0

미술로 표현된 근현대 여성의 모습은 과연 ’여성‘을 담고 있는가, 여성주의자 혹은 여성주의 미술가들이 그린 여성성은 과연 여성주의를 실현하는가, 여성미술은 어느 정도로 여성해방적 미술을 성취하고 있는가 등등에 대한 간략한 질문형식의 문제제기를 해보자. 역사적 사회적 흐름과 더불어 변하는 여성이미지들에 과연 여성성의 달라진 의미들이 반영되어 있다면 여성미술은 시대마다 얼마나 이런 여성성의 문제자체를 인지, 인식해 담아내는가? 여성작가들의 작가활동상에서의 모습은 얼마나 자신이 옹호하는 여성성과 일치하는가 하...

내 마음의 수선전도(修善全圖)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2

   내 마음에도 ‘수선전도’가 존재한다. 내 마음이 느끼는 서울의 전체상인데 내가 느낀 서울의 심경상(像), 그 바닥이자 하늘이다. 원래 ‘수선전도’라는 말은 중국에서 유래됐다.  한 나라의 ‘수도(首都)’의 의미는 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하는 일 곧 수선(修善)의 시작점을 의미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명칭이라고 한다. 수선전도에는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기관들이 국심(國心)의 세력중심으로 재현돼있다. 오늘날의 광화문 부근 영역이 정부청사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대사관등이 들어서 있으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상징하듯...

_‘퍼블릭 아트’는 동어반복적 개념어이다.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0

<광장의 예술과 퍼블릭(Public Art) 아트 개념> 1 광장   광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광장에서 함께했던 낯선 사람들과의 뜨거운 연대감이다. 광장에 서면 일상 속 불만과 갈등이 내일을 위한 희망으로 바뀌어져 간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 느낌의 순간에 내 옆 어느 낯선 사람도 내 마음에 동참해주고 있다는 벅찬 뜨거움이 올라온다. 굳이 촛불집회같은 광장에서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어디인가 누구나가 갈 수 있고 자유롭게 주변을 누리고 공중의 특별한 간섭없이 내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

깊이의 허영 리얼리즘 변종현실 file

  • 쾌활림
  • 2017-09-17
  • 조회 수 136

1 변종현실   제1의 리얼리티가 있다. 제1의 리얼리티는 제1의 리얼리티를 숙주로 한 기생 리얼리티와 그 변종을 무한증식한다. 리얼리티가 무한증식하는 줄기는 의식상에서의 범주에서이다. 그리고 숙주리얼리티 변종들 바이러스는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항상성을 지녀서 겉으로는 가시화되지 않는다.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것은 제1의 리얼리티가 개인이 해체, 파괴할 수 없는 구조로서의 ‘현실 겉면’이기에, 철의 장막이기에 무한증식하는 숙주 리얼리티는 의식 바탕 저 아래 깊이로 밖에는 변종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file

  • 쾌활림
  • 2017-04-01
  • 조회 수 349

월간미술 4월호 연재 글(그간 반년 가량 개인사정으로 중단 했다가 다시 시작)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1. 맥 컴퓨터와 윈도우 컴퓨터를 사용해 작업한 텍스트나 이미지들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호환을 위해서는 다른 장치를 연결해야 한다. 호환의 필요를 위해 고안된 특별한 수단은 결국 상품으로 구입해야 한다. 구글 시트(Google Sheets)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나 한글 워드로 쓴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호환이 안 되면 텍스트를 복사해서 옮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이 작업들을 메일로 전송하고자 ...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 쾌활림
  • 2016-08-28
  • 조회 수 70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월간미술 연재13) 1 이 세상에 실제하는 공론의 양대 축, 공론이 그 안으로부터 생성되는 원천은 제도와 인간이다. 세상의 저간에 떠도는 갖가지 공론들은 인간 개개인에게서, 그들 모두 간의 삶의 느낌에서 나온다. 이런 가지가지 개인감정과 이해(理解)의 시선들이 실제로 모아져 일정하게 객관화된 것이, 결국 인간의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 정착된 것이 ‘제도’이다. 제도는 제도의 정신으로, 관련된 법으로 움직여진다. 제도는 본질상 인간의 행위가 일으키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예측시스...

민중미술의 미학 file

  • 쾌활림
  • 2016-05-30
  • 조회 수 410

민중미술의 미학   1 미술가가 자신이 직접 본 광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동, 서양 모두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였다. 미술가는 이즈음부터 자신이 본 생활상의 장면에 자신의 감정과 세계에 대한 관심을 듬뿍 담아 일정한 틀 속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보다 더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밑바닥 인생들이다. 사실상 일반적인 사회경관 대부분의 광경들은 작가 주변의 일상생활 아니면, 사회 밑바닥 층의 헐벗고 남루하고 그럴 수 없이 가난한 삶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 자연스레 인생에 회의가 들고 인생의 고통 전반에 생각이 ...

악덕,공공성, 제도의 영혼 file

  • 쾌활림
  • 2016-05-28
  • 조회 수 154

악덕, 공공성, 제도의 영혼   1 인류에게 언어가 생긴 이래 악행(惡行)이나 악덕(惡德)을 묘사하는 숱한 어휘들도 생겨났다. ‘흉악하다’, ‘수전노 같다’, ‘냉혈한이다’ 같은 표현들과 ‘악덕 군주’, ‘악덕 자본가’, ‘악덕 계모’, ‘모리배’, ‘간신’ 등등 그야말로 각양각색, 천차만별의 ‘악덕’에 얽힌 이야기들이 인간언어의 중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덕한 행위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보편적이고도 특별한, 악덕에 관련된 형용어들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목숨을 걸고라도 간절히 기...

메타포, 정원, 공공영역 file

  • 쾌활림
  • 2016-01-29
  • 조회 수 169

메타포. 정원(庭園). 공공영역   1   우주의 역사, 자연의 역사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자연의 역사는 뇌의 생리 속으로 자신의 역사, 그 시간 속 공간 속 축적된 의미들을 전달한다.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된 생활의 고통의 역사는 예민한 신경의 공감적 능력에 자신의 고통을 풀어낸다. 자연이 삼킨 모든 생명체들의 죽음과 개체가 행한 생의 무리수, 공포와 착종된 비전을 그려낸다. 그래서 자연이 종국에서 드러내는 생활상의 과거, 산화(散華)된 경험의 소리와 냄새, 빛과 감각의 모든 스펙트럼을 얼마...

자연의 우울_사실성의 우울 file

  • 쾌활림
  • 2015-12-25
  • 조회 수 422

1 자연이 합법칙적이라는 관념은 근대화된 관내(管內) 학문, 곧 근대과학의 산물이다. 근대적 학문범주에서‘자연’으로 범주화된 세계는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서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자연’도 분명 존재한다. 곧 인간의 ‘생활세계’로 근대과학의 탐구 대상인 자연세계를 자원으로해‘인류 발전’이라는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인류생활로서의 세계이다. 사실상 개인이 몸담고 있는, 개인에 관여되어 있는‘자연세계’는‘자연’으로서의‘생활세계’이다. 과학 연구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자연세계는 추상적인 ...

전통_효과의 사다리, 무의미의 의미 file

  • 쾌활림
  • 2015-09-27
  • 조회 수 1443

1.   아프리카 해안가 어디에선가 부터 해협을 건너고, 지구 표면을 따라 방랑하기 시작한 인류의 족적, 이 발자취를 인류사의 시작이라고 말해도 좋지만, 전통이라고도 명명할 수 있다. 지구 위를 방랑하다가 삶의 터전을 세우고 발 길 닿는데까지 영토화한 일도 흔히 역사라고 불려지지만 ‘전통’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전통을 세운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어딘가로부터 한반도로 흘러 들어와 석기, 철기 시대를 열고, 삼한과 백제, 신라, 고구려를 세운 일도 역사이고,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세운 생활의 전...

자기만의 세계상 file

  • 쾌활림
  • 2015-07-29
  • 조회 수 1221

자기만의 세계상 _  새로운 체험의 초현실 1. 누구나 한번 쯤은 살면서 권태롭기까지 했던, 아귀다툼 같았던 일상이 지상의 행복이구나 하며 느낄 때가 있다. 누구나의 일상이 같은 정도로 만족스럽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힘이 반복되는 생활리듬에서 나왔던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별별 이유와 고통으로 상처받은 마음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은 무너지지 않고 벼터내는 것은 나날의 생계(生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목격하고 체험한, 피해 입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고 싶은, 세상...

제대로 사는 삶의 문제 file [2]

  • 쾌활림
  • 2015-07-03
  • 조회 수 457

1 인류는 ‘무엇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하는 아주 오랜 물음, 문명이라는 이름의 물음에 이끌려 살아왔다. 인간의 문명 특히 서구문명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고민할 까닭이 없는, 이런 물음을 갖지 않는 인간을 인간다운 생명으로 여기지 않아왔다. 제대로 사는 것이, 궁극에서 보면 사회의 공적 영역, 그 부산함에, 시끌벅적한 부(富)와 부를 창출하는 기술과 노동, 사업과 인간관계, 인정과 평가의 사회생활에 크든 작든 자신의 능력으로 끼어들어 살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갈구하는 것이...

예술과 생활2 file

  • 쾌활림
  • 2015-05-28
  • 조회 수 376

김성룡천일야화 프로젝트   1. 역사는 거창한 비전과 계획이 이룬 삶이 아니다. 민족이나 국가, 사회의 특정 계층이나 구성원들 일부가 대량살상으로 인해 혹여 절멸 된다고 해도, 나머지 개인들이 비참한 생활로나마 생존할 수 있다면, 역사는 생존자들의 핍진한 이해관계의 긴장으로 무장돼 미래만 바라보며 나가게 된다. 굶주림과 학대가, 살상과 모반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일상은 새벽위로 떠올라 밤사이로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일상에서 몇몇 극소수 개인들은 다른 공동체와의 전쟁도 기획하고 생의 미화도 만끽하면서 ...

미학이란 무엇인가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340

 1 일반적으로 '미학'이란 단어를 들으면 누구나 조금은 그 뜻을 막연해한다. 그래도 '미에 대한 학문'이니까 예술에 관한 전문지식체계를 다루거나 미용 등 구체적인 생활분야에서 무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과 관련될 때 미학을 언급한다는 정도는 알 수 가 있다. 사실 이런 차원에서의 미학 이해는 틀리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미학'은 얼핏 대하기 만만치 않은 아우라와 수수께끼로 가득 차 보인다. 통념이 과연 맞는 것인가 반신반의 하게 된다. 한편 미학에 대한 통념이 미학에서 실제 다루는 내용과 크게 다...

사회시스템과 미술2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94

1 개인이 자기자신에 대해 모르는 정도는 타인에 대해 모르는 그만큼 더 커진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모르는 정도가 클수록 한 사회가 지닌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불일치가 커진다. 세계화로 전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마치 전지구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이 정도로 나마 서로 인지하고 알고 지낸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뿐더러,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서로 간에 모르는 부분은 너무 많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

인문학의 정치,미술의 정치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568

이인철/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 순수예술과 참여예술 논쟁이 있다. 예술이 정치의 수단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말하자면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발언을 해야한다는 신념을 지닌 예술가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간 참여예술을 주장하는 작가는 보통 좌파진영에 속한 작가라고 추정, 분류되면서 80년대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서 보듯 전시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다. 순수냐 참여냐의 예술적 선택에서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를 예술적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온시하면서‘정치적 미술’로 문제시 한 것이다. 실제 정...

사회시스템과 미술1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33

서용선<단종복위모의>   최경태 <겨울 아침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1.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활로를 얻기 위해 움직인다. ‘생활’(生活)에 나서야 나날의 일상과 자신의 생애가 보장되고 생명의 잠재적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태어나자 마자 생활에 나서지는 못한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경험해야한다. 경험을 위해 배워야한다. 초기 인류라면 생활을 위해 무작정 걸으면서 보고 듣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역사 시대 접어들면서는 생활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배워야했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 체계(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가 경험하고...

경험과 판단의 아카이브_필요하지만 없는 것에 대한 단상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249

  조양규 <31번 창고> * 인간은 살면서 생활의 모든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감정은 어떤 생명체 보다 유별나고 복잡하다. 특히 삶의 감정이 단순히 수동적인 지각현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판단과 경험내용의 복합체이며 주관적인 반응이기도 하고, 지식의 결합물이며 의식의 총체물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어떤 것 보다 특수한 인간만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러한 표상들로 부터 사고와 관념의 상들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의식작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