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악덕,공공성, 제도의 영혼

조회 수 154 추천 수 0 2016.05.28 12:59:39

악덕, 공공성, 제도의 영혼

 

1

인류에게 언어가 생긴 이래 악행(惡行)이나 악덕(惡德)을 묘사하는 숱한 어휘들도 생겨났다. ‘흉악하다’, ‘수전노 같다’, ‘냉혈한이다같은 표현들과 악덕 군주’, ‘악덕 자본가’, ‘악덕 계모’, ‘모리배’, ‘간신등등 그야말로 각양각색, 천차만별의 악덕에 얽힌 이야기들이 인간언어의 중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덕한 행위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보편적이고도 특별한, 악덕에 관련된 형용어들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목숨을 걸고라도 간절히 기록했을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악한 마음과 행위는 실제로 존재 한다. ‘’()은 인간의 사실적 성정이고 인류사와 인간사는 악한 마음과 싸우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악은 인간사에 대한 개인의 모든 느낌과 생각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본래적인 모티브이다. 악이 존재하기에 혐오감도 생긴다.

인간사에는 미덕에 대한 이야기이기 보다는 악덕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다양하고 강렬하다. 예술과 역사와 민담이 기록한 악덕의 역사의 깊이는 심산구곡에 감추어진 전설과 산 속 나뭇잎과 이끼에 낀 음양의 찬란함 보다 깊다. 인류의 기억에 잔상으로 남은 악덕은 심지어 진지하기까지 하고 성실하거나 때로는 데카당스하고 문화적이거나 이념적이기까지 하다.

악덕은 예술적이기 까지 하다. 예술처럼 인생에 대해 풍부한 관점을 표현하기에 그렇다. 악덕은 화려한 변론과 정치술을 갖춘, 이해관계를 뚫고 나가는 자기연민과 자기애(自己愛)의 지혜를 갖춘 회심(悔心)이기도 하다. 악덕은 가장 인간다운 면모를 갖춘 자의 것이기도 하다. 인생에 악덕이, 악질이, 악의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사실상 예술가들의 기교 넘치며 개념적이면서도 정갈한, 삶의 여러 즐거움을 표현하는 작업들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술은 상품미학적 진가만 탁월하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인생의 모든 국면과 상황에서, 인간관계에서 악덕은 모든 이해(理解)에 적대감이라는 동기를 감춘다. 이해(理解)의 이해(利害)는 반복해서 자신의 감추인 적대감만으로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전쟁을 부추기는 불만과 무지, 안하무인과 이기성으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기쁨을 찬탈하고 착취, 기만한다.

악덕의 결과는 누구에게나 해()로 남는다. 이런 사정으로 누구나 할 것이 인류 감정의 중추체계는 나는 억울하다, 그러므로 나는 고발하고 행위한다'는 사연에 의해 감시, 통제되는 파놉티콘 체계를 구성된다. 인류의 심리는 나는 억울하다로 진화의 방향을 찾는다.

개별자로서의 개인은 자기와 친밀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악덕과 미덕으로 말미암아 겪은 감은(感恩)과 보은(報恩)과 복수와 비난으로 이어지는 자기감정과 자기논리와, 배제와 경멸, 환멸과 자괴감의 파놉티콘 하에서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며 인생을 계획한다. 그 이야기에 담긴 은원을 해체하지 못한다.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에 갇힌 자아야말로 자신을 가둔 가장 강력한 감옥이다. 그리고 모든 개별적 자아들은 자기와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이 은원의 내러티브에서 사회적 이해관계에 대응한다.

개별자들이 이런 시야로 사회와 맺은 합의는 사실상의 잠정적 타협적 합의이다. 그리고 개별자와 개별자들 간의 사적 합의도 결국 개인 간의 완벽한 궁극적인 합의는 불가능하다는 생애의 경험을 전제로 받아들인, 방편적 합의이다. 그래서 강제와 타협과 절충의 해묵은 관행이 명분상 합의로 수용 될 수 있다. 이로 인해 공공성은 개인이든 사회든 어디든 간에 실체적 진실로서는 닻을 내릴 수 없고, 악덕은 스스로가 목숨 걸고 있고, 자아의 모든 희노애락이 그로부터 나오는 자신의 인생사에 관한 내러티브에 더욱더 말뚝 박는다. 불모의 인격,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인간성의 여러 면모로 전개된다. 악덕은 단 한 번의 생이기에 만끽해야할 생명의 즐거움과 자유를 가로채고, 인생을 살아남아야할 가공할 실재성의 장소로 공고히 한다.

예술의 역사를 들춰보면 각양각색의 악덕들과 고통의 사례들이 넘쳐난다. 사실상 예술은, 그리고 위대한 예술일수록 악덕으로 인한 번민은 처절하게 사실적이다. 예술사는 온갖 악덕에 대한 비판과 조롱, 악덕을 극복하기 위한 도전과 해학들을 그려낸다.

인생에서 미덕은 그 의의가 비교적 선명하나 악덕이 악덕인 진실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 인간 본연의 의지가 원래 악덕에 찬듯 악덕은 인간적이어서 때로는 악덕과 미덕의 경계를 가르거나 뿌리를 나누기가 어렵다. 분명한 것은 악덕의 본질이 이해관계‘(利害關係)라는 사실이다. 과학으로 악덕의 진실을 파악하기에는 과학은 너무 실증주의적이다. ’현대성은 실증적이기만 할 뿐, 악덕의 변증술은 파악할 수가 없다. 통속 문화가 악의 꽃으로 피어난다. 실증세계의 문화는 통속의 문화이다.

정체성개념은 악덕의 은신처이다. 모든 개별자(개인이든 국가든, 아니면 협회든 단체든)들이, 모든 사건들이 자신의 권리를, 자기 일의 정당화를 생존의 명분으로 들이밀면, 악덕은 그 자체로 인생일 수밖에 없는 그 무엇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실증주의는 더 이상 악덕을 규정해내지 못한다. ‘악덕은 인생의 실제가 아닌 듯. 마치 인생 저 너머 어떤 불확실한 상징이기만 한 듯 느껴진다.

이렇게 해 우주의 역사만큼 영원한, 지극히 구체적인 악덕의 농간은 인식되지 않는다. 악덕 상인의 저속하고 비열한 속내는 상업행위의 목적과 수단으로써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는, 남의 저간의 사정일 뿐으로 받아들인다.

 

2

로마의 기독교 시인 프루덴티우스(A. C. Prudentius 348-405)가 그의 <영혼의 전투 Psychomachia>에서 서구 최초로 악덕과 미덕의 싸움을 묘사했다고 전해진다.1)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도 “...일종의 윤리적 총체로서 미덕과 악덕의 완벽한 체계가 장식으로 사용되고 있다.”2) 그리고 전승된 동, 서양의 고사성어들과 속담들은 인간이 살면서 맞부닥뜨린 각양각색의 사실, 악덕을 비롯한 행위의 다면적 방향성과 양가성, 복수적(複數的) 진의가 발생할 수 있는 특이점들에 대한 전언(傳言)들이다. 인간이 남긴 모든 기록들은 사람에게 해가 될 일과 득이 될 일, 하나의 현상이 가리고 있는 다중적 국면들을 예증하고 있다. 판결문도 악덕과 미덕의 사실관계의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공론화한 예시들이다.

사이비(似而非)라는 한자 뜻에는 선량해 보이나 실은 악덕이라는 뜻이 있다고 전해진다. 맹자의 제자가 묻기를 한 마을 사람들이 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든 훌륭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들을 가리켜 향원(鄕原:사이비 군자)은 덕을 해치는 도둑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라고 묻는데, 이에 맹자는 그들을 비난하려 해도 들어서 비난할 것이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구실이 없으나 세속에 아첨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한다. 또 집에 있으면 충심과 신의가 있는 척하고, 나아가 행하면 청렴결백한 척한다.... 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3) ‘사이비는 미덕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악덕인 어떤 모습을 가리키는데, 사이비에 속아온 인류는 악덕을 구별하고자 노력하면서, 삶에 대한 백과사전처럼 그 구별방법을 전승한다.

그래서 무지도 일종의 악덕으로, 모종의 악덕이 유출될 수 있는 몽매의 상태로 구분한다. 무지의 늪에서 튀어져 나온 억견(臆見)이 그 평범성으로 악덕을 자행하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악덕으로 행한 행위와 평범한 일반적 자기 이익 추구 행위는 구분하기도 힘들다. 단지 과다성의 문제일 뿐으로 보인다. 악덕의 평범성, 악덕의 사이비한 측면은 사회의 끈질긴 노력으로 밝혀질 수 있고, 그 차이에 대해 혹여 잊어버리지 않도록 명심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악덕에 관한 이야기로는 성서의 바벨탑이야기도 있다. 인간들이 힘을 합해 하늘 끝 까지 치솟는 거대한 사업들을 꾸미는 것을 본 후, 하나님은 인간들이 힘을 합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인간들 사이의 같은 말의 힘이 인간의 욕망을 산처럼 쌓는 도구가 되기에, 오로지 자기주변 사람들을 위한 말들만이 서로 이해가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끼리끼리 어울려 살게 된 같은 인간 종()인 자기 종족 내에서만 통하는 말만을 허용한 것이다.

인류 전체가 서로 통하는 보통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지역에 뿌리를 둔 언어가 특정 공동체의 진실 구심체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인류에게 인류 역사 전체를 함께 기획하고 인류 역사 전체를 다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게 된 것이다.

인류는 지역성이라는 정체성의 경계 내에서 통용되는 악덕과 미덕의 체계화로 자신을 가두었다. 각자의 지역(혹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체성)에서 각자만의 체계(공화국의 이상)’의 탑을 세우면 그 안에 향원(사이비 선비)들도 나래를 피고 공화국으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게다가 복잡한 점은, 자기 사회의 공론에 몽매한 개인도 바로 자신만의 특정 정체성의 보통 언어를 사용하는 개인으로 공론의 담지자요, 그 밖의 모든 사회적 정체성의 주창자들도 스스로 개별적 공론 담지자로서 전제된다는 점이다.

저널의 여론도 공론이고, 국론을 내세우는 국가도 공론의 담지자이다. 그리고 이런 저런 사회의 미덕과 악덕을 그 근본에서부터 구분하고자 하는 막연한 공공성의 이념도 공론이다. 이중 가장 추상적이고 강제적인 공론은 개인의 사적인 의견이나 여론이나 국론 등과 같은 구체적 의견들이 아니라, 미덕과 악덕의 알레고리를 풀어낼 수 있는 시금석 같은 절대 진리의 공공성을 구()하고자 하는 공론이다.

현대사회는 공공성으로 지어진 만인의 집인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오랜 꿈을 품어왔다. ‘인류가 쓰는 보통 언어의 실제적 이상에 깃들인 공화국을 세우고자 한다. 인간 공동체가 자신들의 공통 감각의 언어로 세운 공동체의 이상적 상태라는 이념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공공성의 비전이다.

공공성의 이념만이 전체 인류보통 언어로 세운 가장 인류다운 공화국을 기획한다. 하지만 그래서 강제성을 띤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인간들이 힘을 합해 행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대상과 사건에 대한 평가와 분석, 구분과 배제는, 공동체의 이상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위해 필요했다.

한 개인의 의견이나 특정 저널의 여론등은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 의견을 보통의 말의 진실을 담는 공론이라 주장하고, 그러다가 서로를 부당시도 하고, 은밀히 모종의 이견들과는 절충을 하기도, 밀약을 맺기도 한다. 다른 말의 진지들에서 지속적으로 불거지는 무지와 보은과 복수의 악의들이 서로 간에 불화를 일으키며 충돌하기도 하며 이보다 더 작은 단위의 무수한 개별 이해체가 사용하는 보통 언어의 악덕들도 덩달아 존재의 이유를 인정해달라고 나설 수 있다.

이런 시선들에서 보면 공공성이념은 강제적이다. 가장 추상적인 보편의 언어를 사용하는 관념체인 상태로 절대군주의 일반의지가 곧 국가라는 근대성의 속성을 계승한다. 바벨탑 해체 이후 자기 친밀성만을 가진 종족의 보통의 공통 언어가 생겼지만, 종족 언어를 지양하고자 하는 공공성의 언어는 인간 전체의 보통 언어에 대한 종족 언어의 무지를 악덕이라며 억압해야만 인류 전체를 위한 미덕의 탑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견 자유는 자본과 시장에서만 구가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평등은 새로운 공화국이 완전해진 이후에나 누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결국 공공성의 이념은 구체적으로 전체를 위한 공통의 미덕이 왜 타당한지에 대한, 미덕의 무수한 변별점들에 대한 공감이라는 이해를 들춰내지 못한다. 공공성은 전체주의적 표상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에 개별 인간들은 자기 안에 심어진 신의 경고와 상처를 정당화하기 위해 개인주의라는 비밀의 화원을 가꾸거나, 문화적 다양성과 문화적 차이라는 개개 이종(異種)들 간에 서로 구별되는 정체성의 정당성을 가치관으로 삼는다.

각자가 자기만의 방언으로 미덕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인데, 이로써 신의 의지도 다시 좌절된다. 개인은 자기 방언이라는 최후의 모나드적 공공성을 갖게 됐고, 그 안에서 인류 전체를 구상하며 전체 인류를 표상한다. 개인주의에서 보편 인간의 이념을 본다. 실존적 단독자에 갇힌 자기만의 우주에 유폐되어 자유를 구가한다. 이 개인들은 나아가 동종의 개인들끼리의 하늘을 찌르는 취향 공동체를 다시 만든다.

 

 

3

양지바른 곳에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발현하고자 하는 악덕과, 음지에서 고고하게 자기 정체성만이라도 보존하려는 자의 음란한 대 여론 시선은 부패한 거리에서 방황하며 각자의 영혼의 투쟁을 한다. 이러한 영혼도 문화의 이름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오랜 훈련이 필요한, 공공애를 지닌 자율적 실천 주체의 형성을 위해 이념의 전유를 악덕과 미덕의 체계로 끊임없이 공론화하는 시도도 악덕일 수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에서도 악덕이 배양된다. 법의 이념에도 양가성은 존재한다. 계급의식에도, 배제와 차별에 대한 저항에도 악덕이 존재한다.

악의 구체성은 형언하기조차 힘든 구체적 억견들과 생활의 구체적 계기적 면면들로 세상사에 개입되어 있다. 한 개인이 지내온 시간과 공간의 조건과 그 과정들에 대한 자기인식으로 구성된 이해에는 모든 순간과 공간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악덕들과의 조우들의 연속적 계열적 경험들이 내포돼 있다. 개인의 가시화될 수 없는 경험은 그가 겪은 악덕의 외연적, 내포적 총체성을 포괄한다.

인간은 인류 수천년 역사의 악덕과 미덕의 산물과 그 영향관계의 결과물들을 유전자처럼 이어받는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억 속의 모든 에피소드들, 선택한 결정들과 그 안에서의 기쁨과 우울함에는 악덕이거나 악덕과의 타협이거나 거기서 헤쳐 나온 경험, 곧 질시와 배타, 기만과 경쟁과 폭력의 순간들이 자리 잡는다.

법과 공중도덕, 상식과 공공성 같은 일반의지의 다양한 여러 사회적 요청들은 일견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초자아의 기능을 담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누군가 이러한 여러 류의 공공의지와 교집합 되지 않는 심성을 가진 사람에게 이 의식범주들은 기만이거나 사회적 퇴보로도 보일 수 있다. ‘일반의지들 간의 협치의 명분에도 표리부동한 교언영색의 농단(壟斷)과 비속함이 있다. 개인의 정의감에도 그늘이 있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쉴러가 정신과의 대화 없이 감성적인 관심만을 자극하는 것은 모두가 비속한 것이다. 본래부터 이미 그 소재나 내용으로 보아 비속한 많은 사물이 존재한다”4)고 지적했지만, 본래부터 이미 비속한 많은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본래부터 비속하고 저속한 사람도 존재한다. 그것은 고급문화에 의해 교육받은 사람인가 아닌가의 문제도 아니고 지배계층은 고귀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비속하다는 것도 아니다.

비속함과 저속함은 자본가와 자본가의 악덕에 짓밟힌 밑바닥 사람들 모두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계층이나 취향,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비속하거나 저속 한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아니 이들이 인류의 대다수를 이룬다. 혹은 공공애(公共愛)를 가진 사람들의 내면에서 조차 비속함과 저속함은 가늘고 길게 그의 인생의 길에 따라 수면위로 떠오르거나 무의식으로 억눌려 있기도 한다.

시인이 중요하지 않은 행위를 세밀하게 서술하고 중요한 행위를 흘려버린다면 그는 자신의 소재를 비속하게 다루는 것이 된다. ..... 저속은 비속의 한 단계 아래에 위치하며, 비속과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다르다. 즉 그것이 단지 소극적으로, 다시 말해서 단지 활기와 고귀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뿐 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다시 말해서 감정의 조잡성, 악습, 비하할만한 심성을 보이는 점에 있어서 다른 것이다. 비속은 다만 소망스러운 장점의 결여를 입증하고, 저속은 만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성질의 결여를 입증한다. 그렇게 때문에 이를테면 복수심 그 자체는 어디에 있건, 어떻게 나타나건 비속한 것이다. 그것은 관대함의 결여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수심을 실천하는 인간이 그것을 만족하기 위해서 비열한 수단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특히 저속한 복수로 구별된다.”5)

쉴러의 이같은 비판은 생활의 모든 선택에 적용될 수 있다. 중요하지 않은 행위를 세밀하게 서술하고 중요한 행위를 흘려버리는 정치가나 도덕론자가 있고, 중요하지 않은 행위를 의도적으로 세밀하게 서술하고 중요한 행위를 흘려버리려는 이해관계가 있다. 인류 전체를 위한 중요한 이익의 구축에 선별과 선택의 우선성을 두지 않는 행위는 비속하고 저속해 보인다.

공공성이라는 특별한 이념은 비속하고 저속한 상태를 벗어나야한다는 오랜 인류의 경험, 염원을 통해 생겨난다. 인류 전체의 지속적인 행복의 조건이 지금, 여기에서 가차 없이 형성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긴장에 찬 생활 당위성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행복에 대한 요구는 계몽주의의 목표에 대한 긍정이자 찬양이다.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 계몽주의의 핵심은 우리 중 일부 혹은 우리 모두가 완전한 숙달, 자기통제, 지식 등의 계몽된 상태를 이미 성취했거나 언젠가 그러한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은 인간이 훈련될 수 있다는 사실,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역사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그리고 통치의 영역에서 이는 행함에 의한 배움을 수반해야한다. 토마스 제퍼슨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에서 자치를 하기 위한 자질들은 타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습관과 오랜 훈련의 결과입니다.”6)

문제는 공공선을 향한 사회 전체의 밑그림 작업은, 이 전체 밑그림은 인구 전체의 공통적인 평등한 행복을 표상하지만, 실행과정에서 개별 욕망에 대한 역지사지의 이해가 결핍되어 있거나 개인 욕망과의 공통분모를 추상적으로 공유 할 뿐이다. 그러면서 교육계몽의 이름으로 개인을 강박적으로 몰아세운다. “국가의 형성은 실험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 시행과정은 한편으로 많고 적은 맹목과 우연과 함께, 중단과 시도의 무질서한 과정 그리고 실수와 더듬질을 통해서 진행될 수 있다.”7)

이 과정에서 맹목과 우연, 중단과 시도, 실수와 더듬질이 피할 수 없는 사회생활의 악질적 문제이고, 더군다나 이 악이 고질적으로 행해진다면, 이 악덕은 민주주의의 악덕이라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악덕이 민주주의적 결정에 의한 일, 혹은 계몽의 필요상의 일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개인의 심정에 저절로 떠오르며 생애에 걸쳐 고스란히 머문다.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심정들은 답변을 기다린다. 영혼의 나만의 투쟁을 하기도 한다. 개인은 그러면서 우주에서의 자신의 인생의 몫을 계산한다. 민주주의이든 전체주의이든, 악덕이든 미덕이든 상관없어진다. 생활의 근저에서 내다보면 믿을 수 없는 공론(空論)들이다. 사실상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이고, 자본주의나 파시즘 체제가 차라리 표리부동하지 않다. 표리부동하지 않으면 전체주의 보다 옳다.

. 현대성이라는 실증주의적 민주주의 체제하에서의, 공론장의 위임주체들의 아집과 어리석음이나 틈틈이 자행되는 저속함으로 인해, 성과를 위한 비열한 수단과 관대함의 결여로 인해, 더듬질로 인한 혼동과 실수로 끊임없이 사회적 동요가 일어나, 보통의 개인들에게는 더불어 사는 일의 불합리성에 대한 의식은 내면화된다. 공통의 언어에 대한 믿음에 수많은 미세한 내적 균열이 일어난다. 사회 전체를 위한다는 명분에 공감할 수 없다.

결국 존 듀이는 따라서 국가를 발견하는 문제는 이미 존재하는 제도를 검토하는 데만 종사하는 이론적 연구자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과의 연합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또는 인류 전체의 실천적 문제이다. 그것은 복합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무리를 이룬 개인의 행동이 낳는 결과를 지각하고 인지하는 능력과 또 그것을 그 원천과 기원으로 소급할 줄 아는 능력을 요구한다”8), 존 듀이의 실용주의는 인간의 비속함과 저열함을 계산한다.

하지만 미리 설정하고 실현하기만 하면 자동으로 좋은 국가를 만들어 내는 선천적 규칙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서로 동일한 공공성은 언제 어디에도 출현할 수 없다. 각각의 조건이 연합된 행동의 결과와 이 결과에 대한 지식을 달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공성이 정부로 하여금 공적 이익에 봉사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은 천차만별이다. 최선의 국가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지 형식적으로만 말 할 수 있을 뿐”9)이라고 주장한다.

근대철학이 진리라고 불렀던 것을 후기 현대사회에 들어서면 공공성이라고 부른다. 공공성의 이념은 선의 보편적 추상성과 악덕의 구체성을 무한성으로 곧 전체로 사유하면서 전체의 진리치에 대한 객관적 언어를 구한다. 그것은 이성의 상상하는 사유’10)에 도전한다.

료타르는 칸트의 비판서들의 명제들을 분석하면서 “‘나는 생각한다의 유일한 목적은 판단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11), “칸트에 의하면 반성이란 인식의 서로 다른 근거들에 주어진 표상들 간의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12), 혹은 무한은 하나의 전체로서 총괄할 수 없다:공포”13), “무한성은 하나의 전체로서 사유할 수 있다 : 심적 고양”14)이라는 논지들로 난관에 처한 정당성의 위기, 현대 공론장의 무수한 사이비 진리치에 대해 사유해간다. 료타르의 이 토픽들을 다음과 같이 바꿔 읽을 수도 있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의 유일한 목적은 일반의지(곧 공론)에 대한 판단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반성이란 인식의 서로 다른 근거들, 개인의 악덕이나 아니면 공론에 대한 불만, 일반의지의 반공공성과 전체주의적 경향 등 이들 표상들 간의 관계에 대한 의식이다’, ‘전체 개인들의 욕망을 하나의 전체로서는 총괄 할 수 없다 : 공포’, ‘이들 전체 개인들의 욕망은 그러나 하나의 전체로서 사유해 볼 수는 있다 : 심적 고양이라고 말을 바꾸어 볼 수 있다.

인구의 통계치로 표현된, ‘개인이라는 사회의 구성원들의 총합은 하나의 전체로서는 총괄할 수 없는 역사의 무한한 반복이며 그 자체 공포이다. 이들의 운명을 개인의 심상에 넣고 반성하는 감정사유는 무한성에 대한 숭고한 감정이라는 심적 고양을 일으킨다. 쉴러에서 료타르에 이르는 이러한 계몽의 프로젝트들은 숭고의 감정을 통해 인류의 비속과 저속을 일반의지’, ‘공공성의 이념으로 통합, 구축하려는 근현대 사회의 과제를 이어왔다.

이것은 윤리적 매개를 통해 차이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15) 인생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매개를 통해 무한한 악덕과 미덕의 교집합속의 미끄러짐, 교착, 오류 들을 교정해갈 수밖에 없다고 믿는 신념의 강고함이다.

하지만 료타르는 우리는 무한한 것의 절대와 유한한 것의 절대가 궁극적으로는 이질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의 종합은 숭고감정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선천적으로 필연적이며 그것은 경험적 실재성이다“16)라며, 그 강고함을 일반의지의 실재성으로 본다. 제도의 목적으로 인식한다.

료타르가 다루는 이 개념어들을 다른 말로 대체해 보면, ‘무한한 악덕과 미덕의 알레고리와 공공성의 절대성에 대한 요구는 궁극적으로는 이질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의 종합은 숭고감정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다시 말해 공공선에 대한 요구와 실현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그 정당화의 조건으로서 선천적으로 필연적이며 그것은 경험적 실재성이기도 하다고 읽기가 가능하다.

사이토 준이치의 말 또한 이런 사유에 연이어 비슷하게 고찰해 볼 수 있는데, “주체는 그 자체가 복수적 정체성, 복수적 가치의 사이 공간 inter -space'이고, 그 공간에는 항상 어떤 갈등이 존재한다. 주체가 복수적이고, 그 사이에 항쟁이 존재한다는 것은 주체가 파편화되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갈등과 항쟁이 존재한다는 것은 복수의 이질적인(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대립하는) 주체성이나 가치가 서로 관련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렌트는 주체 내부에 있는 복수의 가치 사이의 대화를 사고라고 부른다. 이 시각에서 보면, 임의적인 정체성에 경직되고, 단일한 가치에 응고된 주체는 더 이상 사고가 불가능하다. 주체(사고하는 존재자로서의 자기)에게 위기는, 다양한 가치를 질서 짓는 어떤 중심적, 지배적인 가치가 결여되어 있음(소위 정치성이라는 위기)이 아니라, 거꾸로 어떤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가 주체를 지배하는 정체성이라는 위기이다. 복수성은 공공성에서 정치적인 삶의 조건임과 동시에, 주체의 정신적인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17)

합리주의적 계몽이나 교육의 이념들은 근대성 구축에 대한 공론장의 필요에 따라 형성됐다. 그렇지만 그간 인류는 일반의지전체의지사이의 합의가 허위의식이 되는 역사를 너무 많이 겪었다. 근대적 교육을 받아도 개인의 악덕과 개인의 저속함은 여전히 힘을 발휘했다. 근대시기 예술을 통한 감성 고양과 공권력에 대한 숭고한 감정의 억지 추동 등의 방법으로 개인 속 일반의지 강화 다시 말해 공공애 강화는 지속적으로 공공선으로 추켜세웠으나 그 사회적 효과는 미미했다.

계몽의 탓이건 교육의 탓이건 악덕의 무수한 잠재태 계열들은 근대사회 이후 점차 개인의 피부 밑으로 깊이 숨겨졌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개인은 개인들 간의 사적인 합의만으로 사회관계 속의 일 구성원으로 살 수 있게 되어 있지 않다. 사사롭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지도 않다. 개인이 욕망을 성취하는 방식성취제도를 통해서, 제도 안에서 해야 만이 사실적이고 숭고하게 여겨진다.

제도는 전체를 포획하고 있다. 제도가 개인의 우주이다. 개인 욕망과 정체성 안에 무수한 차폐와 비동일시의 틈인 사이가 존재하고 제도의 정체성 내에도 무수한 사이가 내부 투쟁 중이다. 그러면서 사회라는 개념은 공동체나 공공성의 이념만큼, 추상적 개념으로만 존재한다. 사회가 공동체이고, 사회는 공공적이라는 무지개 같은 인식이 제도와 개인 사이에 걸려 있다. 이제 개인은 자신의 매력을 통틀어 이런 제도와 대화하고, 제도와 합의해 자신의 정체성의 속 모양새를 우연히, 하지만 이데올로기로써 드러낸다. 제도가 공중(公衆)의 정신, 그 목적합리성으로써만 성립되는 보통 언어라는 것을 숙지하게 되면서, 개인은 제도를 통해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사회생활 하는 법을 배운다.

제도는 인류 전체의 보통 언어가 됐다. 현대사회에서야말로 제도는 개인 속에 뿌리내려졌다. 제도적 공중성(公衆性)의 내면화는 실현됐다. 개인의 가난은 제도에게만 말을 붙일 수 있다. 개인의 경험의 총체는 제도에의 편승이냐, 제도에 의한 박탈이냐로 구성된다. 제도의 꼭대기에 이르거나 제도와 싸우면서 인생도 성취된다.

일상체제 속에서 제도가 개인에게 해 줄 수 있는 혜택, 개인들 간의 욕구를 조절하는 제도의 기능이 사회를 의미하게 됐다.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제도야말로 공공성의 의미로 다가온다. 사회적 정당화의 최종심급으로 인지된다. 개인은 제도에 전적으로 종속되어야만 정상인이 된다. 그저 막연한 의미에서의 어떤 개인이란 정당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당하지 않은 것도 아닌 어떤 개별적 사람일 뿐이게 됐다.

제도의 영혼의 전투란, 순수 추상적인 자기 목적 합리성 곧 제도의 보편 언어와 보통 언어 사이의 무수한 균열에서 공공성을 확보하고자 일어나는 전투이다. 제도 내 합리성 투쟁이 제도에 영혼을 부여했다. 제도는 영혼을 갖게 되었고, 제도의 영혼이 벌이는 전투야말로 이제는 공공성의 구체적인 의미를 입게 됐다. 제도에 자신을 어필하지 않으면 공론장에, 제대로 된 삶의 장()에 다가갈 수 없다. 제도 속에서라야 제대로 인간다운 숨을 쉬는 인간이 되었다.

나와는 다른 개인, 타인은 나의 지옥이라던 그 타인의 모습도 제도가 대신한다. 제도는 모든 개인의 존재감의 근거이자 위화감의 장이기도 하다. 제도가 악덕과 미덕의 알레고리를 계산한다. 제도 내, 외부에 걸쳐 벌어지는, 제도의 정신에 대한 개인의 영혼의 전투가 공공성의 실체화의 전진기지가 된다. 공공성의 발전 여부는 인생의 숭고함에 대한 경험에 내맡겨진다.

제도의 영혼의 투쟁은 제도의 실제, 그 복수(複數)의 이해관계와 제도의 선입관과 무지와 어리석음을 자기 밖으로 내보이면서 생긴다. 제도의 복수적 정체성과 사이사이의 소외투쟁이 전투를 벌인다. 이제는 제도가 보통 언어상의 존재론과 인식론에서의 선험적 실체가 되어있기에 제도는 진리를 향한 인식 투쟁의 대상이요 주체가 됐다. ‘제도의 영혼은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의 당위로 보편과 특수의 이해관계를 매개한다. 제도가 싸우는 곳은 공공성의 이념의 전쟁터인, 추상적 보편성과 보통 언어를 구사하는 개별적 요구들 사이에서의 막간적(幕間的) ‘진리성의 장이다. (계속)

 

1)아돌프 카첸앨렌보겐 지음, 박은영 옮김, 미덕과 악덕의 알레고리, 조형교육, 1997, 13쪽 참조

2)아돌프 카첸앨렌보겐 지음, 박은영 옮김, 미덕과 악덕의 알레고리, 조형교육, 1997, 204

3)고사성어·숙어 대백과, 최근덕 감수, 오문영 편저, 동아일보사, 1994,177

4)프리드리히 쉴러 지음, 장상용 옮김, 쉴러의 미학예술론, 인하대학교 출판부, 1999, 237

5)프리드리히 쉴러 지음, 장상용 옮김, 쉴러의 미학예술론, 인하대학교 출판부, 1999, 238

6)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지음, 정남영, 윤영광 옮김, 공동체, 사월의 책, 2014, 514-515

7)존 듀이 지음, 정창호, 이유선 옮김, 공공성과 그 문제들, 한국문화사, 2014, 34

8)존 듀이 지음, 정창호, 이유선 옮김, 공공성과 그 문제들, 한국문화사, 2014, 32

9)존 듀이 지음, 정창호, 이유선 옮김, 공공성과 그 문제들, 한국문화사, 2014, 33-34

10) 장 프랑소와 료타르 지음, 김광명 옮김,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 현대미학사, 2000,155

이성은 상상하는 사유에 도전한다

11)장 프랑소와 료타르 지음, 김광명 옮김,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 현대미학사, 2000, 36

12)장 프랑소와 료타르 지음, 김광명 옮김,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 현대미학사, 2000, 45

13)장 프랑소와 료타르 지음, 김광명 옮김,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 현대미학사, 2000, 139

14)장 프랑소와 료타르 지음, 김광명 옮김,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 현대미학사, 2000, 146

15)장 프랑소와 료타르 지음, 김광명 옮김,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 현대미학사, 2000, 155

16)장 프랑소와 료타르 지음, 김광명 옮김, 칸트의 숭고미에 대하여, 현대미학사, 2000, 156

17)사이토 준이치 지음, 윤대석, 류수연 윤미란 옮김, 민주적 공공성: 하버마스와 아렌트를 넘어서, 도서출판 이음, 2009, 114-115도미에 결코 꺼트리지 못할 것이다.JPG


뒤러 정의의여신.JPG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과의 인터뷰 file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176

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과의 지극히 사적인 인터뷰 강성원 (인터뷰는 민미협 30주년 기념 <인터뷰 집>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여차 저차한 이유로 못 실렸음. 이 글은 원래의 인터뷰 글에서 <인터뷰 집> 취지 관련 인터뷰 도입부는 삭제됐음. 그밖에 인터뷰 중간 중간에서도 <인터뷰 집> 관련 내용은 삭제됐음. sns에 올리는 일은 성완경 선생님의 허락 하에. 인터뷰 내용 중 성완경 선생님이 쓰신 글 내용에 대해 질문할 때 성완경 선생님이 쓰신 글 문장을 축약하거나 풀어쓴 경우도 있지만, 선생님이 쓰신 문장 그대로 드러내면서 질문...

<근현대 시각이미지와 여성>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0

미술로 표현된 근현대 여성의 모습은 과연 ’여성‘을 담고 있는가, 여성주의자 혹은 여성주의 미술가들이 그린 여성성은 과연 여성주의를 실현하는가, 여성미술은 어느 정도로 여성해방적 미술을 성취하고 있는가 등등에 대한 간략한 질문형식의 문제제기를 해보자. 역사적 사회적 흐름과 더불어 변하는 여성이미지들에 과연 여성성의 달라진 의미들이 반영되어 있다면 여성미술은 시대마다 얼마나 이런 여성성의 문제자체를 인지, 인식해 담아내는가? 여성작가들의 작가활동상에서의 모습은 얼마나 자신이 옹호하는 여성성과 일치하는가 하...

내 마음의 수선전도(修善全圖)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2

   내 마음에도 ‘수선전도’가 존재한다. 내 마음이 느끼는 서울의 전체상인데 내가 느낀 서울의 심경상(像), 그 바닥이자 하늘이다. 원래 ‘수선전도’라는 말은 중국에서 유래됐다.  한 나라의 ‘수도(首都)’의 의미는 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하는 일 곧 수선(修善)의 시작점을 의미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명칭이라고 한다. 수선전도에는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기관들이 국심(國心)의 세력중심으로 재현돼있다. 오늘날의 광화문 부근 영역이 정부청사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대사관등이 들어서 있으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상징하듯...

_‘퍼블릭 아트’는 동어반복적 개념어이다.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0

<광장의 예술과 퍼블릭(Public Art) 아트 개념> 1 광장   광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광장에서 함께했던 낯선 사람들과의 뜨거운 연대감이다. 광장에 서면 일상 속 불만과 갈등이 내일을 위한 희망으로 바뀌어져 간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 느낌의 순간에 내 옆 어느 낯선 사람도 내 마음에 동참해주고 있다는 벅찬 뜨거움이 올라온다. 굳이 촛불집회같은 광장에서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어디인가 누구나가 갈 수 있고 자유롭게 주변을 누리고 공중의 특별한 간섭없이 내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

깊이의 허영 리얼리즘 변종현실 file

  • 쾌활림
  • 2017-09-17
  • 조회 수 136

1 변종현실   제1의 리얼리티가 있다. 제1의 리얼리티는 제1의 리얼리티를 숙주로 한 기생 리얼리티와 그 변종을 무한증식한다. 리얼리티가 무한증식하는 줄기는 의식상에서의 범주에서이다. 그리고 숙주리얼리티 변종들 바이러스는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항상성을 지녀서 겉으로는 가시화되지 않는다.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것은 제1의 리얼리티가 개인이 해체, 파괴할 수 없는 구조로서의 ‘현실 겉면’이기에, 철의 장막이기에 무한증식하는 숙주 리얼리티는 의식 바탕 저 아래 깊이로 밖에는 변종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file

  • 쾌활림
  • 2017-04-01
  • 조회 수 349

월간미술 4월호 연재 글(그간 반년 가량 개인사정으로 중단 했다가 다시 시작)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1. 맥 컴퓨터와 윈도우 컴퓨터를 사용해 작업한 텍스트나 이미지들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호환을 위해서는 다른 장치를 연결해야 한다. 호환의 필요를 위해 고안된 특별한 수단은 결국 상품으로 구입해야 한다. 구글 시트(Google Sheets)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나 한글 워드로 쓴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호환이 안 되면 텍스트를 복사해서 옮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이 작업들을 메일로 전송하고자 ...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 쾌활림
  • 2016-08-28
  • 조회 수 70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월간미술 연재13) 1 이 세상에 실제하는 공론의 양대 축, 공론이 그 안으로부터 생성되는 원천은 제도와 인간이다. 세상의 저간에 떠도는 갖가지 공론들은 인간 개개인에게서, 그들 모두 간의 삶의 느낌에서 나온다. 이런 가지가지 개인감정과 이해(理解)의 시선들이 실제로 모아져 일정하게 객관화된 것이, 결국 인간의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 정착된 것이 ‘제도’이다. 제도는 제도의 정신으로, 관련된 법으로 움직여진다. 제도는 본질상 인간의 행위가 일으키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예측시스...

민중미술의 미학 file

  • 쾌활림
  • 2016-05-30
  • 조회 수 410

민중미술의 미학   1 미술가가 자신이 직접 본 광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동, 서양 모두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였다. 미술가는 이즈음부터 자신이 본 생활상의 장면에 자신의 감정과 세계에 대한 관심을 듬뿍 담아 일정한 틀 속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보다 더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밑바닥 인생들이다. 사실상 일반적인 사회경관 대부분의 광경들은 작가 주변의 일상생활 아니면, 사회 밑바닥 층의 헐벗고 남루하고 그럴 수 없이 가난한 삶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 자연스레 인생에 회의가 들고 인생의 고통 전반에 생각이 ...

악덕,공공성, 제도의 영혼 file

  • 쾌활림
  • 2016-05-28
  • 조회 수 154

악덕, 공공성, 제도의 영혼   1 인류에게 언어가 생긴 이래 악행(惡行)이나 악덕(惡德)을 묘사하는 숱한 어휘들도 생겨났다. ‘흉악하다’, ‘수전노 같다’, ‘냉혈한이다’ 같은 표현들과 ‘악덕 군주’, ‘악덕 자본가’, ‘악덕 계모’, ‘모리배’, ‘간신’ 등등 그야말로 각양각색, 천차만별의 ‘악덕’에 얽힌 이야기들이 인간언어의 중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덕한 행위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보편적이고도 특별한, 악덕에 관련된 형용어들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목숨을 걸고라도 간절히 기...

메타포, 정원, 공공영역 file

  • 쾌활림
  • 2016-01-29
  • 조회 수 169

메타포. 정원(庭園). 공공영역   1   우주의 역사, 자연의 역사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자연의 역사는 뇌의 생리 속으로 자신의 역사, 그 시간 속 공간 속 축적된 의미들을 전달한다.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된 생활의 고통의 역사는 예민한 신경의 공감적 능력에 자신의 고통을 풀어낸다. 자연이 삼킨 모든 생명체들의 죽음과 개체가 행한 생의 무리수, 공포와 착종된 비전을 그려낸다. 그래서 자연이 종국에서 드러내는 생활상의 과거, 산화(散華)된 경험의 소리와 냄새, 빛과 감각의 모든 스펙트럼을 얼마...

자연의 우울_사실성의 우울 file

  • 쾌활림
  • 2015-12-25
  • 조회 수 422

1 자연이 합법칙적이라는 관념은 근대화된 관내(管內) 학문, 곧 근대과학의 산물이다. 근대적 학문범주에서‘자연’으로 범주화된 세계는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서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자연’도 분명 존재한다. 곧 인간의 ‘생활세계’로 근대과학의 탐구 대상인 자연세계를 자원으로해‘인류 발전’이라는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인류생활로서의 세계이다. 사실상 개인이 몸담고 있는, 개인에 관여되어 있는‘자연세계’는‘자연’으로서의‘생활세계’이다. 과학 연구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자연세계는 추상적인 ...

전통_효과의 사다리, 무의미의 의미 file

  • 쾌활림
  • 2015-09-27
  • 조회 수 1443

1.   아프리카 해안가 어디에선가 부터 해협을 건너고, 지구 표면을 따라 방랑하기 시작한 인류의 족적, 이 발자취를 인류사의 시작이라고 말해도 좋지만, 전통이라고도 명명할 수 있다. 지구 위를 방랑하다가 삶의 터전을 세우고 발 길 닿는데까지 영토화한 일도 흔히 역사라고 불려지지만 ‘전통’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전통을 세운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어딘가로부터 한반도로 흘러 들어와 석기, 철기 시대를 열고, 삼한과 백제, 신라, 고구려를 세운 일도 역사이고,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세운 생활의 전...

자기만의 세계상 file

  • 쾌활림
  • 2015-07-29
  • 조회 수 1221

자기만의 세계상 _  새로운 체험의 초현실 1. 누구나 한번 쯤은 살면서 권태롭기까지 했던, 아귀다툼 같았던 일상이 지상의 행복이구나 하며 느낄 때가 있다. 누구나의 일상이 같은 정도로 만족스럽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힘이 반복되는 생활리듬에서 나왔던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별별 이유와 고통으로 상처받은 마음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은 무너지지 않고 벼터내는 것은 나날의 생계(生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목격하고 체험한, 피해 입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고 싶은, 세상...

제대로 사는 삶의 문제 file [2]

  • 쾌활림
  • 2015-07-03
  • 조회 수 457

1 인류는 ‘무엇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하는 아주 오랜 물음, 문명이라는 이름의 물음에 이끌려 살아왔다. 인간의 문명 특히 서구문명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고민할 까닭이 없는, 이런 물음을 갖지 않는 인간을 인간다운 생명으로 여기지 않아왔다. 제대로 사는 것이, 궁극에서 보면 사회의 공적 영역, 그 부산함에, 시끌벅적한 부(富)와 부를 창출하는 기술과 노동, 사업과 인간관계, 인정과 평가의 사회생활에 크든 작든 자신의 능력으로 끼어들어 살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갈구하는 것이...

예술과 생활2 file

  • 쾌활림
  • 2015-05-28
  • 조회 수 376

김성룡천일야화 프로젝트   1. 역사는 거창한 비전과 계획이 이룬 삶이 아니다. 민족이나 국가, 사회의 특정 계층이나 구성원들 일부가 대량살상으로 인해 혹여 절멸 된다고 해도, 나머지 개인들이 비참한 생활로나마 생존할 수 있다면, 역사는 생존자들의 핍진한 이해관계의 긴장으로 무장돼 미래만 바라보며 나가게 된다. 굶주림과 학대가, 살상과 모반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일상은 새벽위로 떠올라 밤사이로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일상에서 몇몇 극소수 개인들은 다른 공동체와의 전쟁도 기획하고 생의 미화도 만끽하면서 ...

미학이란 무엇인가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340

 1 일반적으로 '미학'이란 단어를 들으면 누구나 조금은 그 뜻을 막연해한다. 그래도 '미에 대한 학문'이니까 예술에 관한 전문지식체계를 다루거나 미용 등 구체적인 생활분야에서 무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과 관련될 때 미학을 언급한다는 정도는 알 수 가 있다. 사실 이런 차원에서의 미학 이해는 틀리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미학'은 얼핏 대하기 만만치 않은 아우라와 수수께끼로 가득 차 보인다. 통념이 과연 맞는 것인가 반신반의 하게 된다. 한편 미학에 대한 통념이 미학에서 실제 다루는 내용과 크게 다...

사회시스템과 미술2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94

1 개인이 자기자신에 대해 모르는 정도는 타인에 대해 모르는 그만큼 더 커진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모르는 정도가 클수록 한 사회가 지닌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불일치가 커진다. 세계화로 전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마치 전지구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이 정도로 나마 서로 인지하고 알고 지낸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뿐더러,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서로 간에 모르는 부분은 너무 많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

인문학의 정치,미술의 정치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568

이인철/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 순수예술과 참여예술 논쟁이 있다. 예술이 정치의 수단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말하자면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발언을 해야한다는 신념을 지닌 예술가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간 참여예술을 주장하는 작가는 보통 좌파진영에 속한 작가라고 추정, 분류되면서 80년대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서 보듯 전시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다. 순수냐 참여냐의 예술적 선택에서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를 예술적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온시하면서‘정치적 미술’로 문제시 한 것이다. 실제 정...

사회시스템과 미술1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33

서용선<단종복위모의>   최경태 <겨울 아침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1.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활로를 얻기 위해 움직인다. ‘생활’(生活)에 나서야 나날의 일상과 자신의 생애가 보장되고 생명의 잠재적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태어나자 마자 생활에 나서지는 못한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경험해야한다. 경험을 위해 배워야한다. 초기 인류라면 생활을 위해 무작정 걸으면서 보고 듣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역사 시대 접어들면서는 생활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배워야했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 체계(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가 경험하고...

경험과 판단의 아카이브_필요하지만 없는 것에 대한 단상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249

  조양규 <31번 창고> * 인간은 살면서 생활의 모든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감정은 어떤 생명체 보다 유별나고 복잡하다. 특히 삶의 감정이 단순히 수동적인 지각현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판단과 경험내용의 복합체이며 주관적인 반응이기도 하고, 지식의 결합물이며 의식의 총체물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어떤 것 보다 특수한 인간만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러한 표상들로 부터 사고와 관념의 상들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의식작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