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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메타포, 정원, 공공영역

조회 수 169 추천 수 0 2016.01.29 21:18:55

메타포. 정원(庭園). 공공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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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역사, 자연의 역사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자연의 역사는 뇌의 생리 속으로 자신의 역사, 그 시간 속 공간 속 축적된 의미들을 전달한다.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된 생활의 고통의 역사는 예민한 신경의 공감적 능력에 자신의 고통을 풀어낸다. 자연이 삼킨 모든 생명체들의 죽음과 개체가 행한 생의 무리수, 공포와 착종된 비전을 그려낸다.

그래서 자연이 종국에서 드러내는 생활상의 과거, 산화(散華)된 경험의 소리와 냄새, 빛과 감각의 모든 스펙트럼을 얼마큼이나 파악해 낼 수 있는가의 문제는 생명체의 공적 과제로 전개된다. 그야말로 온전히, 할퀴고 배반하고 빼앗고 감춘 죽음의, 문명의 전체상을 보았는가, 아니면 그 극미한 파편만이라도 느끼게 되는가, 그렇지도 못하다면 전혀 미개한 상태로의 지둔(遲鈍)함만 있는 생명인가의 문제는 결국 정치적 생명들이 다루어야 할 영구 평화의 문제로 남는다.

일말의 공감을 원하는 원망(怨望)소리 조차 듣지 못하는 개체들도 많다. 하지만 어떤 생명체는 자연의 역사에 자신이 온전히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면서 비로소 영혼의 고통, 그 혼돈의 갈피들을 확인하며, 세상의 갈등과의 조우(遭遇)가 단지 조우였고, 자신이 보편자의 일부임을 알아챈다.

하지만 이런 차원으로까지 자연에 매개되어 얻은 인식의 전망이 총체적 일수록, 자연에 보다 깊이 연결됨을 느낄수록, 자연은 알 수 없는 진실의 냉혹한 물리(物理)인 듯 수만 겹의, 이 생이 다하도록 헤아려도 헤아릴 수 없는 인과관계의 우연과 필연의 기계인양 드러난다.

예민한 신경일수록 자연의 원래 모습에 가까이 감응할 수 있지만, 그럴수록 자연은 예민한 신경을 파괴하는 힘으로서의 본질을 드러내기에, 자연의 총체적 감지는 광기가 된다.

광기는, 자연의 본래의 상태, 그 증오와 불평등의 역사 속 저 밑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그 바닥의 형상을 알아차린 순간 생겨난다. 사실상 인간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다가오는 존재자의 형상을 본데서 오는 광기이다. 예민한 신경이 느낀 광대무변한 질()과 특정할 수 없는 존재의 불가사의함에 대해 갖는 불신의 광기이다.

한계 되어 지지 않은 상태’, ‘인클로저’(Enclosure) 되지 않는, 범주화되지 않고 소유되지 않는 객체에 대한, 생명의 근원인줄 알았던 것이 생명에 가장 적대적인 것임을 인지했을 때의 두려움이 광기로 변한다.

이와는 다른 차원의 광기는 정신병리학적 광기이다. 현실의 복잡계 사이에 얽힌 사실의 틈들 사이로 내비치는 미시, 거시 권력의 자기변론과 그 변론의 무지막지한 자기중심적 진실, 강자의 자연스러움과 실제의 아비규환에 맞서 자신의 안정안전을 위한 억지관념들을 제시하지 못할 때, 스스로를 납득시키거나 자신을 은폐시킬 수 없을 때 광인이 된다.

첫 번째 상태의 광기는 자연을 마주해 공감각의 경계를 넘어간 것이며, 두 번째의 광기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성에 전개되어있는 생활상들이 납득불가의 것으로 인지되어 생겨난 광기이다.

우주적 본질의 냉혹하고 그래서 숭고하게 느껴지는 자연 그 자체의 자연성과, 무한한 갈등변수가 작용하는 사회적 삶의 상태로서의 숭고한 사회적 실제, 곧 사회적 사실 그 자체라는 의미에서의 인생의 자연성, 둘 다 그 재현될 수 없는 리얼리티 혹은 인클로저’(enclosure) 되지 않은 범주라는 점에서 닮았다.

그래서 자연과 사회는 인간의 생애사의 아우라로 작용한다. 누구나의 생애사가 인문학적인 까닭은 이러한 후광이 개인의 생애사에 드리워져 있어서이다. 그리고 이같은 자연성들이 인간에 대해 맞서는 불복종성은 인간이 타자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공감능력을 해체하고 공감능력을 몰가치화한다.

천상과 지하의 마지막까지 내려간 예민한 신경의 감응, 그 인지내용이 오류든 억지든 간에, 이들이 이렇게 인지한 내용을 스테레오타입의 권력적 목소리와 말로 만들지 못한다면, 교환가치가 되도록, 아니면 메타포로나마 통용되도록 할 수 없다면, 이들의 영혼상태를 광란적이 아니라고 부를 길은 없다. 광기는 상투적 메타포 사용능력의 거부거나 상실상태이다.

인류는 원근법으로든 구조로든 상징계로든, 메타포(Metaphor)의 도움 없이는 대상의 리얼리티 재현이 불가능했다. 어떠한 대상이든, 대상 그 자체는 거울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의사(擬似) 이미지조차 볼 수 없는데,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자신(대상)의 깊이와 모양과 을 타자가 온전히 있는 그대로인지할 수는 없다. 타자에 대한 인식을 진실이라고 규정할 기준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이든 인간이든 사건이든 대상에 대해, 하나하나의 그 내용에 즉한 개념으로서의 대상의 진실에 대해 보편타당하게 총체적으로 설명할 방법을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있는 그대로의 사실성의 내용은 지배 권력들에 의해 더욱 더 억지 위에 혹은 왜곡적으로 구축된다.

인식의 도구로 메타포를 사용해온 것은 인류 역사 초기에서 부터였다. 물자체와 인간의 인식의지 사이에 놓인 심연을 잇는 수단, 그 건널 수 없는 강을 메꾼 매체들은 다양한 메타포들이었다. 메타포는 미디어이다.

메타포는 전적으로 비유에 근거한 인식법이다. 메타포는 존재 자체와 혹은 사실이나 사건 자체와 인간의 인식 사이에 놓인 심연, 그 진실의 강을 떠다니는, 생과 사의 이편과 저편을 이어주는 차안(此岸)에서 보낸 상인이다. ‘비유의 메신저들은 각 인류 공동체의 문화체계로 전승되고 비유 속 사물 위상학은 민족지학의 선례들을 구성한다.

메타포는 인식을 위한 기본언어요 틀이다. 메타포로서만 인식할 수 있다. 메타포 곧 직유와 환유 등으로만 사물은 엮여지고 포착될 수 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만 메타포의 전유(專有)를 매개로 진실의 진실이, 개별성의 진실이 포착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사회적 사실성이라는 자연은 직유와 환유 등의 메타포를 통해 부분적으로만 유사(類似) 재현된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끝, 시간과 공간의 질과 규모에 대해 포착할 수 없다. 죽음 이후도 볼 수 없다. 죽음에 대해서도 비유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

사물의 보편성과 특수성은 객관적으로 알 수 없다. 그에 대한 비유만이 가능하다. 물 자체와 인생 자체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도 지극히 예민한 신경을 가진 자에게만이 순간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만일 그가 진실의 총체적 면모의 재현을 얻는다면, 그의 정신의 경계는 숭고의 폭력에 의해 파괴된다.

그래서 존재와 시간과 공간의 의미, 생활의 미시권력과 거시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의 교집합, 그 착종의 양상, 그 역사성은 자연에 대해 서있는 정신에 대한 고고학, 자연이 말하는 메타포들을 사용하는 정신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만 그 계열화나마 간취할 수 있을 뿐이다.

인류는 사물이나 사건 인식에서 인지된 바의 세속화없이는, 인지된 바의 균질화 없이는 인식의 교환이 불가능하다. 개별적인 특수한 대상과 사건에 대한 인지내용은, 하나의 대상에 대한 속성, 그 개성, 그 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하나의 동질적인 전체로서 곧 스테레오타입의 경향적 속성을 지닌 대상으로써 기호화돼야 가능하다. 대상에 대한 혹은 개인이나 하나의 특수한 사건과 현상에 대한 설명과 지식은 이렇게 교환될 수 있다.

유의어의 반복(Tautology)으로 세계는 공유된다. 우리는 비슷하다고 느껴지게만 진실을 알 수 있다. ‘비슷함이라는 굴레 혹은 진실의 근사치로만 만족해야하거나, 진실이라고 우기는 폭력을 동반해서야만, 유사(類似) 진실이라는 억압과 왜곡을 통해서만 세계와 인간 사이의, 인간들 사이의 유사(類似) 소통이라도 가능하다. 기껏해야 비유적으로만 실체에 대해 말하게 되는 것인데, 비유의 연쇄는 연쇄의 굴레가 되고 역사가 되면서 이끼든 비계든 끼면서 왜곡 되곤 한다. 그리고 이 비유로만 된 인식들이 자생적으로 다음 단계의 이차적 비유체계 곧 이데올로기나 공감각이라는 섣부른 살인적인 관념들을 구축한다.

이에 비해 광인들은 실체의 적나라한 파편들을 본다. 하지만 본 것을 일상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본 것과 비슷한 어떤 이미지들을, 메타포를 찾는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이거나 인습적 상식의 고리가 끊긴 상태이다. 일상의 구태의연한 권력적 언어를 공유하지 못한 채 자기파괴의 해체적 언어만을 구사할 수 있다.

결국 보건데 인간은 자연과 인생에 인식의 울타리를 쳐야 안정안전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래야 결국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인데, 해방감도 유사 해방감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인식은 모두 본질적으로 가상’(假想)이라 할 수 있다. 가상은 사실 인생의 가장 리얼한 존재방식이다. 가상은 인간의 인식 상에서는 실체의 최종형식이다.

미술사는 가상의 역사적 기표들을 인습화한다. 미술사는 체제 인문학의 중심기표들을 선별, 재배치한다. ‘가상에 대한 권력게임을 조정하면서 체제 인문학의 대 사회관계와 자연관계, 나아가 학문의 체제적 성격 자체를 통제하는 주인기표 노릇을 한다. 라깡 식으로 표현하면 대문자 A의 기능을 한다.

가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모방(미메시스 혹은 재현)은 인류 언어의 기본기능이다. 사실 표현도 모방의 한 방식이다. ‘모방은 본질의 현상적 결과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것이고, ‘표현은 본질의 속성을 주관적으로 보려고 할 뿐이다.

대상과 범주의 인클로저’(Enclosure:울타리를 침, 폐쇄: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인클로저개념은 15세기 이후 영국에서 일어난 공유지의 사유지화 운동을 표현하는 용어에서 차용. 이 운동 이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가능해졌다고 알려져 있음)는 신경학적으로, 물리적으로 생의 안정을 위한 기본 설정이다.

인간의 지식세계는 사실 그대로의 세계로부터 소외된, 어떤 의미에서는 절대적으로 자체적으로, 곧 자율적으로 인클로저 됐다고 볼 수 있는 세계이다. 기존의 지식세계는 그럼에도 이 세계의 중심으로 절대 자연이나 선험에서 온 추상적 도덕명령을 공중의 도덕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제 근대적 공공영역에서는 이런 갇힌 상태의 사실로부터 나마 즉 인간 능력 한계 내의 사실관계에로부터나마 인간적 진실의 위상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진실은 우리의 경험세계가 아는 나쁜 현실에 있는 것이고, 이를 바로 잡는 일이 공공연하게 필요하고 공공영역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후기 플라토주의 학파의 유출설에서 보듯 제일 원인과 진리(자연의 진리든 절대 이념이든 그래서 절대 권력이든)가 있고 나머지 존재자들은 그로부터 유출된 열등한 계급과 질의 것이라는 관점에서 세계를 운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착종되어 있는 세계에 대한 이런 진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내면에서 요동치는 체험적 진실의 내용들로부터의 현실상을 재구성해야한다는 요구인데, ‘자연성에 대한 애증의 미메시스에 불과한 인식적 가상과 그 위계에 토대를 두고 선악을 구분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깨달은 인간의 진실에 대한 일정한 가치론적 심급 위에 지식의 가치유출 효과를 측정해야한다는 것이다. 지식의 대상에 대한 진실여부가 어차피 가상적이라면, 이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정치적인 효과를 가늠하는 것이다.

삶의 안정과 안전의 마지막 보루는 추상적 도덕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이 말해주는 비루한 진실내용들인 것이다. 후기 플라토주의에 의하면 열등하다고 판단되는 현상계가 진실의 원천이고, 현상계에 대한 지식들이 정치적일 때, ‘가치를 보장하는 정치성을 지닐 때, 지식은 메타포이기를 그칠 수 있다. 언어의 일대일 진리 규정력은 작동한다.

공공의지는 왜곡된 형태심리의 주류(가상의 지배)를 해체하고, 형태적 강자의 지배로 인한 사회적 안정의 영구 동요를, 이로 인해 잘못된 위상체계로 구축된 인간적 생활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들을 사회적. 인간적 경험의 진실에서만 새롭게 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생활의 안정안전이라는 요동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 요구를 인간적 사실들의 제 관계들의 가치론적 보루로 공고히 할 수 있다.

생의 안정안전의 개념 좌표축은 인생의 전 과정이 이미지게임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 좌표이다. 공공의지의 인간적 진실에 대한 정치적 요청은 권력적 기만의 요지부동 의지, 요령부득의 명령에 의해 삶이 동요되거나 해체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지이다.

 

2

정원(庭園)은 인클로저 된 자연이다. 울타리 안의 자연으로 그 안에서 사람은 안정과 평화를 느낀다. 정원은 자연으로부터 보호받고, 자연을 온전히 자유롭게 느끼는 기쁨을 알게 한다. 사실 자연으로부터 보호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일반적으로 볼 때 정원에서만 가능하다. 정원에 고즈넉하게 앉아있거나 둘러보면 인생의 피로와 수고에 대해 보답 받는 느낌을 준다.

정원에서는 일단 인생사의 부대낌과 불안과 긴장으로부터 해방된 소소한 자유감과 희열을 느낀다. 부박스럽고 부단한 삶의 노고들로부터 벗어난 느낌을 갖는다. 정원을 향유할 수 있으면 삶에 대한, 인간에 대한 경멸과 증오도 잠시 빗겨간다.

이 같은 성질의 삶의 한 순간의 안정감은 인간의 사적 소유의 의미를 실존적 가치로까지 숭상, 확대시킨다. 삶에 안정감을 느끼면 그간 스스로와의 싸움에서 의미화 했던 온갖 삶의 가치들에 대해서도 되새겨 볼 수 있다. 정원을 소유한 자에게 그 가치는 옳았던 것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정원 그 바깥의 자연은 정복, 극복해야만 할 대상, 일종의 목적 투시적 대상으로 인간 앞에 존재한다. 그리하여 자연법칙을 연구하고 이용해야한다는 조바심은, 다시 말해 자연을 어떤 수단으로든 영업화해야 생존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경영의 승리의 관점은 결국에는 자연법칙 연구에 계몽적 자발성의 이미지를 띄게 한다.

자연을 두고 일어나는 인간의 이러한 자발성은, 생계를 꾸리고 살아남아야하는 약육강식의,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개별 능력들이 느끼는 자신의 부자유와 불평등의 내적 기원에 면()한 공포감에서 야기된 무엇인가이다. 자기만의 교환가치를 획득하거나 범주화해 교환가치로 팔아야하는 영업생활자인 개인이 그의 저속하고 교활해 질수 밖에 없는 시장의 본능에 쫒겨 은연중에 떠밀려 갖게 된 자발성이다.

그가 고답적인 과학자거나 탐험가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영혼과 일상은 이렇게 해 생계방식이 확정되었을 때만이 안정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이후 비로소 자유롭다고 평화롭다고 느낄 줄도 알게 된다.

자연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그로부터 탄생하는 장소이다. 하지만 생명의 비밀, 자연의 우주론적 기원 자체는 모든 생명의 주검을 자신의 피부에 간직한 말없는 스핑크스라는 모습으로만 인류에게 던져진다. 개체의 죽음 이후 그 소멸의 기억으로만 생명의 기원은 인구에 회자된다.

인간이 산다는 일의 안정과 안전을 단순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써 느끼기에는 인류는 생명의 보편적 진실에 대해 겪은 바가 전혀 없다. 그저 어떻게든 죽지 않으면 다행일 뿐이다. 자연은 그 모든 주검들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 법칙일 뿐으로,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서 생명의 안정을 보장하는 자유와 해방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생활의 안정과 안전은, 원래 무엇이었던지 알 수도 없는 자기 기원으로 회귀하지 않아도 될 그 나마의 유일한 생존방법, 비록 죽음을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인 방법이지만, 그래도 인류에게는 가장 최선이자 최고의 생애 보존 방법이다.

생활은 안정과 안전의 본원적 축적이 가능해졌을 때 자유와 안락을 느낀다. 생계거리의 본원적 축적을 향한 싸움은 사투이지만, 태초 이래 영웅서사이지만, 일정 정도의 본원적 축적 이후에는 전원적(田園的)인 삶의 향유가 가능해진다.

정원은 생의 날것의 전투성의 대상이 아닌, ‘자연을 단지 감상하고 그 안에서 소요(逍遙)할 수 있도록 하는 생활의 여백 공간이다. 인간은 정원에서 비로소 안정과 평화, 자유를 주는 자연이라는 미메시스(재현물)를 갖는다. 대체로 생명체들은 정원에 들어서면 어지러운 기운들이 가라앉으며 생의 활력을 일시적으로나마 회복하고, 자유와 평등감을, 퍼블릭 라이프(Public life)를 아는 기쁨을 얻는다. 움추러든 개체가 아니라 보편성에 한발 다가선 느낌으로 생명이 확장됨을 느낀다. 확장된 생명의 느낌이 있는 그대로로의 내 삶에도 주어져 있음을, 내 삶을 둘러싸고 있다는 가상의 감정을 느낀다.

비록 담장이나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에서나마 산다는 문제의 있는 그대로의 사실성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고, 생명은 단지 생명이 가득한듯한 빛과 바람으로, 흙과 물로만 둘러싸여진 느낌을 갖는다.

정원에서 느낀 자유와 해방은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심정으로, 동시에 지극히 공공적인 생활에 매개돼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미세하게 동요하며 여전히 불안한듯하면서도 흡족한 만족과 투지조차 다시 느껴진다. 정원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관리되는, 에덴동산처럼 신의 손이든 혹은 정원사의 손이든 그 어느 주재자의 손에 의해서든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혼란과 위험, 방해가 제거된 공간으로 인지된다.

가든 스쿨이라 불리던 에피큐러스 학파나 아리스토테텔레스의 소요학파가 인생의 진리를 논하던, 가장 자유롭던 공공의 공간 곧 대학이자 혹은 수도원의 안뜰처럼 고상한 침묵과 변증(辨證)의 즐거움이 머무는 공간이 정원이다. (오경아 <정원의역사> 참고,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78&contents_id=11584)

한편 정원은 그래서 아르카디아처럼 세속적 쾌락의 이상적인 전원적 공간으로 사업적 이익을 떠난 공중적인 생활, 즐기며 부대끼지 않을 만큼의 타자들과의 사사로운 공속(共屬)과 매개가 가능한 공원(公園)이기도 하다.

정원으로 부터의 추방은 공공생활로부터의 추방을 뜻하기도 한다. 정원은 무릉도원 같은 유사 이상향이다. 생계를 위한 생활수단들인, 산만하고 저열하기까지 하고 열악한 피 튀기는 인정투쟁의 공간이 아니다.

마음의 안정과 신변의 안전도 동시에 보장되는, 그러기 위해 관리되는공간으로 생활 속 공간이지만, 유배지에서처럼 생활을 유예시킬 수 있는, 그저 누리고 즐기기만 하면 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매우 사적인 공간이지만, 생활이 유예된 공간이라 생활과 생명의 보편성, 공속성, 공공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정원은 인생의 학교이며 수도원이자,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식사>나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처럼, 전원이나 공원은 시민들이 휴식과 즐거움을 누리는 공간이기도하다. 공공영역이란 이런 안정된 생활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는 영역이다. 생활의 각박함이 아닌, 생활이 축적의 가상, 그 여유를 지닐 수 있도록 생활의 안정과 안전이 보장되며, 사람들 간의 교류와 소통이 이익관계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나고 모이고 그러면서 즐길 수 있는 생활관계를 보장하는 지상최고법의 공간이다.

 

3.

개인 정원은 대개 현관이나 뒷문에서 곧바로 드나들 수 있다. 드나듦에 크게 제약이 없다. 창문을 통해서도 곧바로 정원을 내다볼 수 있다. 창문을 통해 연결되는 정원과 집안의 내밀한 사적 공간 사이의 관계는 창틀 모양에 따라 정해진다고도 볼 수 있는데, 창틀 디자인은 세계와 개인을 잇는 심정을 주조하며, 정원과의 조우(遭遇)방식을 예정조화의 방식으로 구조화한다. 디자인은 메피스토펠레스처럼 개인을 조락(凋落)한 세계관으로 안내한다.

고등학생 시절 교정(校庭)도 일종의 학교 정원으로 개인 집 정원처럼 닫힌 공간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교정과 교실의 창, 교정으로 나가는 문은 개인의 정원처럼 그렇게 친밀하게 유기적인 듯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교실과 교정은 심성사의 옥죄인 주조 틀처럼 서로 협력하며 학창시절의 자유를 기만한다. 교정이 교실에서의 긴장과 통제로부터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긴 하지만, 주로 사육(飼育)을 위한 체육수업의 공간으로 교실 창과 교무실 창으로부터의 시선에 의해 은밀히 감시되는 공간이다.

학창시절의 날 것 그대로의 미성숙함과 미개와 교활함이 뒷골목 범죄처럼 어둠을 파고들며 그위에 공공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은폐와 억압이 조직적으로 자행되는, 악의 꽃 같은 육체가 통제되는 청춘의 자폐적 공간이 교정이다. 비록 공공의 정원이지만 공공의 이름으로 인성이 유린되기도 하는 정원이자 그러면서도 인류사의 압축적 정보들이 화려하게 미래를 수놓고 있을 비밀의 화원이다.

그래서 외부인의 교정출입은 엄격히 통제된다. 전적으로 미래만을 위한 공간으로, 미래의 공공성의 함양을 위한 공간이지만, 교정은, 교문은 있으나 사실상 세계로의 소통이 차단된 공공영역으로, 미래로부터의 전언이 불가능한 폐허 위의 뜨락이다.

대학 캠퍼스는 병산서원이나 소쇄원의 정원이 그렇듯, 그 속에서의 생활을 누려본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고귀한 동산에서 잠시나마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좁은 캠퍼스든 넓은 캠퍼스든, 아름다운 캠퍼스든 관리가 안 된 캠퍼스든, 명문대학의 캠퍼스든 아니든 상관없이, ‘대학의 교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대학 캠퍼스는 형식상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인생과 학문의 진리를 논하던 그 정원과 회랑(回廊)들이요, 후진국 청춘의 아르카디아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정원>이기도 하다. 대학에서의 생활에서는 인생의 어느 시기에서 보다도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고, 추구 할 수 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강의동들은 인생의 진리를 찾는 학문적 탐구의 미로들이다.

대학 교정은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져 비교적 잘 관리되는 곳이다. 관리된다는 것은 그 안에서의 현재의 생활이 자연으로부터 가해질 수 있는, 낯선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위해로부터 일정하게 보호받고, 또 미래의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처럼 학생의 미래가 케어(care)되고 있는 공공장소라는 의미이다. 대학 교정은 미래 보장적 안정과 안전을 발판으로 그야말로 마치 유엔 인권선언이 보장하는 미래생활이 이미 한 발자국 거기 사는 모두의 삶에 들어온 듯 온갖 발전의 메타포들이 공론화되는, 유사(類似) 전원(田園)적 공론전당(公論殿堂)이다.

대학 교정은 고등학교 교정과 달리 웬만하면 누구나 출입이 가능하다. 캠퍼스를 이리저리 자유롭게 걷다보면 누구나 원한다면 유사(類似)자유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다. 그야말로 퍼블릭’(Public)한 공간으로 누군가와 더불어 살 수 있을 것 같은 친화력으로 채워진 곳이 대학 캠퍼스다. 물론 그 안에서의 생활을 실제 들여다보면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추태와 추문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추문들은 쑥덕공론으로 안개처럼 캠퍼스 구석구석에 숨어들다가 대학 밖 악덕을 감싸도는 보이지 않는 진지들을 구축하기도 한다.

어쨌든 교정이든 공원이든 혹은 나아가 공공 카페든 갖가지 예견되는 위해로부터 공중을 보호할 울타리가 있고, 그 안에 머무는 동안 안정안전이 관리된다면, 소요학파에서처럼 자신을 알기 위한 인생비평과 문예비평, 나아가 공화국론, 정치가의 이상 등에 관한 공론으로, 그리고 공론을 지키고자하는 저항을 양심으로 명명하며 즐겁다면, 아니 단순히 여러 사람과의 만남,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유쾌하다면, 그러한 백주 대낮의 밝음과 안전을 일러 공공성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개인의 정원이 타자의 시선을 차단한 울타리로 둘러싸인데 비해, 대학 캠퍼스나 공원은 주위 환경과 분리된듯하나 누구나의 출입이 자유롭게 허가된 공간이다. 사람간의 공공적 만남은 공개되어있고, 캠퍼스나 공원을 거니면서는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서로를 굳이 적대시하고 갈등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의 대화는 본래는 생활을 살리고자 하는 대화인 것이고, 교정의 자연은 실내의 인테리어 정물이나 정물화처럼 그 안에서 쉬고 향유할 마음의 여유, 본원적 마음의 축적을 상징한다.

사실상 이러한 울타리안의 대낮의 평화와 공존은 인간에겐 더할 나위 없는 생활의 즐거움이다. 자연인 듯 인공인 듯 평온상태를 보존하는 공간이 정원이고, 공원이고, 교정이다. 이러한 공공영역들의 공공 차원이란 울타리 쳐진 그 내부 영역의 개방성과 안정, 그 안에서의 자유와 평등감각을 맛보면서 느낄 수 있는 유사(類似) 공공성의 진실 차원이다. 정원과 교정이 상징하는 퍼블릭 영역이란 곧 미적 차원의 영토이다. 공공성의 감각이 미적 교육으로 준비되는, 자연의 억지와 문화의 억지가 서로 간에 위계를 정할 수 있고 위계의 화음 같은 감응도 조율하는 영토이다.

실제 사회에서의 공공 실천이란 이러한 차원에서의 유사(類似) 공공성을 사회전체의 내포적 총체성으로 매개, 전치(轉置)하는 일이다. 공공성이란 부조리한 권력의 실제 일상 언어상의 상투적 메타포 체계와 그 개별적 내용의 가치론적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의지의 외연적 총체성, 그 힘을 표시하는 개념이다. 인간사회의 보편적 이치에 타당하도록 사회의 중심가치를 재배치하고자 하는 정치적 차원을 담보하는 개념이다. 사회에서의 삶의 안정안전이념을 새롭게 기획,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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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과의 인터뷰 file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176

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과의 지극히 사적인 인터뷰 강성원 (인터뷰는 민미협 30주년 기념 <인터뷰 집>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여차 저차한 이유로 못 실렸음. 이 글은 원래의 인터뷰 글에서 <인터뷰 집> 취지 관련 인터뷰 도입부는 삭제됐음. 그밖에 인터뷰 중간 중간에서도 <인터뷰 집> 관련 내용은 삭제됐음. sns에 올리는 일은 성완경 선생님의 허락 하에. 인터뷰 내용 중 성완경 선생님이 쓰신 글 내용에 대해 질문할 때 성완경 선생님이 쓰신 글 문장을 축약하거나 풀어쓴 경우도 있지만, 선생님이 쓰신 문장 그대로 드러내면서 질문...

<근현대 시각이미지와 여성>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0

미술로 표현된 근현대 여성의 모습은 과연 ’여성‘을 담고 있는가, 여성주의자 혹은 여성주의 미술가들이 그린 여성성은 과연 여성주의를 실현하는가, 여성미술은 어느 정도로 여성해방적 미술을 성취하고 있는가 등등에 대한 간략한 질문형식의 문제제기를 해보자. 역사적 사회적 흐름과 더불어 변하는 여성이미지들에 과연 여성성의 달라진 의미들이 반영되어 있다면 여성미술은 시대마다 얼마나 이런 여성성의 문제자체를 인지, 인식해 담아내는가? 여성작가들의 작가활동상에서의 모습은 얼마나 자신이 옹호하는 여성성과 일치하는가 하...

내 마음의 수선전도(修善全圖)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2

   내 마음에도 ‘수선전도’가 존재한다. 내 마음이 느끼는 서울의 전체상인데 내가 느낀 서울의 심경상(像), 그 바닥이자 하늘이다. 원래 ‘수선전도’라는 말은 중국에서 유래됐다.  한 나라의 ‘수도(首都)’의 의미는 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하는 일 곧 수선(修善)의 시작점을 의미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명칭이라고 한다. 수선전도에는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기관들이 국심(國心)의 세력중심으로 재현돼있다. 오늘날의 광화문 부근 영역이 정부청사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대사관등이 들어서 있으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상징하듯...

_‘퍼블릭 아트’는 동어반복적 개념어이다.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0

<광장의 예술과 퍼블릭(Public Art) 아트 개념> 1 광장   광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광장에서 함께했던 낯선 사람들과의 뜨거운 연대감이다. 광장에 서면 일상 속 불만과 갈등이 내일을 위한 희망으로 바뀌어져 간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 느낌의 순간에 내 옆 어느 낯선 사람도 내 마음에 동참해주고 있다는 벅찬 뜨거움이 올라온다. 굳이 촛불집회같은 광장에서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어디인가 누구나가 갈 수 있고 자유롭게 주변을 누리고 공중의 특별한 간섭없이 내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

깊이의 허영 리얼리즘 변종현실 file

  • 쾌활림
  • 2017-09-17
  • 조회 수 136

1 변종현실   제1의 리얼리티가 있다. 제1의 리얼리티는 제1의 리얼리티를 숙주로 한 기생 리얼리티와 그 변종을 무한증식한다. 리얼리티가 무한증식하는 줄기는 의식상에서의 범주에서이다. 그리고 숙주리얼리티 변종들 바이러스는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항상성을 지녀서 겉으로는 가시화되지 않는다.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것은 제1의 리얼리티가 개인이 해체, 파괴할 수 없는 구조로서의 ‘현실 겉면’이기에, 철의 장막이기에 무한증식하는 숙주 리얼리티는 의식 바탕 저 아래 깊이로 밖에는 변종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file

  • 쾌활림
  • 2017-04-01
  • 조회 수 349

월간미술 4월호 연재 글(그간 반년 가량 개인사정으로 중단 했다가 다시 시작)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1. 맥 컴퓨터와 윈도우 컴퓨터를 사용해 작업한 텍스트나 이미지들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호환을 위해서는 다른 장치를 연결해야 한다. 호환의 필요를 위해 고안된 특별한 수단은 결국 상품으로 구입해야 한다. 구글 시트(Google Sheets)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나 한글 워드로 쓴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호환이 안 되면 텍스트를 복사해서 옮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이 작업들을 메일로 전송하고자 ...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 쾌활림
  • 2016-08-28
  • 조회 수 70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월간미술 연재13) 1 이 세상에 실제하는 공론의 양대 축, 공론이 그 안으로부터 생성되는 원천은 제도와 인간이다. 세상의 저간에 떠도는 갖가지 공론들은 인간 개개인에게서, 그들 모두 간의 삶의 느낌에서 나온다. 이런 가지가지 개인감정과 이해(理解)의 시선들이 실제로 모아져 일정하게 객관화된 것이, 결국 인간의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 정착된 것이 ‘제도’이다. 제도는 제도의 정신으로, 관련된 법으로 움직여진다. 제도는 본질상 인간의 행위가 일으키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예측시스...

민중미술의 미학 file

  • 쾌활림
  • 2016-05-30
  • 조회 수 410

민중미술의 미학   1 미술가가 자신이 직접 본 광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동, 서양 모두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였다. 미술가는 이즈음부터 자신이 본 생활상의 장면에 자신의 감정과 세계에 대한 관심을 듬뿍 담아 일정한 틀 속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보다 더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밑바닥 인생들이다. 사실상 일반적인 사회경관 대부분의 광경들은 작가 주변의 일상생활 아니면, 사회 밑바닥 층의 헐벗고 남루하고 그럴 수 없이 가난한 삶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 자연스레 인생에 회의가 들고 인생의 고통 전반에 생각이 ...

악덕,공공성, 제도의 영혼 file

  • 쾌활림
  • 2016-05-28
  • 조회 수 154

악덕, 공공성, 제도의 영혼   1 인류에게 언어가 생긴 이래 악행(惡行)이나 악덕(惡德)을 묘사하는 숱한 어휘들도 생겨났다. ‘흉악하다’, ‘수전노 같다’, ‘냉혈한이다’ 같은 표현들과 ‘악덕 군주’, ‘악덕 자본가’, ‘악덕 계모’, ‘모리배’, ‘간신’ 등등 그야말로 각양각색, 천차만별의 ‘악덕’에 얽힌 이야기들이 인간언어의 중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덕한 행위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보편적이고도 특별한, 악덕에 관련된 형용어들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목숨을 걸고라도 간절히 기...

메타포, 정원, 공공영역 file

  • 쾌활림
  • 2016-01-29
  • 조회 수 169

메타포. 정원(庭園). 공공영역   1   우주의 역사, 자연의 역사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자연의 역사는 뇌의 생리 속으로 자신의 역사, 그 시간 속 공간 속 축적된 의미들을 전달한다.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된 생활의 고통의 역사는 예민한 신경의 공감적 능력에 자신의 고통을 풀어낸다. 자연이 삼킨 모든 생명체들의 죽음과 개체가 행한 생의 무리수, 공포와 착종된 비전을 그려낸다. 그래서 자연이 종국에서 드러내는 생활상의 과거, 산화(散華)된 경험의 소리와 냄새, 빛과 감각의 모든 스펙트럼을 얼마...

자연의 우울_사실성의 우울 file

  • 쾌활림
  • 2015-12-25
  • 조회 수 422

1 자연이 합법칙적이라는 관념은 근대화된 관내(管內) 학문, 곧 근대과학의 산물이다. 근대적 학문범주에서‘자연’으로 범주화된 세계는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서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자연’도 분명 존재한다. 곧 인간의 ‘생활세계’로 근대과학의 탐구 대상인 자연세계를 자원으로해‘인류 발전’이라는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인류생활로서의 세계이다. 사실상 개인이 몸담고 있는, 개인에 관여되어 있는‘자연세계’는‘자연’으로서의‘생활세계’이다. 과학 연구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자연세계는 추상적인 ...

전통_효과의 사다리, 무의미의 의미 file

  • 쾌활림
  • 2015-09-27
  • 조회 수 1443

1.   아프리카 해안가 어디에선가 부터 해협을 건너고, 지구 표면을 따라 방랑하기 시작한 인류의 족적, 이 발자취를 인류사의 시작이라고 말해도 좋지만, 전통이라고도 명명할 수 있다. 지구 위를 방랑하다가 삶의 터전을 세우고 발 길 닿는데까지 영토화한 일도 흔히 역사라고 불려지지만 ‘전통’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전통을 세운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어딘가로부터 한반도로 흘러 들어와 석기, 철기 시대를 열고, 삼한과 백제, 신라, 고구려를 세운 일도 역사이고,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세운 생활의 전...

자기만의 세계상 file

  • 쾌활림
  • 2015-07-29
  • 조회 수 1221

자기만의 세계상 _  새로운 체험의 초현실 1. 누구나 한번 쯤은 살면서 권태롭기까지 했던, 아귀다툼 같았던 일상이 지상의 행복이구나 하며 느낄 때가 있다. 누구나의 일상이 같은 정도로 만족스럽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힘이 반복되는 생활리듬에서 나왔던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별별 이유와 고통으로 상처받은 마음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은 무너지지 않고 벼터내는 것은 나날의 생계(生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목격하고 체험한, 피해 입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고 싶은, 세상...

제대로 사는 삶의 문제 file [2]

  • 쾌활림
  • 2015-07-03
  • 조회 수 457

1 인류는 ‘무엇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하는 아주 오랜 물음, 문명이라는 이름의 물음에 이끌려 살아왔다. 인간의 문명 특히 서구문명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고민할 까닭이 없는, 이런 물음을 갖지 않는 인간을 인간다운 생명으로 여기지 않아왔다. 제대로 사는 것이, 궁극에서 보면 사회의 공적 영역, 그 부산함에, 시끌벅적한 부(富)와 부를 창출하는 기술과 노동, 사업과 인간관계, 인정과 평가의 사회생활에 크든 작든 자신의 능력으로 끼어들어 살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갈구하는 것이...

예술과 생활2 file

  • 쾌활림
  • 2015-05-28
  • 조회 수 376

김성룡천일야화 프로젝트   1. 역사는 거창한 비전과 계획이 이룬 삶이 아니다. 민족이나 국가, 사회의 특정 계층이나 구성원들 일부가 대량살상으로 인해 혹여 절멸 된다고 해도, 나머지 개인들이 비참한 생활로나마 생존할 수 있다면, 역사는 생존자들의 핍진한 이해관계의 긴장으로 무장돼 미래만 바라보며 나가게 된다. 굶주림과 학대가, 살상과 모반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일상은 새벽위로 떠올라 밤사이로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일상에서 몇몇 극소수 개인들은 다른 공동체와의 전쟁도 기획하고 생의 미화도 만끽하면서 ...

미학이란 무엇인가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340

 1 일반적으로 '미학'이란 단어를 들으면 누구나 조금은 그 뜻을 막연해한다. 그래도 '미에 대한 학문'이니까 예술에 관한 전문지식체계를 다루거나 미용 등 구체적인 생활분야에서 무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과 관련될 때 미학을 언급한다는 정도는 알 수 가 있다. 사실 이런 차원에서의 미학 이해는 틀리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미학'은 얼핏 대하기 만만치 않은 아우라와 수수께끼로 가득 차 보인다. 통념이 과연 맞는 것인가 반신반의 하게 된다. 한편 미학에 대한 통념이 미학에서 실제 다루는 내용과 크게 다...

사회시스템과 미술2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94

1 개인이 자기자신에 대해 모르는 정도는 타인에 대해 모르는 그만큼 더 커진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모르는 정도가 클수록 한 사회가 지닌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불일치가 커진다. 세계화로 전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마치 전지구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이 정도로 나마 서로 인지하고 알고 지낸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뿐더러,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서로 간에 모르는 부분은 너무 많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

인문학의 정치,미술의 정치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568

이인철/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 순수예술과 참여예술 논쟁이 있다. 예술이 정치의 수단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말하자면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발언을 해야한다는 신념을 지닌 예술가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간 참여예술을 주장하는 작가는 보통 좌파진영에 속한 작가라고 추정, 분류되면서 80년대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서 보듯 전시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다. 순수냐 참여냐의 예술적 선택에서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를 예술적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온시하면서‘정치적 미술’로 문제시 한 것이다. 실제 정...

사회시스템과 미술1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33

서용선<단종복위모의>   최경태 <겨울 아침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1.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활로를 얻기 위해 움직인다. ‘생활’(生活)에 나서야 나날의 일상과 자신의 생애가 보장되고 생명의 잠재적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태어나자 마자 생활에 나서지는 못한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경험해야한다. 경험을 위해 배워야한다. 초기 인류라면 생활을 위해 무작정 걸으면서 보고 듣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역사 시대 접어들면서는 생활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배워야했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 체계(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가 경험하고...

경험과 판단의 아카이브_필요하지만 없는 것에 대한 단상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249

  조양규 <31번 창고> * 인간은 살면서 생활의 모든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감정은 어떤 생명체 보다 유별나고 복잡하다. 특히 삶의 감정이 단순히 수동적인 지각현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판단과 경험내용의 복합체이며 주관적인 반응이기도 하고, 지식의 결합물이며 의식의 총체물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어떤 것 보다 특수한 인간만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러한 표상들로 부터 사고와 관념의 상들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의식작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