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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사회시스템과 미술2

조회 수 194 추천 수 0 2015.05.07 14:5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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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자기자신에 대해 모르는 정도는 타인에 대해 모르는 그만큼 더 커진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모르는 정도가 클수록 한 사회가 지닌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불일치가 커진다.

세계화로 전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마치 전지구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이 정도로 나마 서로 인지하고 알고 지낸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뿐더러,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서로 간에 모르는 부분은 너무 많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정도로 알고 있지도 않다. 전지구인의 모든 개인들이 살아온 삶의 과정에서 이들 각각의 민족과 국가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졌었는지, 어떻게 죽음을 대면했는지, 우리는 아직 너무 많은 것에 대해, 지구 위 인류의 역사, 개인의 역사에 대해 모른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학문적 업적이 인류에게 가르쳐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어떤 것이었던가? 그 모든 학문적 업적들을 총집합하거나 꿰매도 사실 우리가 인류의 생활에 대해, 우리들의 사회에 대해 아는 것은 파편적인 정보일 뿐이다. 결국 한정된 대상의 표면에 대한 한정된 특정관점에서의 일시적 이미지들일 뿐이다. 우리가 부분적 사실로서만 인간의 생활과 사물과 사건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데도, 학문에서 얘기하는 ‘사실’들은 그것을 대상의, 논의주제의 ‘진실’로 구성한다. 그래서 언제나 기록되지 않은, 관찰되지 않은 대상들의 소위 잉여의 삶은 해석의 배경에서 제외된다. 삶의 사실성은 삭제된다. 

아감벤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란 주제의 글에서 “하이데거 사상의 위대한 새로움은 ... 바로 그것이 단호하게 사실성에 기초하고 있다는데 근원을 둔다.”, “하이데거에 있어 존재론이란 애초부터 사실적인 삶에 대한 해석학 ... 사실적 삶의 본래적 경험의 정식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하이데거 철학과 히틀러주의와의 몇 가지 유사성과 차이점을  밝히고자 레비나스를 인용해 “... 히틀러주의 철학은 ... 영혼과 신체, 자연과 문화 사이의 끊을 수 없는 응집력으로 간주되는 역사적, 물리적, 물질적 상황들의 무조건적이고 단호한 수용에 기반”하고 있고, 히틀러주의에서는 ‘사실적 삶의 경험을 일종의 생물학적 가치로 변형’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적 삶의 실제를 실제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의 정치화는 나치즘에서 인종주의의 전체주의적 강령이 된 것이다.

하지만 굳이 하이데거 철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사실적인 ‘삶의 전체상’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의 일반은 전체주의적 체제에 얹혀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적 삶에 대한 인지불가로 인해 ‘생활’은 전체주의적으로 작동된다. 사실적 삶은 전체주의적으로 작동되는 생활환경을 구성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삶의 사실적인 자유를 누린다는 것인데, 자유주의는 전체주의의 거울상일 뿐이다. 자본주의체제는 이념이기에 앞서 사실적 삶의 인간적 모습이고 그래서 가장 근원적으로 파시즘의 양상을 띤다. 정치적 미술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는 건설자의 윤리적 태도를 지니지만,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전체주의의 거울상을 해체하기를 멈추지 못하지만, 그럴수록 거울상에 자유주의의 유일한 주체로 남는 것은 인류성애자인 자신의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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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트필드가 이미지와 텍스트의 몽타주기법으로 보이지 않는 진실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을 때, 몽타주기법은 구태(舊態)의 표시체계인 기존 시각언어를 대체할 새로운 창조적 시각언어체계를 만드는 방법으로 시도됐다. 실제로는 전체주의적으로 작동되고 있지만 이미지 상으로는 자유스러워 보이는 현실 이미지들을 고발하고 페기 하고자 하는 정치적 시도에서 나온 방법이다. 하지만 이렇게 발생한 새로운 시각언어도 태생적으로 굳은 언어로 물화 되는 운명을 지닌다. 점차 자기문제의 바깥외연들에 대해서는 전체주의적 관계를 지니게 된다.

시각언어 이미지는 특정한 체험과 인식을 상징하고 그 언어를 대체해 생성된 또 다른 새로운 시각언어의 체계로 축적, 전이되면서 개별적, 시대적 시각언어가 담아낸 체험과 인식은 역사가 된다. 물화는 지양과정을 거친다. 역사가 된다는 것은 그럼으로써 상징언어가 현실의 재현물로 소통될 수 있는 의미론의 땅이 다져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불완전한 인식과 재현이지만, 실체의 가상적 상징을 상징할 뿐이지만, 이 한계를 극복하는 미적 장치는 이미지 생산자의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문제의식의 호소력은 이미지를  강력한 발언을 담는 구축물로 살려낼 수 있지만, 구축물은 역사적 근거 없이 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치적 이미지가 발언하는 문제의식의 역사가 현실의 문제지평의 복합적 지층들이 발생하는 문제적 현실지평에 맞물리면서 작가의 ‘문제의식’은 이렇게 해 비로소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데에서의 인정투쟁에서 승리한다. ‘말의 권리’를 쟁취한다.

이미지의 역사, 메타포의 문법을 구축하지 못했거나 메타포 사용의 전통을 이루지 못한 시각언어는 표현상의 비전이 없다. 사실 이미지의 태생적 기능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 하는 데에 있다. 인간은 존재(현실의 본질)와 존재자(현실의 현상)의 간극을 뛰어 넘을 수 없다. 절대자에 대한 인식상의 불능성을 보충하는 혹은 대체하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사용해왔는데, 이미지는 메타포(은유와 환유법)의 상징체를 통해 불가지의 ‘존재’(혹은 불가지의 사회적 실체)를 가리키고자 했다.

현대미술은 텍스트와 이미지 몽타주로 ‘사실적 삶’의 구태를 새로운 삶의 관계로 이끌어 내왔다. 이미지의 힘은 이미지의 내력과 은유와 환유의 문법에서 생겨난다. 이미지를 메타포로 사용해온 역사와 체계에서 물활론으로 작동된다. 미술의 참된 역사도 구축된다. 미술도 현실구속력을 지닐 수 있다. 미술사가 작가나 작품의 역사가 아니라 이미지 언어의 발생론적, 정치적 기술방법의 역사여야 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 미술사와 미술비평에는 작가들이 사용해왔고 사용하고 있는 언어(메타포)에 대한 인식이 없다. 작품론이거나 전시서문 등에 메타포들을 분석하는 일은 있으나 근현대미술사를 관통해온 메타포 사용방법의 계통인식도, 체계도 없다. 작품의 시대적 시각언어로서의 표현내용은 작품이 눈앞에 존재할 때만 감각상이 된다. 작가가 실제 역사를 바라보는 눈에는 역사의식이 있을 수 있으나 작업상에는 현실의 역사적 연관이 견고한 실체로 매개되어 있지 않다. 작품들은 뿔뿔이 저마다 우쭐거리며 그럼에도 또 바로 그래서 작품의 (정치적) 효과는 대동소이하다. 이러할 진데 누가 작가적 성공의 반열에 오르느냐는 작품 외적 역량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누가 봐도 공예적인 완결성을 지니거나 감각적인 얼리 어댑터(early adapter)의 면모를 보여주느냐의 문제로 남겨진다.      


3

실제적 삶이 복잡계를 형성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 미술계의 실제 모습은 매우 협소할뿐만 아니라 표층적이다. 우리의 근현대적 삶은 지구 위 어떤 지역에서보다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해 왔지만, 미술계(미술계에 한정해보자면)는 작가들을 유혹하는 세이렌(Seiren,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의 노래 같다고나 할 만큼 치명적으로 상품물신주의적이고 반인문주의적이다. 일제 시대 이후에도 말할 것도 없지만 일단 해방 이후 오늘날의 동시대 미술계도  이 같은 상황을 넘어서 본적이 없다.

너무나 잘 아는 미술계 구조라 새삼 설명할 바도 아니지만, 그래도 거론해보면, 작가들은 미술생산의 주체들이고 미술교육기관은 작가를 배출하는 기관이다. 나머지 미술계 기관들은 기본적으로 ‘평가기관’이다. 평가자 층인 비평가와 큐레이터 나아가 미술저널리스트가 활동하는 공간이 미술관과 화랑, 미술잡지와 일간지 등 미디어를 통해서이다. 하지만 이 공간에서부터 미술계의 평가 작업은 알 수 없는 힘들이 작용하는 콤플렉스로 기능한다.

지극히 평면적인 피층적인 우리 미술계 구조이지만, 즉 뻔하게 드러나는 우리 미술계의 전체 양상들이지만, 그 구조의 각 부분(미술제도)에서 하는 가치화 작업(전시기획, 비평, 리뷰, 기사 등)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힘의 장 바깥에 있는 구성원들은 이해할 수 없는 힘들이 움직이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제도의 힘들을 움직이는 외적 계기들은 비교적 근거가 추적되기도 하나, 내부적으로 작동되는 가치평가의 이해관계는 그 맥락이, 본질이 사실상 은폐되어있다. 미술계의 그야말로 몇 안되는 지배적 평가기관들이 내리는 결정의 궁극적 이해관계가 물신처럼 유혹적으로 포장된채 흑막에 가려있다. 평가의 근거가 문화적 용어들로 채워져 있지만, 문화적 선택은 권력게임이고 자체 ‘필요’의 맥락인데, 권력게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추측만을 해볼 수 있을 뿐이고 그렇다고 정확히 기관장의 취향대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닐 때, 어떤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이해관계의 조우가 그 안에서 일어난 것인지는 안개 속 움직임처럼 불투명하게만 그려진다.

“나쁜 머리로 고민해본다면, 한 사회가 돈에 종속되지 않은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이 판가름날수 있는게 아닌가 싶고, 예술은 자본에게 종속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 의미에서 상업화랑이 아닌 공공미술관의 역할이 있는게 아닐까”(정재호)고 작가는 믿는다.

하지만 공공미술관이 보여주는 예술적 평가의 비예술적 작동은 작가의 존재근거 자체를 옥죄고 들어오는 부조리로 작용한다. 하지만 지배체제는 이러한 사실 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배워 온 교과서가 가르쳤던 순수미술개념과 미술관의 공공성 개념은 실제하는 삶 속의 공적 미술제도의 진면목 앞에서 허위의식임이 드러난다. 작가들이 이같은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이들이 매일 몸으로 체험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단순한 작품 제작자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꿔주는 사람이다. 그것이 보들레르가 말했던 시선의 모더니티, 시선의 정치였다. 관점의 변화는 양적인 근대가 아닌 질적인 근대의 시작을 알린다. 이것이 현대미술, 모더니즘 미학의 탄생이다. 예술가는 현실의 물리적·양적 권력에 맞서 현실의 진부함을 반성하고 삶의 비범함을 복권하는 고귀한 임무를 띠게 된다. 그러기에 그의 삶은 현실이라는 편집된 시스템에 맞서는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다. 예술가가 존경받는다면 바로 이런 예술의 역사를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영민)

작가의 이러한 믿음은 우리 미술계 현실에 대해 무지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알고 있어서 스스로에게 다시 다짐해 볼 수밖에 없는 자기최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공간에  다른 기준으로 평가된 작가들이 들어간다면 상황은 어떻게 되는가?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공간에 들어간 작가들의 작품의 정당성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의 질에 대한 우리 미술계의 평가에도 공통의 기준이 없다. 물론 공통의 기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합리화된 각자의 작품의 변을 제외하곤, 결국 세인들의 혹은 미술계 평가그룹들의 개인적 심정 속에 느껴진 평가가 쑥덕공론으로 떠돌면서 미술계의 공공성을 연기 같은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 미술에 대한 시장의 불신을 더욱 가중시키고 그럴수록 시장은 단색화 작품들처럼 공예처럼 숱한 붓질을 덧칠하며 잘 만든 미술품을 예술적으로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게 되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우리 미술계의 예술평가행위에는 평가내용들을 중층화, 맥락화 할 수 있는 역사적 문화적 토대로서의 예술가치론이 바탕에 없다. 그림을 읽어내는 평가적 언어규칙이, 가치기준이 전혀 없다. 우리 미술사와 미술비평, 예술학과 미학과 큐레이터학에서 이 문제는 외국의 철학적 분석적 기준들이 소개되어 예를 들면, 학위논문들로 다루어지고 있을 뿐 현장에서 걸러내진 경험적 통계도 종합적 판단도 없다.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통사적, 공시적 비교, 맥락화 작업도 없었고, 전시기획의 역사에 대한 비평적 접근도 부재한다. 작품의 의도와 열정의 미학적, 윤리적 태도를 삶의 문제 전체 연관에 매개해 생활과 역사, 동시대성과 작가의 예술성이 미술계를 어떻게 작동시키며 풍부하게 하는가에 대한 분석도 없다. 작가적 노력을 삶의 문제지평의 맥락 속으로 매개, 의미화하지 못하는데, 미술계에 떠도는 세계적 예술담론과 감각의 얼리 어답터를 소개하듯, 우리 미술계에서 작가와 그의 예술은 이런 공간들에서 나열되고 아티스트 톡으로 소개되고, 토론이나 세미나로 한번쯤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한 번도 제대로 지속적으로 연구된 적은 없다.

연구라고는 석사학위나 박사학위 논문으로 행해지거나 소식지나 학회지, 기관의 정간물에 실리는 정도거나 수장고의 분류체계로 귀속될 뿐이다. 그것도 대개 외국의 기존 연구물들에 대한 편집과 주석과 간략한 요해와 형식적 종합으로 행해진 연구물들이다. 연구가 축적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함경아의 말처럼 “전시장에 진열된 것만 작품이 아니에요. 북한 사람이 자수를 놓기 위해서는 인터넷에 떠도는 외부의 그림과 텍스트를 어쩔 수 없이 읽고 보게 되는 행위, 그것이 바로 '삐라’와 비슷한 기능이 아니었을까요? 제한적이지만 공간적 거리와 이데올로기적 장벽을 뛰어 넘는 소통의 시도 자체와 그것을 둘러싼 전 과정 모두가 작품”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 대한 인식의 축적과 축적 역사, 축적내용의 공공화가 비로소 진정한 정치적 실천에 이르게 되는 길이다. 그러니까 미술사 학위논문 등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작품내재 비평으로서의 작품연구 위주의 우리 미술계의 연구평가 행위는 미술의 정치적 실천을 가로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정치적 현실비판에 대한 반정치적 바리케이드의 확실한 진지를 구축하는 셈이다. 결국 인류 전체의 문화사로 내려다 볼 때는 헛소동일 뿐이다. 인간활동에 대한 인식은 축적되지 않고 각자 해당 기관과 제도 주체의 경력으로 기록될 뿐이다. 


4

국립현대미술관이 하는 일의 내용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자본주의 사회건 사회주의 사회건 ‘국립’ 미술관이 국가의 시각적 정체성을 세우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넘어설 수 없다.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역할은 그만큼 공공적이어야 하는데, 그런데도 우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행해지는 결정과정이 투명한 적은 없었다. 거기에 매개된 갖가지 이해관계의 유래들에 대해서는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다. 그 결과만 기억된다.

이 불투명성의 비밀마저도 ‘국립’의 아우라로, 알레고리로 당연시 되는 공간이 국립현대미술관이다. 그렇지만 사실 국립이나 리움 미술관, 아트선재센터 같은 대형 사립미술관들의 번득이는 사이비 아우라는 자본력,  물적, 인적  동원력에서 나온다. 그 기관의 문화적 능력의 질에서 나오지 않는다.

리움 미술관은 로댕갤러리 전시를 포함해 한 번도 예술적 평가로 전시를 한 적이 없다. 이 곳에서의 모든 전시는 정치적이다. 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미술관에서는 유명 작가들이 해야 한다는 선택이 정치적이다. 이곳에 들어가면 순수미술도 인문학도 최고를 향한 감각과 지성과 테크닉을 갖춘 전사 곧 삼성문화의 용병이 된다, 이곳은 ‘예술가 문화’를 기업의 전략무기로 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다는 것은 국립 미술시장의 예술가로 영구히 재생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리움 미술관에 작품이 보존된다는 것은 문화용병의 게임전투력을 ‘공예’적으로 철저히 위상화해 보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종의 용병의 박물관 전시품화이다. 그런데 그러면서 잃어버리게 된 것은 이곳에 참여한 작가들의 생의 공적 정당성이다.

아트선재센터는 미술관으로서의 공공성을 보여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곳에서의 전시 작가들은 대개 공공성을 주제로 한다.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표현방식과 주제를 통해 사회의 공공성에 대한 요구를 담아냈다. 아트선재센터의 모순된 행태는 스스로를 아방가르드 진지처럼 포즈를 취하되, 전위정신은 얼리 어댑처처럼 향유하고 가신화하면서 자신의 공공성의 얼굴로 삼는데에 있다. 치밀하고 치열하기까지 한 파시스트 심미학에서처럼 ‘정치의 예술화와 예술의 정치화’를 동시에 추구한다. 그러면서 정치경제적으로 문화계를 지배하는 것을 마치 우수한 문화적 헤게모니로 미술계 정치경제권력을 지배하는 것으로, 문화적 엘리트주의로 보이게 하고 있다.

아트선재센터는 보수적이든 진보적인 입장에서든 작가연구나 작품연구가 전혀 없는 기관이다. 문화적 축적자산이 없는 기관이다. 그래도 있는 것은 수장품들 뿐이지만, 수장품 연구는 전혀 행해지지 않는다. 기관 종사자들은 전부 용병들로 기능한다. 형해(形骸)만 남은 기관인데도 물자(物資)들은 들락거린다. 그리고 무기는 해외에서의 국내외 작가평판과 국내에서의 작가평판, 작가문화에 대한 얼리 어댑터같은 촉감적 반응과 이에 관련된 고속 정보망이다. 작가 자신이 제출한 작가자료와 정보이다. 자체 전시기획의 자기정당성도 빌어온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미술문화를 대표하고 지배하고 있는 이 같은 대표적 미술관들이 이렇게  존재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그간 우리가 옳든 그르든 국정교과서 등에서 배우고 믿었던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미술, 진정한 창조정신과 작가정신은 진정 존재하기라도 한 것인가, 존재 한다면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미술과 미술의 진정성은, 이들 미술관에서 전시한 작가든 아니든, 유명한 작가든 아니든, 미술이라는 아름다운 문화를 실현해보고자 한 모든 작가들과 작품들 중 어느 한 작가에게나 작품에게서만 유독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존재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가, 이들 작가들의 한 시절 한 어느 생활의 순간, 어느 특정 작품의 한 층위에, 그리고 이들 작가들의 행위와 말과 작가들과의 연대와 관계에, 이들의 움직임 어느 계기에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흘러 들어갔다 흘러나오며 흩어지기도 하면서 존재한다. 한 순간 머물다가 사라지며 그 울음과 발자국과 영광과 연대감에 창작의 한 순간의 기쁨으로 산화되고 빠져나간다. 미술비평과 미술사는 그 출현과 상실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작가들의 ‘미적문화’는 비빌 언덕 없이 근현대성의 수수께끼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한 치 앞 길, 살 길,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길. 바로 앞에 놓인, 궂은 일 투성이고 땀흘려 살길이고 타자의 도움 없이는 살 길이 막막한 자갈 길. ...먼 길,  ...목숨 길, 피처럼 진하고 따듯하고 돌고 돌아 작은 실핏줄 길. 소리 소문 없이 뛰는 맥박 소리 나는 아주 작은 핏 길. 목숨을 싣고 목숨을 걸어야 가는 아주 작고도 분명한 그 한 치 앞 길.“(김봉준)

하지만 이 고백에서처럼 작가적 생존의 위기상태가 평생토록 지속 될 수 있는 이러한 상황은 벗어나야한다. 모든 작가들의 미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 없었던 것이 되는 상황, 그 끝 모를 추락의 우울함과 분노로부터 작가적 생명이 활로를 얻을 수 있도록 길을 터나가야 한다.

(월간미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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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과의 인터뷰 file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176

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과의 지극히 사적인 인터뷰 강성원 (인터뷰는 민미협 30주년 기념 <인터뷰 집>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여차 저차한 이유로 못 실렸음. 이 글은 원래의 인터뷰 글에서 <인터뷰 집> 취지 관련 인터뷰 도입부는 삭제됐음. 그밖에 인터뷰 중간 중간에서도 <인터뷰 집> 관련 내용은 삭제됐음. sns에 올리는 일은 성완경 선생님의 허락 하에. 인터뷰 내용 중 성완경 선생님이 쓰신 글 내용에 대해 질문할 때 성완경 선생님이 쓰신 글 문장을 축약하거나 풀어쓴 경우도 있지만, 선생님이 쓰신 문장 그대로 드러내면서 질문...

<근현대 시각이미지와 여성>

  • 쾌활림
  • 2018-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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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표현된 근현대 여성의 모습은 과연 ’여성‘을 담고 있는가, 여성주의자 혹은 여성주의 미술가들이 그린 여성성은 과연 여성주의를 실현하는가, 여성미술은 어느 정도로 여성해방적 미술을 성취하고 있는가 등등에 대한 간략한 질문형식의 문제제기를 해보자. 역사적 사회적 흐름과 더불어 변하는 여성이미지들에 과연 여성성의 달라진 의미들이 반영되어 있다면 여성미술은 시대마다 얼마나 이런 여성성의 문제자체를 인지, 인식해 담아내는가? 여성작가들의 작가활동상에서의 모습은 얼마나 자신이 옹호하는 여성성과 일치하는가 하...

내 마음의 수선전도(修善全圖)

  • 쾌활림
  • 2018-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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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에도 ‘수선전도’가 존재한다. 내 마음이 느끼는 서울의 전체상인데 내가 느낀 서울의 심경상(像), 그 바닥이자 하늘이다. 원래 ‘수선전도’라는 말은 중국에서 유래됐다.  한 나라의 ‘수도(首都)’의 의미는 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하는 일 곧 수선(修善)의 시작점을 의미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명칭이라고 한다. 수선전도에는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기관들이 국심(國心)의 세력중심으로 재현돼있다. 오늘날의 광화문 부근 영역이 정부청사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대사관등이 들어서 있으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상징하듯...

_‘퍼블릭 아트’는 동어반복적 개념어이다.

  • 쾌활림
  • 2018-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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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예술과 퍼블릭(Public Art) 아트 개념> 1 광장   광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광장에서 함께했던 낯선 사람들과의 뜨거운 연대감이다. 광장에 서면 일상 속 불만과 갈등이 내일을 위한 희망으로 바뀌어져 간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 느낌의 순간에 내 옆 어느 낯선 사람도 내 마음에 동참해주고 있다는 벅찬 뜨거움이 올라온다. 굳이 촛불집회같은 광장에서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어디인가 누구나가 갈 수 있고 자유롭게 주변을 누리고 공중의 특별한 간섭없이 내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

깊이의 허영 리얼리즘 변종현실 file

  • 쾌활림
  • 20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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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종현실   제1의 리얼리티가 있다. 제1의 리얼리티는 제1의 리얼리티를 숙주로 한 기생 리얼리티와 그 변종을 무한증식한다. 리얼리티가 무한증식하는 줄기는 의식상에서의 범주에서이다. 그리고 숙주리얼리티 변종들 바이러스는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항상성을 지녀서 겉으로는 가시화되지 않는다.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것은 제1의 리얼리티가 개인이 해체, 파괴할 수 없는 구조로서의 ‘현실 겉면’이기에, 철의 장막이기에 무한증식하는 숙주 리얼리티는 의식 바탕 저 아래 깊이로 밖에는 변종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file

  • 쾌활림
  • 201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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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미술 4월호 연재 글(그간 반년 가량 개인사정으로 중단 했다가 다시 시작)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1. 맥 컴퓨터와 윈도우 컴퓨터를 사용해 작업한 텍스트나 이미지들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호환을 위해서는 다른 장치를 연결해야 한다. 호환의 필요를 위해 고안된 특별한 수단은 결국 상품으로 구입해야 한다. 구글 시트(Google Sheets)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나 한글 워드로 쓴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호환이 안 되면 텍스트를 복사해서 옮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이 작업들을 메일로 전송하고자 ...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 쾌활림
  • 2016-08-28
  • 조회 수 70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월간미술 연재13) 1 이 세상에 실제하는 공론의 양대 축, 공론이 그 안으로부터 생성되는 원천은 제도와 인간이다. 세상의 저간에 떠도는 갖가지 공론들은 인간 개개인에게서, 그들 모두 간의 삶의 느낌에서 나온다. 이런 가지가지 개인감정과 이해(理解)의 시선들이 실제로 모아져 일정하게 객관화된 것이, 결국 인간의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 정착된 것이 ‘제도’이다. 제도는 제도의 정신으로, 관련된 법으로 움직여진다. 제도는 본질상 인간의 행위가 일으키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예측시스...

민중미술의 미학 file

  • 쾌활림
  • 2016-05-30
  • 조회 수 410

민중미술의 미학   1 미술가가 자신이 직접 본 광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동, 서양 모두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였다. 미술가는 이즈음부터 자신이 본 생활상의 장면에 자신의 감정과 세계에 대한 관심을 듬뿍 담아 일정한 틀 속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보다 더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밑바닥 인생들이다. 사실상 일반적인 사회경관 대부분의 광경들은 작가 주변의 일상생활 아니면, 사회 밑바닥 층의 헐벗고 남루하고 그럴 수 없이 가난한 삶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 자연스레 인생에 회의가 들고 인생의 고통 전반에 생각이 ...

악덕,공공성, 제도의 영혼 file

  • 쾌활림
  • 2016-05-28
  • 조회 수 154

악덕, 공공성, 제도의 영혼   1 인류에게 언어가 생긴 이래 악행(惡行)이나 악덕(惡德)을 묘사하는 숱한 어휘들도 생겨났다. ‘흉악하다’, ‘수전노 같다’, ‘냉혈한이다’ 같은 표현들과 ‘악덕 군주’, ‘악덕 자본가’, ‘악덕 계모’, ‘모리배’, ‘간신’ 등등 그야말로 각양각색, 천차만별의 ‘악덕’에 얽힌 이야기들이 인간언어의 중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덕한 행위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보편적이고도 특별한, 악덕에 관련된 형용어들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목숨을 걸고라도 간절히 기...

메타포, 정원, 공공영역 file

  • 쾌활림
  • 2016-01-29
  • 조회 수 169

메타포. 정원(庭園). 공공영역   1   우주의 역사, 자연의 역사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자연의 역사는 뇌의 생리 속으로 자신의 역사, 그 시간 속 공간 속 축적된 의미들을 전달한다.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된 생활의 고통의 역사는 예민한 신경의 공감적 능력에 자신의 고통을 풀어낸다. 자연이 삼킨 모든 생명체들의 죽음과 개체가 행한 생의 무리수, 공포와 착종된 비전을 그려낸다. 그래서 자연이 종국에서 드러내는 생활상의 과거, 산화(散華)된 경험의 소리와 냄새, 빛과 감각의 모든 스펙트럼을 얼마...

자연의 우울_사실성의 우울 file

  • 쾌활림
  • 2015-12-25
  • 조회 수 422

1 자연이 합법칙적이라는 관념은 근대화된 관내(管內) 학문, 곧 근대과학의 산물이다. 근대적 학문범주에서‘자연’으로 범주화된 세계는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서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자연’도 분명 존재한다. 곧 인간의 ‘생활세계’로 근대과학의 탐구 대상인 자연세계를 자원으로해‘인류 발전’이라는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인류생활로서의 세계이다. 사실상 개인이 몸담고 있는, 개인에 관여되어 있는‘자연세계’는‘자연’으로서의‘생활세계’이다. 과학 연구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자연세계는 추상적인 ...

전통_효과의 사다리, 무의미의 의미 file

  • 쾌활림
  • 2015-09-27
  • 조회 수 1443

1.   아프리카 해안가 어디에선가 부터 해협을 건너고, 지구 표면을 따라 방랑하기 시작한 인류의 족적, 이 발자취를 인류사의 시작이라고 말해도 좋지만, 전통이라고도 명명할 수 있다. 지구 위를 방랑하다가 삶의 터전을 세우고 발 길 닿는데까지 영토화한 일도 흔히 역사라고 불려지지만 ‘전통’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전통을 세운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어딘가로부터 한반도로 흘러 들어와 석기, 철기 시대를 열고, 삼한과 백제, 신라, 고구려를 세운 일도 역사이고,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세운 생활의 전...

자기만의 세계상 file

  • 쾌활림
  • 2015-07-29
  • 조회 수 1221

자기만의 세계상 _  새로운 체험의 초현실 1. 누구나 한번 쯤은 살면서 권태롭기까지 했던, 아귀다툼 같았던 일상이 지상의 행복이구나 하며 느낄 때가 있다. 누구나의 일상이 같은 정도로 만족스럽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힘이 반복되는 생활리듬에서 나왔던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별별 이유와 고통으로 상처받은 마음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은 무너지지 않고 벼터내는 것은 나날의 생계(生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목격하고 체험한, 피해 입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고 싶은, 세상...

제대로 사는 삶의 문제 file [2]

  • 쾌활림
  • 2015-07-03
  • 조회 수 457

1 인류는 ‘무엇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하는 아주 오랜 물음, 문명이라는 이름의 물음에 이끌려 살아왔다. 인간의 문명 특히 서구문명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고민할 까닭이 없는, 이런 물음을 갖지 않는 인간을 인간다운 생명으로 여기지 않아왔다. 제대로 사는 것이, 궁극에서 보면 사회의 공적 영역, 그 부산함에, 시끌벅적한 부(富)와 부를 창출하는 기술과 노동, 사업과 인간관계, 인정과 평가의 사회생활에 크든 작든 자신의 능력으로 끼어들어 살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갈구하는 것이...

예술과 생활2 file

  • 쾌활림
  • 2015-05-28
  • 조회 수 376

김성룡천일야화 프로젝트   1. 역사는 거창한 비전과 계획이 이룬 삶이 아니다. 민족이나 국가, 사회의 특정 계층이나 구성원들 일부가 대량살상으로 인해 혹여 절멸 된다고 해도, 나머지 개인들이 비참한 생활로나마 생존할 수 있다면, 역사는 생존자들의 핍진한 이해관계의 긴장으로 무장돼 미래만 바라보며 나가게 된다. 굶주림과 학대가, 살상과 모반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일상은 새벽위로 떠올라 밤사이로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일상에서 몇몇 극소수 개인들은 다른 공동체와의 전쟁도 기획하고 생의 미화도 만끽하면서 ...

미학이란 무엇인가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340

 1 일반적으로 '미학'이란 단어를 들으면 누구나 조금은 그 뜻을 막연해한다. 그래도 '미에 대한 학문'이니까 예술에 관한 전문지식체계를 다루거나 미용 등 구체적인 생활분야에서 무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과 관련될 때 미학을 언급한다는 정도는 알 수 가 있다. 사실 이런 차원에서의 미학 이해는 틀리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미학'은 얼핏 대하기 만만치 않은 아우라와 수수께끼로 가득 차 보인다. 통념이 과연 맞는 것인가 반신반의 하게 된다. 한편 미학에 대한 통념이 미학에서 실제 다루는 내용과 크게 다...

사회시스템과 미술2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94

1 개인이 자기자신에 대해 모르는 정도는 타인에 대해 모르는 그만큼 더 커진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모르는 정도가 클수록 한 사회가 지닌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불일치가 커진다. 세계화로 전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마치 전지구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이 정도로 나마 서로 인지하고 알고 지낸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뿐더러,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서로 간에 모르는 부분은 너무 많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

인문학의 정치,미술의 정치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568

이인철/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 순수예술과 참여예술 논쟁이 있다. 예술이 정치의 수단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말하자면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발언을 해야한다는 신념을 지닌 예술가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간 참여예술을 주장하는 작가는 보통 좌파진영에 속한 작가라고 추정, 분류되면서 80년대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서 보듯 전시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다. 순수냐 참여냐의 예술적 선택에서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를 예술적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온시하면서‘정치적 미술’로 문제시 한 것이다. 실제 정...

사회시스템과 미술1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33

서용선<단종복위모의>   최경태 <겨울 아침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1.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활로를 얻기 위해 움직인다. ‘생활’(生活)에 나서야 나날의 일상과 자신의 생애가 보장되고 생명의 잠재적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태어나자 마자 생활에 나서지는 못한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경험해야한다. 경험을 위해 배워야한다. 초기 인류라면 생활을 위해 무작정 걸으면서 보고 듣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역사 시대 접어들면서는 생활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배워야했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 체계(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가 경험하고...

경험과 판단의 아카이브_필요하지만 없는 것에 대한 단상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249

  조양규 <31번 창고> * 인간은 살면서 생활의 모든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감정은 어떤 생명체 보다 유별나고 복잡하다. 특히 삶의 감정이 단순히 수동적인 지각현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판단과 경험내용의 복합체이며 주관적인 반응이기도 하고, 지식의 결합물이며 의식의 총체물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어떤 것 보다 특수한 인간만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러한 표상들로 부터 사고와 관념의 상들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의식작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