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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팅 비평은 모종의 ‘미적 질감’ 비평을 끌어내보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서는 미술과 미학 문제로 다룬다.

그간 미술비평과 큐레이터 일을 했다. 인문학박물관을 만들어 학예실장으로 일 한적도 있고 일민 시각총서 편집장 일도 했다. <미학이란 무엇인가>(사계절)를 비롯해 미술서 몇 권 썼고, <문화적 기억_야나기 무네요시전>, <공감_정기용 건축전>을 비롯해 <격물치지>, <공장>, <우리 학문의 길_새 생활과 새 윤리의 학>, <수레바퀴 밑에서> 등의 전시도 기획했다.

자전적 문화론이자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문명과 미감 사이 곤경(困境)의 질감(質感)에 대해 써보고 싶어 그야말로 노력 중이다. 인생의 불편함, 불쾌함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이자 우주론 독본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건데, 스스로도 그 모양새를 알 수 없다.

인문학의 정치,미술의 정치

조회 수 568 추천 수 0 2015.05.07 14:47:31

이인철스포츠공화국의상과하.JPG이인철/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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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예술과 참여예술 논쟁이 있다. 예술이 정치의 수단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말하자면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발언을 해야한다는 신념을 지닌 예술가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간 참여예술을 주장하는 작가는 보통 좌파진영에 속한 작가라고 추정, 분류되면서 80년대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서 보듯 전시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다. 순수냐 참여냐의 예술적 선택에서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를 예술적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온시하면서‘정치적 미술’로 문제시 한 것이다. 실제 정치는 예술의 정치적 발언에 개입하되 순수예술적 태도에만은 방임으로 대한다.

이전에도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해체하려는 작가들이 있었으나 이들이 미술계 내부에서의 미술적 가치관을 문제로 삼는 한 이들을 좌파진영에 속한 작가로 보지는 않았다. 탈 주류의 새로운 미술로, 전위적인 실험미술로 보되 정치적 단죄는 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미술이 사회적인 발언에 나서지 못한 가장 극심한 때는 유신체제하에서였다.

예술의 통한 사회적 ‘참여’는,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 비판의 문제 혹은 사회적 이념의 문제이기에 앞서, 작가적 삶과 예술창작욕구에 잠재된 예술가의기본정서이다.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욕구는 내 삶의 문제를 학문적으로가 아니라 내 영혼과 인식과 지각의 힘으로 들여다보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무엇인가 특별한 인간의 문화를 창조하고 싶다는 인문적 정신에서 나온다.  

민중미술운동은 90년대 들어 퇴조했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예술을 통해 올바른 삶에 대한 비판과 희망을 이어가고자 하는 작가의식은 오히려, 70, 80년대 식 날선 정치적 탄압이 완화된 가운데, 이제는 작가들의 당연한 동시대 미술의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공립미술관에서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기능에서처럼 이런 움직임들을 순수 미술사 내의 미술운동 이념의 문제로만 연구하고 분류, 서술, 규정하면서 남한 근, 현대미술사의 형식적인 시대적 정립을 모색하기에만 힘을 쏟는다. 하지만 세계적 비엔날레들도 그렇고 광주비엔날레 등 대규모의 국내 미술비엔날레에서는 그 설립 이래 한번도. 하드웨어 상으로는, 예술의 사회 참여적 태도가 동시대 미술의 중심적 성향이라는 전제를 상정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적 미술’로 범주화 된 작품들이 모두 사회비판적인 목적의식의 반체제적 작품들인 것만은 아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치 미술이나 친일 미술,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체제의 정권업적 기록화에서 보이듯  친 체제적인 정치적 목적의 미술도 존재한다. 미술의 ‘정치성’은 사실 인생을 보는 비판적인 미술적 입장의 작가와 작품에서 뿐 만 아니라, 인생을 찬미하는 혹은 순수하게 사회의 기존 가치체계나 주어진 여건에 어울리고자 하는 단순한 미적 태도의 선택을 향해서도 할 수 있는 표현이다. ‘정치적 미술’의 개념으로 참여미술과 순수미술을 ‘구별하는 행위’는 그것이 순수미술 옹호 입장에서거나 참여미술 옹호의 입장에서거나 ‘필요’에 의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예술의 순수성과 예술자율성 이념의 신봉은 친 체제적인 체제 홍보적 인생찬미 미술이거나 체제 비판적 예술로부터의 거리두기, 예술행위, 예술만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가 존재한다는 인정에 대한 요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작가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순수하게 ‘예술’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는, 예를 들면. 친 체제적, 반체제적 태도의 선택에 대한 요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비판에 가세하지 않으면 친 체제적이 되고, 가세하면 반 체제적이라고 분류 될 뿐이다.

그래도 체제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예술만을 목적으로 하는, ‘위대한 예술가 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술 하는 것이 좋아 한평생 작업만을 하는 작가들이 미술계의 작가대중을 이루는데, 동시에 이들의 ‘순수예술’은 체제가 달라져도, 정권이 달라져도 큰 희생을 부르지는 않는, 혹은 더 나아가 양쪽 진영에서 연대에의 제안을 받거나 용인 받을 수 있는 입지점이 구축된다. 더군다나 그 인맥과 재산능력에서 여러 가지 장점을 소유한다면, 양 체제의 어느 편에서라도 가장 우선시되는 연대세력으로 역사 앞에 등장할 수 있다.

적극적인 체제 옹호적, 체제 찬양적 미술은 국가에 봉사한다는 자긍심으로 가문의 영광이고 에술가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탄탄히 얻으며 세간에 나아갈 수 있었고, 반체제적 미술은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빈곤과 박해, 소외로 불운했던 희생적 삶을 마감하기 일쑤였다. 그렇지만 결국 미술사에서 몰락한 것은 나치미술이나 친일미술 세력들이었다. 반면 반체제적이라고 분류된 미술가들은 생활은 몰수당했더라도, 이들의 작품이 보편적 인본주의적 지향점을 굳건히 세우고 나간 경우, 인류는 이들을 사회로부터의 금기시에서 꾸준히 해방시켜왔다.  

하지만  또 한편 보면, 친 체제적, 반체제적이라는 작품 ‘내용’에 대한 구분과 친 체제적이거나 반체제적 (혹은 이 개념이 너무 과격하다면 대신 순수미술과 참여미술 개념으로 바꾸어도 무방할 것이다)이라는 작가의 이념적 ‘성향’에 대한 구분이 완벽히 일치하는 것만도 아니다. 작품상으로만 볼 때는 친 체제적인지 반체제적인지 아니면 적어도 비판적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힘든 이미지들도 있다.

북한미술에서 보이듯 북한의 역사와 관련된 특별한 지역이나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단순한 순수미술 작품으로 보이는 그림들도 있다. 홍성담의 <세월오월>처럼 노골적 정치적 언술은 아니지만, 단순한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인데도 그 안에 내재된 미학적 알레고리나 상징으로 사회적 발언을 하는 작품들도 있다. 이런 작품들은 작가가 사용한 메타퍼를 파악한 후에야 의도가 구체적으로 파악된다. 작품제목에서 짐작해 볼 수 경우도 있지만, 이론가들 혹은 관(官)의 굳이 정치적인 해석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혹은 종북적인 작품인지의 여부가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작품들도 있다.

그래서 작가의 활동 경력상의 성향만으로 작품을 친 체제적, 반체제적으로 구분해 보긴 하나, 실제 작품만을 볼 때 구별하기 힘든 이미지들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승택의 <삐라>, 최진욱의 <조선총독부>, 윤동천의 <당신의 목소리는 힘입니다>, 서용선의 <단종복위 모의>, 정동암의 <사회학 감상>, 석영기의 <교런복의 꿈> 등은 역사적, 사회적 발언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이런 것인지 저런 것인지 작가의 발언과 비평 등의 분석을 통해서야 비로소 파악될 수 있고, 그렇다고 이로써 작가의 사회비판적 입장의 면모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며, 이들은 반체제적인 혹은 사회의 변화를 위한 정치적 실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작가들도 아니다.

장우석의 는 폭발 때 일어나는 버섯구름으로 밖에선 본 우리나라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라고 한다. “버섯구름은 폭발 당시에 공기의 흐름에 의해 주변의 모든 물체와 사물을 흡수하여 구름을 생성한다고 한다. 이런 현상에 착안, 동물들로 만들어진 버섯구름은 우리나라의 전쟁발발 가능성에 대한 대외적인 불안한 감정을 나타내는 한편, 구름 속의 여러 동물과 물고기들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과 같이 아무런 걱정 없이 오히려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작품이다“(장우석),  양연화의 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회풍경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에 의해 생성된 인위적 사회계급과 자본에 관한 욕망으로 만들어진 풍경으로 개개인의 모습은 대중의 모습“(양연화)을 지닌다. 장우석과 양연화의 작품은 분명 사회적 발언이지만 참여미술을 주장하는 작품들은 아니다. 듣고 본 사회의 상태에 대한 개별적 인지상태를 재현한 것이다.

이응노의 <군상>, 오윤의 <마케팅 Ⅴ : 지옥도>, 전준엽의 <문화풍속도 - 위 아더 월드>,  최경태의 <겨울 아침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김재홍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 는 전체적인 시선과 작풍에서 아마도 민중적 입장에서 그린 미술일 것이라 누군가는 짐작해볼 수는 있으나 이들의 작품 또한 역사와 현실에 대한 자신의 시선과 입장을 표현한 것이지 굳이 정치적 미술이라고 범주화되지는 않는다.

작가 개인의 사회 활동으로 볼 때 신학철, 김정헌, 임옥상, 박불똥 등은 사회참여 미술의 실천에 앞장서왔고 소위 세인들의 눈에 ‘정치적 미술’로 비춰진 작품들을 생산했지만, 이들은 철저히 ‘작가’이고자 했고 미술가로서는 반체제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비해 최병수와 이인철 등의 민중미술진영 작가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미술’로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순수하게 느낀 그대로 표현해 왔지만,  그렇다고 이것으로 ‘작가’가 되고자, 미술계에 굳이 속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2   

검찰은 신학철의 작품 <모내기>를 명백한 반체제적 작품, 다시말해 종북 미술로 규정하고 있다. <모내기>에 대한 검찰의 판단은 정치적 판단이다. 신학철의 <모내기>를 ‘정치적 미술’로 보았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볼 때, 엄연한 보안법 위반의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다. 정치적 미술은 그가 속한 사회의 정치적 현실에 개입하는 미술이고, 정치는 한 사회의 가치설정 방향과 가치실현의 방법을 의미하므로 남한사회의 체제가 있고 남한사회의 중심가치가 있는데 이것을 부정하는 행위는 예술상의 행위에서만일지라도 체제에 속한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 행복을 위협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보존의 정당화 논리는 모든 체제가 동일하게 구축하고 있고 체제윤리 등 체제의 인문학을 통해서도 작동시키고 있는 논리이다. 미술가라고 해서 이 논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의 정치적 입장 이전에, 그리고 정치적 미술로서의 <모내기>에 대한 작품 규정 이전에 그저 순수한 미술작품으로 <모내기>를 본다면, <모내기>는 작가의 어떤 생각과 감정을 반영하고 있는가? 일단 세인들의 시선에서 보면,  <모내기>에는 작품 위쪽으로는 백두산도 보이고 아래쪽으로는 산업폐기물 같은 쓰레기들을 쓸어버리는 농부들도 보인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백성들이 즐겁게 서로 공동체를 이룬 듯 함께 야유회를 갖는 장면이 보인다. 이 장면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무릉도원의 복숭아 일 것 같은 과실수이다.

이런 정도로 <모내기>의 이미지들을 읽어내는 것은 미술에 문외한인 일반 세인들도 대략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아마 이 각 부분들의 장면이 전체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한반도에서 더러운 것을 쓸어내고(아래쪽),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가 없는 통일된 사회(그림 전체의 배경 이미지)가 되면 우리 민족구성원의 삶이 즐거울 것 같다는 얘기 정도가 담겨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좀 더 세심히 들여다보면 작가가 꿈꾸는 제대로 된 삶은 ‘농민적인 건강한 공동체적 삶’인가보다 하는 짐작을 해 볼 수도 있다. 일반인의 시선에서 보면 이 작품은 그저 이런 내용의 미술작품일 뿐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도 이 작품에 대해 통일에 대한 염원을 그린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검찰은 일반인들의 눈에 비친 이 정도의 <모내기>에 대한 이해를 넘어 이 작품을 종북적이라고 규정했다. 백두산이 상징하는 것은 북한체제이고 남한에는 쓰레기만 있고, 이것을 쓸어내면 민족이 두루 잘사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북한체제가 항상 주장하는 얘기라고보기 때문이다. 당연히 백두산이 상징하는 것은 북한체제이고 그리고 북한은 지도상의 북쪽에 위치하므로 화면의 윗쪽에 배치됐고 남한사회에 쓰레기만도 못한 인간들, 사건들이 많다는 것은 검찰이 작가 보다 더 정확히 풍부히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워 온, 남한체제 구성원 모두의 공식적 염원이다.

물론 북한에도 쓰레기 같은 인간과 사건들이 많겠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한 북한 땅이기에 남한의 누구도 그 실정을 제대로 상상해 그려 내기는 힘들다. 화면의 윗 쪽에 쓰레기가 없는 것은 이렇게도 해석해 볼 수도 있다. 남한에서만이라도 쓰레기 등 우리 삶을 망치는 것들을 제대로 치워버린다면 한반도는 아름다운 강산이 될 수 있다. 혹은 그 아름다움은 통일이 되면 북한에 까지도 영향을 주어 한반도 전체는 동양적 이상사회가 제대로 구현된 미륵정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의 표현이라고도 이 작품을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좌우지간 이런 저런 해석의 여지는 차지하고서라도, 평론가 성완경이 ‘피고 측 그림감정서’에서 천명했듯 “<모내기> 작품은 단순히 통일을 주제로 한 그림일 뿐이 아닌, 내용과 형식의 풍요로운 결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며 민족미술의 한 이정표가 되는 걸작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했지만, 이 작품은 근, 현대 미술작품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탄탄한 미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다.

신학철의 작가로서의 활동은 분명 미술을 통한 사회참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로써 훌륭한 ‘작가’가 되는 길을 선택해 온 것이다.

이 작품을 반체제적 미술로 규정하는 것은 오류이다. 우리 사회의 현실상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말 바꾸자면, ‘체제 반영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모내기>가 보안법 위반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모내기>가 실제 어떤 작품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체제의 ‘결심’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사실 <모내기>도 그렇지만, 순수미술인가 참여미술인가의 논쟁은 있을 수 있을 수 있고, 있어 왔지만, 우리 미술계에 제대로 된(?) 반체제 미술이 존재했던 적은 없다. 친 체제 미술만이 실제로 존재했다. 아예 빨치산 문화공작대가 아니라면, 우리의 참여미술은 미술적 현실발언의 형태였고, 체제는 이조차 불온시한 것이다.            

사실 모든 예술은 사회의 반영이다. 인간의 심정 속에 깃든 희노애락이 사회적 관계에서 생동하며 억업되거나 상처를 받기에, 이것을 표현하는 예술은 사회의 반영물이다. 굳이 정치적인 내용을 담아서가 아니다. ‘방아타령’이나 ‘노세노세’ 같은 민요들을 부르며 놀았던 부녀자들의 야유회를 그린 김주경의 <야유회>에서도 단순히 당시의 여자들의 놀이문화를 묘사한 그림이지만, 이 그림에는 여성들의 사화생활에 대한 작가의 사회적 관심이 담겨있다.

해방 이전 근대미술 도입기에 만들어진 우리 미술작품들을 당시 미술계 활동의 거의 유일한 장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의 도록에 실린 작품들을 통해 확인해보면, 일제치하의 근대사회 문물을 재현하면서 우리 근대미술은 ‘미술’로서 정착됐다.

이 작품들은 대개 구체적으로 친 체제적이다. 근대적 생활개선을 외치던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치는 미술작품의 주 소재로 구현됐다. 당시 그림에 자주 등장하던 ‘모던’한 건물들과 실내정물, 인테리어는 지금도 그렇지만, ‘세련되고, 의미있게 다가오는 삶의 정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70년대를 중심으로 한 한국 모더니즘 미술 특히 단색조 회화에서는 어떠한가? 여기서는 대놓고 친 체제적이진 않아도 미술이 어떠한 의미에서건 사회의 산물이라는 관점은 제거되면서 반체제적인 것인가 아닌가의 구분은 돼도 친 체제적인가 아닌가는 구분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작가가 비정치성을 표방하더라도, 시각이미지는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 이미지로 표현되는 대상의 재현은 대상의 실체와는 다른 오브제라는 점에서, 그리고 작가의 의도가 작품주제로 개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모내기>만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미술이 사회적 산물이 아님을 주장하는 미학적 관점도 정치적인 관점이다.

이러한 전제의 연장선에서 소위 ‘단색화’라 불리우는 계열의 작품들을 다시 본다면, 이들의 작품들도 사회를 반영하는 작품들이되,  이들 작품 처럼  시대적인 미술내적 담론 지형에서의 작품들에 나타난 사회상의 반영의 의미는 매우 복합적인 미술정치적인 의미지층이 매개돼 있다. 작가들의 미술계에서의 입지문제에 대한 고민은 기본이고, 이에 따른 동시대 미술사조의 영향과 발전방향에 대한 고려, 나아가 미술시장에 대한 파악등 다양한 현실적 요소들의 결합이 추구되고, 이렇게 생산된 이미지는 전혀 예술적이기만 한 어떤 특수한 ‘세계’의 물건이 된다.

여기서의 미술작품은 그 순간부터 미술사적이고 미술계 내적이며 미술시장 가치와 미술이론적인 대상으로만 기능하는, 현실과의 관계가 함몰된 ‘물건’으로 전화(轉化)한다. 이러한 작품은 작품들로 수용된 그 순간 작품 속의 모든 현실반영적 계기들은 미적 장치로써 은폐되고 승화된다. 그런데 이우환은 단색화가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증인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당시의 억압적인 사회적 분위기에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회에 대한 발언을 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단색화도 비저항의 저항미술이라고 한다.

사실 예를 들어 절대폭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모든 작가가 자신의 모든 작품에 현실을 비판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할 수도 없다. 만일 모든 작가가 이런 작업을 한다면 이것 또한 끔직한 체험 일 것이다.

폭력에 대한 저항을 자기만의 메타포로 처리하고, 그래도 ‘조정의 개’의 시선에 공포를 느낀다면 발표를 안하는 방법도 있다. 숨어서도 하기 힘들다면,  작업을 중단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대가 암울한 독재에 숨조차 쉬기 힘들 때,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들로 그럴수록 더 작업에 몰두하는 에술가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어떻게 모든 작가가 일체가 돼 소위 정치적 미술이라고 언 듯 봐서도 분류될 수 있는 작품들만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는 살 수 없는 것이다.

정치적 참여가 여러 가지 원인에서 어려운 개인들도 있다고 인정해야한다. 또 이런 세월이 10년, 20년의 지나면 끝날 것이라는 희망도 없는데, 어떻게 정치적인 직접적 발언을 담은 작품만을, 미술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만을 할 수 있겠는가, 참여하지 않고, 발언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그를 일러 진정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활은 지속되어야 하기에, 전시활동도 하고 해야 한다면, 그러면서 억압적 사회 분위기상 반복적 붓질과 반복적으로 관계항 변주 만들기 행위를 통해 시대에 대해 저항하면서 이중섭처럼 예술로 무엇이 되고 싶어,  위대한 예술가가 되고 싶어 국제비엔날레 등 국내외적 주요기획전에 참여하고, 한국 현대미술의 지속과 보존, 발전을 위해서만 순수하게 활동했다면, 결국은 사회의 쓰레기 같은 현실을 작품 속의 명상을 통해서나마 견뎌내기 위해 빗자루 질은 못했지만, 명상을 위해 정갈하게 세수하고 머리 빗으면서 자신 머리 속의 ‘비듬’은 계속 훑어 낸 것이다. 이우환의 이 주장은 자신의 작품상의 미술적 정치적 이해관계의 실상과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다.  

“70년대 단색화는 저항운동의 표현이었다. 대단히 힘차다”, “70년대는 저항하는 방법은 추상미술밖에 없었다. 비판을 주먹질로만 하는 게 아니다. 간디는 주먹질 안했다. 문화는 다양할 수 있다. 단색화는 사회가 힘들면 발생한다. 70년대 단색화는 저항운동의 표현이었다. 70년대 초 · 중반 특히 70년대 중반의 단색화는 어느 시대보다 힘차고 설득력 있고 감동적이다. 세계사적으로 떳떳하고 훌륭하다”, “단색화가 자기수련, 해방감, 명상 등으로 사회적 해석 틀이 바뀌었다. 순수미학적 면에서 작품성이 약화되어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잘 지켜왔다고 본다. 힘차고 잘된 작품들이 있었으니,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증인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70년대 후반에 단색화파가 생겨 <리콜 드 서울'>, <앙데팡당'>전을 치르고, 점점 권력화하면서 저항적 표현에서 점점 자기반복이 심해졌다” (이우환,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단색화>전 초청강연 중에서, 2014)   

후기 단색화 작가로 흔히 분류되는 고산금의 <소법전(병역법)>과 같은 작품들은 단색화의 미학적인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압축한다. 작가는 법전과 문학적 텍스트들을 읽고 법전이나 문학에서 얘기되는 진실이나 진리에 대한 요구, 규정에서 ‘내용들을 제거’하고 숱한 반복적 작업을 통해  내용에 담보돼 있음직할 아우라만을 매우 세밀한 작은 진주들로 내용 없이 재현한다. 우리 검찰처럼 잘못 작품을 해석하면 내용에 대한 비판처럼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작품의 의도는 아니다. 작품에는 무언가 그럴듯한 인문주의가 있음직 하지만 그 인문주의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전혀 드러내지는 않는다. 드러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필요한 것 인문주의의 은밀한 고귀함의 자태일 뿐이다.

그런데 사실 그녀가 재로로 택한 법전들과 문학들은 생활상의 요구들로 가득찬 신음소리이자 불안과 제도로서의 사회적 물화이자 억압에 대한 기록들인데, 그녀의 작품에서 실제 사회의 물화와 불안, 고뇌는 거기로부터 나오는 인문적 아우라는 단색화의 미학적 아우라로 전치된다. 

최근들어 미술시장에서는 단색화 열풍이 일고 있다고 한다.

“한동안 저평가 됐던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최근 들어 다시 높아지고 있다. 그 단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2012년 3월 ‘한국의 단색화 Dansaekhwa: Korean Monochrome Painting’전을 열면서 마련되었다. 197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김환기, 곽인식, 박서보,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윤형근, 하종현 등 17명의 전기 단색화 작가와 이강소, 문범, 이인현,김춘수, 노상균 등 14명의 후기 단색화 작가의 대형작품 150여 점을 소개한 대규모 전시였다. ... 주제를 가진 대규모 기획전시와 함께 학술대회와 토론회가 개최되면서 담론이 계속되고 국내외에서 단색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전에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박서보, 정창섭, 하종현 등의 초대전을 열었지만 회고전 형식에 머물렀다. 이에 비해 이 전시는 단색화라는 고유명사를 창출하고 관련된 작가를 모두 모아 집중적인 조명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전시였다. 이후 단색화 작가와 작품은 각종 전시와 미술시장의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 또 경매 거래와 화랑 전시에서도 단색화 작가를 재조명하는 노력이 있었다.”(서진수의 ‘미술과 경영’, 벽지 같은 단색화가 돈 되는 이유,  2014.7.25  서울경제신문)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창조경제와 문화중흥을 행정의 핵심토대로 추진하면서 각종 미술관 등과 다양한 미술계 행사에 대한 지원강화정책을 펴면서, 민중미술작가나 2000년대 중심으로 활동하는 비교적 젊은 작가군이 아닌, 그러면서‘세계화’, 세계미술시장에로의 진입이 가능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도 속할 만큼의 발전하는 한국 현대사의 증인의 위상을 갖춘 작가군에 대한 모색이라는 문화정치의 측면에서,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이후 단색화 열풍은 더욱 힘을 받는 양상이다. 미술시장에서의 미술과 사회의 관계는 가장 적나라한 표현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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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재현된 리얼리티’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는 행위에 관한 기억과 경이감, 비판이 포함되며 인생의  수없이 특이한 지점들에 대한 시선들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인간에 대한 ‘표현행위’는 가장 인간다운 특수한 활동이며 생활에서 느끼거나 발견한 의미들을 세계내 의미 혹은 공론의 세계에 매개해 생의 한계를 넘어가고자 하는 염원적 활동이다.

인간은 공론에 매개되었을 때만이, 사회적으로 평가받고 인정받고 하면서 서로 간에 존재의 연쇄를 이루어서만이, 자유롭다고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이 제대로 발현되고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공론장에의 사회적 매개는 자동적으로 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차피 공론장이기에  개인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평가는 사회조직 단위에서의 ‘인정’을 통해 행해진다. 그리고 개별적 존재의 ‘위상’에 대한 가치평가와 조절에는 사회권력의 이해관계가 작용된다. 이 관계는 정치적 본질의 것이다.

사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정치’와 ‘정치학’은 인간과 세계의 관계의 근본이요, 근본학이고, 인간의식의 근본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정치학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 지금도 여전히 인문학은 순수학문임을 주장하지만, 인간의 본질이 정치성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인간에 대한 학문에서 정치성을 빼고 문제를 다루는 오늘날의 인문학과들이 존패의 위기에 처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정치학은 과학적인 학문에 속하니 철학과 역사를 함께 공부함으로써 진리를 힘써 연구해 이해득실을 살피며, 경제를 생각할 때 윤리를 더해 생각해 나라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헤아리고 개인과 공공의 도덕을 배양하는 보통교육이니 일반대중이 깨우쳐야 할 학문이 이것이라”(sk생, 정치론, 대한흥학보 제8호, 대한흥학회, 1908)고 하는 주장에서 보듯, 정치와 정치학을 인문학의 근본으로 파악하는 관점은 일제 강점기 이전 우리 지식인들의 기본적 사고였지만, 우리 근현대 인문학의 역사는 그 계승의 고리를 놓친지 오래이다. 

사회 만사의 문제의 근본에는 ‘생명의 사회화’에 대한 이념이 전제돼 있는데 이것의 실현방법을 찾는 행위가 ‘정치’이다.  실제로 사회현실의 토대가 생명정치의 전략과 방법들에 의해 조직되어 있기에 삶을 반영하는 예술의 활동에도 정치에 대한 반성이 포함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최전선에서 전선을 형성한 지성인들과 일반 세인들의 사이에는 다양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품성적 위상이 존재의 연쇄를 이룬다. 그 스펙트럼은 인간군상의 개별적 차이들만큼 드라마틱하다. 이들 세인들이 전부 좌파나 우파인 것도 아니고, 예술가 대중은 이 스펙트럼의 모든 매개 고리들에서 천차만별의 인간상으로 존재한다. 천차만별의 시선에서 인간과 사건들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예를 들면,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일정정도로의 지금의 민주화가 독립운동가와 운동권 인사들의 희생적 실천을 통해서 달성된 것만은 아니듯, 이들은 그야말로 그 최전선의 전사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지만, 역사의 해방은 전체 대중의 인생경험에 잠재된 제대로 된 사회에 대한 심정적 염원, 사회의 인본질서 확립에 대한 비판적 요구들이 대중들 속에서 보존되고 전달되어 정치의 근본 요구로 분출되곤 했기에 가능했다.

비판적 인문성에 대한 세인 대중의 공감은 학문 같은 전문영역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생활상의 요구에서 오는 것이며 체제내적으로 제한된 의지도 아니다. 에술가 대중의 시선, 예술은 학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선의 가치는 인간을 위해 여하히 가치있는 시선이냐의 문제로 세인들의 삶을 통해 평가된다.  

기존 우리 인문학계에서는 인간의 행동과 작품을 분석하더라도 인간의 ‘행위’에 대한 사회학적, 심리학적 틀 혹은 예술작품이란 틀에서 분석한다. 결국 인간의 특정 사회적  행위의 이유나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 우선적 목적이 아니다. 이보다는 인간의 심리나 인지 행동방식에 대한 과학적, 합리적 분석 자체가 직접적인 목적이 되므로, 다시말해 ’학(學)‘의 성립과 실현이 목적이다.  그래서 한 인간이 왜 그런 일을 하고 어떻게 사물을 느끼고 행하는 지에 대한, 인간의 사회적 삶, 그 경험에 대한 이해와 가치판단이 목적이 아니다.

사람의 행위나 경험에 대한 이해는 온갖 쑥덕공론들의 진상을 들추고 추측이 난무하되 개별 인간에 대한, 사회의 각종 특수 관계들에 대한 예술적 시선과 접근 마인드에서 이해되어야 그  리얼리티의 특수한 총체적 상을 얻을 수 있다. 아니면 그 분절의 한 고리에 대한 제대로 된 감이라도 잡을 수 있다.  한 문화의 인문적 전통은 이런 예술적 시선과 마인드가 어느 정도로 인류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에 대한 감을 파악하고 있는가, 사물과 사건과 행위의 질적 가치에 대한 다양한 판단심급의 정치적 맥락을 파악하고 있는가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인문학이란 이런 바탕위에서 그 다음에 굴러가야하는 판단기제이고 학문이어야 하는데, 현재의 인문학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발생한  우리 문화의 심각한 문제는 그러면 참되다고 할 수 있는  예술적인 혹은 예술가적 시선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그 최종심급에서 서로 공유되지도 그래서 답을 찾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인문학 전통과 인문학적 가치관이 작동하고 있지 못하기에 지난 근, 현대의 우리 미술의 역사에서 평론가나 정권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되는 식의 작품에 대한 평가와 해석으로 결국 어떤 작품도 그 가치가  사회 전체의 보편적인 인문적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하게 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어떤 유명한 작가들 조차도 혹은 세인들의 관심에서 사라져간 혹은 세인들 사이에 있지 않던 외로운 예술가의 인문적 탐구 노력들도 제대로 추스린 적 없고 조명받아 본적 없고, 우리 문화의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으로 수렴 된 적이 없다.

오늘날의 철학적 해체주의 이념은 ‘정당화’를 위한 거대담론을 비판했다. 인간의 행위에 대한 최종판단 심급을 부정하면서 모든 인간의 경험판단들에 대한 기존의 판단심급을 이데올로기로 간주했다. 하지만 인간과 인생을, 진실을, 정당화 관점을 제대로 알고 살고자 하는 요구가 의미가 있으려면 진실판단의 최종심급이 가늠돼야한다. 그 최종심급의 경험적 원천은 결국 인간과 사물에 대한 인문적 성찰과 의견, 축적된 노력들에서 간취될 수 있다. 미술은 사회의 형식과 내용을 이러한 차원에서 반영한다. 

예술은 예술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인생의 진정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수단이다. 개인적 질적 차이들로 분절된 수단들이지만 인생을 그 관계의 정치학, 계산의 처참함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작품에 대한 평가의 최종심급은 작품에 반영된 미술과 사회관계의 진정성에 기반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미술과 사회의 관계문제는 정치적인 모든 것의 가장 근본에 있는 생명의 정치라는 과제를 안고 있는 문제이다.(월간미술2014. 12)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과의 인터뷰 file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176

미술평론가 성완경 선생님과의 지극히 사적인 인터뷰 강성원 (인터뷰는 민미협 30주년 기념 <인터뷰 집>에 실릴 예정이었으나 여차 저차한 이유로 못 실렸음. 이 글은 원래의 인터뷰 글에서 <인터뷰 집> 취지 관련 인터뷰 도입부는 삭제됐음. 그밖에 인터뷰 중간 중간에서도 <인터뷰 집> 관련 내용은 삭제됐음. sns에 올리는 일은 성완경 선생님의 허락 하에. 인터뷰 내용 중 성완경 선생님이 쓰신 글 내용에 대해 질문할 때 성완경 선생님이 쓰신 글 문장을 축약하거나 풀어쓴 경우도 있지만, 선생님이 쓰신 문장 그대로 드러내면서 질문...

<근현대 시각이미지와 여성>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0

미술로 표현된 근현대 여성의 모습은 과연 ’여성‘을 담고 있는가, 여성주의자 혹은 여성주의 미술가들이 그린 여성성은 과연 여성주의를 실현하는가, 여성미술은 어느 정도로 여성해방적 미술을 성취하고 있는가 등등에 대한 간략한 질문형식의 문제제기를 해보자. 역사적 사회적 흐름과 더불어 변하는 여성이미지들에 과연 여성성의 달라진 의미들이 반영되어 있다면 여성미술은 시대마다 얼마나 이런 여성성의 문제자체를 인지, 인식해 담아내는가? 여성작가들의 작가활동상에서의 모습은 얼마나 자신이 옹호하는 여성성과 일치하는가 하...

내 마음의 수선전도(修善全圖)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2

   내 마음에도 ‘수선전도’가 존재한다. 내 마음이 느끼는 서울의 전체상인데 내가 느낀 서울의 심경상(像), 그 바닥이자 하늘이다. 원래 ‘수선전도’라는 말은 중국에서 유래됐다.  한 나라의 ‘수도(首都)’의 의미는 으뜸가는 선(善)을 건설하는 일 곧 수선(修善)의 시작점을 의미한다는 뜻에서 유래된   명칭이라고 한다. 수선전도에는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기관들이 국심(國心)의 세력중심으로 재현돼있다. 오늘날의 광화문 부근 영역이 정부청사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미국대사관등이 들어서 있으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상징하듯...

_‘퍼블릭 아트’는 동어반복적 개념어이다.

  • 쾌활림
  • 2018-06-22
  • 조회 수 50

<광장의 예술과 퍼블릭(Public Art) 아트 개념> 1 광장   광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광장에서 함께했던 낯선 사람들과의 뜨거운 연대감이다. 광장에 서면 일상 속 불만과 갈등이 내일을 위한 희망으로 바뀌어져 간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 느낌의 순간에 내 옆 어느 낯선 사람도 내 마음에 동참해주고 있다는 벅찬 뜨거움이 올라온다. 굳이 촛불집회같은 광장에서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어디인가 누구나가 갈 수 있고 자유롭게 주변을 누리고 공중의 특별한 간섭없이 내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는 ...

깊이의 허영 리얼리즘 변종현실 file

  • 쾌활림
  • 2017-09-17
  • 조회 수 136

1 변종현실   제1의 리얼리티가 있다. 제1의 리얼리티는 제1의 리얼리티를 숙주로 한 기생 리얼리티와 그 변종을 무한증식한다. 리얼리티가 무한증식하는 줄기는 의식상에서의 범주에서이다. 그리고 숙주리얼리티 변종들 바이러스는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항상성을 지녀서 겉으로는 가시화되지 않는다. 의식 내부로 파고든다는 것은 제1의 리얼리티가 개인이 해체, 파괴할 수 없는 구조로서의 ‘현실 겉면’이기에, 철의 장막이기에 무한증식하는 숙주 리얼리티는 의식 바탕 저 아래 깊이로 밖에는 변종을 생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file

  • 쾌활림
  • 2017-04-01
  • 조회 수 349

월간미술 4월호 연재 글(그간 반년 가량 개인사정으로 중단 했다가 다시 시작)   <장치·부담·감각의 논리>   1. 맥 컴퓨터와 윈도우 컴퓨터를 사용해 작업한 텍스트나 이미지들은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 호환을 위해서는 다른 장치를 연결해야 한다. 호환의 필요를 위해 고안된 특별한 수단은 결국 상품으로 구입해야 한다. 구글 시트(Google Sheets)와 마이크로소프트 워드(Microsoft Word)나 한글 워드로 쓴 텍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호환이 안 되면 텍스트를 복사해서 옮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게다가 이 작업들을 메일로 전송하고자 ...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 쾌활림
  • 2016-08-28
  • 조회 수 70

공론, 비평으로서의 예술, 감정의 공론 (월간미술 연재13) 1 이 세상에 실제하는 공론의 양대 축, 공론이 그 안으로부터 생성되는 원천은 제도와 인간이다. 세상의 저간에 떠도는 갖가지 공론들은 인간 개개인에게서, 그들 모두 간의 삶의 느낌에서 나온다. 이런 가지가지 개인감정과 이해(理解)의 시선들이 실제로 모아져 일정하게 객관화된 것이, 결국 인간의 사회생활의 ‘필요’에 따라’ 정착된 것이 ‘제도’이다. 제도는 제도의 정신으로, 관련된 법으로 움직여진다. 제도는 본질상 인간의 행위가 일으키는 모든 사건들에 대한 예측시스...

민중미술의 미학 file

  • 쾌활림
  • 2016-05-30
  • 조회 수 410

민중미술의 미학   1 미술가가 자신이 직접 본 광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동, 서양 모두 근대사회가 시작되면서였다. 미술가는 이즈음부터 자신이 본 생활상의 장면에 자신의 감정과 세계에 대한 관심을 듬뿍 담아 일정한 틀 속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보다 더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밑바닥 인생들이다. 사실상 일반적인 사회경관 대부분의 광경들은 작가 주변의 일상생활 아니면, 사회 밑바닥 층의 헐벗고 남루하고 그럴 수 없이 가난한 삶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 자연스레 인생에 회의가 들고 인생의 고통 전반에 생각이 ...

악덕,공공성, 제도의 영혼 file

  • 쾌활림
  • 2016-05-28
  • 조회 수 154

악덕, 공공성, 제도의 영혼   1 인류에게 언어가 생긴 이래 악행(惡行)이나 악덕(惡德)을 묘사하는 숱한 어휘들도 생겨났다. ‘흉악하다’, ‘수전노 같다’, ‘냉혈한이다’ 같은 표현들과 ‘악덕 군주’, ‘악덕 자본가’, ‘악덕 계모’, ‘모리배’, ‘간신’ 등등 그야말로 각양각색, 천차만별의 ‘악덕’에 얽힌 이야기들이 인간언어의 중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악덕한 행위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보편적이고도 특별한, 악덕에 관련된 형용어들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이야기를 목숨을 걸고라도 간절히 기...

메타포, 정원, 공공영역 file

  • 쾌활림
  • 2016-01-29
  • 조회 수 169

메타포. 정원(庭園). 공공영역   1   우주의 역사, 자연의 역사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자연의 역사는 뇌의 생리 속으로 자신의 역사, 그 시간 속 공간 속 축적된 의미들을 전달한다.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된 생활의 고통의 역사는 예민한 신경의 공감적 능력에 자신의 고통을 풀어낸다. 자연이 삼킨 모든 생명체들의 죽음과 개체가 행한 생의 무리수, 공포와 착종된 비전을 그려낸다. 그래서 자연이 종국에서 드러내는 생활상의 과거, 산화(散華)된 경험의 소리와 냄새, 빛과 감각의 모든 스펙트럼을 얼마...

자연의 우울_사실성의 우울 file

  • 쾌활림
  • 2015-12-25
  • 조회 수 422

1 자연이 합법칙적이라는 관념은 근대화된 관내(管內) 학문, 곧 근대과학의 산물이다. 근대적 학문범주에서‘자연’으로 범주화된 세계는 과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의 일부분으로서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자연’도 분명 존재한다. 곧 인간의 ‘생활세계’로 근대과학의 탐구 대상인 자연세계를 자원으로해‘인류 발전’이라는 합목적성을 추구하는 인류생활로서의 세계이다. 사실상 개인이 몸담고 있는, 개인에 관여되어 있는‘자연세계’는‘자연’으로서의‘생활세계’이다. 과학 연구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자연세계는 추상적인 ...

전통_효과의 사다리, 무의미의 의미 file

  • 쾌활림
  • 2015-09-27
  • 조회 수 1443

1.   아프리카 해안가 어디에선가 부터 해협을 건너고, 지구 표면을 따라 방랑하기 시작한 인류의 족적, 이 발자취를 인류사의 시작이라고 말해도 좋지만, 전통이라고도 명명할 수 있다. 지구 위를 방랑하다가 삶의 터전을 세우고 발 길 닿는데까지 영토화한 일도 흔히 역사라고 불려지지만 ‘전통’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전통을 세운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어딘가로부터 한반도로 흘러 들어와 석기, 철기 시대를 열고, 삼한과 백제, 신라, 고구려를 세운 일도 역사이고, 당시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세운 생활의 전...

자기만의 세계상 file

  • 쾌활림
  • 2015-07-29
  • 조회 수 1221

자기만의 세계상 _  새로운 체험의 초현실 1. 누구나 한번 쯤은 살면서 권태롭기까지 했던, 아귀다툼 같았던 일상이 지상의 행복이구나 하며 느낄 때가 있다. 누구나의 일상이 같은 정도로 만족스럽지는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살아갈 힘이 반복되는 생활리듬에서 나왔던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별별 이유와 고통으로 상처받은 마음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은 무너지지 않고 벼터내는 것은 나날의 생계(生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목격하고 체험한, 피해 입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고 싶은, 세상...

제대로 사는 삶의 문제 file [2]

  • 쾌활림
  • 2015-07-03
  • 조회 수 457

1 인류는 ‘무엇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하는 아주 오랜 물음, 문명이라는 이름의 물음에 이끌려 살아왔다. 인간의 문명 특히 서구문명은 ‘제대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으로 고민할 까닭이 없는, 이런 물음을 갖지 않는 인간을 인간다운 생명으로 여기지 않아왔다. 제대로 사는 것이, 궁극에서 보면 사회의 공적 영역, 그 부산함에, 시끌벅적한 부(富)와 부를 창출하는 기술과 노동, 사업과 인간관계, 인정과 평가의 사회생활에 크든 작든 자신의 능력으로 끼어들어 살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살 수 있는 기회를 갈구하는 것이...

예술과 생활2 file

  • 쾌활림
  • 2015-05-28
  • 조회 수 376

김성룡천일야화 프로젝트   1. 역사는 거창한 비전과 계획이 이룬 삶이 아니다. 민족이나 국가, 사회의 특정 계층이나 구성원들 일부가 대량살상으로 인해 혹여 절멸 된다고 해도, 나머지 개인들이 비참한 생활로나마 생존할 수 있다면, 역사는 생존자들의 핍진한 이해관계의 긴장으로 무장돼 미래만 바라보며 나가게 된다. 굶주림과 학대가, 살상과 모반이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일상은 새벽위로 떠올라 밤사이로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일상에서 몇몇 극소수 개인들은 다른 공동체와의 전쟁도 기획하고 생의 미화도 만끽하면서 ...

미학이란 무엇인가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340

 1 일반적으로 '미학'이란 단어를 들으면 누구나 조금은 그 뜻을 막연해한다. 그래도 '미에 대한 학문'이니까 예술에 관한 전문지식체계를 다루거나 미용 등 구체적인 생활분야에서 무언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과 관련될 때 미학을 언급한다는 정도는 알 수 가 있다. 사실 이런 차원에서의 미학 이해는 틀리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미학'은 얼핏 대하기 만만치 않은 아우라와 수수께끼로 가득 차 보인다. 통념이 과연 맞는 것인가 반신반의 하게 된다. 한편 미학에 대한 통념이 미학에서 실제 다루는 내용과 크게 다...

사회시스템과 미술2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94

1 개인이 자기자신에 대해 모르는 정도는 타인에 대해 모르는 그만큼 더 커진다, 마찬가지로 한 사회가 다른 사회를 모르는 정도가 클수록 한 사회가 지닌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도 불일치가 커진다. 세계화로 전지구가 하나로 연결돼 마치 전지구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 지구의 남반부와 북반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이 정도로 나마 서로 인지하고 알고 지낸 역사는 그리 길지 않을뿐더러,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서로 간에 모르는 부분은 너무 많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

인문학의 정치,미술의 정치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568

이인철/스포츠 공화국의 상과 하  1 순수예술과 참여예술 논쟁이 있다. 예술이 정치의 수단이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말하자면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발언을 해야한다는 신념을 지닌 예술가들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간 참여예술을 주장하는 작가는 보통 좌파진영에 속한 작가라고 추정, 분류되면서 80년대 <현실과 발언> 창립전에서 보듯 전시 작품들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됐다. 순수냐 참여냐의 예술적 선택에서 예술을 통한 현실참여를 예술적 태도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불온시하면서‘정치적 미술’로 문제시 한 것이다. 실제 정...

사회시스템과 미술1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133

서용선<단종복위모의>   최경태 <겨울 아침 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1. 사람은 자신의 생명의 활로를 얻기 위해 움직인다. ‘생활’(生活)에 나서야 나날의 일상과 자신의 생애가 보장되고 생명의 잠재적 가능성이 열린다. 하지만 태어나자 마자 생활에 나서지는 못한다. 성년이 되기까지는 경험해야한다. 경험을 위해 배워야한다. 초기 인류라면 생활을 위해 무작정 걸으면서 보고 듣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역사 시대 접어들면서는 생활 시스템의 작동방식을 배워야했다.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 체계(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가 경험하고...

경험과 판단의 아카이브_필요하지만 없는 것에 대한 단상 file

  • 쾌활림
  • 2015-05-07
  • 조회 수 249

  조양규 <31번 창고> * 인간은 살면서 생활의 모든 것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갖는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도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감정은 어떤 생명체 보다 유별나고 복잡하다. 특히 삶의 감정이 단순히 수동적인 지각현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판단과 경험내용의 복합체이며 주관적인 반응이기도 하고, 지식의 결합물이며 의식의 총체물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어떤 것 보다 특수한 인간만의 세계를 표상한다. 이러한 표상들로 부터 사고와 관념의 상들이 시작된다. 이 과정은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의식작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