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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강기명의 Das Kontrasozia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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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코로나19, 전면감시사회, 유럽중심주의에 관한 어떤 논쟁 [긴 버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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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0-06-29T22:49:09+09:00</published>
		<updated>2020-06-29T22:49:09+09:00</updated>
		<author>
			<name>김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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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이 글은 지난 5월 27일 &lt;피렌체의 식탁&gt;을 통해 축약해서 공개한 글의 원래 버전입니다. 최근 나는 &lt;피렌체의 식탁&gt;으로부터 코로나와 유럽사회에 대한 또 하나의 기사를 청탁받고 관련 기사들을정리할 겸 페이스북에 공유하고 있었다. 보통은 따로 코멘트를 달지 않기 때문에 마치 자료실처럼 기사가 쌓이고 있었는데 5월 초에 공유한 칼럼 &lt;How Germany Is A COVID Failure&gt; 에 뒤늦게 인류학 전공자인 독일인 친구 M이 상당히 ...</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font size=&quot;3&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70,70,70);&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rgb(70,70,70);&quot;&gt;이 글은 지난 5월 27일 &amp;lt;피렌체의 식탁&amp;gt;을 통해 축약해서 공개한 &lt;/span&gt;&lt;a href=&quot;https://firenzedt.com/?p=6770&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70,70,70);&quot;&gt;글&lt;/span&gt;&lt;/a&gt;&lt;span style=&quot;color:rgb(70,70,70);&quot;&gt;의 원래 버전입니다. &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최근 나는 &amp;lt;피렌체의 식탁&amp;gt;으로부터 코로나와 유럽사회에 대한 또 하나의 기사를 청탁받고 관련 기사들을정리할 겸 페이스북에 공유하고 있었다. 보통은 따로 코멘트를 달지 않기 때문에 마치 자료실처럼 기사가 쌓이고 있었는데 5월 초에 공유한 칼럼 &amp;lt;&lt;/span&gt;&lt;a href=&quot;https://medium.com/@indica/germany-is-a-coronavirus-failure-7e2a58f5b4fe&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How Germany Is A COVID Failure&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amp;gt; 에 뒤늦게 인류학 전공자인 독일인 친구 M이 상당히 분개한 어조로 댓글을 달았다. 원 기사는 스리랑카의 언론인 Indi Samarajiva이 영어로 쓴 칼럼으로 이 거친 논조의 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ul&gt;&lt;li&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color:rgb(120,32,185);&quot;&gt;서구 언론은 독일의 코로나 대응을 가장 주요한 성공사례로 꼽고 있다.&lt;/span&gt;&lt;br /&gt;&lt;/li&gt;&lt;li&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color:rgb(120,32,185);&quot;&gt;그런데 기사를 쓸 당시 독일의 사망자 숫자는 5,500명으로 이란보다도 많으며, 반면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베트남은 사망자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시아 국가들의 대응은 무슨 신비한 아시아 전통문화에 기반한 게 아니라 그냥 방역의 과학적 스탠다드에 기초했을 뿐이다. 왜 베트남의 방역은 성공사례가 아닌가?&lt;/span&gt;&lt;br /&gt;&lt;/li&gt;&lt;li&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color:rgb(120,32,185);&quot;&gt;이들 아시아 국가들의 사례를 다루지 않는 이유는 서구사회의 구조적인 인종주의와 백인우월주의 때문이다. 한국은 종종 ‘독일과 더불어’ 성공사례로 다뤄지는데 (기사 작성 당시) 240명이 사망한 한국하고 5,500명이 사망한 독일을 같은 성공사례랍시고 묶는 게 말이 되는가?&lt;/span&gt;&lt;br /&gt;&lt;/li&gt;&lt;li&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color:rgb(120,32,185);&quot;&gt;독일의 대응도 실패 사례일 뿐이다. 메르켈 정부가 한국 정부였다면 벌써 정권이 뒤집혔을 것이다. 하지만 서구 미디어는 뉴질랜드의 총리 자신다 아던이나, 앙겔라 메르켈을 백인 영웅 (white heroes)로 만들고 있다. &lt;/span&gt;&lt;br /&gt;&lt;/li&gt;&lt;/ul&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 기사에서 시작해서, 밤 늦게까지 우리는 코로나, 감시사회, 아시아 문화 그리고 유럽중심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점에서 부딪히면서 논쟁적인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렇게 쌓인 댓글을 보다가 나는 이 대화가 오늘날 코로나 사태가 드러낸 새로운 세계상을 둘러싼 유럽인들의 고민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느꼈다. 원래 청탁받았던 글 대신 이 대화를 조금 더 가공해서 대화체의 에세이로 쓰는 것이 오히려 이 글을 읽을 한국인 독자들에게 좀 더 친숙한 방식으로 많은 것들을 제공해 줄 것이라 생각해서 조금은 산만한 이 대화의 일부를 공개한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944/083/d7cdbfa8c57c39f41054b3e9f6fd1225.jpg&quot; alt=&quot;37686_83998_2035.jpg&quot; width=&quot;640&quot; height=&quot;428&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출처: Steve Webel on Flickr&lt;/div&gt;&lt;div&gt;&lt;br /&gt;&lt;/div&gt; &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br /&gt;&lt;/div&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 아주 이상한 논조네. 난 그럼 이 ‘구조적 인종주의’를 몇 개 더 던져주지. 이란의 숫자는 확실히 훼이크야. 사망자 숫자는 훨씬 더 많다고 알려져 있어. 그리고 서구 미디어는 적어도 한국에 관한 한 확실히 찬사를 보내지 않았나? 특히 검사와 추적에 있어서 세계 최고였다고. 구글에 “ Südkorea Corona Strategien” 넣기만 해도 기사들을 쏟아져 나와. &amp;lt; &lt;/span&gt;&lt;a href=&quot;https://www.tagesschau.de/faktenfinder/corona-suedkorea-111.html?fbclid=IwAR01rQtqgm-kCn5ViTeZaTFqhzj2cgx8tIq9zaAwUSBKoE9OuXqcdzyqUWE%E2%80%AC&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aßnahmen gegen Corona: Südkorea als Vorbild?&lt;/span&gt;&lt;/a&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amp;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amp;lt;&lt;/span&gt;&lt;a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Südkoreas erfolgreiche Corona-Strategie: Ein Land wird geteste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amp;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amp;lt;&lt;/span&gt;&lt;a href=&quot;https://www.tagesspiegel.de/politik/suedkorea-als-vorbild-bei-coronavirus-bekaempfung-innenministerium-dringt-auf-strategiewechsel-massiv-mehr-tests/25688554.html?fbclid=IwAR0FUXyhrH-nPdCYSUjHS8WlnCHuApIBk0OGHV9cMWahYeGBfg-h1a_j41g%E2%80%AC&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Innenministerium dringt auf Strategiewechsel – massiv mehr Tests&lt;/span&gt;&lt;/a&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amp;gt;, &amp;lt;&lt;/span&gt;&lt;a href=&quot;https://www.sueddeutsche.de/gesundheit/coronavirus-suedkorea-japan-strategie-1.4900613?fbclid=IwAR2ZS6PAvP2X31EnRgB6Fap76XHPRT_eawAr_7QeeY07ihaM98wd2DFa6MQ%E2%80%AC%20%E2%80%AC%E2%80%AC&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Coronavirus: Was Südkorea anders macht &lt;/span&gt;&lt;/a&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amp;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이런 기사들을 봐봐. 아무도 그걸 부인하지 않아. 아닌 기사 있음 함 찾아서 보여줘봐. 하지만 그 방식은 많은 이들의 사생활 개인정보를 완전히 희생한 결과잖아? 이번에 이태원의 게이골목 사례를 함 봐봐.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기사대로면 서구사회가 해야 할 계몽된 탈식민주의적 코로나 대응이란 건 개인주의를 거부하고 아시아인들의 “우월한” 집단주의 마인드를 수용하는 건가? 성공적 대응의 지표는 단지 사망자 숫자보다 더 다양할 수 있어. 오직 숫자만 따져보면야 한국, 대만 등이 분명 최고의 성과를 거뒀겠지.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물론 대다수 언론들은 동아시아 각국의 대응의 안좋은 면들도 같이 다루고 있어. 하지만 이건 비판적 언론이 전체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선 원래 해야 하는 일이야. Indi Samarajiva는 그걸 전혀 인정하지 않고 “인종주의적 백인들은 오직 그들의 위대함만을 볼 수 있고 다른 인종들의 성과를 수용하는데 무능력하다“는 식으로 서구 언론의 이미지를 왜곡하고 있어. 나는 이런 식의 “비판적 백인연구” 담론들이 지긋지긋하다. 물론 백인 우월주의 마인드가 분명 존재하지만 이런 식으로 탈식민주의 이론이 신-본질주의로 가는 건 세계의 복잡함을 전혀 무시하는 거 아니야?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아마 몇몇 지점에선 너한테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기사는 너무 거칠고, 필자가 비서구 국가들을 묶는 카테고리는 여전히 매우 자의적이야. 하지만 몇가지 들을만한 주장 때문에 나는 이 글을 공유했어.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1. 저자는 여기서 어떤 “우월한” 동양 문화나 아시아적 문명에 대해 (네가 말한 “공동체/집단주의” 같은 것?) 언급하지 않고 있어. 사실 그건 그저 오리엔탈리즘의 한 요소지. 대신에 저자는 비서구 국가들의 코로나 대응이 그저 “서구(과학)의 복사물”이라고 말하고 있어. 그러니 여기서 중요한 건 문화적이거나 문명적인 차이가 아닌 거지. 의학이나 행정, 거버넌스 같은 근대의 지식과 학문들은 기본적으로 어디서나 “서구적”인 것이야.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2. 네가 잘 말한 것처럼 서구 언론은 몇몇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선 충분히, 혹은 너무 많이 다루고 있어. 특히 대만이나 한국이 그렇지 (물론 많은 기사들을 보면 문화 본질주의적인 오리엔탈리즘 적 시선이 많이 보이긴 해.). 하지만 난 여전히 이 한국, 대만 홍콩 등에 대한 칭찬과 비슷하게 방역에 성공하고 있는 베트남이나 태국 등을 무시하는데서 유럽중심주의를 의심하고 있어.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여기서 작동하고 있는 건 비서구 국가들 간의 ’서구화’ 혹은 ‘자유주의화’ 정도의 차이 같아. 한국이나 대만을 언론이 선택하는데선 한편으론 ‘중국 혐오’가 읽혀. 서구언론들은 이 서구적 가치의 우등생들하고 사악한 권위주의적 적을 비교하고 있는거지. “Team Democracy” vs “Team Dictatorship”이랄까? 다른 한편으론 언제나 가난하고, 미발전되었고…하는 식으로나 서구 미디어에 나오는 베트남 같은 나라들에 방역사례에 대한 완전한 무시가 있지. 몇몇은 유럽 국가들은 물론 한국보다도 더 성공적으로 전염병을 막고 있는데도 말야.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사실 서구사회를 그들의 유럽중심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건 되게 어려운 일이야. 왜냐하면 그건 ‘근대화’ 그 자체의 요소니까. (물론 ‘동양사회’를 유럽중심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도 어려워. 아시아 문화의 우월성 같은 걸 주장하는 다양한 근대적 형태의 아시아 민족주의들은 사실 유럽중심주의적 구조를 뒤집어 놓은 거울상 같은 거지.) 맞아. 비판적 백인성 연구 같은 거의 언어는 종종 별로 도움이 안 되고 모든 것들을 “백인성”에다 돌리곤 하지. 식민주의적, 인종주의적 본질주의를 웃기게 미러링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하지만 나는 이 기사가 100% 이런 노선을 취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 저 기사의 가장 큰 문제는 서구사회가 구조적 인종주의 때문에 아시아로부터 배울 마음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이야. “아시아 각국은 서구적 제도와 사유들을 수용하고 복제하면서 발전해왔다. 만약 서구가 너무나 자만한 나머지 아시아로부터 이제 다시 배우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저 죽어갈 것이다.” 이건 무슨 헛소리야? 서구 과학자들이나 (특히 메르켈 처럼 전문가 말을 새겨듣는) 정부는 의심할 바 없이 다른 나라에서, 특히 남한에서 많은 것들을 잘 배우고 있어. 마스크의 효과나 접촉자 추적 같은 것 말야.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하지만 “서구사회”는 “한국방역 패키지” 전체를 수용하진 않으려고 하지. 왜냐하면 그것은 곧 감시 국가를 말하니까. 한국식 방식의 추적방식은 서구에 그대로 복제 될 수가 없어. 왜냐면 핸드폰 GPS 데이터나 신용카드거래, 약구입 기록, CCTV 영상등을 감시하는 건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적, 자유지상주의적 가치들과 맞지 않으니까.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여기서 나는 어떤 구조적인 인종주의도 못 찾겠는데? 저자는 서구 각국도 아시아 각국의 감시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고, 그게 아니면 구조적 인종주의라는 식인데 미안하지만 이건 믿을 수 없이 멍청한 주장이야.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간섭받지 않는 자유(liberty)의 가치란 서양에선 때로 수천명의 죽음이나 경제적 손실보다도 더 중요하게 취급되곤 해. 이 저자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위기를 이유로 자유를 잃어버리면 위기가 지나가도 그게 결코 돌아오지 않아. 우리는 그걸 2차 대전 같은 걸 통해 경험한 바 있어. 그리고 CCC와 같은 시민단체들은 계속 그걸 지적하고 있어. &amp;lt;&lt;/span&gt;&lt;a href=&quot;https://www.ccc.de/de/updates/2020/corona-tracing-app-offener-brief-an-bundeskanzleramt-und-gesundheitsminister?fbclid=IwAR0dycthLW3egEwmjtmVDCT-4VRFoxVOU2zjCZhmtKk_4rJczZvf80j2pAE%E2%80%AC&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Corona-Tracing-App: Offener Brief an Bundeskanzleramt und Gesundheitsminister&lt;/span&gt;&lt;/a&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amp;gt;&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M, 나는 “구조적 인종주의”같은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야. (왜냐면 실제 관계[Sachverhalt]란 인종주의같은 개념보다도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팀 서구가치” vs “팀 감시사회”같은 도식은 분명히 애용되고 있어. 나는 이게 서구사회와 비서구 사회 사이에 있는 실제 갈등이나 차이들을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해. 너는 대체 이 감시 테크놀로지들이나 근대 행정학이나 통치성 같은 것이 애초에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해?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나는 꼭 서구 국가들이 중국이나 베트남 (심지어 한국)으로부터 배워야만 한다고, 혹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자유주의적 서구와 권위주의적 비서구라는 분석범주는 저자의 주장보다도 더 문제적이야. 오늘날 “자유주의적 사회들”과 “권위주의적 사회들” 사이의 구분선은 서구의 리버럴들이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모호해. 이미 푸코가 그의 (자유주의적) 통치성이나 생명권력 개념을 가지고 잘 분석한 바 있잖아?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나는 저자와 똑같은 걸 말하고 싶은 건 아니야. 당연히 우리가 전체주의적 감시에 기반하지 않은 대책들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 내가 진짜 문제라고 보고 있는 게 뭔지 알아? 지금 서구 각국의 정부들은 말은 ‘서구적 근본가치’를 이야기하면서도, 사실상 (중국 것은 아무튼 간에 아닌 한국 방식의) 감시대책들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에 more or less 굴복하고 있다는 거야. 왜냐하면 사실은 이런 감시 기술들이나 권위주의가 결코 서구적 근대성에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내가 무엇인가를 “인종주의적”이라고 부른다면 그건 바로 서구인들의 이 사실을 무시하는 것, 그리고 감시기술 등을 “아시아적 문화”라고 타자화하고 유럽을 마치 완전히 리버럴한 곳인 냥 재현하는 그 점에 있겠지.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내가 이 글을 공유한 건 저자의 주장 때문이 아니라 이 글 안의, 그리고 이 글에 대한 (아마도) 백인 독자들의 반응들에 있는 몇몇 흥미로운 지점들 때문이었어. 너는 내 지난번 Merkur 기고글을 발표 전에 먼저 봤었잖아? 그건 한국식 경찰국가 해법에 대한 비판적인 에세이었지. 동시에 서구 사회의 스스로를 성숙하고, 자유주의적이라고 보는 것에 대한 사르카즘이기도 했고. &amp;lt;&lt;/span&gt;&lt;a href=&quot;https://www.merkur-zeitschrift.de/2020/04/01/was-europa-von-suedkorea-nicht-lernen-kann&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WAS EUROPA VON SÜDKOREA NICHT LERNEN KANN&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amp;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 당연히 감시체제는 아시아의 발명품이 아니지! 하지만 감시의 테크놀로지들을 아시아적이라고 타자화하는 것은 분명 어떤 실제로 존재하는 - 그래 나를 그렇게 몰아붙이고 싶다면 ‘본질적인’이라고 하자 - 사생활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가 중국같은 나라나 독일같은 나라 사이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 너는 이 차이가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고, 이 점은 근본적으로 동의할 수가 없네. ‘본질주의’를 부정한다 해도, 문화적 차이가 쉽게 그런 ‘구성주의’에 로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니라구.&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이 지점에서 넌 아마도 그럼 뭐가 문화적 단일체냐고 묻고 싶을테지? 물론 거기에 분명한 경계는 없어. 하지만 분명 차이들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야. 사생활을 둘러싼 이 문화적 차이는 판데믹 대처와 같이 “전체 공동체의 이득”을 명분으로 한 전면감시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디지털 결제 시스템 같은 기술에서도 볼 수 있어. 중국인들 다수가 사생활에 대한 일말의 고려 없이 이런 기술들을 받아들이지만 사생활에 환장한 독일인들은 도통 현금 거래를 포기하려 하지 않지. 마치 현금이 “인쇄된 자유”인냥 말이야. 이런 개념들은 중국이나 (아마도) 한국에서는 결코 독일에서와 같은 무게를 갖고 있지 않을 거야.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이런 개념은 궁극적으로 서구의 사유 전통에 있는 개인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너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적 선에 대한 문화 간의 이 상이한 가치평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거야? 물론 이건 양단간의 문제는 아니고 두 극 사이의 어느 지점에 관한 것이겠지만 말이야. 집단문화는 당연히 서구에도 있고, 개인주의는 당연히 동양에도 있겠지. 하지만 분명 강조점에 있어서 대조적이라 할 수 있지 않아?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그리고 지금 누구도 전면감시가 아시아적 형태의 거버넌스라거나, 아시아의 발명품이라고 말하지 않아! 나는 스노든의 폭로를 기억하고 있고, 또 전체주의 동독의 감시사회도 기억하고 있어. 또 근대 통치기술로서 통계학의 원천도 알고 있어. 전면감시는 집단주의적 형태의 거버넌스지. 하지만 아시아 문화가 오늘날 조금 더 집단주의적이라 더 친화적으로 감시 정책들을 받아들였다는거고. 지금 중국 등의 아시아 국가들은 집단적 선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조금 무르라고 설교를 하고 있어. 그리고 저 기사의 저자는 바로 이 노선을 서구도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고. 나는 결코 동의할 수가 없어. 왜냐하면 우리가 그 개인의 자유라는 제단에다가 수많은 코로나 희생자들을 바치고 있기 때문이야. 그만큼 중요하다고.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베트남 사례 역시 집단주의 이슈지. 거기선 사람들이 규칙을 따른다고! 그들은 국가 전체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개인들의 필요를 희생시켜. 그리고 선의가 한계에 다다를 정도면 군사적인 제재가 전체의 안녕을 지키지. 물론 서구 기독교적인 “이웃사랑” 역시도 집단/공동체 문화의 한 형태일 거야. 이웃의 안녕을 깊이 생각하는 것. 미국에서 총들고 데모하는 사람들이나 독일에서 광장에서 모여서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건 감시 기술이나 경찰 국가를 다시 수입하는 게 아니야. 독일인들은 그걸 이미 해 봤고, 다시는 그것을 원하지 않아. 베트남은 한편으론 발 빠르게 격리조치를 시행했고, 또 한편으론 전체 주민들에게 방역에 관한 훌륭한 캠페인을 했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가짜뉴스”를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언론 검열을 심화하기도 했어.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그리고 너는 대체 서구가 그래서 아시아의 전략에서 마스크쓰기 문화나 효율적 테스트 외에 무엇을 더 배워야 한다는 건지 대답해야 할 거야. 그게 기술을 이용한 전면감시가 아니라면. 뭐 군사적 억압이라도 배워야 하나?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솔직히 &quot;Team Democracy vs. Team Dictatorship&quot; 구도가 과연 그렇게 틀린 건가? 베트남은 분명 이 Team Dictatiorship에서 탑플레이어겠지. &amp;lt;&lt;/span&gt;&lt;a href=&quot;https://foreignpolicy.com/2020/05/12/vietnam-coronavirus-pandemic-success-repression/?fbclid=IwAR0r7rmLpIvQ4saJjm2LK1QH5LlMjmHrSMkHYAQ-LOFaq0RZTvK44OQBZoA&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Vietnam’s Coronavirus Success Is Built on Repression&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amp;gt;그리고 인도의 극우 대통령 모디의 잔인한 록다운 정책 역시 같은 방향일거야. “아시아적 방식”에 대해 더 많이 읽으면 읽을 수록 내가 확인하는 건 이 성공적인 대책 안에 들어 있는 권위적인 본성이야. 물론 너나 나나 그런 걸 바라는 거 아닐 테고, 너나 나나 그게 중국이나 한국, 베트남 인도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야. 판데믹에 대한 세계 각국의 대처는 한가지를 분명히 해 줬어. 집단주의적인 혹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권위주의적인 정책이 분명 방역에선 효과적이었다는 거야. 하지만 우리는 분명 윤리적 질문도 던져 봐야지. 서구가 과연 스스로도 이미 재앙적으로 경험한 바 있었던 이 권위주의적 리더쉽을 지금 수용해야만 할까? &lt;/span&gt;&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나는 서구가 아시아 국가들의 그런 정책들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러니 그 질문엔 대답할 필요가 없겠지. 내가 이야기한 건 서구 각국의 정부들이 이미 이 “아시아의” 감시 정책들을 수용하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게 바로 오늘날 서구 근대성이 보여주는 딜레마지.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서구 근대성 안에 있는 “역학疫學적 합리성”( epidemiological rationality)이 마찬가지로 서구적인 “자유주의적 정치적 합리성”(liberal political rationality)을 향해 방역에 효율적인 감시 수단들을 실행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는 상황이라는 거지. 방역의 테크놀로지란 결코 외래적인 게 아니야. 푸코가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 페스트 방역이나 천연두 방역의 모델을 통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애초부터 서구 자유주의 근대성의 핵심에 있는 거지. 동시에 유럽인들의 자기정체성인 “서구적 가치들”과 길항관계에 있는 것이고.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그리고 솔직히 신용결제나 디지탈 결제와 ‘가치관’을 직접 연결시키는 네 이야기는 내가 보기엔 완전히 자의적인데, 유럽에서 가장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나라가 어디야? 스웨덴이잖아. ‘현금없는 시장’은 바로 어느나라보다도 스웨덴이 앞서 있는 정책이었다고. 사생활만 자유주의 가치인가? 한국식 감시체제를 정당화하는 “투명성”이라는 구호도 권위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자유주의적인 가치에 가깝다고!&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그래서 내가 계속해서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를 “팀 자유주의 대 팀 권위주의”로 나누는 도식이 그저 밖으로 드러난 현상형태들만을 다루는 왜곡된 현실이라고, 그리고 얼마간 유럽중심적이고 인종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거야.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 “팀 자유주의 대 팀 권위주의” 이야기 말인데, 그래 전면 감시 정책이나 테크놀로지는 아까도 말했지만 서구사회에 있었고, 지금도 있어. 어디에도 완전한 이상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너는 왜 그렇다면 홍콩 사람들한테 이 구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물어보지 않니? 거기선 “언론의 자유를 갖거나 그렇지 않거나”, “헌법에 따른 사법적 시스템을 갖거나 정치활동가들이 그냥 사라지거나”의 문제라고. 난 솔직히 니가 이런 현실들을 그저 유럽중심주의적이고 인종주의적인 기만 정도로 치부하는 게 충격적인 걸?&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나는 중국이나 베트남 등의 정치적 구조나 사회적 분위기가 권위주의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이런 감시 체제를 배우지 않으려는 것이 곧 서구사회의 인종주의라는 기사의 관점에도 동의하지 않아.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하지만 유럽 각국의 록다운 대책들은 그럼 자동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서구적 가치”에 기초한 것이니? 제재, 금지, 그리고 벌금을 통해 코로나 파티나 여는 거만한 시민들을 길들이는 훈육국가적 정책들 말이야.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팀 자유주의 대 팀 권위주의 도식은 내 보기엔 매우 자의적이야. 솔직히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유럽 각국의 록다운 대처 모델은 타켓팅된 감시를 바탕으로 시민의 이동과 영업의 자유를 어느정도 보장한 자신들의 “자유주의적 모델”과 거리가 멀고, 이동통제와 출입/접촉금지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식 “권위주의적 모델”에 훨씬 가까울지도 몰라. 실제 사태란 언제나 이렇게 더 복잡한 것이고, 우리는 신중하게 다양한 각각의 케이스들을 살펴야 하는 거지.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전체 아시아를 “집단주의적” 문화로 범주화하거나 본질화하는 시선들을 함 보자고. 오늘날 다양한 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적 공통점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야. 어떤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전혀 공동체주의적이지 않고, 초-개인주의적이고 초-리버럴한 사회야. 거기서 지배적인 것이 있다면 그건 “투명성”이라는 정언명령이지. 서구사회에서보다 더 급진적으로 말이야. 개인들 뿐만 아니라 정부도 투명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정권이 뒤집혀. 물론 신자유주의가 아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지. 이건 그저 우리가 왜 여러 사회들을 몇 가지 재현들이나 현상형태들만 가지고 정의할 수 없는지의 한 예일 뿐이야.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나 솔직히 말해서 니가 확신에 차서 주장하는 본질주의에 가까운 문화적 차이에 대한 주장들에 매우 놀라고 있어. 그런 ‘문화’ 과연 정말 방역 정책들의 서로 다른 모델의 배경이나 원인인 것일까? 내가 보기엔 그것들은 배경이 아니라 전경,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 가까워 보여.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그리고 내가 또 놀란 건 네가 유럽 국가들의 저 높은 사망자 숫자를 낭만화하고 있다는 거야. 감시와 추적 정책들을 외래적이고 악한 것으로 말하기 위해서. 인류학 연구자로서 너는 정말 차이점들에 대한 이 분석이 그렇게 쉽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해?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 이건 인류학에 대한 게 아니라 정치적 신념 문제야. 그리고 꼭 같은 근본적 질문을 테러리즘에 대해서도 할 수 있어. 우리는 정말 경찰국가를 통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통해 테러리즘을 완전히 박멸해야 하나? 혹은 우리의 자유로운 사회를 지키기 위해 얼마간의 테러리스트 공격을 고통스럽지만 겪어야만 하는 걸까? 네가 만약 후자인 나의 신념을 “낭만주의”라고 가치절하한다면, 그래. 난 그 낭만주의와 더불어 살겠어. 만약 나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이 자유 사회에서 살 수 있는 대가라면 테러 공격이나 바이러스에 의해 죽는 편이 더 나아. 물론 뭐 그런 일이 그렇게 높은 확률로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말해 보자면 그렇단 말이야.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안 돼… 그건 너무 흑백논리다. 그래 그게 너의 유럽 리버럴로서 정치적 신념의 문제라면야 뭐 이해할 수 있어(근데 너 샌더스 좋아하는 좌파 아니었어?). 하지만 미안해. 그 신념에 도달하는 분석적 방법에는 전혀 동의를 못하겠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 독일은 코로나 사망자 숫자를 평년의 독감 바이러스 사망자 숫자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어. 그런 점에서 보면 독일은 확실히 자유와 생명이라는 가치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있어 잘 하고 있다고 봐. 한국도 그만큼 잘 하고 있지만 강조점은 자유보다는 생명에 있는 것 같다. 이게 내가 저 기사의 비판이 매우 일차원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야. 저 칼럼니스트는 자유의 가치를 무시하고 있어. 생명의 가치란 분명 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자유는 그렇지 않지.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그리고 네 질문 “유럽의 록다운 정책들이 유럽적 가치에 맞는 자유주의적인 것이냐?”말인데, 아 당연히 아니지. 그것들이 어떻게 자유주의적인 것이겠어. 내가 바보라고 생각함? 이건 고전적인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억압이고, 자유의 제한이지. 부정적으로만 보면. 고전적 정치 이론에선 모든 정부의 법령은 억압과 강제력(Gewalt)이니까. 그건 아시아의 정부나 유럽의 정부냐와 상관없이.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하지만 분명 좀 더 자유주의적인 행정의 형태들고 좀 더 권위주의적인 행정의 형태들은 분명 존재하고, 이상적 수준에서만 아니라 현실의 특정 현상형태들로 실현되고 있잖아. 어떤 사회는 자유를 더 제한하고, 다른 곳은 좀 더 자유를 주고 말이야. 너는 현실이 어떤 선명한 경계를 긋기에는 너무 복잡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독일과 중국의 통치의 형태는 자유주의 사회와 권위주의 사회 사이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는 충분할 만큼 급진적으로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그래 우리 모두 중국과 독일 사이의 차이를 꽤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독일과 대만, 혹은 독일과 한국 혹은 다른 민주주의적 비서구 국가들 사이에선? 서구적 가치와 비서구적 가치의 도식은 서로 다른 사회들을 분석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난 어떤 대가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중요하다는 네 정치적 신념은 동의하겠는데, 문화적인 것을 이렇게 도식화하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너무 취약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서구 문명”의 핵심 가치 아니었나?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그리고 이런 식으로 동양-서양을 재현하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집합적인, 탈유럽중심적인, 더 나아가 탈인간주의적인 정치와 조직화의 방식을 상상하는데 해롭기까지 해. “아시아적” 코로나 방역에 대한 무조건 적인 칭찬 만큼이나 말이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들”에서 발견하는 것은 사실 “자유주의적”이지도 않아. 나는 이게 유럽 리버럴이 처한 또 하나의 딜레마라고 생각해. 요즘 “서구적 가치”라는 말 너무 많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아? 무슨 종교마냥.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나는 그런 점에서 유럽인들이 좀 더 20세기에 비 서구 지역들에서 더 급진적으로 (그리고 엄청나게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한 통치성, 생명권력 그리고 훈육적 국가의 유럽적 기원에 대해 다시금 자기 자신의 것으로서 진지하게 마주해야 한다고 봐. 몇몇 비-서구 사회들은 이제 내 용어로 말하면 비-서구적인게 아니라 초-근대적 혹은 초-서구적 사회가 되었어. “우리”가 국제주의적이고 세계시민주의적 입장의 좌파라면(그래, 이게 내 정치적 입장이다), 소위 서구적 가치들의 패키지에 계속해서 점착되어서 다른 문화들을 다른 어떤 이름으로 가치절하하기보다는 “우리”의 공통적인 근대성 안에서, 아니 그 공통적 근대성의 ‘균열’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봐.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 하지만 그럼 너는 타인을 보호하기 위해 모두가 마스크를 쓰는 문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어? 그게 집단주의 공동체 문화의 표현이 아니라면 말야. 왜 이런 문화가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 공통적일까?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나는 당사자로서의 너의 경험이 갖는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진 않아. 그리고 오늘날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초-개인주의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네 분석에도 동의해. 자본주의는 거대한 개체화의 도구니까. 문화란 항상 여러 다양한( heterogenous) 요소들이 섞인 어떤 거지.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정말 잘 몰라서 너한테 묻는 건데, 아시아의 공동체주의적 사회들이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론은 틀린거야? 중국, 한국, 베트남 혹은 일본에서 개인과 공동체 간의 전통적인 관계란 그럼 뭐야? 서양의 기독교적 중세적 관계와 짝을 이루는 동양적인 것 말이야. 그리고 “아시아적 가치”같은 개념은 유럽인들이 아니라 싱가포르의 리콴유 같은 아시아인들 스스로가 서구적 인권과 민주주의를 보편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해서 만든 것이지 않았어?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아시아의 몇몇 지식인들이나 리콴유나 박정희같은 “독재자”들이 이미 오래 전에 사회적 가치로는 사망했던 유교를 20세기 중반에 다시 소환해서 아시아인들의 문화적 오리지널리티로 만들려고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야. 한편으로는 바깥을 향해 반서구중심적, 반제국주의적 반응으로 나온 것도 사실이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건 내부를 향해서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고 그들의 권위주의적 노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했어.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들과 달리 역시나 지도자급 정치인 레벨에서 이 유교적 정체성의 기능이 그저 이 지역의 민주화에 대항해 전통적 요소 몇 가지를 도구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나중에 노벨상을 받은 대통령이 된 정치인 김대중이었어. “Foreign Affairs”지에서 벌어진 &lt;/span&gt;&lt;a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리콴유&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와 &lt;/span&gt;&lt;a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대중&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사이의 논쟁은 지금 봐도 읽을만 해. 나는 이런 식의 아시아인들 스스로의 동아시아 유교문화 정체성에 대한 주장들이 그저 뒤집힌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민족주의의 예라고 생각해.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그리고 – 네가 진짜 진짜 놀랄지 모르겠는데 – 적어도 한국 교육 시스템에선 “유교 윤리”라던가 “유교 사회문화” 이런 과목이 없어. 심지어 박정희 때에도 그랬어. 고전적인 유교 교양은 이미 오래 전에 한국 사회에서 사라졌고. 내가 처음으로 유학자들의 경전을 읽은 건 대학의 아주 작은 수업에서였어. 다른 나라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한국 사람들은 솔직히 유럽사람들이 유대교-기독교 전통에 대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적은 정도로나 유교를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21세기에는, 아 물론 중국 정부가 예전에 싱가폴이나 한국 독재자들이 유교의 이름으로 했던 걸 지금 하고 있긴 한데, 일반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더 지배적인 건 신자유주의적 정체성이나 민주주의적 정체성이야.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 하지만 분명 아시아적인 권위주의란 것이 실존하고 있고, 거기에는 역사적 이유와 요소들이 있지 않나? 예를 들면 근대 이전의 서구사회 역시 권위주의 사회였고, 근대적 통치성에도 네 말대로 권위주의적 요소들이 있어. 그것들은 기독교에서 온 것, 봉건적 구조에서 온 것, 근대 안에서 만들어 진 것,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그리고 히틀러의 나치즘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 내 생각에는 네가 오히려 동아시아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서구 근대성의 틀로만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유교의 영향을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을까?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나는 비서구 사회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전통적 사회가 외부로부터, 그러니까 서구의 식민주의 권력 혹은 서구적 근대성에 의해서 단절되었었다는 점을 다른 무엇보다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봐. 근대 이후로 어떤 전통으로부터의 성공적인 내재적 발전이란 대부분의 경우에 어렵거나 혹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지. 그래서 비-서구의 근대성이란 항상 키메라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현대 아시아 국가들은 동양적이지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서양적일 수도 없어. 지금 많은 사회들은 더 이상 19세기나 혹은 20세기에도 유지된 만큼 전근대적이고, 가난하고, 관습적이지 않아. 그 대신 “근대화되어야 한다”, “세계 시장에 통합되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근대성의 명령어들을 통해서 어떤면에서는 서구 근대보다 더 근대적으로, 그러니까 초-서구적, 초-근대적으로 된 거지. 서구 근대성의 어떤 요소들은 더 과장되게 받아들이고, 어떤 요소들은 무시되고 그러면서.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 그래도 어떤 아시아의 내재적인 요소는 있을 거 아니야. 말하자면, 좋아, 그렇게 수입된 권위주의가 왜 유독 강하게 꽃을 폈을까? 그러니까 마오쩌둥의 권위주의는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성공했을까?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네가 마오를 굳이 입에 올리다니 넘 반갑네. 마오쩌둥이 중국 유교의 가장 큰 적이었던 건 알고 있지? 모든 전통 유교적 가치들과 제도들을 “사회주의”(마르크스는 어느나라 사람?)의 이름으로 파괴한 건 바로 그 마오와 마오주의자들이었다고.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어쩌면 누군가는 권위주의의 성공을 아시아에선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에 완수되어야 했던 근대화, 자유화, 자본주의화를 이유로 들 수도 있겠지. 또 세계 시장 속에서 경쟁관계를 탐색하는 정치경제학적 설명도 있을 수 있을 거고.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그리고 애초에 식민지를 경험한 많은 국가들에서 “서구 근대성”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개인주의라는 가치의 패키지였을까? 홍콩 사람들이 중국 반환 전에는 언론자유와 집회시위, 선거의 자유를 막 누렸던가? 어느 곳 보다도 식민지에서 서구의 전면감시 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았어? 그리고 오늘날의 ‘서구적 가치’라는 개인주의가 과연 서구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가치일까? 히잡을 쓴 이민배경의 여성이 백인들이 누리는 만큼의 개인의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해? 정치적 권리를 갖지 않은 채로 노동인구로서 서구에서 살아가는 어마어마한 수의 이민자들에게도 개인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가 그렇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일 수 있을까?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 네가 마지막에 말한 게 분명 서구의 문제점인 건 사실이야. 불평등이 존재하지. 하지만 난 여전히 이 개인적 자유가 모든 이들에게 확장되는 것이 서구적 해법일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너의 논의에서는 너무 많은 길이 로마로 통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시아를 유교로 환원하는 것도 그렇지만 서구적 근대화로 환원하는 것도 부적절하지 않아? 다양한 요소들과, 역사적 우연들이 있겠지. 아시아적인 것의 특징이 분명히 서구와 다르게 존재하지 않나?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나는 모든 것을 서구근대성으로 환원하기 위해서 이 개념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야. 아시아 및 모든 비서구의 권위주의적 근대화와 서구 사회의 연루 관계, 혹은 공범관계를 좀 더 분명히 하려고 하는 것이지. 오늘날의 세계자본주의적 공통점을 ‘문명간의 갈등’ 혹은 ‘차이’보다 정치적으로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당연히 모든 지역들과 문명권들이 근대 이전에는 관습적이고, 전근대적 형태의 권위주의를 가지고 있었겠지. 그리고 그 중 어떤 것들은 여전히 이런 저런 방식으로 현재에도 작동하고 있을 것이고. 그건 맞아. 하지만 근대화, 식민화 그리고 세계화 이후의 모든 것들은 인류의 아주 구체적인 역사적 단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야. 서구중심주의에서 자유로운 어떤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문화의 발전은 지난 수세기 동안, 그리고 지금도 불가능한 어떤 것이야. 그래서 너무 많은 것들을 서로 다른 정체성과 문화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너무 약하고, 정치적으로 무쓸모하고, 심지어 위험하다고 생각해. 새뮤얼 헌팅턴과 네오콘을 보라고!!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M: 그럼, 이를테면 마스크 쓰는 문화 같은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너는 아직 이건 설명하지 못하고 있어.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그래 좋아. 우리는 “집단주의 문화” 말고도 충분히 여러가지 설명을 내놓을 수 있어. 첫째, 우선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어디서나 쓰는 게 상대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마스크를 쓰는 게 그렇게 일반적으로 공유되거나 강요되는 문화가 아니었어. 내 생각에 2000년대 초반의 SARS 전염사태 이후에야 확실히 전염병에 대한 요즘 식의 공포가 커진 것 같아.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둘째, 많은 유럽과 북미의 공장들이 중국, 아시아, 태국 같은 아시아 국가들로 제조업 공장들을 이전하는 바람에 이 동아시아 전체 지역이 공기 질이 여전히 매우 나빠. 유럽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지. 이미 이번 판데믹 이전에도 스모그나 미세먼지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는 건 이 아시아 각국의 일상의 한 부분이었어.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셋째, 중국, 한국, 베트남 등에는 마스크를 생산하는 공장들이 꽤 많아. 부분적으로는 위에 말했듯 제조업이 여기에 몰려있기도 하니까. 생산된 마스크는 계속 팔려야 하는 것이고. 그런 시장 요소도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넷째, 내 주장과 관련해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일텐데, 이 지역에서는 항상 더 근대적이 되라는, 더 시민윤리를 갖추라는, 더 서구적이 되라는 그래서 더 위생적이 되라는 사회적 압력이 근대화 시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있어. (서구인들은 이 점을 정말 잘 이해를 못하는 것 같더라.) 정작 마스크를 쓰는 건 전혀 유럽이나 서구 문화가 아니지만 아시아에서 마스크는 근대화됨, 위생적임을 상징하는 게 되었을 수도 있어. 이런 게 비서구, 구식민지 국가들에 있는 식민주의적 유산 같은 거지. 혹은 내가 말한 초-서구성 같은 것. 다섯째, 여섯째… “집단주의 문화” 보다 훨씬 더 개연성 있는 설명들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거야.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문화를 어떤 것들의 ‘원인’이나 ‘배경’으로 바라보는 문화환원주의적 접근은 항상 매력적이고 쉽지. 하지만 이 공통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대안을 생각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 한국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마스크 쓰는 이유에 대해서 공동체주의적 행동이라고 즐겨 설명할 지도 몰라. 그게 더 문명적이고 성숙하게 들리니까. 하지만 내 생각엔 그건 유교의 경우 만큼이나 환원주의적인 설명 같다. 감시의 테크놀로지들을 아시아 사람들이 폭넓게 수용하는 데에도 권위주의 보다는 훨씬 다양하고 긴 설명이 가능할 거야. 하지만 나는 철학도이지 이 분야의 전문가들인 문화연구자나 인류학자, 사회학자가 아니니까 여기서 줄일게.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나는 우리 시대의 생명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가치”에 기반하거나 “문화”에 기반한 선명하고 쉬운 클리셰들보다는 훨씬 모호하고, 모든 방향에 비판적인 접근법들이 필요하다고 봐. 그런 클리셰들은 근본에서는 결국 유럽중심주의로 귀결되는 것이었어.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 M: 오케이. 이제 밤이 늦었다. 재밌는 대화 고마워. 다음에 만나면 더 많이 이야기해보자고. 허그로 인사하지는 못하겠지만...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김강: 그래. 나도 이 늦은 시간까지 너랑 오랜만에 토론같은 토론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 담에 보자.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content>		<category term="코로나"/><category term="유럽중심주으"/><category term="오리엔탈리즘"/><category term="권위주의"/><category term="독일"/><category term="유럽"/><category term="한국"/>	</entry><entry>
		<title>다시,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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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0-04-16T17:20:04+09:00</published>
		<updated>2021-07-19T09:54:09+09:00</updated>
		<author>
			<name>김강</name>
		</author>
		<summary type="text">이 글은 아래의 글 &quot;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quot;에 대한 한승동 메디치 미디어 기획주간의 반론 &quot;코로나19 팬데믹, 서방 패권 소멸의 분기점&quot;에 대한 재반론을 겸하여 쓴 글입니다. 지난 7일 &lt;피렌체의 식탁&gt;을 통해 번역, 공개한 에세이 “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 (Was Europa von Südkorea nicht lernen kann)”가 이 정도로 관심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 독일어권 독자들에게 이 글을 공...</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font size=&quot;3&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quot;&gt;이 글은 아래의 글 &quot;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quot;에 대한 한승동 메디치 미디어 기획주간의 반론 &quot;코로나19 팬데믹, 서방 패권 소멸의 분기점&quot;에 대한 재반론을 겸하여 쓴 글입니다. &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지난 7일 &amp;lt;피렌체의 식탁&amp;gt;을 통해 번역, 공개한 에세이 “&lt;/span&gt;&lt;a href=&quot;https://firenzedt.com/?p=5909&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a href=&quot;https://www.merkur-zeitschrift.de/2020/04/01/was-europa-von-suedkorea-nicht-lernen-kann/&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Was Europa von Südkorea nicht lernen kann&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가 이 정도로 관심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 독일어권 독자들에게 이 글을 공개한 매체인 Merkur부터가 대중적인 잡지가 아니라 소수의 인문계 지식인들을 독자로 하는 매체였기 때문이다. &lt;/span&gt;&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글 안에서 나는 서구 엘리트들, 혹은 서구적 정신세계가 처한 딜레마에 대한 농담과 조롱들을 곳곳에 배치해 두었는데, 이것을 그대로 한국의 비슷한 독자층에게 전달하려는 의도로 약간의 보충만을 더해 번역하여 기고했다. 이 글이 한국에서 이 정도로 넓은 독자층에게 다가가게 될 줄 알았다면 글을 직접 번역하는 대신 새로 썼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조롱과 농담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가 보다는 그 뒤에 다가오기를 바라면서 조금은 숨겨서 배치해 두었기 때문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하지만 이렇게 퍼져나간 덕분에 여러가지 반응들을 수집할 수 있었고,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계속 사유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글에 집어 넣어 둔 용어와 코드들에 대한 여러 (오해가 섞인) 반응들에 대해선 앞서 이야기한 배경을 가진 글이기 때문에 굳이 설명하지 않으려 했는데, 동 매체의 한승동 기획주간이 영광스럽게도 필자의 글을 직접 요약, 비평하며 서방 패권의 종식 이후를 생각해보자는 글 (&lt;/span&gt;&lt;a href=&quot;https://firenzedt.com/?p=6097&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amp;lt;코로나19 팬데믹, 서방 패권 소멸의 분기점&amp;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을 기고하였기 때문에 이미 내 손을 떠난 글에 대해 몇 마디 말을 보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lt;/span&gt;&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855/083/fb1e5f5696ad1325984698e6da4f13bf.jpg&quot; alt=&quot;오리엔탈리즘-415x600.jpg&quot; width=&quot;415&quot; height=&quot;600&quot; /&gt;&lt;/div&gt;&lt;p&gt;&lt;br /&gt;&lt;/p&gt; &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서구 패권 소멸 희망편 vs 절망편&lt;/span&gt;&lt;/strong&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우선 내 글과 한승동 주간의 글 사이에 (아마도 한국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다니엘 튜더의 &amp;lt;동아일보&amp;gt; 기고글 &lt;/span&gt;&lt;a href=&quot;http://www.donga.com/news/NewsStand/article/all/20200411/100604567/1?fbclid=IwAR3xJKpSgnYeh54B_t-I4x80sA8G00dthnkDUp-H0Lq0p_FomYjxapT8PEE&quot; target=&quot;_blank&quot; style=&quot;font-size:14px;&quot; rel=&quot;nofollow&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서양 우월주의’가 무너지고 있다”&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가 있었다는 점을 언급해 두자. 이 글에서 튜더는 판데믹에 의해 그 어느 지역보다도 크게 해를 입은 서구의 우월과 패권은 저물고 있으며, 이제 세계는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현재의 한국은 서구, 특히 영국과 미국이 잃어버린 민주적 사회계약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것이 지금의 방역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의 근저에 있다고 언급한다.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 글은 그야말로 앞으로의 세계사에 대한 칸트적 전망을 담은 “서구패권소멸론”의 희망편이라 할만하다. 아니, 사실 칸트는 인류가 전지구적 공화국, 혹은 민주사회에 이를 때 까지 극한의 갈등과 전쟁 등을 통과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한 점(&amp;lt;세계 시민의 견지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amp;gt;)에서 이 글은 칸트보다도 더 희망적인 시각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내 글은 말하자면 이 “서구패권소멸론”의 절망편인 셈이다. 내 글에서 그의 이론을 정밀하고 정확하게 소환했다고는 결코 주장할 수 없겠지만, 거기서 칸트적 희망의 대쌍으로 선택한 것은 푸코의 의심이었다. 그는 유럽의 근현대사를 이성, 민주주의 그리고 계몽의 역사로 바라보는 표준적인 역사관 아래에서 간과된 통치와 권력, 행정 테크놀로지의 역사를 재구성한 철학자다. 그에 따르면 계몽과 민주화의 역사는 동시에 훈육권력, 생명권력, 통치성의 역사였다. 내 글은 현상분석, 혹은 미래 전망에 있어서 민주주의와 계몽이라는 틀 대신 푸코의 이 미시적 권력분석의 틀을 (아주 기초적인 단계에서나마) 빌려본 것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성인됨’의 환상&lt;/span&gt;&lt;/strong&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내 글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지적을 받은 부분은 ‘아동’과 ‘성인’의 구분인 것 같다. 한승동은 &lt;/span&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그(김강기명)는 […] 고분고분한 한국인들에게서 ‘아동’을 발견했고, 그와는 전혀 다른 독일인들 속에서는 ‘성인’을 찾아냈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라고 내 입장을 요약했는데, 이것은 조금은 악의적인 요약이다. 우선 양쪽의 차이를 언급한 것은 일차적으로 시민 행위자가 아니라 “시민을 대하는 행정 및 사회문화적 환경”에 대해서다. 그리고 내가 이 글 전체에서 말하려 한 것은 유럽사회가 스스로에 대해서 가진 ‘성인됨’의 환상이지, 실제로 한국인들이 ‘아동’처럼 행동하고, 유럽인들이 ‘성인’처럼 행동한다는 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오독을 수용한다 해도, 서비스 제공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아동과 성인 중 어느 쪽이 더 &quot;까다로운&quot; 존재일까? 물론, 표준시민이란 어디나 비슷하게 틴에이저같은 이들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lt;/span&gt;&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혹자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신자유주의적 소비자 주체성의 차원에서 한국 행정시스템을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은가 지적을 하기도 했는데, 동의한다. 하지만 굳이 이 문제 많은 성인됨(Mündigkeit)의 유비를 사용한 것은 바로 이것이 서구 근현대사를 계몽과 민주주의의 역사로 파악하는 환상의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즉, 서구인들은 스스로를 집단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그리고 (서구의) 타자들과의 비교 안에서 성인으로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한편으로는 생명권력에 의한 전 사회적 통치를 거부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형태의 “성숙한”(풉!) 시민성이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이번 판데믹 대응에 있어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글의 서두와 마지막에 각각 언급한 “발코니 콘서트”는 바로 이 방역에 실패한 채 집으로 쫓겨들어간 유럽인들의 ‘정신승리’인 셈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너무 성숙한 나머지” 한국식 해법의 도입이 어렵다고 한 것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기술이 부족했는가? &lt;/span&gt;&lt;/strong&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한승동 기자는 유럽의 이번 방역실패가 그저 단순히 제대로 대처할 선진적인 기술적 대비가 돼 있지 않았던 점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lt;/span&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font-size:16px;&quot;&gt;“현실적으로 그것(한국 방식)을 수용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lt;/span&gt;&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하지만 내가 인문학도로서 더 알고 싶은 것은 의학을 비롯해 과학기술적 역량에서 결코 타 지역에 비해 부족하다 할 수 없는 (아니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기술적 역량의 선두권에 있는) 유럽과 북미의 선진국들이, 이 분야의 과학 기술인들이라면 누구나 표준적인 해법이라고 생각할 한국식 방역시스템을 왜 도입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심지어 기술적으로 쳐진 동유럽 국가들보다 압도적으로 방역에 실패했는지 그 정신적인 배경에 대한 것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우선 많이 논의되고 있는 것부터 이야기해보자면 우리가 한국에서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유럽 내의 개인정보보호 및 자유권에 관한 규제가 촘촘하고, 지역적 수준에서 유럽연합에 이르기까지 두텁게 존재하는 대의정치적 구조가 이 인권관련 규제들을 지속적으로 유지, 강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대의정치적 구조가 두텁다는 것은 단순히 각급 의회들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의회와 각 정당들을 통해, 혹은 그 바깥에서 사회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등 기타 단위들의 역량과 영향력 역시 매우 크다는 것이다. 각 정당, 정치조직들의 이념과 정책이 서로 다르지만, 이 구조 전체는 기본적으로 행정적 합리성 혹은 시장 합리성이 전 사회를 지배하는 것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서유럽 각국의 공교육은 자본주의 못지 않게 바로 이 대의정치적 구조를 재생산할 수 있는 시민 양성을 목표로 한다. 이 시민의 형상은 사실상 근대 계몽주의에 의해 주조된 것이다. 곧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성인 개인들이다. 근대 유럽 민주주의와 인권의 역사는 바로 이 백인 남성 자산가를 모델로 한 시민의 형상이 노동계급으로, 여성으로, 타인종으로, 장애인으로 확장된 역사였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유럽 바깥, 특히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유럽 내 고등학교나 대학으로 유학을 온 이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가 “아니 근데 답이 여기 뻔히 나와 있는데 그걸 가지고 또 토론을 하고 있더라니까? ‘1+1=2’같은 걸 대체 왜 토론에 붙여?” 같은 말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너무나 당연히 수긍하는 유럽인들을 찾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것은 민주주의적 개인을 만드는 훈련일 수도 있지만, 어떤 수준에선 민주주의를 방해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끝끝내 자신은 인종차별을 해야겠다고, 아이에게 백신을 안 맞추겠다고, 이건 내 표현의 자유고 존엄이라고 버티는 유럽인들의 수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이다. 자신들이 성인(개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전 글 마지막에 내가 쓴 “빌어먹을 틴에이져”라는 말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념은 다 달라도 자신들이 독립적, 주체적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재)생산하는 이 대의정치의 구조와 문화는 사생활이나 개인생활을 침해할 수 있는 기술이나 정책을 도입하지 못하게 하는 방어장치의 역할을 한다. 게다가 유럽의 의회구조는 그 어마어마한 복잡성을 특징으로 하므로, 한 지역이나 한 나라 차원에서 이런 컨센서스를 깨기란 또 쉬운 게 아니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기술적으로 무수히 많은 특허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기술을 즉각 유럽 내에 도입하기란 쉽지 않고, 아예 기술 개발 자체가 지연될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그 뒤에는 위에서 말한 더 큰 정신적, 문명사적 배경이 있다. 결국 서유럽 각국이 뒤늦게야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비상사태” 선언과 그에 준하는 여러 금지조치들이었다. 독재와 급속발전의 20세기를 지낸 동유럽 각국은 서유럽보다는 훨씬 더 기민하게 인권제한조치들을 취함으로써 방역에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유사-면역학적 믿음&lt;/span&gt;&lt;/strong&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두번째 요소는 사실 반증불가능한 가설이라 그저 재미로 들어주면 좋겠다. 나는 한참 동아시아에서 전염이 진행중이던 2월, 3월에도 과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국의 엘리트들의 대응이 지나치게 여유롭고 늦었던 것에 대해 무의식적 수준에서 “우리는 괜찮을 거다”라는 일종의 유사-면역학적 믿음이 작동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이것은 스페인의 트렌스젠더남성(MTF) 철학자 폴 프레시아도 (Paul B. Preciado)가 코로나 사태를 다룬 글에서 다음 구절을 발견했을 때 세운 가설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blockquote style=&quot;margin:0 0 0 40px;border:none;padding:0px;&quot;&gt;&lt;blockquote style=&quot;margin:0 0 0 40px;border:none;padding:0px;&quot;&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color:rgb(0,117,200);&quot;&gt;“루이 파스퇴르나 로버트 코흐같은 세균학자들의 발견을 통해 “immunity(면역, 면책)” 개념은 19세기부터 법적 영역을 넘어서 의학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신체로 여겨진 근대적 개인은 단지 자유주의 경제의 낙원일 뿐만 아니라 생명정치적 면역의 표준이기도 하다. 19세기의 자유주의적이고 가부장적-식민주의적 유럽 국가들은 근대적 개인의 이상을 만들었는데, 그는 단지 자유로운(남성, 백인, 이성애자) 경제적 행위자로서만 아니라 면역/면책된 존재로서, 공동체에 대해 빚진 것이 없는 분리된 신체로 이해되었다. &lt;/span&gt;&lt;/div&gt;&lt;/blockquote&gt;&lt;/blockquote&gt;&lt;blockquote style=&quot;margin:0 0 0 40px;border:none;padding:0px;&quot;&gt;&lt;blockquote style=&quot;margin:0 0 0 40px;border:none;padding:0px;&quot;&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color:rgb(0,117,200);&quot;&gt;[…]&lt;/span&gt;&lt;/div&gt;&lt;/blockquote&gt;&lt;/blockquote&gt;&lt;blockquote style=&quot;margin:0 0 0 40px;border:none;padding:0px;&quot;&gt;&lt;blockquote style=&quot;margin:0 0 0 40px;border:none;padding:0px;&quot;&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color:rgb(0,117,200);&quot;&gt;우리가 지난 몇년간 사회에 대한 바이러스와 같은 위협이라고 간주한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대항해 취했던 국경봉쇄 정책이나 엄격한 수용 정책, 이동의 자유의 제한 등은 이제 우리 국내의 영토 안에서 재생산되고, 모든 인구로 뻗어나가고, 모든 개인의 신체에 새겨지고 있다. 몇 해간 우리는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시민권을 박탈한 채 수용소에, 무권리의 연옥 속에, 영원한 대기실에 가둬두었다. 이제는 우리가 수용소에 살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집이 바로 그 수용소가 된 것이다.” &lt;/span&gt;&lt;/div&gt;&lt;/blockquote&gt;&lt;/blockquote&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프레시아도는 이 글에서 Immunity와 community가 같은 어근 munus에서 왔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Munus는 “빚, 의무, 호의, 줌(선물 등)”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인데, immunity는 이 단어에 부정의 뜻을 가진 어두가, community는 “함께”라는 뜻을 가진 어두가 붙어있다. 즉 면역 혹은 면책(immunity)이란 빚진 것이 없는, 해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를 설명하는 개념이고, 공동체(community)란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그리고 선물을 주고 있는 것을 일컫는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프레시아도는 유럽의 근대적 개인의 형상 속에 이 면역/면책(immune)된 주체에 대한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의 이 환상속에서 전염병은 공동체(community)에 대해 빚진 것이 없는, 공동체에 해를 입히지 않는 “내 몸”과는 상관이 없는, “저들의 몸”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상상 속에서 전염병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법은 “저들을 차단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실제로 이미 3월에 많은 사망자가 나오기 시작한 이탈리아나, 지금 그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내며 심각한 단계로 진행중인 미국이 이미 1월에 경고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취한 조치는 그저 “중국인 입국금지”였다. 지역사회 감염에 대한 대비는 너무나도 늦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어쩌면 유럽과 북미의 백인 엘리트들은 자신의 몸이 곧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있다는 아주 당연한 과학적 사실을 (적어도 무의식적 수준에서) “깨끗하고 건강한 이몸이, 이몸과 동류인 이들이, 공동체에 해를 입히는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리는 없지 않은가”라는 유사-면역학적 믿음으로 대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내가 이런 (앞서 말했든 반증 불가능한) 가설까지 들이대는 이유는 아직도 도무지 유독 서유럽과 북미에서 과학적, 기술적 대처가 늦었는지, 그리고 영국이나 스웨덴에서는 심지어 집단감염(herd immunity)과 같은 비과학적인 대처방법이 국가적 차원에서 대책으로 고려되었었는지 이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성숙하고 건강한 개인이라는 유럽 시민성에 대한 미신(!)이야말로 그들의 신체를 그 어느 지역과 인종집단의 신체보다도 더 취약하게(verletzlich) 만든 원인 중 하나는 아니었을까.&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lt;/span&gt;&lt;/strong&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앞선 글의 마지막에서 나는 “새로운, 민주적인 삶-의-형태가 무엇인지 토론을 시작해 보도록 하자”라고 제안을 한 바 있다. 실제로 비상사태 선언과 록다운으로 한국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권의 침해를 겪은 유럽인들 앞에 놓인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판데믹 이후 그저 유럽인들도 한국식 해법을 이후 다시 나타날 전염병 대처의 교본으로 받아들이면 끝나는 문제일까? 앞서 말했듯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내가 독일인 독자들에게 설명하려 했던 것은 한국식 해법이 기본적으로 (행)정부와 시민사이의 극도로 가까운 거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것을 묘사하기 위해 문제 많은 ‘모성’ 개념을 사용한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한다.) 이 글이 나간 뒤 받은 비판 중 내가 가장 수긍할 수 있었던 비판은 “바로 그 시민 가까이의 행정서비스가 민주화의 결과물중 하나인데, 왜 민주주의가 아니란 말인가?”라는 주장이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물론 나도 이전 글에서 시민들이 정부의 경찰국가적 조치를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한국적 생명정치가 가진 민주주의적 ‘외양’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것을 좀 더 긍정적인 방식으로 서술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글은 ‘절망편’이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앞선 글에서 내가 강조한 것은 남한이 급속한 근대화 및 민주화의 경로 안에서 서구를 모델로 하면서도, 서구와는 다른 ‘초서구적’(hyper-westlich) 형태로 나아갔다는 것이었다. 남한은 비슷한 독재 체제의 북조선과 경쟁하면서 권위주의적인 후기식민지형 근대화를 이뤘고, 이후 시민들은 한편으론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한편으론 독재시절의 유산을 변형, 재구성해가며 대통령 주도의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지금의 삶-의-형태를 만들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강경화 장관이 BBC인터뷰에서 분석한 것처럼 좋은 면만 보자면 지금 한국의 사회모델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이후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효과적으로 보장하는 정부를 시민들이 더 앞서서 요구하는 민주주의적 경찰국가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서구적 시선에서 보자면 이것은 일종의 키메라와 같은 것이다. 민주주의(Demokratie)란 한자로나 유럽어로나 인민의 지배를 뜻하지만 그 인민의 지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한국인들은 서구인들과는 사뭇 다른 감각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란 무엇보다 “반독재”이다. 즉 억압적인 권위적 정부 대신 시민의 목소리와 명령에 귀를 기울이는 정부를 갖는 것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서유럽인들에게 “민주주의가 뭐냐?”고 묻는다면 많은 경우 인민의 지배라는 기본적 정의 이후 자유로운 개인들이 회의체를 통해 공동체의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라는 대답이 이어서 나올 것이다. 군대나 경찰, 행정조직과 같은 권력조직에 대한 대의기구의 통제를 민주주의적 행정의 근간으로 이해하는 서구인들에게 (각급 의회를 항상 불신하고) 행정과 시민의 가까운 거리를 민주주의의 성과로 이해하는 한국모델을 이해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번 코로나 판데믹은 서구사회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한국은 그렇게 20세기와 21세기 초반의 역사를 겪으면서 서구와는 다른 방향으로, 혹은 초서구적 방향으로 발전한 민주주의 체제의 한 예일 뿐이다. 이번 판데믹은 단지 서구사회의 갱신이 지체되고 있다는 점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서구 현대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들과 서구인의 주체성 자체가 의심과 회의 앞에 놓이게 만들었다. 서구인들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은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권위적인 체제들만이 아니다. 지금 서구인들에게 일종의 ‘위로’를 주고 있는 한국식 연성 경찰국가 모델조차도 서구의 가치적 배경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진 모델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모두가 이 지점에서 잠시 멈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란 ‘유럽’이나 ‘한국’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구의 패권이 없어지면 뭐가 어떻단 말인가? 나는 종종 사석에서 한국으로 따지면 386, 미국이나 유럽으로 따지면 베이비부머 세대의 남자 지식인(그러니까 아재)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문명”, “패권”, “경쟁” 이런 단어라고 놀리듯 이야기하곤 하는데, 그건 보통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문명, 패권자, 혹은 경쟁자와 동일시하는 심리가 보여서 어처구니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성별, 다른 세대에게선 좀처럼 찾기 힘든 사고방식이다. 그런 문명사와의 동일시에 쏟을 에너지를 좀 더 아래에다 쏟는 것은 어떨까. 그 서구패권의 종식 이후 세계는 그래서, 누구를 위한 세계인가?&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민주주의는 그 말 그대로 demos의 것, 인민의 것이다. 유럽의 인민들은 이 정의에 다시 도달하기 위해서 “자율적이고 독립된, 면역/면책(immune)된 개인”이라는 유럽중심주의적 환상을 넘어 거기에 선행하는 전지구적 차원의 공동의 것(the common)을 재발견해야 할 과제 앞에 섰다면, 한국인들은 이에 더해 정부의 통치와 위임을 넘어서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 가야 할 민주주의적 성인됨이 무엇인지 정치적 실천 속에서 발견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다. 문명이 어떻고, 패권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지우고 나면 나, 그리고 지구 전체의 동료시민들이 겪는 다종 다양한 삶과 민주주의의 위기가 보인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농담을 설명해야 하는 사태는 희극인들에겐 가장 치욕스러운 일일 것이다. 다행히 나는 희극인이 아니라 글솜씨가 부족한 대학원생일 뿐이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몇 마디 해명의 말을 더 보태본다. 진지한 반론을 제기해 주신 한승동 주간과 지면을 제공해 주셨던 &amp;lt;피렌체의 식탁&amp;gt;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유럽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수 없는 것 [피렌체의 식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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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20-04-16T17:17:53+09:00</published>
		<updated>2020-04-16T17:31:56+09:00</updated>
		<author>
			<name>김강</name>
		</author>
		<summary type="text">이 글은 필자가 독일의 문화비평지 Merkur의 블로그에 기고한 글 &quot;Was Europa von Südkorea nicht lernen kann&quot;을 한국어로 수정, 번역하여 &lt;피렌체의 식탁&gt;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번 코로나 위기 국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이상하게 느꼈던 것은 남한이 서구사회의 상당한 주목과 칭찬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즈 같은 보수 경제지 뿐만 아니라 리버럴 미디어인 뉴욕 타임즈나 BBC, 좌파 신문인 디 타게스차이퉁(die ta...</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font size=&quot;3&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quot;&gt;이 글은 필자가 독일의 문화비평지 Merkur의 블로그에 기고한 글 &quot;Was Europa von Südkorea nicht lernen kann&quot;을 한국어로 수정, 번역하여 &amp;lt;피렌체의 식탁&amp;gt;에 기고한 글입니다. &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size=&quot;3&quot;&gt;&lt;br /&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size=&quot;3&quot;&gt;이번 코로나 위기 국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이상하게 느꼈던 것은 남한이 서구사회의 상당한 주목과 칭찬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lt;/font&gt;&lt;a href=&quot;https://www.ftimes.com/nations-employ-drastic-tactics-to-fight-microscopic-foe/article_a3c80a09-621a-57f0-abe9-92511b1b6812.html&quot; target=&quot;_blank&quot; style=&quot;font-size:16px;&quot; rel=&quot;nofollow&quot;&gt;파이낸셜 타임즈&lt;/a&gt;&lt;font size=&quot;3&quot;&gt; 같은 보수 경제지 뿐만 아니라 리버럴 미디어인&lt;/font&gt;&lt;a href=&quot;https://www.nytimes.com/2020/03/23/world/asia/coronavirus-south-korea-flatten-curve.html&quot; target=&quot;_blank&quot; style=&quot;font-size:16px;&quot; rel=&quot;nofollow&quot;&gt; 뉴욕 타임즈&lt;/a&gt;&lt;font size=&quot;3&quot;&gt;나 &lt;/font&gt;&lt;a href=&quot;https://www.bbc.com/news/world-asia-51836898&quot; target=&quot;_blank&quot; style=&quot;font-size:16px;&quot; rel=&quot;nofollow&quot;&gt;BBC&lt;/a&gt;&lt;font size=&quot;3&quot;&gt;, 좌파 신문인&lt;a href=&quot;https://taz.de/Kampf-gegen-Corona/!5672405&amp;amp;s=S%C3%BCdkorea/&quot; target=&quot;_blank&quot; rel=&quot;nofollow&quot;&gt; 디 타게스차이퉁(die taz)&lt;/a&gt; 등이 앞다투어 Covid-19 대규모 감염 사태를 다루는 소위 한국식 대책을 우리시대 위기대응의 교과서처럼 소개했고, 미국에서는 „왜 한국처럼 하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은 기자회견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외국어에 능통한 젊은 한국인들은 한껏 부풀어 오른 자존감으로 이런 기사들을 빠르게 번역하고, 또 소셜 미디어로 공유한다. 저녁 시간 메인 뉴스들은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이나 스웨덴 총리 스테판 뢰벤이 문재인 대통령과 위기 대응을 상담했다는 뉴스를 연일 내보냈고, 또 동시에 같은 방송에서 사람들은 유럽의 상황이 얼마나 지금 나빠지고 있는지를, 봉쇄에도 불구하고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이나, 이탈리아 소도시에 늘어서 있는 관들의 이미지와 함께 구경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성마르게 (가치 공동체 혹은 진보와 근대화의 상징 혹은 어떤 의미든 간에) “유럽은 죽었다”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런 한국인들의 국가적 자존감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다. 몇 달 전 독일에서 아시아인 커뮤니티들을 경악하게 만든 - 방호복을 입은 사람 이미지와 “made in china”라는 제목이 달린 - 슈피겔지의 표지를 봤을 때만 해도 나는 지금의 상황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아시아인들을 전염병의 숙주로서 타자화하는 것이 유럽 엘리트들의 (빌어먹을)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가 알았겠는가. 겨우 한달이 되지 않아 유럽인들이 격리중인 집의 발코니에서 여는 작은 콘서트들을 인스타그램으로 스트리밍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게 없는 상황이 올거라고 말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며칠 전에는 어떤 슈퍼마켓 지점에서 사재기를 하는 사람을 맞닥뜨렸다. 안타깝게도 직원들이 매몰차게 제지했기 때문에 그녀는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나를 놀래켰던 것은 그가 매우 젊은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대체 지금 유럽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매일 나는 (철학 전공자로서) 유럽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글들을 읽고 있다. 아감벤의 벌거벗은-생명의-비상사태, 지젝의 이것은-세계혁명의-찬스 만트라, 바디우의 아직은-공산주의가-아님,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출입금지-민주주의의-위기 기타 등등. 내가 거기서 발견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크건 작건 그들의 증상을 즐기고 있다는 점 뿐이었다.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국인들은 아직 들어갈 필요가 없는, 그 실재.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862/083/717c212318ac6e68de9470aa93297435.png&quot; alt=&quot;인종차별_슈피겔-표지.png&quot; /&gt;&lt;/div&gt;&lt;p&gt;&lt;br /&gt;&lt;/p&gt; &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그렇다. 한국식 시스템은 훌륭히 작동중이다. 많은 전문가들이나 언론인들이 분석하고 있는 것처럼 소위 한국식 해법은 다섯 개 정도의 중요한 요소로 이뤄져 있다. 1. 중앙화된 국민의료보험, 2. 정부의 선제적인 개입, 3. 빈번하고, 광범위하고, 확실한 검사, 4. 보편적인 이동제한 대신 감염자들의 동선추적과 선별적 격리, 5. 중단없는 정보공개와 투명한 감시가 그것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 요소들은 한국에서만 36명의 생명을 앗아간 2015년의 메르스 위기 이후 한국 정부는가 발전시켜온 기술적 대책과 협력적 구조를 배경으로 학 있다.. 이 해법들을 통해 하국인들은 지금까지 여전히 폭넓은 이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고, 감염율 역시 큰 폭으로 감소했다. 유럽에서의 출입금지령이나 접촉금지령, 중국에서 있었던 혹독한 제한명령 없이 말이다. 이것은 특히 서구의 많은 의료전문가들이나 정치인들로부터 (중국의 전체주의 모델과 비교되는) “민주적” 모델로 찬사를 받았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하지만 왜 서구 각국은 한국인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대처할 수 없는 것인가? 솔직히 나는 유럽 국가들은 한국적 대책의 핵심요소들을 애초에 도입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거기에 사용된 기술 중 다수는 “고무장갑이나 귀 청소용 솔” (뉴욕타임즈) 정도로 쉬운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뉴욕타임즈의 기자 막스 피셔와 최상훈은 한국식 방역정책이 다른 나라에 도입되는데에는 두 가지 허들이 있다고 말한다. 첫번째는 엄중한 대책을 도입하려는 정치권의 의지가 부족하다는 점, 두번째는 사회적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한에서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는 극도의 대립과 포퓰리즘적 백래쉬에 시달리고 있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보다 더 높다.”고 덧붙인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 두 논거는 불충분하고, 사실 헛소리에 불과하다. 과연 프랑스의 입출입 완전 통재의 강도와 한국의 확진자 GPS 추적의 ‘엄중함’을 비교할 수 있을까? 또한 한국에서도 사회적 신뢰의 상실이라든지 가짜뉴스를 비롯한 극우 백래쉬 현상은 뉴스의 단골 소재중 하나다. 아시아의 공동체 문화 같은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적인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남한의 “민주주의”를 중국의 “전체주의”와 비교하는 논거 역시 의심의 눈으로 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무엇이 “민주주의”인지 좀 다시 정의를 내려야 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사람들은 지금 남한에 대해서 “ 전면감시사회의 민주주의적 형태”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국식 방역정책의 민주주의적 외양은, 그리고 적어도 보기에는 매우 양식있게 보이는 한국 행정 및 시민들의 행동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 관해 무언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특히 서구적 근대의 생명정치적 통치성과 관련해서 말이다. 상세한 설명을 피하고 간략히 말하자면, 이 개념은 철학자 푸코가 소개한 것으로, ‘인구’ 혹은 ‘주민’(population)를 대상으로 한 근대의 통치 및 권력의 작동방식을 말한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 생명정치적 통치성은 오늘날 북반구의 세계 혹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결코 동일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 글에서 나는 “문명 간의 투쟁”이라던지 ‘문화상대주의’같은 도식을 반복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거시적 도식 대신에 남한의 생명정치적 상황의 몇 가지 미시적인 특징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남한은 분명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서구적 세계에 속한 국가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내가 독일에 이주한 것은 2011년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오직 한 번 한국을 다녀갔는데 그것은 독일살이 6년이 지났을 때였다. 이 때의 여행은 나에게 상당히 큰 인상을 남겼다. 처음으로 내가 살던 나라를 낯설게 느꼈기 때문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서울에 도착하자 마자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모든 곳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글자와 인포그래픽들이었다. 관에서 만든 것이건, 민간에서 만든 것이건 서울의 모든 곳이 글자로 채워져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을 할 때는 각종의 길안내 표지물들이 사람들을 출구 앞 100m 앞에서 부터 안내한다. 안내는 지하철을 타는 내내 이어진다. 화장실이 지하철 역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서울의 지하철 시스템은 친절하게 알려준다. “각종”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게 그저 이를테면 화장실 표지판 하나를 말하는 게 아니라 거기까지 이어지는 바닥의 길안내 표지선이나, 모든 출구에 붙어 있는 번호들, 그리고 시작 및 청각적 안내물 등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글자는 엄청나게 크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플랫폼에 선 승객들은 하이테크 스크린 도어에 의해 보호를 받는데, 그 위에는 적절한 에티켓이라든지, 현재 도착하는 열차의 구체적인 노선이라든지, 정부의 새로운 세금정책이라든지 하는 것들의 정보가 계속 지나간다. 물론, 나는 열화된 형식이긴 해도 베를린의 지하철에도 비슷한 게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아마 유럽의 여러 대도시들에서 지하철 역 정도가 이런 정보들을 가장 많이 제공해주는 공공공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서울의 거리는 광고나 정보제공을 위한 현수막으로 가득차 있다. 그 중 상당수는 이런 저런 국가 기관이나 관청이 걸어놓은 것들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베를린의 칼 맑스 대로의 나무들 사이에 현수막이 걸려 있고, 쉴 새 없이 우리에게 “소득 공제 신청기간을 잊지 마세요!”라던가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족 간에 사람을 나눠요.”라던가, “여기는 사고 다발 지역입니다. 조심하세요!”라던가 하는 내용을 상기시키는 장면을 말이다. (그곳 현수막이 걸려 있다면 그건 그저 월세 인상에 반대하는 세입자들의 현수막 뿐이다.) 한국의 공원들에서 사람들은 구석구석마다 공원에서 취해야 할 올바른 행동을 안내하는 크고 작은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거기엔 “선진국 시민으로 행동합시다.”와 비슷한 슬로건이 붙어있을 때도 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 여행에서 나는 서울 옆의 성남시에서 운전면허증을 갱신했다. 서류를 접수하고 15분만에 나는 새 면허증을 받고 집으로 운전을 해서 돌아갔다. 그날은 무려 ‘토요일’이었다. 국민건강보험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전화 한통 후에 나에게 보험수급자 자격을 다시 부여해 주었다. 내가 발급받은 면허증의 번역을 위해 필요한 서류는 다른 관청에서 발급받았는데, 예약을 할 필요도, 가서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민원업무는 보통 인터넷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쇠네베르크 구에서 독일 면허증을 신청했는데, 그걸 수령한 것은 12주가 지나서 (12시간도, 12일도 아님!)였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성남시의 관청 건물 벽면에도 많은 현수막들이 붙어 있었는데, 하나는 시에서 새로 도입한 사회정책에 대한 안내를 담고 있었고, 또 다른 것은 구에서 열리는 스포츠 행사의 일정을 소개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만난 모든 공무원들은 믿을 수 없게 친절해고, 항상 웃고 있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그들의 본성에서 나온 건 아니다. 남한에선 공무원들에게도 항상 민간 기업의 고객서비스 직원들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압력이 있다. “고객의 소리를 들어라!”는 한국 행정의 정언 명령이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독일에 오기 전에는 그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것이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물론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들이 한국과 유럽 사이의 절대적인 차이가 아니라 그저 조그마한 상대적인 차이들이긴 하지만, 이번 코로나 위기에서 이 차이들은 상당히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유럽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국에서 시민들과 국가 행정 사이의 거리는 지나치게 가깝다. (전통적 가족 모델에 대응해서 말하는 것에 대해 미리 용서를 구한다.) 한국의 생명정치적 돌봄과 통제는 ‘모성적’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중앙정부나 지자체는 주민들에게 매 시간마다, 때로는 매 분마다 SMS를 발송해서 현재 상황을 안내한다. 관청들은 페이스북 페이지에다가 확진자 한명이 이 구역에서 지나다닌 구체적인 경로를 올린다. 거기에는 교회, 카페, 레스토랑, 사무실 등의 이름과 주소가 들어가 있다. 방역 당국은 심지어 사용자의 동의 없이 스마트폰의 GPS 정보를 수집해서 감염자를 추적한다. 마치 십대 아들의 스마트폰이나 딸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지나치게 그들의 삶을 염려하는 걱정 많은 엄마처럼 말이다. (다시 한번 이 가족모델의 비유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공무원들은 자가 격리를 하고 있는 감염자들을 위해 하루에 두 번 방문을 두드리고, 생필품을 공급하는 등,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무엇보다 이 꼼꼼한 추적과 돌봄이야 말로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데 효과적인 영향을 끼쳤다. 유럽 각국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입출입 금지나 접촉 금지 같은 일단의 부권(父權)적 명령들을 내리고 있다. 지오르지오 아감벤 같은 이들은 거기서 ‘삶’(bios, 삶의 형태)이 ‘목숨’(zoe, 벌거벗은 생명)으로 축소되어 취급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반면에 한국식 대책은 이런 미시적인 통제와 모성적인 생명의 돌봄을 특징으로 한다. 21세기에 들어와서 한국과 독일에서 각각 긴 시간을 살면서 양국의 관료제를 다 경험해 본 입장에서 조심스레 말해 보자면, 남한의 행정이나 사회 문화적 환경 속에서 ‘표준 시민’은 ‘아동’이고, 반면에 유럽의 불친절하고 느린 행정에서는 ‘성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표현이 어떤 이들을 분격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앞서 말했든 나는 유럽 각국이 한국식 정책을 결코 수용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이 모델이 아무리 “민주적”이라는 이름으로 칭찬을 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한국 모델의 이 민주적 외양은 사실은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라 통치성의 모성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종종 (근대 남성부양자 핵가족 모델의) 가정에서도 엄마가 아빠보다 조금 더 민주적으로 느껴지듯 말이다. 사실 둘 모두 엄격한 의미의 민주주의와는 상관이 없다. 기껏해야 ‘엄마의 감시’ vs ‘아빠의 금지’ 정도? 과연 자기 스스로를 (사실 여부를 떠나) 성인이고,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비판적이라고 생각하는 유럽의 ‘표준시민’들이 이런 완전한 감시와 통제 정책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한국인들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공공 서비스와의 이 가까운 거리를 그들의 시민적 권리로 인식한다. 아마도 유럽인들은 국가의 통제로부터 최대한 벗어나는 걸 그들의 자유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미디어나 관청의 캠패인이나, 혹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동료 시민으로서 적절하게 행동하는 법을 서로 배우고 가르친다. 때로 그들은 정부가 발표한 정보를 보고 위기대응 정책을 따르지 않는 동료시민들을 직접 비난하기도 한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한국의 위기대응 속에서 우리는 21세기의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 비동시적인 권력양식들의 동시적 공존을 발견한다(물론 유럽중심주의적으로 보자면 그렇다). 18세기의 훈육권력, 19세기의 생명권력, 그리고 20세기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21세기 하이테크를 기반으로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오로지 한국적인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유럽과 북미 바깥의 많은 후발 산업 국가들에서 우리는 비슷한 경향을 찾을 수 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내전으로 산산히 부서진 나라였던 한국에게 서구적 근대는 도달해야 할 모델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은 급속한 발전이 필요했다. 약 300년 간 이어진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지름길을 위해 필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라 오직 ‘정답’이었다. 그들은 열심히 서구적 근대가 제공하는 정답을 공부했다. 남한의 중고등학생들은 늦은 저녁까지 학교에 머물고, 그 다음에는 학원에 간다. 거기서 그들은 5지 선다로 이뤄진 시험의 답안을 찾는데 몰두한다. 1987년의 민주화 이후에도 이런 교육시스템이나 학습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답을 공부하는 남한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은 수사학, 연설, 산문쓰기, 의심하기, 비판적인 의견, 자율적 정치적 실천 같은 것들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의 열성적 지지자들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로 이야기되는 것은 대통령직이나 몇가지 헌정적 이슈들이다. 그들은 종종 100만이 넘는 거대한 시위를 통해 현직 대통령들을 끌어내리고 그들의 주권과 시민적 용기를 자랑한 바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들의 상징적 아버지들을 즐겨 살해한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하지만 엄마-자식 관계는 이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더 가깝다.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더불어) 시민 에티켓 세계 챔피언이라 할 수 있는데, 심지어 전술한 대규모 시위 속에서도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올바른 시민의식을 결코 잃지 않을 정도다. 도시를 방화하는 블랙블록이나 아나키스트들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한국의 민주주의관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학교나 회사, 대학 들에서 이뤄져야 할 민주적인 일상생활이다. 또한 비판적이고 자율적인, 성숙한 개인들을 기초단위로 하는 의회주의 문화도 종종 과소평가 되는 요소중 하나다. 그 대신에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초-서구적인 문화와 태도, 기술같은 것들이다. 남한은 또한 인터넷 속도 세계 챔피언이기도 하다. 값비싼 비용이 들어가고, 수백년간의 계급투쟁에 의해 형성된 복지국가 모델 대신 한국과 같은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더 저비용 고효율의 돌봄 국가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앞서 말한바와 같이 한국 사회에서는 이 모성적인 거버넌스가 편재하고 있다. 코로나 위기 대응은 한국에서는 일상적 상태의 조금 더 과격한 연장일 뿐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은 “탈근대 경찰국가”가 조금 더 분명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폭력 비판을 위하여”(1929)에서 “안전을 이유로” 행사되는 경찰권력은 “문명화된 국가들의 삶에서 결코 파악불가능한, 모든 곳에 퍼져 있는 유령적인 현상형태와 같이 형상 없는” 권력이라 말한 바 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탈근대의 경찰국가는 여전히 미시주권권력의 모든 곳에 퍼져 있는 현상형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더이상 ‘유령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모성적’이다. 시민들은 기꺼이 그들의 어머니 국가의 감시, 통제 그리고 돌봄을 수용한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시민권’의 중요 요소다. 이것이 바로 한국적 대책이 가지고 있는 민주적 외양의 진짜 얼굴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한국 모델은 사실 21세기의 후발 혹은 초근대화 국가들에서 발전하여 이미 오래전 부터 “성인된 세계”(디트리히 본회퍼)였던 유럽의 체제과 새롭게 경쟁하는 여러 모델 중 하나일 뿐이다. 하필이면 이번 대규모의 판데믹에서 유럽은 시민들의 생명(zoe)을 지키는데 있어서 그들 시스템의 열등함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유럽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사람들이라, 이 비상사태와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도 발코니 콘서트나 하면서 통해 “삶-의-형태”(bios)를 지속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혹은, 이런 전체적이고 모성적인 경찰국가의 돌봄과 통제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성숙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은 이 격리 상태를 함께 즐기자. 그러고 나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로운, 민주적인 삶-의-형태가 무엇인지 토론을 시작해 보도록 하자.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표준시민’이란 세계 어디나 비슷하게 빌어먹을 틴에이져들이란 사실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스카이캐슬 조(파)국씨의 계급투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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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9-08-27T17:59:32+09:00</published>
		<updated>2021-07-19T09:53:55+09:00</updated>
		<author>
			<name>김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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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스카이캐슬의 조(파)국씨 가문이 해온 일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것은 “별다른 불법행위는 찾을 수 없는 민중에 대한 범죄행위”다. 법과 규칙의 논리를 넘어 ‘계급’을 이 파국 속에서 발견할 때에야 정부여당과 그 주변의 리버럴 엘리트들은 이 “범죄행위”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아주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이런 형태의 ‘파국’과 ‘분노’야 말로 리버럴 엘리트들이 가장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스카이캐슬의 조(파)국씨 가문이 해온 일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것은 “별다른 불법행위는 찾을 수 없는 민중에 대한 범죄행위”다. 법과 규칙의 논리를 넘어 ‘계급’을 이 파국 속에서 발견할 때에야 정부여당과 그 주변의 리버럴 엘리트들은 이 “범죄행위”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아주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lt;/span&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아니 사실은, 이런 형태의 ‘파국’과 ‘분노’야 말로 리버럴 엘리트들이 가장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었다. 조(파)국 가문이 부와 학력을 세습하는 동안 기회는 불평등했고, 과정은 불공정했고, 결과는 부정의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선 몇 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들이 있을 뿐 커다란 불법은 없었다. 이를 근거로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에 큰 하자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 이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조국 딸의 학력 및 계급 세습(법대교수와 의사, 스카이캐슬의 주인들이 아니던가.) 과정을 옹호하는 대학교수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이 페이스북에서 스스로 빤쓰를 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은 적지않이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아하! 선생님들이 바로 그렇게 자녀를 키워 오셨군요! 이렇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읽어본 글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특목고반 학원 강사를 하는 사람의 글이었는데, 그는 “사교육 쪽에 좀 있어본 사람의 입장에서 그 당시엔 다들 저 정도 자원을 투입했다.”고 썼다. “다들”이라니 세상에! 물론 그 학원을 찾은 사람들이야 당연히 모두가 그걸 하려고 찾아 왔겠지. 그들이 정말로 ‘다들’이 되어버리는 이 마법 속에서 우리는 리버럴 엘리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공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계급”의 문제다. 그러니까, 그들이 사는 세상.&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리버럴 엘리트들의 이 기만성은 남한 만의 현상은 아니다. 나는 이번 ‘스카이캐슬적 파국’ 속에서 2013년 독일 연방하원 선거(총선)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메르켈이 최장수 총리로 집권하는 십수년간 사민당은 대항마가 될만한 인물을 내지 못하고 매번 패배를 당했는데 그 선거도 그랬다. 사민당은 예나 지금이나 의료보험에서 공보험/사보험 2원 체계를 없애고 공보험으로 통합하는 공약을 내고 있는데, 당시 꽤나 회자된 한 양자 티비토론에서 사민당의 페어 슈타인브뤽 총리 후보가 자신도 사보험 가입자라는 것을 떨떠름하게 시인했던 것이다. 이 논란과, 기업을 다니며 받은 수천만원대 강연료 등 사민당 이름에 걸맞지 않은 개인의 기만성이 이슈가 되면서 사민당의 지지율은 전보다 더 줄어들었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기회와 과정과 결과의 공정을 논하는 건 평등한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서로 “존재적으로” 다른 계급들 사이에선 애초에 이 “공정”이라는 문제계 자체가 허위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아 지금 대입과 직업선택의 문제를 가지고 벌어지는 일은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엄밀히 말해 “계층”의 문제 아니냐고 할 것이다. 일견 맞는 이야기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계급”이라는 용어를 유지할 것인데, 그것은 계급과 계급 관계(Klassenverhältnis)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산수단 소유 유무, 그러니까 유산계급(자본가/지주)와 무산계급(혹은 노동계급)에 의해 객관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타 계급을 향한 “적대”를 통해 (주관적이라기보다는 “초객관적”으로)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갱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전통적으로는 둘다 노동계급이고 계층적으로 분류가 될 수 있겠지만, 시험을 봐서 입사한 정규직이 그렇지 않은 비정규직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그들의 불평등을 지속시키기를 주장할 때 이들은 계급관계 속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734/083/3a32ebf3454364c47d9b4812f4edea6d.JPG&quot; alt=&quot;151809682700_20180209.JPG&quot; width=&quot;700&quot; height=&quot;394&quot; /&gt;&lt;br /&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99,99,99);font-size:16px;&quot;&gt;&quot;아니거든요&quot;&lt;/span&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자본가/지주와 무산계급이라는 정치경제학적 계급이건, 엘리트와 대중이라는 문화사회학적 계급이건, 고학벌(력)과 저학벌(력)이라는 교육사회학적 계급이건, 남성과 여성이라는 가부장제하의 성별계급이건, 그것이 다른 모양이 아니라 계급 적대로 나타나는 곳에서 자유주의적인 ‘능력에 따른 공정’이 관철되어야 한다고 상상된 공간인 “기회, 과정, 결과”의 게임은 존재할 수 없다. 사실 리버럴들은 바로 이것을 기를 쓰고 감추려는 사람들이다.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서울대를 가고, 혹은 고시를 봐서 훌륭한 변호사가 된 사람. 그 사람들이 리버럴의 기만성을 가려주는 도구 역할을 해 준다. 그 사람의 자식은 외고를 가고 아버지 동료들의 도움으로 인턴십을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겠지만. 계급론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계급투쟁은 하위계급이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계급적으로 단결된 자본가가 노동계급을, 지주가 무산자를, 남성이 여성을(여혐!),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고학력이 저학력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다. 그래서 맑스와 엥겔스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우리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고, 얻을 것은 전 세계다.”라고 한 것이다. 자본가들은 너무나 잘 하는 그 단결이 프롤레타리아에겐 그토록 어려우니까!&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문제는 지금 남한에는 계급을, 그러니까 “결과의 평등”을 의제화할 수 있는 유의미한 ‘좌파’ 정치세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계급은, 현실에서 명료한 정치적 언어를 통해 이 적대를 폭로하고, 어떻게든 단결과 연대를 조직해서 “결과의 평등”을 얻어내야 하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기생충» 같은 영화를 보면서 냉소를 보내고 말 뿐인 문화적이고 미학적인 어떤 것(냄새!)이 되어 버렸다. 문재인 정부가 툭하면 입에 올리는 “촛불정신”은 단지 박씨, 최씨 집안의 ‘불법행위’만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재벌 가문들로 대표되는 “계급”에 대한 분노였지만 (그들은 서로의 부를 불려주면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죽게 놔 두었다!), 리버럴들은 전자만을 부각시키며, 후자를 의도적으로 촛불정신에서 탈각시켰다. 이제는 뭐 일본과의 외교대결이 촛불정신이라고 하면서 재벌에게 면죄부를 주고 온갖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고 있는 지경이다. 그렇게 상류계급이 하류계급을 향해 벌인 계급전쟁에 대한 촛분의 분노는 들리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누가 계급에 대한 냉소를 계급에 대한 분노로 다시 조직할 수 있을까. 그런 정치를 어느 정도라도 의회 안에서 실천할 수 있었던 마지막 정치세력은 아마도 민주노동당이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좋아진 여러 사회적 제도들은 대부분 민주노동당이 앞서서 던졌던 의제들에 빚을 지고 있다.) 이후 국회 안에는 계급 간에 벌어지는 삶의 차이를 정면으로 문제삼는 어떤 정치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웅동학원과 펀드까지 기부하겠다는 승부수까지 낼 만큼 절실함을 보여준 조국은 아마 법무부 장관으로 임용될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리버럴인 조국의 이념이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투사였던 조국의 이념을 아주 성공적으로 질식시켜 죽였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하지만 “성별 계급”의 문제를 바라보면, 우리는 아주 약간, 희망적인 풍경을 마주한다. 최근 몇년간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들은 (그 안의 배제적인 흐름이나 능력주의에 기초를 둔 소위 “야망론” 등을 제외한다면) 여전히 “결과의 평등”을 위한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평등이라는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면, 나는 그건 페미니즘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여전히 문제는 어떤 정치세력이 과연 페미니즘이 주장한 (남성과 여성 간의) “결과의 평등” 문제를 리버럴의 문제계(공정과 능력주의) 속으로 형해화되도록 놔두지 않으면서 다른 여러 계급 적대들과 연결시키며 평등의 정치를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결과의 평등”이 정치화 되지 않는다면 조국 가문에 대한 분노는 그저 “나도 공부 잘하(할 수 있)는데 혜택과 보상은 못누렸다고 느끼는” 다른 학벌-능력-특권층(및 그 워너비들)의 공정성 시비로 조금 불붙다가 끝나고 말 것이다. 리버럴의 기만성에 대한 실망으로 보수주의가 더 강고해지는 것은 덤일테고. 빤쓰를 내리는 저 대학교수들(왜 가만히 있지도 못하는가 그들은. 아 그것은 누구도 그들의 기득권을 해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만이 아니라 조국의 딸에 분노하고 있는 젊은 고학력 중산층들 역시 – “나도 누려야 하는데 너만 누리고 있는 특권”에 분노할 뿐 – 학벌과 직업에 따른 특권을 없애는 것에는 관심이 없거나 사실 적개심까지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내가 잘 된 건 내 능력, 쟤가 잘 된 건 쟤 부모의 능력이라고 생각할 뿐 대입, 입사, 공무원 시험, 각종 고시들로 얻는 계급적 특권 자체가 문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그렇다면 조국 반대시위를 한다는 서울대와 고대 학생들이 터뜨리는 저 분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의 저 기괴한 분노가 실제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조국의 딸일까? 아니다. 그들의 실제 목표, 그러니까 ‘무의식적 목표’는 바로 자신들이 분노를 선점해서 학벌사다리의 하류 계급들이 자신들 전체를 상대로 분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능력’의 문제일 뿐, ‘계급’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의 본능적인 판단이다. (고대와 서울대의 조국반대 시위에 우파 정치세력, 학생세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사회의 학벌 엘리트들은 바로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남한사회를 지배해왔다. 그리고 그들의 학벌계급을 지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능력에 따른 공정한 입시’라는 대중의 환상이다. 끝내야 할 것은 바로 저 대학서열,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특권 자체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계급투쟁이란 – 역시나 세간의 오해와는 다르게 – 어느 날 한날 한 시에 죽창을 들고 모여서 상류계급을 제거하는 혁명을 벌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끈질긴 사회적 의제화, 정치적 제도화의 싸움이다. 누군가는 이제 (혹은 다시금!) 4년제 종합대학의 같은 과라면 졸업장의 가치의 차이가 없는 세상, 직업으로 무엇을 택하든 임금격차와 안정성이 지금처럼 심하게 차이 나지 않은 세상, 세입자로 살아도 평생 이사다니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사실상의 형벌이 되지 않는 세상을, 그러니까 “결과의 평등” 의제들을 함께 묶어 끈질기게 밀고 나가야 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자.&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58,50,195);font-size:16px;&quot;&gt;*이 글은 대구경북지역 민중언론 &amp;lt;뉴스민&amp;gt;에 기고한 글입니다.&lt;/span&gt;&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서평] 민중이 사라진 시대, 민중신학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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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9-01-30T23:26:12+09:00</published>
		<updated>2019-01-31T06:15:07+09:00</updated>
		<author>
			<name>김강</name>
		</author>
		<summary type="text">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 이상철 외 공저, 분도출판사 펴냄, 2018년 작년 한 해 이런 저런 경로로 등단한 신인 소설가들 중 가장 큰 대중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의 장류진(張琉珍) 작가였다. 창비에서 온라인으로 그의 소설을 공개하자마자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들 상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난 그의 단편은 (웹상에서의 평가에 따르면) 하이퍼-리얼리즘 자본주의 비판 소설...</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p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614/083/c0c320ce24c39fe8bbc26863e1ee5178.jpg&quot; alt=&quot;30523_29196_418.jpg&quot; width=&quot;150&quot; height=&quot;221&quot; style=&quot;font-family:&#039;-webkit-standard&#039;;&quot; /&gt;&lt;br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strong&gt;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lt;/strong&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 이상철 외 공저, 분도출판사 펴냄, 2018년&lt;/p&gt; &lt;p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br /&gt;&lt;/p&gt; &lt;p&gt;작년 한 해 이런 저런 경로로 등단한 신인 소설가들 중 가장 큰 대중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는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의 장류진(張琉珍) 작가였다. 창비에서 온라인으로 그의 소설을 공개하자마자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들 상에서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난 그의 단편은 (웹상에서의 평가에 따르면) 하이퍼-리얼리즘 자본주의 비판 소설이라 할 수 있는데, 짧은 분량 안에서도 판교 테크노벨리의 IT기업 및 재벌 대기업의 사내문화와 직장갑질, 소셜네트워킹을 기반으로 한 시장거래의 작동방식과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직장인의 비참에 대해 코메디적 터치로 두텁게 묘사한 이 작품의 작가 본인이 테크노벨리의 한 회사의 직장인이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다.&lt;/p&gt;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나 역시 이 작품을 둘러싼 화제를 온라인상에서 접했는데, 이후 몇 달 동안 화두처럼 떠나가지 않는 질문이 생겨났다. 이 소설을 수용하는 여러 사람들, 그리고 나 역시 위의 문단을 작성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쓰지 않은 두 단어 때문이었다. ‘노동’ 그리고 ‘노동자’가 그것이다. 이 소설이 90년대에 발표된 소설이라면 어떤 카테고리로 수용이 되었을까? 장류진 작가는 무려 ‘현장 노동자’이고, 자신의 ‘노동현장’을 소설로 담아냈고, 이 소설의 가장 큰 주제는 ‘노동의 소외’라 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그렇다면 전형적인 ‘민중문학’ 작품이 아닌가? 하지만 놀랍게도, 혹은 하나도 놀랍지 않게도 2018년의 그 누구도 장류진 작가를 ‘노동작가’라거나 ‘민중문인’이라 부르지 않았다(아마 작가 스스로도 원치 않을 듯 싶다). 그렇다면 “이것은 왜 민중문학이 아니란 말인가?”&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 시대는 어떤 애도도 없이, 한 터럭의 놀람도 없이 찾아왔다. 시나브로 민중문학이 불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곧 세상의 비참과 사회적 고통을 이야기하는, 혹은 약자들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소설이 없어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라진 것은 그 고통의 소식들, 연대의 언어를 하나로 묶여주던 그 ‘말(言)’이다. 어느 시기엔 고통과 연대의 경험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게 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던 그 ‘말’은 이제는 오히려 그 경험들을 설명해줄 수 없는, 그 ‘말’을 꺼내면 사람들이 어색함과 민망함을 느끼고 마는 ‘말’이 되어 버렸다. 나이든 사람이 ‘민중’이란 말을 입에 올리면 고루한 옛날사람으로, 젊은 사람이 ‘민중’이란 말을 입에 올리면 과도한 자의식을 가진 중2병 환자로 보이는 시대가 된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것은 문학이나 언중의 언어생활에서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남한의 진보적 인문사회과학 및 공공담론은 물론 관(官)에서조차 (“민중의 지팡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민중’ 개념은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실상 완전히 퇴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문사회과학자들이 마지막으로 활발하게 ‘민중’ 개념과 의의, 그것의 존재양태에 대해 토론한 것은 2008년 촛불집회 때였다. 결론이 내려졌던 토론이 아니었지만, 그 이후 ‘민중’은 사회과학적 용어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했다. 동시에 ‘민중운동’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남한 사회의 좌파적 운동 혹은 각종 인권사회운동을 포괄하는 단어가 아니게 되었다. 오늘날 성소수자 운동, 페미니즘 운동 등이 약자들의 대중운동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지만 그 운동의 주체들은 이전시기와 같이 스스로를 ‘민중’이라는 큰 범위 안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더욱 ‘민중운동’으로서 이해되었던 노동, 철거민, 통일운동 역시 세대를 지나며 더 전문적이고 분화된 성격을 보이고 있다. 진보좌파 정당은 물론 의제를 아우르는 정치적 성격의 사회운동체들이 급격하게 몰락한 것 역시 ‘민중’의 사라짐과 때를 같이 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민중신학’은 한 때 그 담론이 가진 여러 신학-너머의 이론적 성찰에도 불구하고 세간에서 논의되는 수많은 민중에 대한 담론의 종교적 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신학계와 사회과학계 양 쪽에서 이론으로서의 고유성originality이 없는, 그저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위한 실천적 담론 정도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의 변화를 지나온 지금, 놀랍게도 민중신학은 ‘민중(民衆)’을 학술용어로 삼고 있는 유일한 이론/담론이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남한에서는 ‘민중신학’이 하는 이야기가 곧 “민중에 대한 인문사회과학적, 이론적 성찰”인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신학을 자신의 필드로 삼고 있는 일군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담론 지형 속에서 자신의 작업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을까? 그리고 여전히 ‘민중’이 유의미한 이론적/실천적 범주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을까?&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한국민중신학회와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공동 기획하고 분도출판사에서 출간한 《민중신학, 고통의 시대를 읽다》는 오늘날 민중신학자들이 가진 상황 인식과 이에 대응하는 입장들을 보여주는 반가운 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에 들어간 다수의 글들은 전술한 상황 속에서 생겨난 질문에 충분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시대 민중신학의 익숙한 담론들을 반복하거나, 그것에 새로운 주제 몇 가지(여성, 성소수자, 청년, 난민, 재개발 피해자, 촛불집회 등)를 추가하는 정도에서 멈추고 있다. 지난 시대 민중신학 내부의 두 담론, 즉 기독교 지향적 담론 —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고통 속에 놓인 약자들을 품을 것인가?(박지은, 홍정호), 그에 부합하는 기독교 영성과 성서해석은 무엇인가?(정경일, 이영미, 김희헌) — 과 사회비평신학 지향적 담론 — 사회적 고통의 주체들인 민중(김윤동, 박재형)과 사회운동의 여러 주제들(황용연, 최형묵)에 어떻게 신학의 언어로 참여할 것인가? — 은 이 책에서 서로 간의 논쟁적 대화 없이 평행선처럼 반복되고 있다. 상황은 지금 민중신학에 ‘민중’이라는 말 자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왜 여성, 성소수자, 철거민, 난민 이슈들, 통일과 경제민주화 이슈를 ‘여전히’, ‘민중’이라는 범주에서 다루어야 하느냐는 사회과학적/이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전자의 필자들은 이에 관심이 없고, 후자의 필자들은 이 질문에 답변하는 대신 ‘기존의 민중신학’을 자기참조하고 있는 것이다.&lt;span style=&quot;color:rgb(81,143,187);&quot;&gt; “이제 민중신학은 ‘누가 지금 쫓겨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를 통해 ‘지금 누가 민중인지’를 재발견하고, 그 […] 메시아적 사건을 증언하며 이에 참여하도록 소리쳐야 한다.”(박재형, 147쪽) “그들(청년세대)은 […] 세상의 모든 구조에서 오는 피해를 짊어진 무리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다시 호명할 것을 제안한다. […] 추방당하고 낙인찍힌 ‘한(恨)’ 서린 민중으로 말이다.”(김윤동, 68쪽)&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20세기 전반부에 디트리히 본회퍼는 서구 사회의 세속화 이후 이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성숙해진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의 삶-세계가 ‘값싼 은혜’라는 싸구려 종교로 전락한 것을 관찰하고, 신학이 대체 이 세계에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같은 형식의 고민이 오늘날 민중신학에도 필요하지는 않은가. 오늘날 민중신학 역시 어쩌면 (좋다 나쁘다를 떠나) ‘성숙해진’, 즉 민중이 사라진 시대에 한때 사회 한 켠에서 얼마간 대중화되었던 적 있는 ‘운동권 기독교’의 언어를, 20세기 독일 루터교의 값싼 은혜의 언어처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 고민의 작업은 철저히 사회비평/이론 학술장을 수신자로 둔 ‘이론적 실천’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그 반대항인) ‘실천적 이론’으로서 민중신학 담론이 이전 시대에서 만들어져 경화(硬化)된 통속적 운동권 신학의 언어를 벗어나지 못한 채 사실상 시효가 만료되었고, 다른 한편 각종의 정체성들이 부각되고 있는 시대에 현재의 사회비평/이론이 새로운 보편성의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 보편성의 언어가 ‘민중’이어야 하는지는 민중신학 연구자들 스스로 이론적 고투를 통해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읽혀져야 할 이유는 바로 이 사회이론적 고투에 나서며 민중신학의 다음 세대 담론을 형성하려 시도하는 몇 편의 글들 때문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신익상(“잔여/주체, 포스트휴먼과 마주하다”)은 오늘날의 ‘4차 산업혁명’ 등의 용어를 통해 진행 중인 전지구적 산업구조의 변화 속에서 민중신학의 의의를 새롭게 그려낸다. ‘인공지능’과 ‘연결’을 키워드로 하는 소위 4차 산업혁명은 근대적 자본-노동관계 속에서 형성된 인간 주체성의 변화를 암시 혹은 요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포스트휴먼 담론을 신익상은 기술을 통한 인간의 혁신을 말하는 포스트휴먼-이즘과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을 추구하는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나눠서 설명하고, 전자는 기술낙관주의에 머무르면서 자본주의가 낳는 소외와 차별을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고 비판하고, 후자 역시 연결과 확장을 통한 인간주의의 철폐에 대한 낙관적 전망에 비해 그 경로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한다. 양자 모두 남겨진 이(것)들, 즉 ‘잔여’의 문제에 대답을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익상은 민중신학의 “사건으로서의 민중” 개념을 통해, 포스트휴먼이라는 보편적 주체 형성의 이면에 놓인 ‘잔여’의 배제와 망각을 폭로하며 다른 보편성을 요구하는 주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상철(“논란의 중심, 민중 메시아” 및 프롤로그)과 이정희(“민중신학, ‘어디로?’: 그 원천을 질문하면서”)는 최근 유럽 정치철학에서 주목받았던 비판적 철학 내부의 신학적 담론들 —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조르지오 아감벤 등 — 을 민중신학의 맥락에서 살펴보고 있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철학자들의 담론과 동시대에 유사한 사유를 전개해 왔음에도, 민중신학이 갖는 민족주의적‧국지적‧반(反)엘리트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이들 정치철학자들의 논의와 민중신학 간의 비판적 대결은 그동안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다. 두 글(및 필자들의 최근 단행본들)은 이러한 대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일이지만, 유럽 철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민중신학을 재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거꾸로 민중신학의 사유가 서구 정치철학의 신학적 담론에 줄 수 있는 자극이 무엇인지, 이를 통해 유럽중심주의를 넘어선 보편성을 신학이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지를 설득할 수 있을 때에야 의미 있는 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정용택의 “왜 고통이 중요하며, 왜 고통이 문제인가?”는 이 책에서 사회과학/사회비평적 이론으로서 민중신학의 성격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그가 보기에 민중신학은 초창기부터 민중을 어떤 사회적 실체로 직접적으로 정의하는 담론이 아니라 ‘사회적 고통’의 사건을 통해서 민중을 발견하고 증언하려 한 탈재현적 비판담론이었다. 문제는 민중신학이 ‘민중의 사회적 전기(傳記)’를 방법론으로 하면서도, 그 전기가 자리 잡은 사회와 사회적 고통의 양태와 조건, 본질에 대한 이론적 탐구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는 점이다. 앞으로의 두터운 작업의 서론 격이 될 이 짧은 글에서 필자는 민중의 고통의 증언을 강조한 민중신학 1세대, (마르크스주의적인) 경제사회 구조 분석에 나섰던 2세대, 민주화 이후 비가시화된 민중의 사회적 고통에 주목한 3세대의 문제의식 — 민중신학의 세대적 흐름에 관해서는 김진호의 “에필로그: ‘운동의 신학’에서 ‘고통의 신학’으로: 포스트-‘1987년 체제’의 민중신학”을 참조 — 을 종합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 및 비판이론의 주요 흐름에서 발전되어 온 가치이론, 인정이론, 정신분석학의 토론에 참가하면서 ‘민중’이 유의미한 사회이론적 범주라는 점을 설득하고 있다.&lt;/div&gt;&lt;div&gt; &lt;/div&gt;&lt;div&gt;이 책은 오늘날 민중신학이 처한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표지의 판화나 뒷면의 문구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민중신학을 여전히 1980년대적 감성계 및 당시에 형성된 문제의식 안에 머무르게 하는 힘은 강력하다. 또한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진 연구자들의 경우 서로의 작업을 사실상 거의 참조하지 않고, 논박하지도 않으며 자기 작업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참조하는 민중신학은 오늘날 동료 연구자들의 민중신학이 아니라 1세대 민중신학일 뿐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전술하였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중신학의 담론’이 곧 ‘민중에 대한 담론’이 된 상황에서 민중신학은 이론화를 요구받고 있으며, 그에 응답하는 작업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관건은 이 작업들이 얼마나 두터운 생태계 속에서, 연관 학문분야와의 대화와 논쟁을 통해 발전해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quot;&gt;*이 글은 월간 &amp;lt;복음과 상황&amp;gt; 온라인 판에 실린 글입니다. &lt;/span&gt;&lt;/div&gt;</content>		<category term="민중"/><category term="민중신학"/>	</entry><entry>
		<title>목적지가 고작 청와대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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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6-11-15T18:29:11+09:00</published>
		<updated>2019-08-30T07:27:49+09:00</updated>
		<author>
			<name>김강</name>
		</author>
		<summary type="text">왜 좌파들이 지금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차벽을 넘어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 갈아치우는 게 가장 큰 목적인 것마냥. 자본주의의 지배를 끝장은 못내더라도 적어도 의문에 붙이자고 좌파하는 거지 민주당으로 대통령 갈아치우자고 지금까지 좌파했나. 대통령 갈아치우자고 100만명이 나왔는데, 거기 1/10 채우자고 우리가 좌파하는 건가. 이 판은 좌파의 판이 아니지 않은가. 퇴진도, 탄핵도, 하야도 좌파가 주도할 수 ...</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왜 좌파들이 지금 청와대로 가야 한다고, 차벽을 넘어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일까. 대통령 갈아치우는 게 가장 큰 목적인 것마냥. 자본주의의 지배를 끝장은 못내더라도 적어도 의문에 붙이자고 좌파하는 거지 민주당으로 대통령 갈아치우자고 지금까지 좌파했나. 대통령 갈아치우자고 100만명이 나왔는데, 거기 1/10 채우자고 우리가 좌파하는 건가. 이 판은 좌파의 판이 아니지 않은가. 퇴진도, 탄핵도, 하야도 좌파가 주도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amp;nbsp;&lt;/span&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하지만 지금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재벌들이 줄줄이 엮여 있는, 국민연금과 삼성이 걸려 있는 이 사건의 실체를 이미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은가. 지배자들의 민낯을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내가 가난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내가 이렇게 죽도록 야근을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왜 그렇게 자주 이사를 다녀야 하는지, 이사를 다닐 수록 집은 왜 작아만 지는지, 왜 공부를 하려는 내가 이렇게 알바만 살고 하고 있는지, 왜 빚만 가득한지, 왜 이렇게 부모님한테 죄송해 죽을 것 같았는지, 왜 이렇게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만 했었는지, 그게 다 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사람들이 보기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우리는 무엇 때문에 FTA와 싸우고, 반올림 투쟁을 하고, 밀양에서 싸우고, 부양의무제와 싸우고, 수많은 사업장에서 수많은 악덕 사장들과, 수많은 골목의 작은 가게들 앞에서 수많은 악덕 지주들과 용역깡패들과 싸웠던 것일까. 무엇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수도 없이 밟혀도 끊임없이 다시 고개를 들었던 것일까. 오늘 이 순간 때문이 아니었나. &quot;박근혜가 위기에 처한&quot; 오늘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가 저들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기 시작한 오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가. 우리가 싸우던 문제가 모든 이들의 문제와 다르지 않은 것임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시작한 오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닌가.&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quot;이 모든 문제가 자본주의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때문이다!&quot;같은 말을 주문처럼 반복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귀담아 듣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이 싸움이 박근혜 하나 몰아내자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계속 말해야 하지 않는가. 청와대로 가는 싸움에 앞장 서겠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이 싸움이 얼마나 넓은 싸움인지를, 하지만 이길 수 있는 싸움인지를 계속 말해야 할 책임이 좌파들에게 있지 않은가. 왜 청와대로 가자고만 하는가. 청와대로 가자고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이 때에 왜 우리도 청와대로 가자고 해야 하는가. 왜 싸움을 넓히려 하지 않는가.&amp;nbsp;&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left;&quot;&gt;&lt;span style=&quot;text-align:justify;font-size:16px;&quot;&gt;모든 곳에서 말하고 다녀야 할 때가 아닌가. 가난한 건 우리 잘못이 아니었다고. 행복하지 못했던 건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었다고. 재벌들 세금을 깎아주고, 복지를 포기했어도, 일자리도, 경제성장도,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도 늘어나지 않았다고. 그냥 저들이 다 가져갔을 뿐이라고. 광장에 백만이 모이는 이 때, 광장이 아닌 곳에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조직하고, 그 곳의 싸움을 백만의 싸움과 이어야 할 때가 아닌가. 왜 목적지가 고작 청와대인가.&lt;/span&gt;&lt;br /&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left;&quot;&gt;&lt;span style=&quot;text-align:justify;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left;&quot;&gt;&lt;div style=&quot;text-align:justify;&quot;&gt;&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910/081/b6d23974fe839aea89ff0ac3ab349624.png&quot; alt=&quot;b6d23974fe839aea89ff0ac3ab349624.png&quot; style=&quot;width:600px;height:167px;&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167&quot; /&gt;&lt;/div&gt;&lt;p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910/081/183acb8ad1dc251e9b4419c0ab90e970.jpg&quot; alt=&quot;44tr.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537&quot; /&gt; &lt;/p&gt; &lt;p&gt;&lt;br /&gt;&lt;/p&gt; &lt;br /&gt;&lt;p&gt;&lt;/p&gt; &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910/081/6d607b1cf30f4ad4fe7901cb43b944b7.png&quot; alt=&quot;스크린샷 2016-11-15 10.46.15.png&quot; style=&quot;width:598px;height:161px;&quot; width=&quot;598&quot; height=&quot;161&quot; /&gt;&amp;nbsp;&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justify;&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justify;&quot;&gt;&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910/081/11af7046349ddbb0851ced7da7df3dd0.png&quot; alt=&quot;스크린샷 2016-11-15 10.54.10.png&quot; style=&quot;width:600px;height:136px;&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136&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br /&gt;&lt;/div&gt;&lt;p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910/081/af6416ac33f72b2d9d4e1698251d00b8.png&quot; alt=&quot;스크린샷 2016-11-15 10.53.57.png&quot; style=&quot;width:600px;height:117px;&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117&quot; /&gt;&lt;/p&gt; &lt;p&gt;&lt;/p&gt; &lt;p&gt;&lt;br /&gt;&lt;/p&gt; &lt;/div&gt;&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책 안 읽는 남자들’ 담론과 내일의 극우정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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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6-11-10T17:05:54+09:00</published>
		<updated>2021-07-19T09:53:25+09:00</updated>
		<author>
			<name>김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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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출판 시장에서 2030 남성이 사라졌다지금은 아무도 관심이 없겠지만, 몇 주 전 문재인과 민주당은 꽤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이 위기를 촉발했다. &lt;빙하는 움직인다&gt;(창비),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회고록이다. 새누리당은 이 책을 근거로, 참여 정부가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앞서 북한에 의견을 구했고, 그에 따라 기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문재인을 정조준했다. 내게 ...</summary>
	<content type="html">&lt;h3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1.414em 0px .5em;font-weight:400;line-height:1.35;font-size:1.2em;font-family:&#039;Nanum Barun Gothic&#039;;color:rgb(51,51,51);&quot;&gt;&lt;strong&gt;출판 시장에서 2030 남성이 사라졌다&lt;/strong&gt;&lt;/h3&gt;&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지금은 아무도 관심이 없겠지만, 몇 주 전 문재인과 민주당은 꽤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이 위기를 촉발했다. &amp;lt;빙하는 움직인다&amp;gt;(창비),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의 회고록이다. 새누리당은 이 책을 근거로, 참여 정부가 유엔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앞서 북한에 의견을 구했고, 그에 따라 기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문재인을 정조준했다. 내게 이 논쟁 자체는 그다지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몇 주 지나서 전혀 생뚱맞은 맥락에서 이 책이 언급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세대 간, 성별 간 “독서의 양극화 경향”을 다룬 &lt;a href=&quot;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mp;amp;artid=201611011744501&amp;amp;code=116&quot; target=&quot;_blank&quot; style=&quot;color:rgb(0,136,190);text-decoration:none;&quot;&gt;&amp;lt;주간경향&amp;gt; 기사 “독서의 양극화 ‘문해격차’ 커진다”&lt;/a&gt;였다. 10월 내내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였던 이 책의 주요 소비자들이 누구였을까?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상주하는 ‘정덕(정치 덕후)’들이나 볼 것 같았던 이 책을 가장 많이 구매한 계층은 “20대 여성(22.3%)”이었다. 50대 남성 (13.3%), 3-40대 남성(각 11.7%)들은 20대 여성보다 꽤 큰 차이로 뒤를 이었다. 20대 남성은?&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이 기사에서 인용한 한 출판사 관계자의 말을 따르면 “출판 시장에 2030 남성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들은 “워낙 책을 읽지 않는다.” 이 현저한 비율 차가 &amp;lt;빙하는 움직인다&amp;gt;에만 한정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젊은 남성들의 저조한 독서량은 매우 새로운 경향이라고 한다. 2002년만 하더라도 20대 남성은 월평균 독서량이 20대 여성과 별 차이가 없을 만큼 가장 책을 많이 읽는 계층이었다. 그런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출판시장의 ‘없는 존재’로 불리고 있다. 물론 아무리 국내 최대 규모라 해도, 인터넷 서점 한 곳의 판매량 통계만으로 특정 세대, 특정 성별의 독서량 자체의 결론을 곧장 도출해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문화관광부에서 발행한 설문 통계 자료 &lt;a href=&quot;https://www.mcst.go.kr/web/s_data/research/researchView.jsp?pSeq=1590&quot; target=&quot;_blank&quot; style=&quot;color:rgb(0,136,190);text-decoration:none;&quot;&gt;&amp;lt;2015 국민 독서실태조사&amp;gt;&lt;/a&gt;에 따르면 (연령별 남녀 통계가 집계되진 않았지만) 전체 성인남녀의 독서량이나 권수는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초중고의 경우 남학생과 여학생 간의 독서율과 독서습관(및 독서 교육 참여)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보이지만, 이 차이가 성인기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을 중심으로 출판시장의 동향을 관찰하는 마케터들,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최근 들어 “책 읽는 젊은 여성, 책 안 읽는 젊은 남성”이라는 언급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지성’과 ‘젠더’를 둘러싼 담론의 내용과 형태가 변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SNS를 포함한 각종 매체, 대학생들의 조별과제 사례, 중고생 과외 교사들의 경험담, 학교 현장에서 독서활동을 지도하는 교사들의 기고문들, 인문사회분야 강의의 시험지를 채점하는 강사들의 푸념, 심지어 소개팅 경험담에 이르기까지 “젊은 남자(남학생)들이 무식하다/책을 읽지 않는다/고집이 세다, 여자들이 책을 읽는다/더 똑똑하다.”는 담론은 여러 형태로 변주되며 빈번하게 언급되곤 한다. 젊은 여성들의 소비가 출판의 트렌드를 결정하고 있다는 출판관계자들의 발언은 최근의 이런 담론 변화에 담긴 통념을 확인시킨다. 실제 남녀 간의 독서격차가 확인되지는 않는다 해도, 성차와 지성을 둘러싼 담론의 이동이 진행 중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이런 현상을 현재 한국사회의 어떤 변화를 유추할 수 있는 징후라 생각한다. 그 변화는 한편으로는 분명하게 진보적이고, 여성 해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상당히 위험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lt;a title=&quot;books&quot; href=&quot;http://ichungeoram.com/11537#&quot; style=&quot;color:rgb(0,136,190);text-decoration:none;&quot;&gt;&lt;img class=&quot;aligncenter&quot; title=&quot;books&quot; src=&quot;http://farm6.staticflickr.com/5628/30259362664_1e0e59221a_o.jpg&quot; alt=&quot;books&quot; width=&quot;783&quot; height=&quot;720&quot; scale=&quot;0&quot; style=&quot;border:0px;vertical-align:middle;height:auto;margin:15px auto;&quot; /&gt;&lt;/a&gt;&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최근 젊은 여성들의 상대적으로 높은 독서율과 넓은 주제의 폭, 특히 페미니즘 도서의 호황은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굳어진 불안정한 노동사회와 여성의 높은 교육수준이 결합한 현재의 한국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성에서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회구조는 생산과 재생산 영역 모두에서 여성의 경제 참여(맞벌이 혹은 독신 여성노동)를 요구하고 있지만 성과 성차, 성별을 둘러싼 담론은 여전히 이전 시대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독서와 공부는 새로 사회에 진입해서 살아가야 할 여성들에게 필수 요건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성공하기 위해, 차별적 사회를 극복하거나 최소한 생존하기 위해 젊은 여성들은 책을 들고, 언어를 익히고, 지금 세상을 읽고,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이것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젊은 층에서 여성의 투표율이 남성의 투표율을 따라잡은 지 꽤 되었고, 각종 정치적 운동에서도 주도층의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의 성비가 높아지고 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보여주었듯 현재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운동의 실험을 주도하는 주체도 여성들이다. “어린 여학생이 대단하네!” 같은 말들은 이제 촌스러운 것을 넘어 금기어처럼 받아들여진다. SNS 등에서 터져 나오는 “남자들이 ‘무식해서’ 말이 안 통한다, 답답하다”는 비명은 실제 남성들이 정말 아둔해지고 있는지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해도, 여성의 지적 수준과 지적 활동에 관한 동기부여 수준이 올라가면서 남녀의 지성에 대한 평가에서 격차의 보정, 혹은 역전이 이뤄지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이러한 경향은 여성의 해방과 가부장제의 철폐, 혹은 최소한 지금보다 더 평등한 사회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한편으론 그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독서 경향이든, 정치적 경향이든 여성만이 미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이 상황을 “여성은 미래를 향하고 있는데, 남성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아선 안 된다. 책 읽기를 소홀히 한다는 젊은 남성들 역시 자신들의 미래를 향하고 있다. 책을 읽는 젊은 여성에게서 진보의 가능성을 보는 것만큼이나 우리는 책을 읽지 않는 젊은 남성들에게서 미래의 무언가를 읽어내야 한다. 다음 시대는 이 둘이 빚어낸 어떤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미래는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국보다 먼저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와 교육 평등에 도달한 서구사회의 현재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얼마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서구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여성의 지위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 미래의 뒷면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lt;/p&gt; &lt;h3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1.414em 0px .5em;font-weight:400;line-height:1.35;font-size:1.2em;font-family:&#039;Nanum Barun Gothic&#039;;color:rgb(51,51,51);&quot;&gt;&lt;strong&gt;그들은 왜 브렉시트에 찬성하고, 트럼프를 뽑았나?&lt;/strong&gt;&lt;/h3&gt;&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사실 이 ‘뒷면’이 문제다. 이 뒷면은 결코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사소하지 않다. 아니,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은 우리가 이제 이 ‘뒷면’이 더 이상 ‘뒷면’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교육수준이 올라가고, 생산영역이 지식기반 경제로 재편되면서 20세기 내내 노동시장과 재생산(주로 가족)분야는 물론 한 사회의 정치적 구성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주도층이었던 계층의 지위가 이전보다 낮아진다. 남성-백인-노동계급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하락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현재 서구 각국에서 극우 정치의 핵심지지 세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포드주의 시대에 진보 혹은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상징세력이었던 이들이 어느새 극우세력의 텃밭이 되었다. 각국의 여론조사에서 “만일 백인 남성들만 투표한다면?”이라는 질문의 결과는 상당히 무시무시한데, 몇몇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의 국민전선(FN)은 집권이 가능하다. 독일의 독일대안당(AfD)을 비롯한 각국의 우익 포퓰리스트 당의 지지율 역시 매우 높게 나온다. 브렉시트(&lt;span class=&quot;s2&quot;&gt;Brexit)&lt;/span&gt;는? 우리는 투표함이 열리기 전에 이미 결과를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는 지도상의 모든 주를 빨갛게 물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서구의 ‘정치적 우익’들은 ‘유럽연합 대신 국민주권’, ‘외국인 혐오와 민족주의’ 같은 전통적인 우익의 구호만 외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더불어 이들의 정치 의제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바로 젠더 평등과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비판 혹은 혐오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독일의 젠더이론/정치철학 연구자인 에바 폰 레데커(Eva von Redecker)는 지난여름에 나온 198호에 독일 우익 정치와 그들의 사회적 담론 속의 ‘반젠더주의Anti-Genderismus’ 경향을 분석한 글 &lt;a href=&quot;https://www.radicalphilosophy.com/commentary/anti-genderismus-and-right%E2%80%91wing-hegemony&quot; target=&quot;_blank&quot; style=&quot;color:rgb(0,136,190);text-decoration:none;&quot;&gt;“반젠더주의와 우익헤게모니”&lt;/a&gt;를 기고했다. 젠더주의(Genderismus)라는 말은 좀 생소하게 들리는데, 이 단어는 페미니스트들이 내 건 말이 아니라 반젠더주의를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조어라고 한다. 이 말을 처음 쓰기 시작한 이들은 네오나치였다. 전통적인 미소지니(여성혐오/여성차별)나 보수주의와는 달리 이 반젠더주의 담론은 여성 일반이나, 혹은 자유롭고 강한 여성들 자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들이 공격하는 것은 소위 ‘젠더 이데올로기’나 ‘젠더 메인스트리밍’이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lt;em style=&quot;color:rgb(0,136,190);&quot;&gt;“(반젠더주의에서는) 엘리트 학자들이나 정책결정자들의 모호한 음모가 타겟이 된다. 이것은 심지어 반젠더주의가 페미니즘과도 공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페미니즘이 여성의 차이에 대한 존중, 모성에 대한 강한 강조, 그리고 무엇보다 서구와 그 이외 지역을 구분짓는 어떤 성취로 여겨지는 한에선 말이다. 하지만 이런 ‘페미니즘’은 결코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이나, 페미니즘 이론과 공명할 수 없다. 단지 반동적인 이들의 입장을 계속해서 자기-합리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von Redecker, 2016&lt;/em&gt;&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말하자면 이들이 공격하는 것은 남녀가 평등하다는 사실(그건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다)이나, 한국식의 ‘착한 페미니즘’이 아니다. 그건 괜찮다. 오늘날 서구에서 페미니즘을 비판하거나 종교적 신념 또는 자연의 순리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남녀 차별 자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극소수다. 대신 외래어인 ‘젠더’(독일어에서도 Gender는 보통 번역되지 않은 채 쓰인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논의나 입안된 온갖 종류의 ‘이상한 정책들’, ‘비성상적 담론들’이 이들의 표적이 된다. 이를테면 독일어에서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표현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논의나, 법적이거나 공식적인 문서에서 성별 중립적인 표현을 쓰는 것을 독일어라는 언어를 훼손하는 것(독일어는 문법과 단어 모두에서 영어보다 훨씬 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표현이 발달한 언어다. 그리고 통상 남성은 ‘인간일반’과 동치된다)으로 비난하거나, 젠더정치의 이름 아래서 동성혼과 동성부부의 아동 입양을 정체화하거나, 학교에서 실시하는 진보적인 성평등, 성지향 중립적인 교육을 집요하게 문제 삼는 식이다. “교육에서 이념을 추방하자” 지난 9월 베를린 주 선거에서 우익 독일대안당(AFD)이 내걸었던 구호였다. 여기서 이념은 주로 ‘젠더 이념’을 말한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흥미로운 점은 이 논의(반젠더주의)가 대부분 학문 영역에서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젠더주의자들의 상상 속에서 (나쁜) 페미니스트들이나 ‘젠더주의자’들은 일종의 음모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남녀평등’이 아니라 사회의 정상적인 (때로는 신이 부여한) 질서 자체를 파괴하고, 언어를 파괴하기 위해 각종의 젠더 이론을 들고 와서 사람들을 현혹하고, 정치권에 로비하는 사람들이다. 페미니스트들이나 퀴어 이론가들의 논의의 어떤 문구들은 과장되게 주목받아 (이들의 음모를 증명하는) ‘팩트’의 이름으로 돌아다니고, 상세한 사회적 맥락을 담은 논의들은 그냥 무시되거나 엘리트주의로 치부된다. 이들은 단지 인터넷 세계에서 댓글을 다는 것을 넘어서 젠더 연구 분야의 학자들이나, 관련 정책을 입안하는 정치인들에게 협박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한쪽으론 반지성주의가, 다른 쪽으론 과잉지성주의(이를테면 자신들의 ’팩트’에 대한 사랑)가 이 반젠더주의 논의의 성격을 보여준다.&lt;a title=&quot;hate&quot; href=&quot;http://ichungeoram.com/11537#&quot; style=&quot;color:rgb(0,136,190);text-decoration:none;&quot;&gt;&lt;br /&gt;&lt;/a&gt;&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이런 우스꽝스러운 주장이나 때로 폭력적인 행위에 직접 가담하는 사람들 자체는 적지만, 문제는 이런 주장이 현실 정치세력들과 연결되어 더 크게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반젠더주의는 기본적으로 공포와 방어 메커니즘에서 나온 담론으로서 다양한 형태의 외국인 혐오와 같은 논리적, 물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외국인을 혐오하는 그 사람들이 사회의 ‘젠더 메인스트리밍’이나 ‘젠더화(genderization, 역시 신조어)’에도 반대한다. 백인 남성들은 밖으로 외국인들을 쫓아내고, 안에서 ‘젠더주의자’들의 음모와 맞서 싸워 줄 우익정당에 표를 던지거나, 이 정치활동에 참여한다. 반젠더주의자들이 다 남성인 것은 아니지만(퀴어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보수적인 이성애자 여성들도 있다) 이런 담론의 주류 생산자들은 백인 남성들이고, 주로 호응하는 부류 역시 비엘리트 백인 남성 계층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형태의 여성/소수자 혐오와 이민자 혐오는 오늘날 우익 정치 안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하고 서로를 키우고 있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lt;a title=&quot;hate&quot; href=&quot;http://ichungeoram.com/11537#&quot; style=&quot;color:rgb(0,136,190);text-decoration:none;&quot;&gt;&lt;img class=&quot;aligncenter&quot; title=&quot;hate&quot; src=&quot;http://farm6.staticflickr.com/5788/30590148370_2df4cab307_c.jpg&quot; alt=&quot;hate&quot; width=&quot;800&quot; height=&quot;473&quot; scale=&quot;0&quot; style=&quot;border:0px;vertical-align:middle;height:auto;margin:15px auto;&quot; /&gt;&lt;/a&gt;&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다른 한편에서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은 최근 페미니즘 담론의 위기를 관찰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난민들이 쇄도하는 곳곳에서 ‘문화적 차이’가 문제로 떠오르고, 무엇보다 지난 새해 첫날 각 대도시에서 난민/이민자들 일부가 주도해서 벌인 대규모의 성추행 사건 이후, 페미니즘과 외국인 혐오 담론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부르카를 둘러싼 논쟁 등에서 이 모호함은 계속 증폭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남성들이나 보수진영, 혹은 페미니즘 일각에서도 ‘페미니즘’을 ‘이슬람 가부장주의’에 반대되는 ‘서구적 가치’로 내세우는 데 기인한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엘자 쾨스터(Elsa Koester)는 지난 8월 부르카와 부르키니(수영복, 얼굴을 가리는 복장이 아니다) 논쟁이 격화되고 있을 때 지에 기고한 칼럼 &lt;a href=&quot;https://www.neues-deutschland.de/artikel/1023103.beim-burkastreit-geht-es-nicht-um-frauen.html&quot; target=&quot;_blank&quot; style=&quot;color:rgb(0,136,190);text-decoration:none;&quot;&gt;“부르카 논쟁을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lt;/a&gt;에서 부르카와 페미니즘 담론 속에 있는 남성들의 담론들을 구분할 것을 지적했다. 그때는 마침 프랑스의 해변가에서 남성 경찰들이 한 무슬림 여성의 부르키니를 강제로 벗기는 사진이 논란이 되었을 때였다. 쾨스터는 부르카를 둘러싼 논의가 여성 해방을 위한 논의가 아니라 서로 다른 남성 가부장주의자들 사이의 영역 다툼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서구사회에서도 여성들은 언제나 남성의 시선 아래에서 옷차림과 외모에 신경 쓰고 살아가야만 한다. 다만 ‘정숙함’에서 ‘자유로움’으로 몸 가치의 척도가 조금 이동했을 뿐이다. 남성들이 여성들의 몸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통제하는 권력관계 자체는 절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부르카는 서구 남성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시선 권력에 대한 완전한 거부다. 부르카를 둘러싼 논쟁에서 우리는 자기 문화권의 여성을 통제하려는 이슬람 가부장주의와 자신들의 시선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페미니즘과 서구적 가치의 이름으로 부르카를 비난하고, 무슬림을 욕하는 백인 남성들의 가부장제 사이의 다툼을 본다. 여기에 무슬림과 백인 등 모든 여성의 해방을 위한 진지한 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lt;/p&gt; &lt;h3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1.414em 0px .5em;font-weight:400;line-height:1.35;font-size:1.2em;font-family:&#039;Nanum Barun Gothic&#039;;color:rgb(51,51,51);&quot;&gt;&lt;strong&gt;‘고삐 풀린 혐오’가 우리의 미래인가?&lt;/strong&gt;&lt;/h3&gt;&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현재 서구 사회의 어떤 경향은 미래의 한국사회를 그려보는데도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착한’ 페미니즘과 ‘과격한’, ‘나쁜’ 페미니즘을 구분하고, 사실상 아주 낮은 수준의 양성평등 논의가 아닌 이상 페미니즘적 주장 일반을 후자와 동일시하며 각종 행동에 나서는 남성들을 특히 지난여름부터 지금까지 지겹도록 보고 있다. 그들은 반론하고 토론한다. 하지만 사실 토론하지 않는다. “메갈은 반사회적 집단이다” 같은 말을 무한 반복하며, 여성가족부의 음모를 파헤치고, 메갈/워마드를 몰래, 혹은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을 징치하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선다. 최근 페미니즘이 주도하고 있는 젊은 세대 내부의 사회 담론에서 나오는 “남자들은 말이 안 통한다”나 “무식하다”라는 말에 극도의 분노와 ‘차별감’을 표시하지만, 말이 되는 논의를 내놓는 대신 자신들만의 ‘팩트’를 내세운다. 나름대로 이런 이들의 분노와 차별감을 대변해주는 지식을 생산하는 일군의 논자들(나무위키로부터 박XX까지)이 이들의 ‘근거’ 역할을 한다. 여성혐오가 ‘위에서 아래로’의 형태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의 형태로, 지배적 담론에 저항하는 ‘대항담론’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서구사회에서 비엘리트 백인 남성 계층에게서 새로운 형태로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외국인 혐오와 여성/소수자 혐오의 결합, 그리고 우익 정치의 확장은 한편으로는 여성해방이 이룬 성과의 ‘뒷면’이기도 하다. 그것을 단지 더 나은 진보적 사회로 향하는 길목에서 겪는 진통이라 하기에는, 그런 식의 역사발전론을 믿기에는 최근의 백래쉬(backlash)는 굉장히 격렬하다. 이것이 단지 경제적으로 위기에 몰린 비엘리트 백인 남성들의 방어적 정치 행위일까? 혹은 그저 무식한 사람들이 벌이는 교양 없는 비행(非行)일까? 사태를 이렇게 보는 것은 그렇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성들은 수천 년 동안 남성들보다 교육수준이 낮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존재는 아니었다. 남성들도 저학력이 곧장 이들의 정치적 위험성의 모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낳은 경제적 박탈감으로 우익 이념을 모두 해명하는 것도 어떤 것들을 묻지 않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어떤 것 중에는 분명 성차의 문제가 있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서구사회든, 한국사회든 가부장제가 끝나지 않은 이상, 여전히 사회주도계층은 남성 이성애자들이다. 경제의 형태가 바뀌고, 여성들의 경제활동과 지성의 수준이 올라가게 되면서 남성 계층에서 먼저 권위를 상실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말빨이 딸리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가부장제 아래에서 이들은 여전히 지배적 성의 일원이다. 더이상 여성들보다 똑똑하거나 잘난 것이 불가능해지거나, 여성이라는 성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던 각종의 ‘미소지니’적 행위들이 ‘여혐’의 이름을 얻고 비난받아 더 이상 효용이 없어진다 해도 남성들은 지배적 성으로서의 자신들의 지위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아예 잘나 보이기를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적어도 담론 상에서) 여성해방이 진전된 사회 주류에서 못난 것으로 취급받는 이념과 실천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잘난 여자들’, 그리고 이들이 옹호하는 자유주의, 세계주의, 여성주의적 가치나 정책들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확인하려 한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최근 독일의 와 가진 인터뷰 &lt;a href=&quot;http://www.zeit.de/kultur/2016-10/judith-butler-donald-trump-populism-interview&quot; target=&quot;_blank&quot; style=&quot;color:rgb(0,136,190);text-decoration:none;&quot;&gt;“트럼프는 고삐풀린 분노를 풀어놓고 있다”&lt;/a&gt;에서 트럼프 현상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lt;em style=&quot;color:rgb(0,136,190);&quot;&gt;“트럼프가 풀어놓고 있는 것, 그것은 고삐 풀린 혐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최근 보고 있듯 타인의 동의에 신경 쓰지 않는 성적 행동이기도 하죠. 우리가 언제 부터 여자들에게 그들을 만져도 되는지 어떤지를 물어봤냐, 혹은 왜 그래야 하냐? 트럼프가 실제로 이렇게 말하진 않지만, 이런 질문이 정확히 그가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행동은 사람들을, 그들의 분노를, 그리고 그들의 혐오를 풀어놓습니다. 이 사람들은 부자일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고, 중산층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들은 자기들이 억압받고 있거나 검열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파들이나 페미니스트들, 민권과 평등을 위한 운동에 의해서, 그리고 흑인이 국가를 대표하는 것을 허락한 오바마 정부에 의해서요.”&lt;/em&gt;&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반젠더리즘같은 이상한 대항담론이나 트럼프나 그 지지자들의 혐오 발언들은 이런 점에서 잘난 것들을 겨냥한 열패감의 분출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아래에서 자신을 위협한다고 믿는, 그리고 주류 엘리트들이 자신들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은 존재들, 즉 외국인들과 성소수자들을 향해 원한감정(ressentiment)을 투사한다. 투표 분석 결과를 보면서 여성들도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반 투표층과 적극 지지층, 혹은 한 정치 세력의 담론을 주로 주조하는 세력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lt;a title=&quot;trumb&quot; href=&quot;http://ichungeoram.com/11537#&quot; style=&quot;color:rgb(0,136,190);text-decoration:none;&quot;&gt;&lt;img class=&quot;aligncenter&quot; title=&quot;trumb&quot; src=&quot;http://farm6.staticflickr.com/5536/30775136842_6bc13728e8_o.jpg&quot; alt=&quot;trumb&quot; width=&quot;594&quot; height=&quot;720&quot; scale=&quot;0&quot; style=&quot;border:0px;vertical-align:middle;height:auto;margin:15px auto;&quot; /&gt;&lt;/a&gt;&lt;/p&gt; &lt;h3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1.414em 0px .5em;font-weight:400;line-height:1.35;font-size:1.2em;font-family:&#039;Nanum Barun Gothic&#039;;color:rgb(51,51,51);&quot;&gt;&lt;strong&gt;공통의 독서와 담론의 세계가 필요하다&lt;/strong&gt;&lt;/h3&gt;&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대학진학률은 높지만, 정치참여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에서는 우익정치의 주요 행위 그룹으로 ‘대졸 미만 남성 노동계급’을 꼽는 식으로 우익정치를 논하는 서구의 방식이 그다지 유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도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고소득의 백인 남성들을 아우르고 있다. 하지만 대학 졸업장 소지 여부를 떠나서 남녀 간에 사회적, 정치적 교양 수준에서의 격차가 담론장에서 유의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지성을 둘러싼 담론으로부터 이런 식의 미래적 형태(?)의 남성 우익정치가 대두할 가능성이 낮지는 않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시사인의 표제를 빌려 말하자면, 한국의 ‘분노한 남자들‘이 분출하는 사회적인 ‘열패감’이 아직 정치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 뜬금없이 진보정당인 정의당에서 (반 메갈리아의 형태를 띄고있긴 하지만 사실은) 반페미니즘을 주장하는 남성들이 결집했던 것은 한편으론 (일각의 주장처럼) 여혐이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진보적인 담론세계에서 먼저 여성주의가 주류 담론이 되면서 내부의 남성 일각이 이런 방식의 공격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지금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가긴 했지만, 페미니즘이 ’책 읽는 여성‘들과 함께 주류 담론장에서 자리를 잡아가면 갈수록 이 문제가 보수 진보를 가르는 주요한 의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어떤 남성들은 정치에서도 기꺼이 ‘진보’를 이탈하고, 새로운 우익적 남성 동맹을 맺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히 보수적이고 성차별적인 한국사회에서 이들을 정치적으로 동력화할 만한 주장을 내놓는 엘리트들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주민이 늘어나고 외국인과 이민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면 민주화나 경제성장을 둘러싼 이전 시대의 진보-보수와는 다른 전선이 앞으로의 정치적 갈등을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남성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이야기는 그런 점에서 결코 쉽게 넘기거나, 그냥 놀림감으로 삼거나, 혹은 거기서 단지 여성해방의 희망을 볼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사회를 위험하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성이 책을 읽지 않으면 사회를 위험하게 만든다. 남성이 여전히 가부장사회의 지배적 성이기 때문이고, 그 지배를 결코 그냥 포기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젊은 세대의 남성들이 정말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으로 책을 적게 읽고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해도 공통의 독서와 담론 세계에서 이탈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도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다. 책을 읽는 것은 단지 지식을 쌓는 행위가 아니다. 진공 상태에서 책을 골라서 읽는 고독한 독서가는 없다. 우리는 책을 둘러싼 각종의 사회적 배치 속에서 책을 고르고, 읽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독서는 그런 점에서 곧 사회적 소통행위다. 정치적 주체를 빚어내는 데 있어 독서가 사회경제적 요소들보다 더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책을 읽고, 읽히고, 대화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교양에서 핵심 요소다. 독서로부터의 이탈을 막아야 한다.&lt;/p&gt; &lt;p class=&quot;p2&quot; style=&quot;margin-bottom:1.3em;color:rgb(51,51,51);font-family:&#039;Nanum Gothic&#039;, Arial, Helvetica, sans-serif;font-size:15px;&quot;&gt;*이 글은 &amp;lt;청어람 매거진&amp;gt;에 기고한 글입니다. &lt;/p&gt;</content>			</entry><entry>
		<title>정치는 신학을 떨쳐낼 수 있을까 - 마크 릴라, «사산된 신» 서평 (2009)</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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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6-02-27T19:27:38+09:00</published>
		<updated>2016-02-27T19:43:10+09:00</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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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김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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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이 서평은 2009년 «온라인 당비의 생각»에 실었던 글이다. 아래에 쓴 &quot;문명하셨습니다.&quot;와 연결되는 관점을, 특히 &#039;정치와 종교&#039; 문제와 관련하여 짧은 서평 안에 정리해 둔 글이라 몇 년 지난 글이긴 하지만 약간의 코멘트를 추가하여 «파벨라»에도 담아둔다. 1648년 10월 24일. 베스트팔렌의 오스나브뤼크에서 역사적인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벌어진 ‘신교 유럽’과 ‘구교 유럽’의 피비린내 나는 30...</summary>
	<content type="html">&lt;p&gt;&lt;strong&gt;&lt;/strong&gt;&lt;/p&gt; &lt;p&gt;이 서평은 2009년 &lt;a href=&quot;http://dangbi.tistory.com/15&quot; target=&quot;_blank&quot;&gt;«온라인 당비의 생각»&lt;/a&gt;에 실었던 글이다. 아래에 쓴 &quot;문명하셨습니다.&quot;와 연결되는 관점을, 특히 &#039;정치와 종교&#039; 문제와 관련하여 짧은 서평 안에 정리해 둔 글이라 몇 년 지난 글이긴 하지만 약간의 코멘트를 추가하여 «파벨라»에도 담아둔다. &lt;/p&gt; &lt;p&gt;&lt;br /&gt;&lt;/p&gt; &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733/080/20e6b72a77a6e2a7e379005e3d654b30.jpg&quot; alt=&quot;▶ 텍스트 비평:『사산된 신』 마크 릴라 지음, 마리 오 옮김, 바다출판사, 2009.&quot; width=&quot;240&quot; height=&quot;369&quot; margin=&quot;3&quot; style=&quot;width:240px;height:369px;float:left;&quot; /&gt;&lt;p&gt;1648년 10월 24일. 베스트팔렌의 오스나브뤼크에서 역사적인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벌어진 ‘신교 유럽’과 ‘구교 유럽’의 피비린내 나는 30여 년의 전쟁을 끝맺는 것이기도 했지만, ‘교회의 정치에 대한 지배’라는 중세 유럽의 기나긴 신학-정치적 전통과 이별하는 것이기도 했다. 유럽의 각국은 이제 황제와 교황의 이중의 지배권으로부터 벗어나 국민국가 내부의 주권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으며, 정치는 종교로부터 분리되어 세속적이며 국제적인 새로운 질서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알다시피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근대 세계 질서의 시작이었다. &lt;/p&gt; &lt;p&gt;&lt;br /&gt;&lt;strong&gt;신학- 정치적 질서의 악몽이 되돌아오다 &lt;/strong&gt;&lt;/p&gt; &lt;p&gt;그로부터 약 353년이 지난 어느 날, 가야 할 곳에 도착하지 못한 비행기 두 대가 뉴욕의 한 빌딩에 충돌하며 새로운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그 후 수년 간 세계는 다시금 신학적 용어가 정치와 종교 담론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한쪽은 명시적으로, 다른 한쪽은 은유적으로 &#039;성전(聖戰)&#039;을 외치며 시작된 이 전쟁은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이단과 이교도를 향한 중세의 전쟁에 가까운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매일 성경 구절을 하나씩 묵상하며 그날의 &#039;군사 작전&#039;에 대한 지침을 내렸다는 럼스펠드에게서 우리는 1000년 전 십자군전쟁에 참전한 한 유럽 영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lt;/p&gt; &lt;p&gt;이미 350여 년 전에 떨쳐버렸다고 생각했던 이 신학-정치적 질서의 악몽이 되돌아오는 것을 서구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마크 릴라의 『사산된 신』은 이러한 신(新)신학-정치적 질서 앞에 선 서구 지식인의 진지한 -그러나 매우 우울한- 답변이라 할 만하다. 릴라는 ‘자유주의적이며 민주적인 서구’ 대 ‘종교적이며 덜 진보한 이슬람’이라는 상투적인 렌즈로 오늘날의 세계 질서를 바라보는 통상적인 사유와 결별한다. 근대 유럽의 정치적 사유를 엄밀하게 검토한 끝에 그는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결코 정치신학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그런 일 -신학적 개념들이 사람들의 정신을 자극해 사회를 파멸시키는 ‘메시야주의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인간은 종교와 정치 문제를 구분하는 법을 배웠으며 광신주의는 사라졌다고 믿었다. &lt;strong&gt;오판을 한 것이다&lt;/strong&gt;.&quot;(강조와 괄호 안은 필자)&lt;/p&gt; &lt;p&gt;릴라에 따르면, 정치신학의 뿌리는 깊고도 깊다. 사실은, ‘정치철학’이야말로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것이다. 정치 문제를 우주의 궁극적 존재자인 신에 대한 사유와 연결시키는 것은 사실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습관이다. 적어도 기독교 정치신학의 역사 만해도 정치철학의 탄생 이전 16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정치철학의 나이는 아직 400살 밖에 되지 않았다!) 릴라는 따라서 오늘날 정치신학의 흥기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치철학이 탄생하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유럽이 종교 전쟁의 포화에 휩싸여 있고, 지식인들이 그 끔찍한 메시야적 열정 앞에서 환멸을 느끼고 있던 그 시점으로.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홉스와 로크가 있다. &lt;/p&gt; &lt;p&gt;홉스는 종교적 열정이 정치에 미치는 파괴력에 대해 그 이전과 이후의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에 종교적인 열정은 인간이 타인과 세계에 대하여 갖는 공포심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신앙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안전판을 제공해주지만, 이번에는 신이 또 하나의 공포 요인이 된다. 어떻게 해야 신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신구교의 성직자들은 제각각 이것에 대한 대답을 제시했고, 이 종교적 다양성이 종교적 분쟁의 원인이 된다. 홉스의 해결책은 간단하면서도 무시무시했다. 인간이 털어낼 수 없는 공포를 오직 한 사람 -인간 군주- 에게 집중함으로써 모든 신학-정치적 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lt;/p&gt; &lt;p&gt;하지만 하나의 종교적 믿음은 단지 군주에 대한 공포만으로는 결코 쉽게 다른 것으로 전환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로크 등 홉스의 ‘자유주의적’ 후예들은 좀 더 세심하게 종교적 열정을 관리하는 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의 키는 ‘관용’에 있었다. 국가가 종교를 제어하기를 포기하고 단지 그 종교가 공적인 장에 위협적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관리하기만 한다면, 종교적 열정은 ‘일요일의 사적 예배&#039;에서 충분한 자유를 누리며 정치를 위협하지 않은 채 존속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lt;/p&gt; &lt;p&gt;&lt;strong&gt;종교와 정치는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lt;/strong&gt;&lt;/p&gt; &lt;p&gt;그러나 종교와 정치는 결코 이들의 바람처럼 깔끔하게 분리되지 못하였다. 릴라는 자유주의의 탄생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정치신학적 사유의 흔적을 대륙의 근대 사상가들에서 찾고 있다. 루소, 칸트, 헤겔로 이어지는 철학적 전통은 홉스와 그 후예들보다 훨씬 더 심원한 언어로 인간의 종교와 그것의 역할에 대해 사유했다. 그들에 의해, 기독교는 더 이상 메시야적 구원 종교가 아님에도 세속의 정치와 오히려 깊이 밀착한 사회 운영의 원리로 제시될 수 있었다. 19세기의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들에게서 더 나아가 기독교가 도덕적 발달과 사회적 화합에 기여하려면 국가가 기독교를 적극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기독교는 더 이상 성서적 계시 종교가 아니라 ‘문화 개신교’였다. “신약성서의 예수는 화평이 아닌 칼을 가져왔다. 자유주의 예수는 책과 음악을 가져왔다.&quot;(235)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를 ‘독일 정신’과 동일시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의 신학은 20세기 초, 1차세계대전이라는 대재앙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기독교 독일&#039;은 전 유럽에 처참한 폐허만을 남기고 끝났던 것이다. &lt;/p&gt; &lt;p&gt;릴라는 이 압도적인 페허가 낳은 ‘구원에 대한 갈증&#039; 속에서 온갖 종류의 종교적 열정이 다시금 서구 정치 사유 속으로 깊이 침입해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그 출발점은 오히려 종교가 정치로부터 재분리되는 데에 있었다. 바르트 등의 소위 ‘위기 신학자&#039;들은 정치(독일)와 구분된 신성한 계시와 성서의 구원 약속을 복원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릴라는 그들이 홉스가 가졌던 민감한 인식 -종교적 열정이 정치적 주제와 연결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을 가지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즉, 그들이 인본주의적인 종교를 비판하고, 신과 인간의 무한한 차이와 신으로부터 오는 구원과 임박한 종말을 강조할 때 “(그들의) 용어들은 정치적 수사에도 인용되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문명의 붕괴는 ‘충격&#039;이었고, 러시아혁명은 ‘격변&#039;이었다. …좌익에서 우익에 이르는 모든 이념주의자들은 오직 자신들의 당만이 노동계급 또는 독일 국민을 ‘구원&#039;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quot; 종교적 열정은 이제 하나의 &#039;역사철학&#039;의 옷을 입고 다시금 정치 속으로 깊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lt;/p&gt; &lt;p&gt;결국 기나긴 논의를 거쳐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신학적 사유에 깊이 오염되어 있는 서구 정치사상의 모습이다. 릴라는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와 정교 분리로 특징지어지는 서구의 정치사상이 결코 안정적인 토대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종교적-신학적 열정(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적이지만은 않은)은 언제든지 정치 질서의 위기 속에서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업적인 종교적 관용과 정교분리가 단지 지나간 유산만이 아니라 진행 중인 실험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잘 관리해나가야 파국적인 위기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lt;/p&gt; &lt;p&gt;그러나 과연 릴라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길을 제대로 찾은 것일까? 어쩌면 그야말로 현재의 신학-정치적 질서를 하나의 ‘위기&#039;로 인식하고, 정교분리를 통해 정치가 안정적이며 원만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구원&#039;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의 결론은 결국 이 ‘원만한 정치 제도&#039;를 향하고 있다.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여전히 정치신학을 정치의 자원으로 삼은 타 문명권에 강요하지 말아야 하며, ‘다른 문명&#039;은 그들의 전통 안에서 그것을 위한 신학적 자원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망이야말로 인류 평화라는 &#039;구원&#039;을 갈망하는 하나의 (신 없는) 종교적 심성의 발로인 것은 아닐까. &lt;span style=&quot;color:rgb(0,117,200);&quot;&gt;[2016년 추가: 다른 한편, 오늘날 자유주의 자체가 하나의 성스러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이다. 서구 미디어에선 &#039;서구적 가치&#039;라는 표현이 그 어느 때보다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이 &#039;가치&#039;는 곧 다른 외래적이고 미개한 &#039;가치&#039;들에 대립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quot;평등과 자유의 동일성 공식&quot;이라 할 수 있는 해방(Emanzipation)은 실천적으로는 &#039;해방된 서구&#039;와 &#039;아직 해방되지 못한 비서구&#039;라는 비동등성, 혹은 불평등의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일종의 &#039;형식&#039; 혹은 &#039;역사&#039;였던 자유주의가 &#039;내용&#039;이자 &#039;종교&#039;가 된 것이다.] &lt;/span&gt;&lt;/p&gt; &lt;p&gt;나는 릴라야말로 서구 근대의 종점에서 길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정치와 종교가 그토록 분리되기 어렵다는 것을 훌륭하게 서술해 놓고(이 책은 신학교의 현대신학 과목 교과서로도 매우 훌륭한 책이다) “그러니 우리 서구의 유산인 정교 분리를 더 잘해야 한다&quot; 정도의 결론밖에 내리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쉽다. 오늘날 명백하게 정치가 신학화되어가고, 신학이 정치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과연 이상적인 근대로의 회귀가 가능할 수 있을까? 어쩌면 (릴라를 포함하여) 우리는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신학적 상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럴 때야말로 우리는 좀 더 솔직하게 신학적 자원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길을 찾게 되지는 않을까.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다시 읽어야 할 책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이 아니라 그와 같은 시대에 매우 과감하게도 자유로운 종교적 상상을 민주주의의 무기로 삼을 수 있다고 보았던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일지도 모른다. &lt;br /&gt;&lt;/p&gt;</content>		<category term="정교분리"/><category term="자유주의"/><category term="종교전쟁"/><category term="문명"/><category term="미개"/><category term="스피노자"/><category term="근대"/>	</entry><entry>
		<title>&quot;문명하셨습니다.&quot;</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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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6-01-06T22:40:01+09:00</published>
		<updated>2016-01-31T18:40:29+09:00</updated>
		<author>
			<name>김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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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지금까지 어떤 문명이 미개함을 몰아내자는 캠페인으로 건설된 바 있을까. 있다. 오직 식민지들에서만 그것이 가능했다. 그것을 건설이라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미개를 타파하고 문명을 갈망하는 목소리들에 (문명인 다운) 주체적인 자의식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문명 캠페인은 두 개의 타자화 형식, 즉 1. &quot;미개&quot;라는 타자를 설정하고 공격하는 것, 2. 스스로 &quot;외국&quot;이라는 대타자(오직 구미의 선진국들만이 이...</summary>
	<content type="html">&lt;p style=&quot;text-align:center;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quot;&gt;&lt;span style=&quot;font-family: Arial, Helvetica,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1.4; text-align: justify;&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475/080/7f0bdf9fbc267e6ee588137ed3245df1.jpg&quot; alt=&quot;호후홍.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600&quot; /&gt;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family: Arial, Helvetica, sans-serif; font-size: 14px; line-height: 1.4;&quot;&gt;지금까지 어떤 문명이 미개함을 몰아내자는 캠페인으로 건설된 바 있을까. 있다. 오직 식민지들에서만 그것이 가능했다. 그것을 건설이라 부를 수 있다면. 오늘날 미개를 타파하고 문명을 갈망하는 목소리들에 (문명인 다운) 주체적인 자의식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문명 캠페인은 두 개의 타자화 형식, 즉 1. &quot;미개&quot;라는 타자를 설정하고 공격하는 것, 2. 스스로 &quot;외국&quot;이라는 대타자(오직 구미의 선진국들만이 이 &quot;외국&quot;이 될 수 있다)의 대상이 되는 것 속에서 이뤄진다. 그 속에서 문명을 갈망할 수록 주체는 더욱 더 식민상태에 빠지는 역설이 발생한다.&amp;nbsp;&lt;/span&gt;&lt;br /&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quot;&gt;&lt;br /&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1.4;font-family:Helvetica;&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이러한 형식은 좌우, 연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건 발견되기 때문에 특별히 고를 것 없이 어젯밤에 트위터에서 발견한 한 문장을 인용해 보자. SBS스페셜이 충격적으로 미개한 다큐, &amp;lt;엄마의 전쟁&amp;gt;을 방송한 뒤 나온 말이다.&amp;nbsp;&lt;/span&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quot;&gt;&lt;br /&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1.4;font-family:Helvetica;&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quot;@Dxxxxxxk&amp;nbsp; 1월 4일&lt;/span&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1.4;font-family:Helvetica;&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다큐멘터리 하는 외국친구들이 한국 다큐멘터리는 왜 드라마틱하냐고 물은 적있다. 음악이 너무 많고 제작진의도로 쓴 자막이 많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에 입각한 진실을 전달하면 된다.감정은 관객의 몫이다.&amp;nbsp;&lt;/span&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quot;&gt;&lt;br /&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1.4;font-family:Helvetica;&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Dxxxxxxk 1월 4일 @Dxxxxxxk 외국 다큐멘터리를 보라. 최대한 현장음을 살리고 음악도 나레이션도 최소화한다.그것은 제작진의 해석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다.감정적인 나레이션의 도배,인터뷰에도 넣는 음악,제작진이 멋대로 해석한 자막,이건 다큐가 아닌 의도된 영상일뿐이다.&quot;&lt;/span&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quot;&gt;&lt;br /&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1.4;font-family:Helvetica;&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미개한 내용은 물론, 미개한 형식에도 지친 반도의 다큐 시청자는 다큐의 이데아, 다큐의 문명을 찾으러 &quot;외국&quot;을 향한다. &quot;외국&quot;을 말하지 않고 무언가를 비판할 수 있는 길이 반도에는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amp;nbsp;&lt;/span&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quot;&gt;&lt;br /&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quot;&gt;&lt;br /&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1.4;font-family:Helvetica;&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lt;/span&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1.4;font-family:Helvetica;&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눈을 조금 돌려 보면, 이러한 &#039;문명화&#039;는 서구에서는 &#039;원주민&#039;이 &#039;이민자&#039;들을 향해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보수 정당인 독일 바이에른 기사당은 최근 난민들에게 독일의 기본법이 이슬람 율법 샤리아보다 상위에 있다는 것, 독일(유럽)의 기본적 가치들을 인정한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난민신청자의 지위를 주자는 정책을 제안한 바 있다. 애초에 난민(이민자) 전체에 미개의 혐의를 씌우고, 문명 앞에서의 주체성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다. 물론 동성혼 반대라던지, 부부간에도 형법상 강간죄를 적용하려는 법에 반대표를 던졌던 것 등을 포함해서 바이에른 기사당의 여러 정책이 얼마나 &#039;문명&#039;적인지 감히 반도인인 내가 판단할 수는 없을 테다. 저명한 68세대 페미니스트 운동가인 알리스 슈바르처는 그의 잡지 EMMA를 통해 이주민 무슬림(남성)들을 끊임없이 비판하는데, 그 내용이란 정작 이슬람 교도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쓰고 다니는 게 &quot;이슬람주의 십자군의 깃발&quot;, &quot;21세기의 파시즘&quot;을 보여준다는 식이다. 히잡을 쓴 여성이 이슬람주의의 피해자가 아니라 페미니스트일 수 있다거나, 최소한 자기 주체적인 여성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히잡을 벗지 않고서는 무슬림 여성이 문명인이 될 방법이 없다.&lt;/span&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quot;&gt;&lt;br /&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1.4;font-family:Helvetica;&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흥미롭게도 이들 &#039;원주민&#039; 혹은 &#039;문명인&#039;들 사이의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에 관한 한 바이에른 기사당과 알리스 슈바처 사이는 동이 서에서 먼 것 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 동성혼이나 고용평등, 낙태 등의 이슈에서 이들은 전형적인 대립 관계에 속할 것이다. 백인-기독교-계몽주의-페미니즘-자본가-노동자…사이의 수많은 균열과 대립의 선들은 이들 모두가 &#039;문명&#039;이라는 대타자의 목소리에 복종할 때 깨끗하게 사라진다. 이 균열과 대립을 통해 탄생한 주체(&quot;문명인&quot;)의 역사는 오간 데 없고 미개를 향한 타자화만 남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서구 문명 자체의 위기이기도 하다. 더 이상의 부친살해(프로이트)도 없고, 모든 가치를 전복시키는 어린아이(니체)도 태어나지 않는 문명. 그야말로 &quot;&lt;/span&gt;&lt;a href=&quot;https://namu.wiki/w/%EB%AC%B8%EB%AA%85%ED%95%98%EC%85%A8%EC%8A%B5%EB%8B%88%EB%8B%A4&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문명하셨습니다&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quot;&amp;nbsp;&lt;/span&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quot;&gt;&lt;br /&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normal;font-family:Helvetica;&quot;&gt;&lt;br /&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1.4;font-family:Helvetica;&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lt;/span&gt;&lt;/p&gt; &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 &lt;/span&gt;&lt;p style=&quot;margin:0px;font-size:18px;line-height:1.4;font-family:Helvetica;&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font-family:Arial, Helvetica, sans-serif;&quot;&gt;반도의 &quot;문명화 캠페인&quot;은 문명을 사랑하고 미개를 멀리하는 이들의 소망처럼 반도인들이 문명인이 되는 결론을 낳을 수 있을까. 아이즈IZE의 신년 캠패인에서 내건 100개의 목록이건, 혹은 트위터같은 곳에서 &#039;미개&#039;와 &#039;문명&#039;이라는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이런 저런 행위건, 그 미개와 문명의 &#039;내용&#039;은 결코 문명화 캠패인의 성공에 대해 말해주지 못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내용이 아니라 (수행적인) 형식이다. 사실 이런 캠페인의 진짜 내용은 그 형식에서 나온다. 그리고 문명과 미개라는 형식 속에서 발생하는 균열 혹은 적대는, 문명을 낳기엔 위험하고, 무력하다.&lt;/span&gt;&lt;/p&gt;</content>			</entry><entry>
		<title>[번역] 좌파 버전의 무의미한 그렉싯 담론에 반대함_토마스 자이버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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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5-07-12T23:00:15+09:00</published>
		<updated>2015-07-12T23:04:52+09:00</updated>
		<author>
			<name>김강</name>
		</author>
		<summary type="text">역주 | 그리스 치프라스 수상과 차카탈로스 재무장관이 국민투표에서 채권단 안이 부결된 뒤에 이와 비슷한 긴축안을 재출함으로써 각국 좌파들 내부에서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칼럼은 독일 좌파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리자 정부의 신 협상안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그리스 정부의 신 협상안은 정치적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독일 정부가 이끄는 현재 유럽질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무엇...</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span style=&quot;color:rgb(99,99,99);&quot;&gt;역주 | 그리스 치프라스 수상과 차카탈로스 재무장관이 국민투표에서 채권단 안이 부결된 뒤에 이와 비슷한 긴축안을 재출함으로써 각국 좌파들 내부에서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칼럼은 독일 좌파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리자 정부의 신 협상안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그리스 정부의 신 협상안은 정치적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독일 정부가 이끄는 현재 유럽질서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무엇보다 정치적 행위자로서 좌파진영의 무능이야말로 이 사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이다. 유럽 및 그리스 좌파의 다음 스텝은 일각의 그렉싯 주창자들이 아니라 일보 후퇴 이후 다시금 투쟁을 조직하는 데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 원글 주소: &lt;/span&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http://www.neues-deutschland.de/m/artikel/977586.gegen-das-linke-grexit-gerede.html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905/058/db17eaac564511170ba740c47c3f9890.jpeg&quot; alt=&quot;114106.jpeg&quot; width=&quot;490&quot; height=&quot;326&quot; style=&quot;line-height: 2;&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65,65,65);font-family:Georgia, Palatino, Times, &#039;Times New Roman&#039;, serif;font-style:italic;line-height:30px;background-color:rgb(251,251,251);&quot;&gt;AFP/ARIS MESSINIS&lt;/span&gt;&lt;/div&gt;&lt;span style=&quot;font-size:13px;&quot;&gt; &lt;/span&gt;&lt;br /&gt;&lt;/div&gt;&lt;div&gt;이제 공식적으로 떠오른 그렉싯Grexit(주/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은 우선은 쇼이블레의 프로젝트다. 그렉싯은 자본 내부의 특정 파당에 의한 정치적 프로젝트지만, 그것을 자본주의의 자체의 프로젝트라 볼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 전체는 더 큰 활동공간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긴축을 완화하거나 없애는 방향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부채모라토리엄이나 일부 탕감 역시 자본주의 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쇼이블레의 파당이 계속 승승장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독일에서 70%를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무엇보다 독일내 좌파의 문제다. (또한 더 넓게는 유럽 핵심부 좌파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 내부에서 쇼이블레 쪽이 아니라 다른 파당이 승기를 잡는데에 내기를 건 것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주/프랑스 정부나 미국의 케인즈주의 경제학자 등 지배구조 안에서 메르켈-쇼이블레 정부와 각을 새우고 있는 쪽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우리가 앞으로 수 시간, 혹은 수일 내에 볼 수 있는 가능한 옵션 중 하나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61%의 그리스인들은 50%가 넘는 유권자들이 참여한 국민투표에서 긴축협상안 반대에 투표했다. 이것은 분명하게 쇼이블레의 요구에 대한 반대투표였다. 하지만 이것을 그렉싯에 대한 찬성투표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반대표가 보여주는 그리스인들의 의지는 쇼이블레의 요구에 대한 반대 만이 아니라 유로존에 잔류하려는 의지 역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반대표를 던진 사람들의 투표를 좌파적인 것이라 볼 수 있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좌파가 주류가 된 사회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반대표를 던진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그들의 굴욕과 빈곤화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존엄을 주장한 것이지 지배계급의 종결이나 그에 따른 결말에까지 투표를 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상상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주의 로망에 불과하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좌파들이 그렉싯을 추진한다면, 그들은 반대표를 던진 유권자들 중 소수의 지지만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반대 유권자들의 뜻을 경향적으로 거스르는 것이며, 그리고 찬성표를 던진 유권자들과는 분명하게 적대하는 것이며, 또한 기권한 유권자들 대다수와도 대립하는 선택이 될 것이다. 논의의 여지 없이 그렉식은 적어도 당분간 (약 몇년이 될 것이다.) 그리스 경제를 빠른 속도로 망가뜨릴 것이다. 유로에 대한 접근권을 가졌거나, 빠져나가는 사람들이나 혜택을 보게 될 것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때문에 좌파적인 그렉싯은 약 절반 정도에 달할 그리스인들의 저항을 뚫고 나가야만 할 것이다. 이들의 저항은 분명 매우 전투적인 형태로 분출할 것이고, 그리스 바깥의 세력들은 모든 가능한한 형태로 이들을 지원할 것이다. 그렉싯을 찬서하는 좌파들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들 것이다. &lt;/div&gt;&lt;div&gt; &lt;/div&gt;&lt;div&gt;그렉싯을 수행한 좌파의 그리스는 결국 21세기에 20세기 사회주의 프로젝트에 후신 프로젝트를 하나 추가한 정도로 그칠 공산이 크다. 권위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빈곤상태의 행정이 이뤄지고, 그 지지자들은 이데올로기적 배당금 (“사회주의 그리스로 전진 전진! 미래는 빚나고 있다!”)이나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될 수록, 이에 만족하는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 것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20세기의 모든 경험이 가르치고 있는 것은 급진적인 해방을 위한 싸움은 언제나 가능한한 최악의 조건 속에서 이뤄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 결국 알려지게 된 구 현실사회주의 사회들의 정치적, 도덕적 황폐화는 오늘의 우리가 품을 수 있는 어떠한 환상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지점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 속에서 우리가 처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좌파적 그렉식을 포기하는 것이 현 시리자 정부에 뜻하는 바는 결국 분명하게도 쇼이블레의 요구들을 수용하면서 부채 문제를 강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배반”이 아니다. 단지 쇼이블레 파당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현재의 지배관계를 다시금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70%의 독일인들, 유럽 중심부의 사람들, 구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의 주민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물론 시리자 정부의 출발시점이나 국민투표일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 그것이 부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해도 - 패배다. 시리자만의 패배가 아니라 모든 좌파의 패배이며, 또한 시리자 프로젝트를 다른 유럽을 위한 싸움으로 가져가려 했던 모든 사람들의 패배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하지만 이러한 패배가 결코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이 패배야 말로 현재 시작되어야 할 투쟁들의 서막이 되어야 한다. 이 싸움들은 결코 “단순한”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이 투쟁이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투쟁이 벌어져야 하며, 또한 내부적 갈등들이 동반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투쟁은 (현재로선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지만) 시리자 정권의 행위가 가장 중심에 놓인 그런 싸움은 아닐 것이다. 결국 2015년 1월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야 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리스인들의 저항이 거두었던 성과, 그리고 확신할 수 있는 것들 - 광장(들)의 민주주의로부터 일상의 정치화, 그리고 정당을 투쟁의 수단으로 입양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 은 시리자 정부의 정치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연대하면서) 시리자 정부와 거리를 두거나, 시리자 정부와 대립하면서도 계속될 수 있다. 이 공간에서야 많은 것들이 가능할 수 있다, 아직 시험해 보지 않았고, 밟아보지 못한, 발명되어야 할 아래로부터의 21세기 사회주의 말이다. 모든 다른 곳에서 그랬듯 이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가진 급진적이고, 그래서 아직은 소수파적인 형식들 속에서 그 다음의 반란이 현실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반란을 좌파적 그렉싯 프로젝트나, 필연적으로 권위적 수밖에 없는 네오-현실사회주의 빈곤체제를 이끌고 나가는 것과 혼동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이들 그렉싯의 투사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가능성의 틀 안에서만 움직이려 하며, 그래서 다른 이들을 해방과 행복으로 이끌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차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아직은 시리자에 보냈던 연대와 지지 - 물론 그것은 너무나 약했고, 그래서 근본적으로 지금의 위기를 낳은 요인이 된 것이지만 - 를 철회할 이유는 없다. 그 반대다. 그리스의 새출발에 연대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아는 것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우리야 말로 성공한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을 고려한다면 (독일과 유럽의 핵심부에서) 시리자의 배반을 논하며 다투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만함이며, 우스꽝스럽고 역겨운 행동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trong&gt;&lt;span style=&quot;color:rgb(99,99,99);&quot;&gt;토마스 자이버트 |&lt;/span&gt;&lt;/strong&gt;&lt;span style=&quot;color:rgb(99,99,99);&quot;&gt; 철학자. 독일의 급진좌파 운동네트워크인 Interventionistische Linke (개입행동좌파)의 회원이며, 신그람시주의적인 “모자이크 좌파”전략 (통일된 좌파정당이 아니라 각 부문의 좌파 행위자들이 유기적으로 행동하며 사회전체의 해방을 추구하는 전략)의 이론가 중 하나다. &lt;/span&gt;&lt;/div&gt;&lt;div&gt;&lt;font color=&quot;#636363&quot;&gt;번역 | 김강기명&lt;/font&gt;&lt;/div&gt;</content>		<category term="그렉싯"/><category term="치프라스"/><category term="시리자"/><category term="쇼이블레"/><category term="유럽연합"/><category term="유로존"/><category term="경제위기"/>	</entry><entry>
		<title>독일 급진좌파운동 약사(略史)</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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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15-05-20T22:45:01+09:00</published>
		<updated>2015-06-03T02:09:04+09:00</updated>
		<author>
			<name>김강</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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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mmary type="text">68 운동의 학생 지도자 루디 두취케 6, 70년대의 독일 급진좌파의 역사는 우리에게도 비교적 익숙하다. 50년대의 보수적인 “총리 민주주의”의 시기를 거쳐 대연정 및 사회민주주의의 황금기에 접어든 독일(서독)에서도 반전운동과 반권위주의로 특징지워지는 68혁명의 기운이 불어왔다. 이 시기의 서독의 의회정치는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 그리고 소수파 자유당 단 3당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교회(가톨릭과 독일개신...</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455/001/f102cd2c25cd4e9973efdc8afc2af5a8.jpeg&quot; alt=&quot;49d3fc_414e448a3a554d1487d8b1ed3e01f4db.jpg_srb_p_486_324_75_22_0.50_1.20_0.00_jpg_srb.jpeg&quot; width=&quot;486&quot; height=&quot;323&quot; style=&quot;line-height: 2;&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68 운동의 학생 지도자 루디 두취케&lt;/div&gt; &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r /&gt;&lt;/div&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6, 70년대의 독일 급진좌파의 역사는 우리에게도 비교적 익숙하다. 50년대의 보수적인 “총리 민주주의”의 시기를 거쳐 대연정 및 사회민주주의의 황금기에 접어든 독일(서독)에서도 반전운동과 반권위주의로 특징지워지는 68혁명의 기운이 불어왔다. 이 시기의 서독의 의회정치는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 그리고 소수파 자유당 단 3당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교회(가톨릭과 독일개신교)나 노동조합, 자본가들의 이해관계가 이들 정당을 통해 대의되는 조합주의적 사회형태를 띄고 있었다. 그러나 전후에 태어난 세대가 성인이 되는 60년대 후반부터는 새로운 사회와 정치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도 서구 각국의 제국주의적 확장정책이 낳는 전쟁과 착취에 대한 제3세계의 저항운동이 거세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들 세로운 세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의회주의를 넘어선 신좌파 정치운동(Außerparlamentarische Opposition)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급진좌파 정치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이후 소위 K그룹이라고 통칭되는 혁명적 전위그룹들 — 맑스 레닌주의, 마오주의, 트로츠키 주의 그룹 등을 포괄한다. — 이었지만,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인원들을 훨씬 크게 넘어서는 젊은 세대의 활동가들이 사회 곳곳에서 여러 그룹들을 만들고 있었다. 학교마다 다양한 학생 그룹들이 만들어졌고, Sponti라고 불리는 도시의 빈 건물을 점거하고, 반문화적 활동을 벌이는 이들, 그리고 다양한 생활협동조합이나 대안적인 회사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약간 늦은 시기에 노동계급운동으로부터 시작되어 사회 전체로 퍼져나갔던 이탈리아의 자율주의(autonomia) 운동과는 달리 독일의 급진좌파운동은 노동계급에 대한 노동조합과 사민당의 지배를 흔들지는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K그룹들 중 과격파들은 우리에게 유명한 적군파(RAF)를 형성하며 테러주의로 나아갔고, 온건 그룹들은 반핵운동 등을 통해 점차 신사회운동이나 녹색당을 비롯한 대안정치운동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RAF의 테러가 격화되고 히스테리적 반응이 사회를 뒤덮으면서 6, 70년대 급진좌파운동은 쇠퇴해갔다.&lt;/span&gt;&lt;br /&gt;&lt;/div&gt;&lt;div&gt; &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455/001/8388fb5d96d279c6537164c7ba7dec4b.jpeg&quot; alt=&quot;49d3fc_9c82a892dafa4e44b28bfc6e807acc42.jpg_srb_p_486_329_75_22_0.50_1.20_0.00_jpg_srb.jpeg&quot; width=&quot;486&quot; height=&quot;328&quot; style=&quot;line-height: 2;&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Commune Eins&lt;/span&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br /&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80년대의 급진좌파운동은 새로운 형태를 띄었다. 이 시기에 다시금 급진좌파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의 아우토노미아 운동이었다. 조합주의나 민주집중제, 혹은 관료주의적인 조직화 대신 소규모 행동그룹(Bezugsgruppe)의 자기조직화 및 네트워크를 강조하는 아우토노멘(자율주의자) 운동이 대규모로 형성되었다. 이들의 독일적 뿌리는 각종 학생그룹들과 도심의 점거생활자들 및 펑크 등의 서브컬쳐였다. 수많은 그룹들이 각 지역마다 결성되었지만 이들을 하나로 묶어 설명할 수 있는 이념이나 전략은 사실상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보다는 문화적 요소들이 이들 운동을 특징지었다. 이들은 이전시대의 운동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반문화적이고 반사회적인 성격을 띄었다. 검은 옷 혹은 펑크 스타일의 옷차림이 이들을 주류 사회로부터 구분하여 주었고, 때로 운동에 있어 정치적 올바름이나 도덕적 정당성을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군대, 교회, 조합, 정당 등 기존의 조합주의적 사회를 움직이는 요소들을 급진적으로 거부하며 자율주의자들이 만든 자유공간(Freiraum)에서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적 운동이기도 했다. 블랙블록이라고 불리는 대규모의 폭력시위 형태의 운동 역시 80년대 자율주의 운동에서 태동한 것이었다.&lt;/span&gt;&lt;br /&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 &lt;/span&gt;&lt;/div&gt; &lt;/div&gt;&lt;div&gt;90년대에 이르러서 이들 자유공간을 중심으로 한 자율주의 운동은 점점 더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상실한 채 사회변혁이라는 과제로부터 멀어지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자율과 자기조직을 강조하지만 조직화를 위한 규칙을 지나치게 경시한 나머지, 결국 카리스마적이고 나이많은 남성활동가들이 주도하는 권위주의적 조직문화가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두 가지 지점에서 운동이 재활성화 된다. 내부적 요소로는 이렇게 교조적으로 변한 자율주의 운동을 극복하고자 하는 상대적으로 젊은 활동가들이 주도하는 포스트자율주의 그룹들이 탄생하고 있었고, 외부적으로는 통독 이후 네오나치가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리면서 좌파들이 더 이상 자율공간 속에서만 지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 후자의 요소가 90년대의 급진좌파 운동의 변화에 좀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민족민주당(NPD)을 중심으로 하여 하부에는 준군사적인 조직들까지 형성되고 있었던 네오나치에 맞서서 각 지역의 자율주의적 급진좌파들 역시 준군사적으로 조직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주류 사회는 상당히 우경화를 겪고 있었고, 의회정당들은 사회의 우경화를 막는데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안티파 아우토노멘들의 운동은 복잡한 실을 풀려하기보단 곧장 칼로 잘라내는 운동이었다. 수 많은 곳에서 나치에 대항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으며, 특히 대학에서 출발한 그룹들로부터는 안티파시즘을 정교하게 이론화하고, 반자본주의 이론과 결합하는 이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국적인 안티파 네트워크를 추진하기도 했다. 70년대 이후 다시금 수만 명이 급진좌파의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반나치를 넘어서 반국가주의 운동으로 나아갔고, 나치의 폭력에 맞선 대항폭력을 옹호하며 국가의 폭력독점을 문제시했기 때문에 국가(특히 경찰과 헌법수호청)와 상당한 긴장관계를 형성하였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 &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455/001/dd6597f093c69d3ef74cb850c7ae5cf2.jpeg&quot; alt=&quot;49d3fc_f54c576311ca4096bd8335bd1f353659.jpg_srb_p_486_260_75_22_0.50_1.20_0.00_jpg_srb.jpeg&quot; width=&quot;486&quot; height=&quot;259&quot; style=&quot;text-align: center; line-height: 2;&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안티파 블랙블록&lt;/span&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그러나 이 안티파-아우토노멘 운동은 여전히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에 부딛혀야 했다. 아우토노멘 만이 아니라 좌파 운동 전체가 커지면서 각종 정파그룹들이 난무했고, 이들은 내부적으로 많은 이념적 논쟁을 벌였다. 스탈린주의가 여전히 조직론에서 힘을 발휘하는 그룹들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갈등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중동문제를 둘러싼 &quot;반독일주의자Antideutsch&quot;들과 &quot;반제국주의자Antiimps&quot;들간의 갈등이었다. 90년대 안티파 운동의 전국 네트워크였던 AA/BO의 각 지역 조직들은 이러한 논쟁 속에서 갈라졌다. 또 하나의 문제는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던 운동의 마초성이었다. 성차별과 성폭력 의제들이 수많은 자율공간들에서 많은 논쟁을 낳았으며, 여성 활동가들의 대규모의 이탈을 불러오기도 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 &lt;/span&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132/455/001/01304a7a53c24c6228611d9e0b1e679d.jpeg&quot; alt=&quot;49d3fc_50bca4b6ac974198a244b6a0b87c9f16.jpg_srb_p_486_372_75_22_0.50_1.20_0.00_jpg_srb.jpeg&quot; width=&quot;486&quot; height=&quot;371&quot; style=&quot;line-height: 2;&quot; /&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2007년 하일리겐담에서 열린 G8 정상회담 반대행동&lt;/span&gt;&lt;/div&gt;&lt;/div&gt;&lt;div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하지만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새로운 조직들이 다시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며, 여전히 많은 전통적인(8-90년대 스타일의) 안티파 아우토노멘 조직들도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새롭게 만들어진 포스트-아우토노멘 조직들은 의회 내부의 주류좌파(민주사회당과 그 후신 좌파당 등)나 70년대의 좌파들이 성장(혹은 노화)해가며 만든 시민운동들과의 연결지점을 찾고자 했으며, 특히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세계를 한 바퀴 돌며 진행되었던 대항세계화 운동(정상회담 봉쇄시위, 세계사회포럼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다양한 사회 의제들 — 녹색당과 사민당의 사회복지 개혁안(Hartz IV)에 대한 반대운동, 등록금 도입 반대운동, 반전운동, 유럽사회포럼, 핵폐기물 수송열차 저지운동, 슈트트가르트 신역사 개발 반대 운동 등 — 주류 좌파 그룹들과 함께 개입하였다. 또 한편 반파시즘 의제에 시민사회 전체를 끌어들이는 것에도 성공하였다. 2006년에 좌파당이 만들어지면서는 전국 단위에서 의회 안에 이들 급진좌파운동과 의회 좌파정치를 잇는 연결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경제 위기 이후 이들 급진좌파운동은 그리스의 풀뿌리 사회운동과 집권을 눈 앞에 둔 좌파정당 시리자의 사례나 스페인의 급진적인 풀뿌리 운동의 사례로부터 영감을 받으며 다시금 재활성의 시기를 맞고 있다.&lt;/div&gt;</content>			</entry></fe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