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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익숙한 것들을 뒤로 하고, 다시금 사유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게시판에서 나는 ‘독일’ 이야기를 하게 될 테지만, ‘독일’을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이야기를 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사회민주주의의 낙원도, 경제강국이라는 유토피아도, 그리고 ‘선진국의 문물을 배우고 전하는 유학생’도 이 공간엔 없다. 대신 (독일)사회의 ‘반대편’에 놓인 잡다한 것들을 다루는 사전, 기사, 보고서 등의 인용문들이 이 공간을 채우게 될 것이다. 사회의 풍경은 이 반사회적인 - 각각 asozial, unsozial, kontrasozial에 해당하는 - 것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베를린 유학생.

스카이캐슬의 조(파)국씨 가문이 해온 일을 우리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것은 “별다른 불법행위는 찾을 수 없는 민중에 대한 범죄행위”다. 법과 규칙의 논리를 넘어 ‘계급’을 이 파국 속에서 발견할 때에야 정부여당과 그 주변의 리버럴 엘리트들은 이 “범죄행위”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아주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은, 이런 형태의 ‘파국’과 ‘분노’야 말로 리버럴 엘리트들이 가장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었다. 조(파)국 가문이 부와 학력을 세습하는 동안 기회는 불평등했고, 과정은 불공정했고, 결과는 부정의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선 몇 가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일들이 있을 뿐 커다란 불법은 없었다. 이를 근거로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에 큰 하자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 이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조국 딸의 학력 및 계급 세습(법대교수와 의사, 스카이캐슬의 주인들이 아니던가.) 과정을 옹호하는 대학교수들과 오피니언 리더들이 페이스북에서 스스로 빤쓰를 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은 적지않이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아하! 선생님들이 바로 그렇게 자녀를 키워 오셨군요! 이렇게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본 글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특목고반 학원 강사를 하는 사람의 글이었는데, 그는 “사교육 쪽에 좀 있어본 사람의 입장에서 그 당시엔 다들 저 정도 자원을 투입했다.”고 썼다. “다들”이라니 세상에! 물론 그 학원을 찾은 사람들이야 당연히 모두가 그걸 하려고 찾아 왔겠지. 그들이 정말로 ‘다들’이 되어버리는 이 마법 속에서 우리는 리버럴 엘리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공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계급”의 문제다. 그러니까, 그들이 사는 세상.

(리버럴 엘리트들의 이 기만성은 남한 만의 현상은 아니다. 나는 이번 ‘스카이캐슬적 파국’ 속에서 2013년 독일 연방하원 선거(총선)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메르켈이 최장수 총리로 집권하는 십수년간 사민당은 대항마가 될만한 인물을 내지 못하고 매번 패배를 당했는데 그 선거도 그랬다. 사민당은 예나 지금이나 의료보험에서 공보험/사보험 2원 체계를 없애고 공보험으로 통합하는 공약을 내고 있는데, 당시 꽤나 회자된 한 양자 티비토론에서 사민당의 페어 슈타인브뤽 총리 후보가 자신도 사보험 가입자라는 것을 떨떠름하게 시인했던 것이다. 이 논란과, 기업을 다니며 받은 수천만원대 강연료 등 사민당 이름에 걸맞지 않은 개인의 기만성이 이슈가 되면서 사민당의 지지율은 전보다 더 줄어들었다.)

기회와 과정과 결과의 공정을 논하는 건 평등한 개인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서로 “존재적으로” 다른 계급들 사이에선 애초에 이 “공정”이라는 문제계 자체가 허위일 뿐이다. 어떤 이들은 아 지금 대입과 직업선택의 문제를 가지고 벌어지는 일은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엄밀히 말해 “계층”의 문제 아니냐고 할 것이다. 일견 맞는 이야기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계급”이라는 용어를 유지할 것인데, 그것은 계급과 계급 관계(Klassenverhältnis)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산수단 소유 유무, 그러니까 유산계급(자본가/지주)와 무산계급(혹은 노동계급)에 의해 객관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타 계급을 향한 “적대”를 통해 (주관적이라기보다는 “초객관적”으로)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갱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전통적으로는 둘다 노동계급이고 계층적으로 분류가 될 수 있겠지만, 시험을 봐서 입사한 정규직이 그렇지 않은 비정규직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그들의 불평등을 지속시키기를 주장할 때 이들은 계급관계 속에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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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거든요"

자본가/지주와 무산계급이라는 정치경제학적 계급이건, 엘리트와 대중이라는 문화사회학적 계급이건, 고학벌(력)과 저학벌(력)이라는 교육사회학적 계급이건, 남성과 여성이라는 가부장제하의 성별계급이건, 그것이 다른 모양이 아니라 계급 적대로 나타나는 곳에서 자유주의적인 ‘능력에 따른 공정’이 관철되어야 한다고 상상된 공간인 “기회, 과정, 결과”의 게임은 존재할 수 없다. 사실 리버럴들은 바로 이것을 기를 쓰고 감추려는 사람들이다. 가난하고 힘들었지만 서울대를 가고, 혹은 고시를 봐서 훌륭한 변호사가 된 사람. 그 사람들이 리버럴의 기만성을 가려주는 도구 역할을 해 준다. 그 사람의 자식은 외고를 가고 아버지 동료들의 도움으로 인턴십을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겠지만. 계급론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계급투쟁은 하위계급이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계급적으로 단결된 자본가가 노동계급을, 지주가 무산자를, 남성이 여성을(여혐!),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고학력이 저학력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다. 그래서 맑스와 엥겔스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우리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고, 얻을 것은 전 세계다.”라고 한 것이다. 자본가들은 너무나 잘 하는 그 단결이 프롤레타리아에겐 그토록 어려우니까!

 문제는 지금 남한에는 계급을, 그러니까 “결과의 평등”을 의제화할 수 있는 유의미한 ‘좌파’ 정치세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계급은, 현실에서 명료한 정치적 언어를 통해 이 적대를 폭로하고, 어떻게든 단결과 연대를 조직해서 “결과의 평등”을 얻어내야 하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기생충» 같은 영화를 보면서 냉소를 보내고 말 뿐인 문화적이고 미학적인 어떤 것(냄새!)이 되어 버렸다. 문재인 정부가 툭하면 입에 올리는 “촛불정신”은 단지 박씨, 최씨 집안의 ‘불법행위’만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재벌 가문들로 대표되는 “계급”에 대한 분노였지만 (그들은 서로의 부를 불려주면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죽게 놔 두었다!), 리버럴들은 전자만을 부각시키며, 후자를 의도적으로 촛불정신에서 탈각시켰다. 이제는 뭐 일본과의 외교대결이 촛불정신이라고 하면서 재벌에게 면죄부를 주고 온갖 노동개악을 밀어붙이고 있는 지경이다. 그렇게 상류계급이 하류계급을 향해 벌인 계급전쟁에 대한 촛분의 분노는 들리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누가 계급에 대한 냉소를 계급에 대한 분노로 다시 조직할 수 있을까. 그런 정치를 어느 정도라도 의회 안에서 실천할 수 있었던 마지막 정치세력은 아마도 민주노동당이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그나마 좋아진 여러 사회적 제도들은 대부분 민주노동당이 앞서서 던졌던 의제들에 빚을 지고 있다.) 이후 국회 안에는 계급 간에 벌어지는 삶의 차이를 정면으로 문제삼는 어떤 정치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웅동학원과 펀드까지 기부하겠다는 승부수까지 낼 만큼 절실함을 보여준 조국은 아마 법무부 장관으로 임용될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리버럴인 조국의 이념이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투사였던 조국의 이념을 아주 성공적으로 질식시켜 죽였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성별 계급”의 문제를 바라보면, 우리는 아주 약간, 희망적인 풍경을 마주한다. 최근 몇년간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들은 (그 안의 배제적인 흐름이나 능력주의에 기초를 둔 소위 “야망론” 등을 제외한다면) 여전히 “결과의 평등”을 위한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평등이라는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면, 나는 그건 페미니즘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여전히 문제는 어떤 정치세력이 과연 페미니즘이 주장한 (남성과 여성 간의) “결과의 평등” 문제를 리버럴의 문제계(공정과 능력주의) 속으로 형해화되도록 놔두지 않으면서 다른 여러 계급 적대들과 연결시키며 평등의 정치를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결과의 평등”이 정치화 되지 않는다면 조국 가문에 대한 분노는 그저 “나도 공부 잘하(할 수 있)는데 혜택과 보상은 못누렸다고 느끼는” 다른 학벌-능력-특권층(및 그 워너비들)의 공정성 시비로 조금 불붙다가 끝나고 말 것이다. 리버럴의 기만성에 대한 실망으로 보수주의가 더 강고해지는 것은 덤일테고. 빤쓰를 내리는 저 대학교수들(왜 가만히 있지도 못하는가 그들은. 아 그것은 누구도 그들의 기득권을 해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 때문일 것이다.) 만이 아니라 조국의 딸에 분노하고 있는 젊은 고학력 중산층들 역시 – “나도 누려야 하는데 너만 누리고 있는 특권”에 분노할 뿐 – 학벌과 직업에 따른 특권을 없애는 것에는 관심이 없거나 사실 적개심까지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내가 잘 된 건 내 능력, 쟤가 잘 된 건 쟤 부모의 능력이라고 생각할 뿐 대입, 입사, 공무원 시험, 각종 고시들로 얻는 계급적 특권 자체가 문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국 반대시위를 한다는 서울대와 고대 학생들이 터뜨리는 저 분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의 저 기괴한 분노가 실제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조국의 딸일까? 아니다. 그들의 실제 목표, 그러니까 ‘무의식적 목표’는 바로 자신들이 분노를 선점해서 학벌사다리의 하류 계급들이 자신들 전체를 상대로 분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능력’의 문제일 뿐, ‘계급’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들의 본능적인 판단이다. (고대와 서울대의 조국반대 시위에 우파 정치세력, 학생세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사회의 학벌 엘리트들은 바로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남한사회를 지배해왔다. 그리고 그들의 학벌계급을 지켜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능력에 따른 공정한 입시’라는 대중의 환상이다. 끝내야 할 것은 바로 저 대학서열,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특권 자체다. 

계급투쟁이란 – 역시나 세간의 오해와는 다르게 – 어느 날 한날 한 시에 죽창을 들고 모여서 상류계급을 제거하는 혁명을 벌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끈질긴 사회적 의제화, 정치적 제도화의 싸움이다. 누군가는 이제 (혹은 다시금!) 4년제 종합대학의 같은 과라면 졸업장의 가치의 차이가 없는 세상, 직업으로 무엇을 택하든 임금격차와 안정성이 지금처럼 심하게 차이 나지 않은 세상, 세입자로 살아도 평생 이사다니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사실상의 형벌이 되지 않는 세상을, 그러니까 “결과의 평등” 의제들을 함께 묶어 끈질기게 밀고 나가야 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자.

*이 글은 대구경북지역 민중언론 <뉴스민>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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