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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낭설'은 특별한 카테고리의 주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당분간은 한국 사회에서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냉소와 분노의 계급화' 현상,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 등에 대한 글을 쓸 예정이다.

한겨레 기자. 주로 사회부에서 일했다. 빈민, 이주노동, 교육 문제 등을 취재했다. 공저서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와 <저널리즘 글쓰기의 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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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건을 둘러싼 구조를 살피자는 제의를 ‘촌스럽다’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건의 끔찍함이 강렬할수록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가해자에게 격분한다. 격분은 문제의 책임을 가해자에게 집중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사건을 낳은 구조의 문제는 성찰하지 않는다. 구조의 문제는 쉽게 인식하기 어렵다. 게다가 사건을 해결하는 즉자적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사건의 끔찍함은 피해자만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한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안긴다. 때로는 자신을 피해자의 지위에 대입해 같은 피해 상황을 상상하기도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다.

언론인 12명의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파리의 테러는 한국에 실시간 뉴스로 전달됐다. 무엇보다 언론사에 침투해 한 명씩 표적 사살을 했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고통은 빠르게 전이됐다. 이어서 테러범들이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쳤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이 뉴스는 어떤 신호였다. 한국 사회 일각에서 느닷없이 이슬람의 ‘미개함’을 거론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할례와 부르카 문제를 꺼내 이슬람의 가부장적 ‘여성 탄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종차별성 혐오 발언도 등장했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가해자들이 단지 ‘무슬림’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테러는 특정한 젠더를 대상으로 발생하지도 않았다. 테러는 무슬림 이민 가정 출신이지만 프랑스의 교육을 받고 자란 프랑스인에 의해 발생했다. 테러범 쿠아치 형제는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한 번도 부모를 본 적이 없다. 피자 배달 등을 하며 절망적인 청년 시절을 보내던 동생 셰리프가 어느날 알카에다 조직 합류가 목표인 단체에 가담했다. 이 일로 감옥을 들락거리던 그는 결국 이슬람을 표방하는 과격파 행동주의와 결별하지 못하고 형과 함께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저지른다. 그러니 이 테러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문제점도 아니고, 유럽 내 무슬림 커뮤니티 일반의 문제도 아니다.

심지어 테러범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라고도 볼 수 없다. 쿠아치의 변호인은 그가 엄격한 무슬림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슬라보이 지젝은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진짜 근본주의자는 시기도 원한도 없다. 그들은 불신자가 사는 방식에 전혀 상관하지도 않는다...유사 근본주의자이지 테러리스트는 진짜 근본주의자와 반대다.” 그는 이어 “테러리스트가 보여준 열정은 오히려 그에게 진짜 확신이 없음을 증거한다. 그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연약했기에 풍자 주간지에 실린 한심한 만화를 보고 위협을 느꼈겠는가”라고 말했다. 만약 그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슬람이나 무슬림 일반에 대한 혐오로 이어져야 할 까닭도 없다. 대다수의 무슬림들은 근본주의 테러세력을 비판한다. 다만, 근본주의 테러 세력만큼이나 서구의 이중적 행태 역시 비판할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테러범이나 IS와 이슬람, 그리고 나아가 이슬람 근본주의를 구분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긴 시간을 들여서 쿠아치 형제의 삶을 정밀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해봐야 한다.

그런데 왜 샤를리 에브도 테러를 두고 갑자기 이슬람에 대한 혐오가, 그것도 ‘여성 탄압 비판’이라는 외피를 쓰고 등장한 것일까. 그것은 실시간으로 전해진 테러의 끔찍한 고통과 충격이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설명 방법으로 음모론이 등장한다. 사회학자 전상진은 <음모론의 시대>에서 음모론이 가지는 보편적 형식을 7가지로 정리했다. 음모론은 우선 필사적인 물음에 대한 상상적 해결책이기 때문에 증거를 꼼꼼히 따지지 않는다. 비난을 남에게 돌려 고통과 비루한 처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해준다. 복잡한 사안을 단순하게 만들어 비난의 대상을 명확하게 해준다. 탓할 수 있는 대상을 지정해줘 자신을 방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고통을 낳는 문제의 구조는 무시하고 고통의 이유와 원인을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우연 따위는 인정하지 않고 모든 나쁜 일이 적의 의도대로 짜인 결과로 인식된다. 마지막으로 음모론은 세상을 ‘착한 우리’와 ‘나쁜 그들’로 이분화해 ‘착한 우리’에는 선량한 희생자의 지위를 부여하고 ‘나쁜 그들’은 악마화한다.

음모론을 통한 책임 전가와 회피를 위해 필요한 것은 낙인을 찍을 가짜 적대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에서 낙인 찍힌 가짜 적대의 대상은 이슬람이었다. 이슬람은 테러와 직접 관련이 없음에도 ‘미개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내부의 복잡성과 역사성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테러에 대해 명확하게 비난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이슬람이 존재해 주었다. 테러범들에게 고통을 줬던 프랑스 사회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는 위기를 무시한 채 고통의 이유와 원인을 무슬림이라는 인종으로 형상화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이슬람의 미개함’을 비난하는 이들은 이슬람의 ‘여성 혐오’를 거론하며 잠재적 희생자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고, 무슬림은 인종차별적으로 악마화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적 이성 비판>에서 “희생자 이론의 약점은 의식의 자기 물화이며, 순진하면서도 교활한 입장에 있다. 이는 경우에 따라 책임 면제의 술책으로, 협박의 기술로, 간접 공격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또는 그렇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무슬림에 대한 혐오에는 정상성 이데올로기도 동원됐다. 정상성 이데올로기는 ‘정상성’으로 규정된 다수의 도덕에서 이탈한 ‘예외적 인간’을 빠르게 타자화한다. 타자화의 일선에 선 문제 제기자는 ‘예외적 인간’의 예외성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정치하게 따져보지도 않은 채 즉각 그를 비정상의 영역으로 몰고 간다. 때로는 그 ‘예외적 인간’이 속해 있는 소집단이 비정상의 영역과 등치되기도 한다. 이렇게 가해자가 비정상의 영역으로 축출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정상의 영역은 별탈없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안도한다. 여기서 사회의 책임은 소거된다. 사건의 책임은 오롯이 비정상의 영역에서 돌출한 가해자 개인 혹은 가해자가 속한 비정상의 영역 집단에 일임된다.

이 이데올로기를 샤를리 에브도 테러에 적용해보면, 다수의 도덕에서 이탈한 ‘예외적 인간’은 테러범 쿠아치 형제였다. 사람들은 쿠아치 형제가 테러를 저지르게 되기까지 어떤 인생 경로를 밟아왔고, 어떤 계기로 이런 테러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다. 재빨리 그들을 타자화할 궁리만 했다. 이때 쿠아치 형제가 무슬림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무슬림 이민자들은 서구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를 굴릴 수 있는 한 축의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삶의 영역에선 게토와 같은 ‘비정상’의 영역으로 배제되어 있다. 체제의 타자다. 그러니 “무슬림은 모두 잠재적 테러리스트이고, 쿠아치 형제가 무슬림이기 때문에 테러를 저지른 것”이라고 규정하면, 정상성의 영역은 오롯이 보존할 수 있다. 사회의 책임을 소거할 수 있는 것이다.

음모론과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더해 한국 사회 일각에선 앞서 말했듯 이슬람의 가부장적 ‘여성 혐오’에 대한 비판도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왜 그랬을까. 한국 사회는 넷우익들을 중심으로 ‘여성 혐오’가 만연한 사회다. 일베는 여성 혐오를 전시하면서 주목 경쟁을 한다. ‘진보’로 분류되는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정도나 표현의 강도는 일베만 못하지만, 여성 혐오에 가까운 표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테러를 낳은 무슬림’이 심지어 ‘여성 혐오자’이기도 하다는 테제는 여성 혐오 현상을 자주 접하며 한국 사회에 대해 어떤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는 억눌린 여성들을 이슬람을 향한 음모론과 정상성 이데올로기의 장으로 초대하기에 효율적인 장치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란과 같은 나라가 1960년대에는 여성들이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다녔는데, 종교 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 여성을 탄압하는 문화로 퇴행했다고 말했다. 한국도 언제 지금의 이란과 같은 사회로 되돌아갈지 모른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이런 주장에 사람들은 ‘테러=이슬람’이라는 공식을 받아들이고 이슬람 혐오자들과 함께 샤를리 에브도 테러 가해자들과 무슬림들을 악마화하고 비정상의 영역으로 내모는데 동참했다.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에 대해 반응하는 한국 사회 일각의 이런 모습이 두려운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섞여서 다문화로 포장된 인종별 계급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 같은 위기는 한국 사회에서도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극우는 유럽에서만 준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넷우익들은 체제의 문제를 여성이라는 가짜 적대에 전가해 여성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 그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의 근본적 원인은 불평등을 조장하는 체제에 있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적 약자인 여성들에게 역차별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체제를 향해야 할 분노를 여성이라는 약한 고리를 겨냥해 해소한다. 그러니 해결책은 우선 이 가짜 적대를 폭로하는 일이다.

인간의 어떤 선택에는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어떤 이는 그것이 구조만의 문제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그것이 개별적 선택일 뿐 같은 구조의 모든 이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구조를 벗어난 개별자의 선택은 있을 수 없다는 반박도 있다. 그것은 딱 잘라 한쪽이 옳다 그르다 다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어느 한쪽만이 전부라고 말하는 방식이고, 한국 사회는 대부분 개별자의 선택에 문제의 책임을 떠맡긴다는 사실이다. 지금 여기 필요한 것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배제된 구조적 관점에 대한 숙고,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다.


댓글 '1'

지나가다

2015.05.11 12:26:28

글 잘 봤습니다. 불우하게 살면서 앞으로의 삶이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극단적인 종교에 빠져들고 저런 행동을 하기 쉬우니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기본적으로 종교란 것은 주변의 환경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고 느낄 수록 믿기 쉬우니까요.

그러나 이슬람 종교에 대한 혐오와 무슬림 혐오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슬람 종교 자체는 idea이기 때문에 비판을 해도 상관없으며, 사실 이슬람 종교 자체는 (다른 모든 종교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지만) 상대적으로 봐도 더욱 이상한 교리가 많은 종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해서 그 아이디어를 혐오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Sam Harris가 말한 것 처럼 이슬람은 "the mother load of bad ideas" 니까요.

물론 무슬림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혐오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무슬림에 대한 혐오인 것처럼 보일까봐 걱정스러워하다가 정당한 이슬람에 대한 비판까지 피하게 되는 것을 특히 미국에서 많이 봐서, 그 두 가지는 꼭 구별해야 한다는 댓글을 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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