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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숙현의 하위주체가 보는 세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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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23 Oct 2026 16:54:2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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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영화 ‘1987’이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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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lt;div&gt;&lt;strong&gt;&lt;span style=&quot;color: rgb(255, 170, 0);&quot;&gt;*글에 영화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lt;/span&gt;&lt;/strong&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1987년을 언급하는 서사들은 대체로 신기할 정도로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지운다. 학출과 넥타이부대가 다했다는 식, 혹은&amp;nbsp;&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amp;nbsp;&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일반 시민&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들이 그 혁명을 완성했다는 식이다. 사실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다. 이번 촛불정국에서도 “노동자들 자제요~”를 외치는 건 여전했으니까. 그나마 영화 &amp;lt;1987&amp;gt;에선 연희(김태리)의 죽은 아버지를&amp;nbsp;&amp;nbsp;‘투쟁하던 노동자&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로 설정해 그 흔적을 남겼다. 권영숙 선생의 표현을 빌어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연희의 아버지는 ‘체불임금 투쟁’을 했던 노동자였다. (참고: 권영숙 선생의 1987 페북글 &amp;nbsp;&lt;a href=&quot;https://www.facebook.com/youngsook.kweon/posts/1753290444681604&quot; target=&quot;_blank&quot;&gt;https://www.facebook.com/youngsook.kweon/posts/1753290444681604&lt;/a&gt;) 그러니까 연희가 그토록 뻗대는 건 흔한 여성혐오 공식의 흔한 여성 캐릭터가 그러하듯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대생’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알 만큼 알지만 ‘모르기로 작정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패한 투쟁이 남기는 상처와 고독을 남들보다 먼저 봐 버렸다. 실패한 투쟁은 패배의 기억만이 아니라 함께 싸우던 이들 사이의 배신 및 불신과, 좌절과 냉소와, 가족들의 고초와 생활고를 남긴다.&amp;nbsp; 그리고 독재정권의 힘은 매우 강폭했다. 영화 속 박처장(김윤석)은 부검을 하겠다고 버티는 최검사(하정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자신과 자신이 신봉하는 세력의 권력을&amp;nbsp;과시하고 이 권력이 계속될 것임을 확신하는&amp;nbsp;대사이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 연희가 이 대사를 자신의 삼촌 한병용(유해진, 이 캐릭터는 실존인물 한재동과 전병용을 합친 캐릭터라 한다)과 학교 선배 이한열에게 반복한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는데요?” 워딩은 같지만 결이 다르다. 이것은 패배와 그 후유증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의 두려움의 대사이다. 사람들을 다시 잃고 싶지 않다는, 다시 그 지옥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절규이다. 그러나 그녀는 영화의 말미, 결국 대오에 함께 서게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width=&quot;665&quot; height=&quot;443&quot; alt=&quot;1987 연희.jpg&quot;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52/966/082/0bc1ec7284d8e77cb403e2951c591240.jpg&quot; /&gt;&lt;/p&gt; &lt;div align=&quot;left&quot;&gt;&lt;/div&gt;&lt;p&gt;&lt;/p&gt; &lt;div&gt; &lt;/div&gt;&lt;p&gt;&lt;br /&gt;&lt;/p&gt; &lt;p&gt;영화는 (아마도 6.10 집회로 짐작되는) 미도파 백화점 앞 대규모 시위 장면에서 끝이 난다. 그리고 에필로그로 이한열 열사의 장례집회의 실제 장면들이 붙는다. 영화가 멈춘 그 시간 이후에도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7월부터 9월까지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끝난 뒤에 이어지는 시간들에서 그녀는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호헌철폐, 독재타도와 직선제를 외쳤던 그 인파들이, “대학생이 고문으로 죽었다”며 기사를 쏟아내던 언론들이 민주노조 건설을 외치며 7월부터 투쟁을 이어간 노동자들에게는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또 다시 배신감을 느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볼 것이다. 노동자들이 그 투쟁을 어떻게 이어 나가는지를. 어떻게 민주노조를 결성해내는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 마침내 민주노총을 건설해내는 과정을. 어쩌면 연희는 민주노총의 고위 활동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서울여성노조의 창립멤버가 됐을지도. 그래서 어쩌면, 지금도 어딘가에서&amp;nbsp;&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한상균 위원장 석방&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을 외치고 있거나, 한국여성노동자회에서 활동하며 낙태죄 폐지 시위를 기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확신하는 건, 연희의 삶은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이 이후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왔고, 영화에 등장했던 인물들 중 일부는 청와대로, 또 국회로 진출해 권력을 가진 고위 공무원이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장준환 감독의 말대로 “아파트 값을 올리는 데 일조하”면서 자신보다 어린 후배 세대 혹은 자식 세대들을 착취하는 기성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연희만은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lt;/p&gt; &lt;div&gt;&lt;br /&gt;&lt;/div&gt;&lt;div&gt;&amp;lt;1987&amp;gt;은 박종철에서 시작해 이한열로 끝을 맺는 구조이고, 그 이한열 역시 “박종철을 살려내라”며 외치다 죽었다. 결국 이 영화는, 1987년을 전후로 한 무수한 투쟁과 항쟁들 중에서도 ‘박종철 사건’을 중심으로 잡은 영화라 할 수 있다. 무수한 사건 사고들을 두 시간 남짓의 시간에 묘사하면서 무엇을 취사선택하고 무엇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는 언제나 창작자들이 고심하는 문제이고, 이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생략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영화가 노동자 대투쟁까지 묘사하지는 못한 데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수긍하는 편이다. 또한 영화 개봉 직후 일각에서 일었던, “영화가 투쟁하는 여성들을 지웠다”는 데에 그리 동의하지 못한다. 애초 이야기 구조가 이러하고 ‘정치 스릴러’ 장르의 공식을 느슨하게 취하는 영화다. 특히 트위터에서 &amp;lt;1987&amp;gt;을 향해 일었던 비난엔 영화를 보지 않은 채 행해진 것들이 점점 확대된 경우가 너무 많고 컸다. 사실로 따지자면 오히려 &amp;lt;1987&amp;gt;은, 현대사를 다루는 근래 몇몇 영화들 중에서도 시위하는 여성들이 가장 많이 나오는 영화기도 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트위터에서 나온 각종 반박들을 황진미 영화평론가가 총집합해서 정리해 놓고 있다. (여기에는 내가 썼던 트윗들의 흔적도 슬쩍 끼워져 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했듯, 연희가 이한열을 처음 만나게 되는 명동 코리아극장 건물 앞 기습시위 장면에서도 여학생의 숫자는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대오 제1열을 거의 차지하다시피 하고, 이는 연세대 교문 앞 시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최루탄이 터지기 전 대오 1열은 거진 여학생들이었다. 연희가 이한열을 다시 만나게 되는 ‘만화사랑’ 동아리의 비디오 상영회 장면에서도, 이 상영회를 진행하며 5.18 비디오를 소개하는 것은 여자 선배다. 영화 속에서 이한열이 그녀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아마도 그 여선배가&amp;nbsp;동아리의 회장이거나 제일 나이와 권위가 많은 선배였을 것이라 짐작 가능하다. 또한 이승한 평론가가 “&lt;a href=&quot;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826527.html&quot; target=&quot;_blank&quot;&gt;영화 ‘1987’이 ‘연희의 영화’인 이유&lt;/a&gt;”에서 훌륭하게 지적했듯이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결과적으로 연희이며, 결국 &amp;lt;1987&amp;gt;은 연희의 영화다.&amp;nbsp;&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영화가 여성들을 배제하고 생략했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영화에 비중 높은 여성 캐릭터가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일까. 보는 관객들 역시 눈에 보이는 여성을 습관적으로 생략하는 관성에 젖어 있었기 때문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뿐일까. 나는 &amp;lt;1987&amp;gt;이 여성들을 지웠다는 데 동의할 수 없지만, 이 영화가 싸우는 여성들을 잘 살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공들여 설정되고 연출되고 연기된 연희 캐릭터와 달리, 많은 다른 여성들의 캐릭터는 카메라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심지어 이름 한 번 불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는 화면에 그 어떤 다른 영화들보다도 싸우는 여성들을 많이 담고 있지만, 관객의 망각과 생략을 영화가 돕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김정남이 은신하던 절에서 탈출한 뒤 한병용이 그의 안위를 확인하며 새로 지령을 받는 전화통화 신에서,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여성 투쟁가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그래서 그 여성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시위 신들에서 무수한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그 여성들은 그저 대중의 한 명으로 등장했다가 바삐 사라진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연세대 장면들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조연 여성 캐릭터 한 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바, 바로 이한열이 소속돼 있던 동아리 ‘만화사랑’의 여자 선배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녀는 꽤 여러 차례 화면에 등장한다. 먼저 그녀는 만화사랑 상영회를 앞에서 진행하고 5.18 비디오를 소개한다. “지금부터 만화사랑 비디오 상영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보실 영화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입니다. 외국에서 찍은 거예요.” 그리고 비디오테크에 비디오를 꽂는다. 전두환의 호헌 담화 방송을 지켜보고 반응하는 여러 시퀀스 중 만화사랑 동아리방의 장면에서도 몇 차례 그녀의 대사가 있다. 남자 후배가 “7년을 또 해먹겠다고?”라고 반응하자 그녀는 “(단지 7년이 아니라) 체육관 선거로 ‘평생’을 해먹겠다는 것”이라고 본질을 꿰뚫는 정정을 해준다. 또한 그 옆의 후배의 뒷통수를 때리기도 한다. 그녀는 연세대 교문 앞 시위 장면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최루탄 때문에 대오가 흐트러지고 이를 본 이한열은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 피 끓는 구호를 외친다. 이 구호에 시위대는 다시 대오를 정비하고 이한열은 맨 앞에서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검은 현수막의 한쪽 깃대를 들며 시위대를 이끈다. 바로 그때, 다른 쪽 깃대를 드는 두 명 중 한 사람이 바로 ‘만화사랑 여선배’이다. 즉, 그녀는 이한열과 함께 시위대의 맨 앞에서 선다.&amp;nbsp;&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러나 나는 이렇게 자주 등장하는 그녀를 ‘만화사랑 여선배’라고만 지칭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극 중에서 단 한 번도 이름이 불리지 않기 때문이다. 짧게 등장하는 연희의 친구조차 ‘정미’라는 이름이 드러나는데, 그녀의 이름은 끝내 관객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이 비판이 사소한 트집잡기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가 박종철로 시작해 이한열로 끝나는 영화, 그럼으로써 무수한 열사들 중에서도 박종철이라는 이름과 이한열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영화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그리고&amp;nbsp;&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amp;nbsp;&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이름을 부르고 기억하는 행위&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의 중요성을 다시 짚어본다면, 이렇게 여러 차례 중요하게 등장함에도 이름이 지워져 있다는 사실은 의아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그녀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장면들에서도 카메라의 포커스는 이한열에게만 맞춰져 있다. 비디오 상영회에서도 카메라는 만화사랑 여선배를 제대로 보여주기보다 이한열에 집중한다. 호헌 방송을 보는 동아리방 신에서도, 그 신은 곧 “뭐라도 해야 한다”며 등사판을 잡는 이한열을 보여주기 위한 숏이 돼 버린다. 교문 앞 시위 장면에서 그녀가 이한열과 함께 맨 앞에서 현수막을 잡고 전진했다가 또 다시 발사된 최루탄에 얼굴에 먼지를 잔뜩 얹은 채 쓰러져 있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한열의 시선에 포착된’ 장면으로 처리된다. 그녀의 존재감이 덜한 것이 과연 이름과 얼굴이 덜 알려진 배우의 연기가 부족했던 탓일까? 아니, 그러기에 그녀의 등장 신은 오로지 이한열을 보여주기 위한 기능에 충실히 종속돼 있다.&amp;nbsp; 이 영화에서 고집스럽고도 일관되게 보이는 정신, 그러니까&amp;nbsp;&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모두가 주인공&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이고 그렇기에 조연과 단역의 캐릭터도 섬세하고 사려깊게 다루면서 미도파 앞 대규모 집회 신을 영화의 마지막으로 삼았던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러한 처사는 의아스럽다.&amp;nbsp;&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p align=&quot;center&quot;&gt;&lt;img width=&quot;646&quot; height=&quot;443&quot; alt=&quot;1098 - 광장.jpg&quot;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52/966/082/f0a3ec258ae715c8f19156f6687c0411.jpg&quot; /&gt;&lt;/p&gt; &lt;div align=&quot;left&quot;&gt;&lt;/div&gt; &lt;div&gt; &lt;/div&gt;&lt;p&gt;&lt;br /&gt;&lt;/p&gt; &lt;div&gt; 나는 &amp;lt;1987&amp;gt;을 두 번 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많은 부분 한계와 아쉬움을 느꼈으며, 그 아쉬움의 상당 부분을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이 영화가 많은 고뇌의 산물이자,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선택과 집중을 매우 영악하게 했고, 그에 따른 생략을 모두 문제 삼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탁월한 연출과 연기와 미장센들에, 그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매우 높은 완성도를 성취해냈다고도 생각한다. 영화의 종결 시점 이후 이어지는 역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집회 신으로 마무리지은 것 역시 훌륭하고도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악당인 박처장의 묘사였다. 영화 전반부 ‘악의 축’이었던 그도 영화의 후반에 가면 그저 몸통을 위해 잘리고 버려지는 ‘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끔찍함을 굳이 대사로 뱉는 것은 악당 캐릭터의 존재감을 키우고 그의 악행을 합리화하거나 변명거리를 주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이 장면은 어쩌면 오히려 이 영화에 환호하는 이들을 위해 보내는 섬뜩한 경고와도 같은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이 인물처럼 역사의 괴물이자 악당일 수도 있다.”는.&amp;nbsp;&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고 어정쩡함이 남는다. 이것을 그냥 무시해도 좋은 걸까. 투쟁하는 노동자의 존재가 연희 아버지의 설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 및 예언되는 것을, 그래도 흔적은 남았다고 만족해야 할까. 연희 캐릭터가 다른 흔한 ‘각성’ 캐릭터와 달리 내면의 갈등과 자기 스스로의 선택과 경험과 고집을 갖고 점차 성장해 가는 인물이라는 점에, 또한 지금의 관객들을 그 시대로 안내하고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amp;nbsp;&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진짜&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amp;nbsp;주인공이라는 사실에 기뻐하며 다른 여성 캐릭터들이 그려지는 방식에는 눈을 감아도 좋은 걸까. 실존인물 두 명(한재동과 전병용)을 합쳐 한병용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융통성이, 왜 다른 여성 투쟁가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데까지는 발휘되지 못했을까. 다른 캐릭터들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에 충실한 방식으로 은폐, 조작을 막아내는 데 기여했던 것과 달리, 이 한병용 캐릭터는 교도관으로서 메시지를 빼돌리는 것뿐 아니라 재야인사와의 접촉, 또한 연희와 혈연이라는 연결 고리로서 연희를 자극하는 기능까지 너무 여러 기능성을 부여받는 캐릭터가 되지 않았던가. 또한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전국 각지의 실제 집회 장면의 기록화면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투쟁의 역사가 서사화되는 과정이 또다시&amp;nbsp;&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amp;nbsp;&lt;/span&gt;&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서울 내 명문대 남성 학생&lt;span style=&quot;font-family:Gulim, &#039;����&#039;;&quot;&gt;’&lt;/span&gt;&amp;nbsp;및 그들의 사건 중심으로 재구성되는 데는 대하여 그저 ‘또 다른 영화’를 기약하는 것으로만 아쉬움을 달래도 좋은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amp;lt;1987&amp;gt;에만 제기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후 만들어질 ‘항쟁을 소재로 한’ 또 다른 영화들에 &amp;lt;1987&amp;gt;이 귀감이 된다면, 이 숙제들 역시 함께 물려받아야 할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김숙현의 하위주체가 보는 세계</category>					<dc:creator>노바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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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fabella.kr/xe/blog3/82966#comment</comments>			<pubDate>Sun, 07 Jan 2018 19:46:1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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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미디어오늘 강현구 기고문 &quot;&quot;탈김치됐으니 축하&quot; 그들은 왜 빈곤 청년을 혐오하나&quot;을 읽고</title>
			<link>http://fabella.kr/xe/blog3/81412</link>
				<description>&lt;div&gt;&lt;br /&gt;&lt;/div&gt;&lt;div&gt;링크: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mp;amp;act=articleView&amp;amp;idxno=131468 (&quot;탈김치됐으니 축하&quot; 그들은 왜 빈곤 청년을 혐오하나 - 강현구, 미디어오늘.)&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금요일 오후 강릉행 버스 안에서 저 글을 읽었다. 스마트폰으로 긴 글을 쓰는 데에 영 익숙하지 않음에도, 독수리 타법으로 힘들게 오랜 시간을 들여 페이스북에 당시 장문의 글을 올렸는데, 이를 다시 다듬고 보완하여 올린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52/412/081/cd95d8e54d521fd773b9c5e3f49d8740.jpg&quot; alt=&quot;구의역 추모_민중의소리.jpg&quot; width=&quot;800&quot; height=&quot;531&quot; /&gt;&lt;br /&gt;(사진 설명: &#039;민중의 소리&#039;가 게시한, 구의역 사고사 피해 노동자 추모 집회 당시 사진. 이 추모의 집회에 참석한 건 남성만도, 비-페미니스트만도 아니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일단 이것은 확실하게 밝혀두고 시작하는 게 좋겠다. 나는 저 필자가 인용하는 워마드의 빈곤 혐오에 동조할 생각도 지지할 생각도 전혀 없다. 고인에 대한 조롱 역시 나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종류의 것이다. 더욱이 가혹한 노동 조건에서 목숨을 내놓고 일하고 쉬는 날에는 다른 동료들과 피켓시위에 나섰던 가난하고 성실한 청년 노동자의 죽음, 이 불합리하고 약자를 착취하며 위험을 가난한 이들에게 외주화하는 사회 구조에 의해 살해당한 노동자의 죽음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이에게 가해지는 조롱과 비아냥은 아무리 미러링이든 그저 드립에 불과하든 받아들이기도, 용인하기도 힘들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작년에 메갈리아에서 &#039;이백충&#039;이란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도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았으며, 경악하고 분노했다. 당장 &#039;이백충&#039;이란 단어는 나도, 내 남성 파트너도 타격하기 때문이다. &#039;이백충&#039;이란 단어는 포괄적으로 가난한 이들, 저임금 노동자들을 타격한다. 당연히 여성들도 포함된다. 동일한 노동을 해도 남성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진급에 제한을 받으며 임금 인상도 느리게 진행되거나 좌절당하기 쉽고, 애초 직종의 선택에 있어서도 보이는/보이지 않는 차별과 억압으로 인해 제한과 한계가 있고, 여성들이 많이 선택하는 직종이 다시 저임금 직종화하는 사회 구조이기 때문이다. 포괄적인 빈곤 혐오 언어들은 남성보다 필연적으로 더 가난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을 타격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빈곤이 여성에게 더 가능성이 높고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여러 연구와 통계로 드러난다. 절대 빈곤층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다. 절대 빈곤층 및 상대적 빈곤층 양 영역에서 공히 여성 가구주의 빈곤이 가장 심각한 것으로 지적되고 연구된다. 특히 한부모 가정의 여성 가장이 차지하는 비율은 오래 전부터 가장 높고도 심각하다(이 문제는 아동 빈곤율과도 연결된다). 노인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도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고령화 사회가 급속히 진행됨에 따라 노인층 자체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고 노인 빈곤 역시 해가 갈수록 심각하게 악화하고 있는데, 노인 빈곤층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평균 수명이 남성보다 평균 약 10년이 길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여성이 더 가난하게, 그리고 더 오래 가난하게 산다는 사실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런데 이 &#039;이백충&#039;이 메갈리아를 대표하는 언어 중 하나로 등극하지는 못하고 길지 않은 수명을 다했다는 사실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것이 사용자들의 심리적 반발에 부딪힌 결과이자 소극적 차원에서의 &#039;자정&#039;이 작용한 결과로 본다. 이 단어가 자정의 대상이 된 이유도, 내가 이 단어를 비판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조준을 잘한다 해도 혐오의 실제 타격은 제일 약자가 받으며 둔탁하고 느슨한 혐오일수록 가장 약자가 타격 받기 쉽다. 빈곤에 대한 혐오가 확대되고 일상화되며 흔해질수록 그 혐오는 여성을 향할 수밖에 없고, 그 타격도 여성이 더 크게 받는다. 이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 단어가 바로 &#039;이백충&#039;이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여기서 통계로 잡히지 않는 여성의 빈곤도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매우 흔한 예로 부부인데 자기 명의의 재산은 없는 경우, 혹은 있더라도 경제력 행사권이 거의 없는 여성의 경우 등. 이런 종류의 빈곤이 다른 의미에서 또한 심각한 이유는 이것이 당장 가시화되지 않다 하더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가리워져 있는 빈곤, 폭력과 억압과 착취를 감내함으로써 가까스로 도래를 연기하고 있는 빈곤이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제 애초 저 미디어오늘의 글로 돌아가 보자. 글의 제목에는 &quot;왜?&quot;라는 질문이 들어가 있는데, 글 전체에서 &quot;왜?&quot;에 대한 대답이 없다. 그 결과 저 글은 &quot;그들은 빈곤청년(남성)을 혐오한다, 왜냐면 빈곤청년(남성)을 혐오하기 때문이다&quot;라는 토털러지가 된다. 대신 저 글은 저 워마드에서 빈곤 자체를, 빈곤한 청년들의 약자성 자체를 조롱한다며 워마드를 &#039;고발&#039;하고 이들을 반 휴머니즘적인 집단으로 낙인 찍는다. 이들이 진보의 연대성을 끊을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이 경고는 메갈/워마드에 대해 소위 진보진영 내에서 지지의 입장을 밝힌 이들을 향한 협박이기도 하다. 결국 저 글이 향하는 바는 메갈/워마드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지지의 입장을 철회할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문제는 빈곤 혐오를 반대한다며 문제 제기하고 있는 글이 빈곤의 문제에서도, 청년의 문제에서도 여성은 괄호 안에 처박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워마드의 빈곤 혐오는 정확히 하면 빈곤 청년 &#039;남성&#039;에 대한 혐오일 터이다. 그런데 필자는 제목은 물론 본문에서도 내내 고집스럽게 &#039;빈곤 청년&#039; 혐오라 지칭한다. 남성이 곧 보편이요 청년의 대명사란 말인가? 위에서도 길게 서술했지만 현실에서 빈곤의 문제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심각하지 않은가? 여성이 더 압도적인 다수로, 심지어 더 오래 빈곤에 시달린다. 청년층의 빈곤 문제라고 별다르지 않다. 남성의 군 생활 동안 여성이 돈을 버는 상황이 분명 있다. 그리고 이 상황 외에, 많은 여성들이 가계 부양 혹은 남자 형제의 진학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할 것을 종용받는 상황, 진학을 하더라도 집안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여성의 노동시장 진입이 취업 기회 자체의 제한으로 인해 더 열악한 조건의 저임금 노동을 수락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심지어 여성을 우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직종들의 경도 열악한 조건의 저임금 노동 직종들이라는 사실도 함께 고려돼야 한다. 사회초년생들의 빈곤, 노동빈곤(노동할수록 빈곤해지는) 역시 남녀 모두의 문제인데, 여성의 경우 노동시장 진입 자체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에서 오히려 여성에게 더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처럼, 빈곤은 종종 남성들의 것으로 독점되고, 현실적으로 가장 심각하고 가장 개연성이 높은 여성의 빈곤은 이 지점에서 폭력적으로 삭제된다. 남는 것은 막연하고 나태하기 짝이 없는 구호로서의 &#039;빈곤 혐오 반대&#039;인데, 이 나태함과 막연함이야말로 빈곤을 계속해서 타자화하고 외면하는 방식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빈곤이 타자화되고 혐오당하는 것은 워마드나 메갈리아만의 일이 아니다. 저 필자가 구의역 청년 노동자의 죽음과 그에 대한 추모를 향한 비아냥을 인용했으니, 나 역시 강남역 살인사건의 추모와 구의역 청년 노동자 추모를 잠깐 비교하며 살펴보려 한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039;추모&#039;가 상징성이 매우 강한 행위인 만큼, 사회 모순으로 인한 죽음을 향한 추모는 일각의 판단이나 기대와 달리 애초 매우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강남역 피해자에 대한 대규모 추모는 사람들이 그 죽음에 대해 강력하고 광범위한 &#039;동일시&#039;를 통해 이뤄졌다. 이 동일시는 자신 역시 같은 사회적 위치이므로 같은 비극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quot;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quot;라는 문구가 가장 많이 공유됐던 것도 이 때문이다. 강남역 추모 행렬이 그토록 강력했던 건, 이 추모가 기본적으로 &#039;동일시&#039;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추모에 대한 몰이해, 나아가 비아냥 역시 정확히 이 동일시를 향해 이루어졌다. 이 몰이해와 비아냥이 드러내는 것은 또 다시 여성이 처한 사회적 위치이다. (이 모든 과정에 &#039;정치적&#039;이라는 묘사를 어떻게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반면 구의역 청년 노동자의 죽음에서 빈곤은 추모에 동참한 이들에게도 타자화되었다. 많은 이들이 역시 &#039;나도 이렇게 죽을 수 있다&#039;에서 추모의 글귀를 붙였으나, 또한 많은 이들이 이 추모에서 공유한 감정은 연민과 동정이었다. 내가 당장 당할 수 있는 죽음 대신, 내 자식/친구가 당할 수 있는 죽음으로, 한 발짝 더 떨어진다. 빈곤 연구물들을 보면 IMF 이후, 그리고 2007년 세계 경제 위기 이후 더욱 사회가 양극화되고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으며 빈곤 문제가 더 심화되며 광범위화하고 있는데도, 가난은, 빈곤은 동일시보다 타자화의 방식으로 고려된다. 죽음에 대한 추모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빈곤 혐오를 비판하는 언어들이 또 다시 빈곤을 타자화하면서 빈곤의 여러 가지 얼굴과 양태를 도외시한다. 워마드의 빈곤 남성 혐오는 우리 사회에서 흔하고 일상적인, 손쉽게 빈곤을 타자화하는 방식을 더 극단으로 밀어부친 것이다. 구의역 노동자와 그를 향한 추모에 대한 비아냥은 바로 이 타자화의 틈을 뚫고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빈곤에 대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취하는 빈곤을 괄호치거나 타자화하는 관습, 또한 광범위한 빈곤 혐오의 분위기에서, 워마드의 빈곤 남성 혐오도 튀어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매우 경악스럽지만, 그에 경악하는 이들 또한 다른 방식으로 가난을 혐오하고 타자화하고 있는 것이 이 광경의 진짜 정체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52/412/081/32e60e3657c497e39f9b87ca71833ff8.jpg&quot; alt=&quot;구의역 사고사 노동자 조롱.jpg&quot; width=&quot;918&quot; height=&quot;466&quot; /&gt;&lt;p&gt;(사진 설명: 강현구 씨가 인용한, 구의역 추모에 대한 워마드의 일부 댓글.)&lt;/p&gt;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나아가 저 필자가 인용한 워마드의 워딩들을 볼 때, 구의역 노동자를 향한 빈곤 혐오와 조롱의 문구의 맥락에 강남역 추모 당시 터져나왔던 일각의 비아냥과 평가절하 시도에 대한 반발의 기운이 읽힌다. 성격도 방향도 달랐던 두 개의 추모장에서 강남역에 등장했던 추모의 방식이 구의역에 비슷하게 등장한 것에 대해, 이 역시 강남역 추모를 평가절하하고 훼손하려는 의도라는 오해 내지 피해의식도 함께 읽힌다. 나는 이 피해의식에 동의하지 않고 반발의 방식 역시 당연히 비판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강남역 추모가 지닌 힘(정치성)을 계속해서 평가절하하거나 왜곡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러한 피해의식을 전혀 근거 없는 망상으로 쉽게 비난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저 글이 미처 인식하지 못해서, 혹은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있는 어떤 맥락에 대해서도 말을 덧붙이고 싶다. 워마드의 워딩들에 강력하게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워마드의 배제나 혐오집단이라는 낙인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나 워마드를 적극 지지하는 이들이나 공히 공유하고 있는 어떤 전제된 맥락이 있다. 그들은 대체로 공유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은 미처 공유하고 있지 못한 것, 혹은 눈 감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1. 사회적, 구조적 문제에서 특히 진보진영에서 적극 고려하고 배려하는 빈곤의 문제가 여성의 빈곤은 괄호치고 있다는 문제의식&lt;/div&gt;&lt;div&gt;2. 가난의 서사, 빈곤의 서사마저도 남성이 독점하고 있거나 하려 든다는 인식&lt;/div&gt;&lt;div&gt;3. 나아가 젠더 위계에서의 폭력적 착취와 물리적 폭력의 변명과 알리바이로 빈곤이 너무 자주 들이밀어지고 이것이 너무 쉽게 승인되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저 글 자체가 1번과 2번에 해당사항을 품고 있다. 나아가 3번은 위에서 말한 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난을 타자화하는 습관에 속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가난을 타자화하고 혐오하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자신들의 폭력을, 그리고 자신들의 여성에 대한 젠더 착취에 종종 &#039;가난&#039;을 핑계로 들이미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한 이들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더욱이 나는 저 필자가 들이민 인용들에서, 그 워딩들이 드러내는 것이 실제로는 &#039;공포&#039;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공포의 정체는 무엇인가? 폭력과 착취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 그것에 빈곤이 핑계로 들이밀어질 가능성, 그 경우 그 폭력과 착취가 손쉽게 승인 혹은 이해받을 가능성, 그러는 사이에 피해자인 여성은 지워질 가능성에 대한 공포이다. 안타깝게도 이 가능성은 매우 높으며, 이 공포 역시 매우 합리적인 것이다. 언제나 어떤 공격과 혐오의 타격점의 끝은 가장 약자가 되기 쉽다. 그런데 이것은 착취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여성이 가난한 남성에게 착취당할 확률이 과연 어느 정도일까? 정확한 수치는 잘 모르겠지만,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착취의 결과는 훨씬 더 참혹하고도 여파가 더 길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실제로 경험했고 여전히 그 후유증의 여파를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저 필자가 인용한 &quot;부자 한남충 vs 열등 씹치남&quot; 대조표 및 그 비슷한 워딩들로 가 보자. 이 워딩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039;내가 남자와 연애를 한다면 어차피 그는 날 물리적 혹은 정서적으로 학대하거나 억압할 확률이 99%&#039; 라는 절망과 포기이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어차피 당할 학대와 억압과 착취라면 차라리 돈 있는 놈에게 당하겠다는 것이다. 동의할 순 없지만 이해는 된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가 말하자면 일베의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는 심지어 2년 전 40대 초반인 나도 가졌던 공포다. 2, 30대 여성이 가진 공포의 크기, 그리고 실제로 겪고 있는 이들의 절망은 내가 가졌던 공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클 것이다. 이 공포를 과연 피해망상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일베의 멘탈리티에서 특히 여성 혐오는 단지 일베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진보적이라 자평하는 이들도 대다수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도 여성들도 이것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지금, 많은 여성들이 자신들이 가진 여성 혐오를 매우 맹렬하게 돌아보고, 성찰하고 있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혐오의 외피를 쓴 저 워딩들이 실제로 드러내는 것, 함유는 하고 있지만 미처 제대로 드러내고 있지는 못하는 것을 성실하고도 사려깊게 살피고서야 제대로 된 비판을 할 수 있고, 또 더 나은 대처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적어도 어느 집단을 낙인찍어 배제하고 도태시키려는 손쉬운 방법보다 그쪽이 훨씬 더 사회 정의에 부합하고 더 진보적이다. 많은 이들이 메갈리아 혹은 워마드는 혐오 집단이기 때문에 그들과 연대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 혐오의 외피를 쓴 워딩들이 어디에서 연유했고 실제로 가리키고 있는, 혹은 드러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한 성찰과 숙고와 분석을 결여한 채로, 부정확한 비판과 함께 혐오집단으로 낙인 찍고 배제하는 데에만 골몰하겠다면, 나는 묻고 싶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정확히 혐오의 방식 아닌가, 라고. 메갈이 혐오집단이라서 그들을 반대한다는 이들이 그들을 매우 전형적인 방식으로 혐오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혐오가 아닌 방식으로 비판하고 반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결론은 저 필자의 것과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빈곤 혐오가 결국 빈곤 (장애인 성소수자 저학력 비정규직노동자/무임금자) 여성을 가장 크게 타격할 것이기 때문에 빈곤 혐오에 반대한다는 바로 그 점에서, 나는 워마드의 빈곤 혐오를 비판한다. 그렇기에 빈곤 혐오의 언어를 거둬야 한다고 주장하고, 설득하고 싶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의도적으로 남성의 빈곤만을 말하며 여성 빈곤을 삭제하는 시도에 대해, 다른 악덕의 핑계로 가난을 소환하는 것에도 반대한다. 그런 빈곤 혐오 반대야말로 또 다른 빈곤 혐오이자 빈곤의 타자화이기 때문이다. 빈곤 문제를 사고하고 이 해결책을 찾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여성 빈곤에 대한 연구와 말하기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여성 빈곤에 대해 더 많은 말하기와 공유를 할 것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일단 찾아낸 대처 방식이자 결론이다. 이게 적어도 매갈 낙인 찍기와 배제 및 고립보다는 훨씬 더 진보적이고 옳은 방향이라고 자평한다.&lt;/div&gt;</description>
		<category>김숙현의 하위주체가 보는 세계</category>					<dc:creator>노바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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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fabella.kr/xe/blog3/81412#comment</comments>			<pubDate>Mon, 08 Aug 2016 19:23:32 +0900</pubDate>
		</item><item>
			<title>엄기호님의 글 &quot;사랑과 난입&quot; 논란에 대하여</title>
			<link>http://fabella.kr/xe/blog3/81331</link>
				<description>&lt;div style=&quot;text-align:justify;&quot;&gt;엄기호님의 글(링크: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05292059005&amp;amp;code=990100)과 페미디아에서 esse님이 쓰신 비판글(링크: http://femidea.com/?p=706), 그외 다양한 반응글들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거대한, 그러나 필연적인 맥락의 오독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성화의 부모님이라고 지칭된 글 속 인물들 관계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직접적인 물리적 가정 폭력을 가했다는 정황은 확실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엄기호님의 글 중간에 치료를 받던 남편이 아내에 대한 &#039;폭력&#039;을 인정했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그 &#039;폭력&#039;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다소 혼란을 준 것도 같다. 마치 무수한 성희롱도, 추행도, 강간도 모두 &#039;성폭력&#039;이라는 단어로 포섭되지만 역으로 우리가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곧바로 &#039;강간&#039;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처럼. 단적으로 글의 첫 문장에서 &#039;자주 다퉜다&#039;는 표현이 나온다. 가정폭력과 다툼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나는 엄기호님 글에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한국에 흔한 일방적이고 독선적이며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그에 매번 문제제기와 저항(한국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제기/저항은 곧장 &#039;말대꾸&#039;란 단어로 폄하되곤 한다)하던 어머니, 그럼으로써 다툼이 끊이지 않던 관계에서 어머니가 마침내 그들에게는 최후의 카드였을 &#039;이혼&#039;을 통해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고, 그 국면에서 &#039;선택&#039;을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로 읽었다. 이 글을 읽고 나는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변화를 촉구하며 싸운 이를 통해 자신의 기득권자의 위치를 깨닫고 이 관계가 폭력적이었음을 인정하는 화답을 쟁취해낸 이야기로, 그리하여 변화를 위해 실천을 끌어낸 이와 그 실천을 행함으로써 진정한 파트너로 거듭난 드물지만 귀한 사례로 느껴졌다. 다소 위악적이고 (글의 주인공들께 무례하게)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039;고쳐쓰기 불가능하다는 한남충을 고쳐쓴 매우 드문 성공 사례&#039;랄까.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 엄기호님은 트위터에서 그 글 속 가정의 &#039;폭력&#039;이 물리적 가정 폭력의 범주가 아니었다고 직접 밝혔다.) 내가 감동한 포인트가 &#039;그들이 결국 이혼하지 않았다&#039;가 아니라는 것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52/331/081/c37e4bc1704b20eaaeb5c7b0364b03c9.jpg&quot; alt=&quot;79.jpg&quot; width=&quot;834&quot; height=&quot;623&quot; /&gt;&lt;p style=&quot;text-align:center;&quot;&gt;프리다 칼로, &quot;상처 입은 사슴&quot;(1946)&lt;/p&gt;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폭력적인 관계에서 이혼을 하거나 그것도 안 되어 야밤에 아이들을 들쳐업고 도망가는 것도 투쟁이고 싸움이고 저항이다. 그리고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계속 문제 제기를 하고 다툼을 벌이고 상대를 병원에 보내는 것도 투쟁이고 싸움이고 저항이다. 물론 우리가 전자를 주로 권하는 것은 후자의 성공율이 희박하기 때문이며, 노력에 비해 성과는 미비하고 오히려 &#039;처벌&#039;로서의 보복이 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글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그렇게 생존자이자 싸운 여성이었고, 드물게도 싸움의 성과를 쟁취해낸 여성이다. (권명인님의 글 링크 참조: https://www.facebook.com/saramsari/posts/1007429539340132?pnref=story) 그 어머니가 가부장제의 폭력을 연장시키고 공고화시킨 여성 내지 20년 동안 맞고 살며 저항도 하지 못한 불쌍한 여성 정도로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건 매우 우려스럽다. 이 역시 여성 주체에 대한 폭력이다. 저항했던 이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그를 대상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페미디아 esse님의 비판글 역시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나는 처음에 엄기호님의 글을 읽고 혹했고 감동을 받았지만, 두 번째 다시 읽고 혼란에 빠졌다. 위에서 말했듯 감동의 한편에 석연치 않은 찝찝함이 계속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찝찝함이 esse님의 비판글을 읽고 풀린 것은 아니다. 아니, 비판글을 읽고 오히려 혼란이 더 커져버렸다... 여전히 내 찝찝함과 혼란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나마 내가 인지하고 말할 수 있는 혼란의 이유는 두 가지로 다음과 같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1) 분량이 한정된 지면에 누군가의 사례를 이야기화해서 삽입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했을 생략 때문에 이야기의 구멍이 너무 많다. 이 구멍은 &#039;폭력&#039;에 대한 혼란뿐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서술의 불균등 역시 포함한다. 나 역시 처음 이 글이 가정 폭력과 학대의 사례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lt;/div&gt;&lt;div&gt;2) 그 글에 소개된 사례가 매우매우 드물다는 냉소와 자조. 난 그 글이 실화인지조차 의심스러웠는데, 결과적으로 필자의 윤리를 함부로 의심하는 무례한 짓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던 것은 그것이 현실에서 너무나 희귀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실화라고 해도 너무 판타지스러운 것이다.&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그러나 이러한 &#039;집단적 오독&#039;이 과연 &#039;폭력&#039;이란 단어의 개개인의 혼란이 중첩되기만 한 결과일까. 그러한 오독이 &#039;집단적&#039;이라면, 이 집단적 오독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여기에 더 큰 맥락이 존재했고 이 오독은 다소 필연적이라 생각한다. 이 필연적인 맥락이란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다.&lt;/span&gt;&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나는 위에서 이 글의 아버지를 &#039;한국에 흔한... 가부장적인 아버지&#039;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 &#039;흔한&#039;이라는 표현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우리는 &#039;자기 멋대로 자신의 편안과 취향을 강제적으로 가족의 룰의 기준으로 삼고 독선적이며 가부장적인&#039; 아버지, 그러나 &#039;가족 구성원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는&#039; 아버지가 흔하다고 믿고 싶어한다. 가정 폭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윤리적인 가정의 상에서 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의 현실에서는, (물리적) 가정 폭력이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가정이 그렇지 않은 가정들만큼이나 흔하다. 다만 이것은 언제나 &#039;남의 얘기&#039;로 혹은 &#039;익명&#039;에 의지해서만 발화될 뿐이다. 한국의 가정 윤리란, 집에서 맞은 것을 밖에서 입에 올리는 걸 금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해를 고발하고 증언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 용기에 대한 보상(!)이란 많은 경우 격려와 위로, 대응 방안과 예방책 대신 &quot;집안 망신 시킨다&quot;, &quot;제 얼굴에 침 뱉는다&quot;는 손가락질, 나아가 &#039;가정 교육&#039; 운운을 빌미로 해 오히려 피해자를 향한 편견과 차별이기 쉽기 때문이다.&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lt;br /&gt;&lt;/span&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엄기호님의 글의 애초 의도와 상이한 반응들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기인한 부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앞서 나는 &#039;폭력&#039;이란 단어가 협의와 광의를 모두 아우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혼란에 대해 말했지만, &#039;폭력&#039;이란 단어의 혼란은 그것만이 아니다. 명백한 폭력인데도 그것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인지 부조화 현상, 즉 &quot;때린 건 사실이지만 폭력을 가한 건 아니&quot;라고 말하는 광범위한 현상들도 포함한다. 강자-가해자는 자신이 행한 나쁜 짓을 &#039;나쁘다&#039;고 가치 평가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러한 부정적 가치 평가를 저지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시적으로 폭력을 당하고 사는 이와, 매일 맞고 사는 건 아니라도 &lt;/span&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언제라도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며 사는 이와, 내가 당하는 폭력에 폭력이란 이름이 제대로 붙지 못하는 걸 상시적으로 겪는 이와, 폭력의 위협 자체를 아주 가끔씩만 느끼는 이와, 아예 위협을 느낄 일이 없는 이가 느끼고 감각하는 세계란, 슬프게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엄기호님의 글에서 발생한 혼란은, 물론 정해진 지면의 분량적 한계와 표현의 다소 모호함 같은 것들도 있겠지만, 그 글만이 아닌 모든 &#039;글&#039;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기반할 수밖에 없는 우리 세계에 훨씬 광범위하게 폭력이 자행되고 있고 이 폭력이 제대로 &#039;폭력&#039;이라 불리지도 못하거나 &#039;남의 얘기&#039;로 겨우 유통됐던 현실과 더 큰 관련이 있다 생각한다. 또한 상시적인 폭력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가 대체로 (함께 연대해 저항하려는 의지는 있지만) 그 폭력을 피상적으로 인지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입을 통해 겨우 발화됐던 현실도. &lt;/span&gt;&lt;span style=&quot;line-height:2;&quot;&gt;그 한계를 폭로한 것이 esse님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esse님의 글은, 엄기호님의 글이 기반하고 있는 인식을 포함해 우리 사회의 어떤 합의의 너무나 명확한 한계를, 그리고 강요된 침묵을 폭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lt;/span&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러나 나는 esse님의 글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되 엄기호님 글에 대한 비판글로서는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피해의 크기가 발언권의 크기와 비례하는 경향은 매우 자연스럽지만, 그것이 언제나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국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피해자로서의 위치를 강조하는 것은 감춰진 폭력의 현실과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자칫하면 절대적 피해자-약자로 위치를 영구히 고착시킴으로서 생존자, 저항자로서의 이행 가능성을 오히려 저해할 위험을 동시에 품는다. 나의 피해와 투쟁을 강조하다가 의도와 상관없이, 혹은 오히려 의도와 상반되게 다른이의 피해와 투쟁을 결과적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나는 esse님의 글 역시 이러한 위험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우리의 입장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떤 젠더이냐 따라, 어떤 계급이냐에 따라, 직업이 무엇이냐에 따라, 작게는 여러 형제자매 중 첫째냐 막내냐에 따라서도.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싸우면서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누군가는 상시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겪지만 누군가는 별로 겪을 일이 없는 폭력과 고통을, 이야기하고 공유하고 공감하고 연대하고 함께 싸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런 점에서, 나는 엄기호님의 글이 여전히 귀한 글이라 생각한다. 이 온갖 역한 인간의 본성들 앞에서도 불구하고 불의에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것, 혹은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곧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 세계를 더 낫게 만드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글의 어머니가 바로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낸, 저항하고 싸우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 신념이나 믿음은 그렇게까지 강한 것이 못 된다. 방금 전에도 나는 위에서 &quot;그런 일은 너무 드물어서 이건 실화라 해도 판타지&quot;라고 썼다. 이러한 냉소와 자조와 의심은 내 개인적인 피해망상이나 염세주의가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그럼에도 세상에 이런 방식 혹은 저런 방식으로 계속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 싸움들로 인해 우리의 세상이 과거보다 더 나아졌고 앞으로도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순 없다. 이 연약하고 매번 흔들리는 믿음이 조금만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 엄기호님의 글이 쓰여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례를 통해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라고. 아마 앞으로도 누군가에겐, 스스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바로 옆 사람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용기를, 흔들리지만 다시 붙잡고자 하는 믿음과 신념을, 격려하는 글이 될 것이라고. &lt;/div&gt;</description>
		<category>김숙현의 하위주체가 보는 세계</category>					<dc:creator>노바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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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fabella.kr/xe/blog3/81331#comment</comments>			<pubDate>Mon, 06 Jun 2016 15:50:25 +0900</pubDate>
		</item><item>
			<title>메르스의 공포와 불안에 대한 어떤 &#039;인문학적&#039; 성찰</title>
			<link>http://fabella.kr/xe/blog3/1628</link>
				<description>&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어제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어느 아파트 단지가 있는 관할 보건소와 그 아파트 관리실에 단체로 민원이 빗발쳤다. &quot;메르스 의심 환자가 있으니 조치해 달라&quot;는 내용이었다. 민원들은 하나같이 그 아파트의 몇 동 몇 호에 사는 가족을 지목하고 있었다. 메르스 확진 판정이 나온 병원에 근무하는 이와 그의 가족이었다. 그렇게, 그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이와 그 가족은 “메르스 의심 환자”로 찍혀 신고 대상이자 조치 요구의 대상이 되었다. 지인은 그 민원을 직접 받은 이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실제 얘기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국가 방역 체계가 뚫렸고 믿을 만한 정보와 대처가 축적되지 못한 현재, 확진 환자가 거쳐간 병원에서 일하는 이가 잠재적 보균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다. 그 당연함에 대한 결과로, 운 나쁘게 병에 걸린 환자, 그의 곁을 떠날 수 없는 가족, 그리고 그 자신이 병에 걸릴 위험에도 불구하고 최전선에서 병과 싸우면서 환자를 돌보고 있는 의료진, 그리고 그 의료진과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그렇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가해자로 분류된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조치’를 요구한다. 그런데 “어떤 조치”를, “누구”에게?&lt;/span&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트위터에서 이문재 선생의 글이 십자포화를 받고 있길래 찾아보았다.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6122142525&amp;amp;code=990100&amp;amp;med_id=khan 몇몇 부분이 눈에 걸린다. 그럼에도 트위터상의 일관된 조롱과 비아냥 분위기 역시 눈에 걸린다. 그 글이 일으키는 이 대단위 거부감의 정체가 뭘까, &#039;인문학적 성찰&#039;을 조금 해봤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솔직히 한국의 남성들은 너무 손을 안 씻는다. 화장실에 다녀와 손을 씻는 버릇이 없던 어느 남성에게서 “여자는 씻어야 되지만 남자는 (털면 되니까) 안 씻어도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경악했던 기억도 난다. (한국에서 문명인-남자가 되는 길은 너무도 쉽지 않은가? 손을 잘 씻으면 된다!) 불안과 공포가 사회 전체에 만연한 상황에서, 일상적으로 원래 당연했고 이 국면에서 더욱 권장되어야 하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가 지나치게 부여되는 것이 참 &#039;한가해&#039;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lt;/span&gt;&lt;/p&gt; &lt;center&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52/628/001/c38f52b9a0ad19971336cc95409260c0.jpg&quot; alt=&quot;낙타여.jpg&quot; width=&quot;480&quot; height=&quot;270&quot; /&gt;&lt;/center&gt; &lt;p&gt;&lt;/p&gt; &lt;p&gt;&lt;br /&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그러나 과연 그것만일까. 무기력한 좌절과 불안과 공포가 심해지는 가운데, 우리는 이에 대한 책임을 이제 불특정한 타인 - 개인들에게 물으려 하는 유혹에 점점 굴복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병에 걸린 이들은 전방위적 가해자로, 환자의 가족과 의료진들을 잠재적인 가해자로 여기며 이들을 모두 &#039;걸어다니는 세균 폭탄&#039;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타인으로부터 내가 조금이라도 손해를 얻기 싫고 그들에게 내가 입은/입을지도 모를 손해의 책임을 묻고 전가하고자 하는 건 아닐까. 너무 많은 이들에게 범위도 너무 넓게, &#039;자가 격리&#039;란 이름의 가택 연금이란 처벌을 너무 배려 없이 요구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그 불특정한 타인을 최대한 &#039;물화&#039;(내지 비인간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문재 선생의 글에서 읽은 것은 그런 것들에 대한 우려였고, 그런 종류의 공포와 불안이었다. 우리는 이미 중국으로 출장을 갔다는 확진 환자를 향해서, 35번 의사 환자를 향해서 그런 비난을 쏟아낸 바 있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불안과 공포의 원인이 &#039;전염병&#039;인 경우 이는 어느 정도 필요하고, 합리적이며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상황은 또한 우리가 역사에서 봐왔던 어떤 광기의 국면들의 &#039;전조&#039;와 익숙하게 겹치기도 한다.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인정되면서도, 어느 정도 또 경계와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사이에서 어떻게 선을 그을 것인가, 무엇을 허용하고 무엇을 비판의 대상으로 둘 것인가. 또한 무엇을 경계해야 할 것인가. 이 합의선을 토론과 논쟁을 통해 도출해내는 게 지금의 과제일 것이다. 단적으로 우리는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각자도생을 권유하는 상황에 대한 정치적 의미조차 짚을 겨를을 내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는 ‘고작 독감’이라고 격하하는 이 병이 이렇게나 통제되지 못한 채 퍼져나가고 사망자를 낼 것이라고, 우리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던가. 우리 시스템이 이렇게 허약할 것이라고, 시스템의 얼개는 있어도 그 시스템을 이렇게까지 버려두고 활용 못 하고 대처 못 할 것이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었던가. 모두가 당황과 패닉에 빠져 있는 국면인 것은 당연하다. 스페인 독감이 휩쓴 1918년 도 아니고…&lt;/span&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대신, 잠재적 가해자와 보균자를 ‘색출하고 격리’하는 데에만 전력을 쏟고 있는 건 아닌가? 오히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야근 거부 파업을 일으켜야 하는 게 아닐까? 면역력이 약해 걸리는 질병이라면, 면역력이 떨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해 충분한 휴식을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몸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으면 하루 병가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랬다가 영영 회사에서 잘리고 생계가 막막해질지 모르는 우리는 차마 야근 거부를 조직화하지 못한다. 대신 같은 이유로 중국으로 출장 간 이를 맹렬하게 비난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시스템이 어떤 병과 폐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때, 믿을 만한 정보와 대처에 의해서가 아닌 그저 입막음과 강압으로 공포와 불안을 제어하려 할 때, 그래서 그 안의 개개인들이 그저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할 수밖에 없다는 공포와 불안감에 잠식될 때, 우리는 그 책임을 질 ‘대상’을 찾는다. 그리고 이미 거센 비난에 직면한 상황에서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하는 시스템과 이 시스템에 복무하는 책임자들은,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는 &#039;입&#039;들은, 이 &#039;대상 찾기&#039; 놀이를 힘 없는 개인으로 향하도록 유도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누군가는 병을 염려하고 누군가는 이 병이 가져올 공포와 불안을 염려한다. 누군가는 만약 병에 걸릴 경우 내가 당하게 될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만이 아니라 내가 책임지고 있는 가족의 생사와 생계를 생각하며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또한 누군가는 책임의 대상이 힘 없는 개인, 환자, 환자의 가족을 향할까 우려한다. 또한 누군가는, 어떤 계기로 과거에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그리고 여러 번 반복됐던 사회적 사건들을 떠올리며 그 사건이 또 다시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내가 트위터에서 ‘예민함’이라고 지칭한 것은 마지막 종류의 불안과 공포이다. 그것이 그저 노파심의 발로라 하더라도,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어떤 사건들의 전조를 느끼고 그때 우리가 저질렀던 실수들을 상기시키는 것, 그리하여 혹여라도 발생할지 모르는 어떤 사건들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은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의 사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를 표현하는 글이 다소 성길지라도, 그 글에 동원된 알레고리들이 상투적이라며 그저 비평적 차원의 비난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이 우려에 귀를 기울이고 경계를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글이 지시하고 우려하는 바를 함께 우려하는 이들을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그런 ‘비평적 차원의 비난’이야말로 &#039;한가하&#039;다.&lt;/span&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개인적으로, ‘강박적으로’라는 단어까지 동원하여 그 글이 손을 씻는 행위를 언급할 때, 나는 그저 통상보다 좀 더 신경 써서 손을 씻는 정도의, 당연한 에티켓으로서 권장되는 말 그대로의 손 씻는 행위보다, 영화 &amp;lt;숨바꼭질&amp;gt;에서 손현주가 손을 씻는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그 장면은 손현주의 어떤 강박과 불안을 상투적이지만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문재 선생의 글에서 지칭되는 ‘강박적으로 손을 씻는 행위’ 역시, 한편으로는 이 국면에서 중요한 예방책이자 평소에도 권장될 만한 말 그대로의 손을 씻는 행위 자체뿐 아니라, 그러한 공포와 불안의 표현으로서의 일련의 ‘강박적이고 히스테리컬한 반응과 행위들을 함께 가리키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일군의 독자들은 후자의 의미를 애써 지우고 전자의 의미만을 취한다. 이 편향이 이상한가, 이 편향을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이 이상한가?&lt;/span&gt;&lt;/p&gt; &lt;p class=&quot;MsoNormal&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line-height:13.8000001907349px;&quot;&gt;시인이 글에서 보여준 &#039;한가한 예민함&#039;이, 공포와 좌절을 오히려 부추기는 말보다 차라리 더 윤리적일 수도 있다. 한국의 일반적인 후진 경향을 탓하며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구별짓기를 통해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언행에서 우리가 캐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런 보균자가, 가해자가 아니다, 하지만 쟤는 가해자일 수 있다!”라면, 나는 이 또한 병 못지 않게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대상이라 생각한다. 역사에서 그나마 교훈을 건져오며 &quot;그건 아닌 것 같은데...&quot;라며 주저하고 있는 우리의 무의식을, &quot;해도 돼, 해도 돼!&quot;라고 선동하며 죄책감을 없애고 마음껏 타자를 탓하도록 유도하는 일련의 발언들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 생각한다. 이문재 선생의 글이 주는 거부감에는, 그 글이 ‘개인 차원의 타자 간 적대’(박권일의 표현을 빌어 썼다)의 다른 끝에서 개인 차원의 귀찮음과 불만과 억울함(일견 떼쓰기로 보이기도 한다)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039;한가해 보이는 예민함&#039;에 대한 평가절하와 함께, 어쩌면 마녀사냥의 달콤한 유혹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lt;/span&gt;&lt;/p&gt; &lt;div&gt;&lt;br /&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김숙현의 하위주체가 보는 세계</category>					<dc:creator>노바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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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fabella.kr/xe/blog3/1628#comment</comments>			<pubDate>Sun, 14 Jun 2015 16:42:5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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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gt; 감상기</title>
			<link>http://fabella.kr/xe/blog3/1503</link>
				<description>&lt;div&gt;&amp;lt;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amp;gt;의 홍보 포스터를 처음 본 순간 내 눈은 그저 샤를리즈 테론의 모습에만 고정되었다. 시리즈의 원래 연출자인 조지 밀러가 돌아왔다는 사실도, 꽤 호감을 갖고 있는 배우 톰 하디가 출연한다는 사실도 관심 밖이었다. 아니, 나는 오히려 노 감독이 왕년에 자신이 히트시켰던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되돌아온 것에 대한 일말의 편견과 걱정도 함께 갖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를 박박 깎고 얼굴에 검은 기름칠을 한 채 도전적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샤를리즈 테론의 모습을 보라. 그녀가 누군가. 사적으로 가정 폭력의 생존자였고, 도무지 인간의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미모를 지녔으며, 이 탓에 남자 주인공의 주변 배역만 주어지는 역차별을 당했었고, 그에 저항하고자 &amp;lt;몬스터&amp;gt;에서 미모를 지우고 배우로서의 야심을 온몸으로 천하에 드러냈던 사람 아닌가. 그녀라면, 아무리 옆에 ‘요즘 뜨는’ 남자 배우가 있더라도 그저 그를 빛내주는 역할은 아닐 거라고, 훨씬 중심적인 역할을 할 거라고 짐작했다. &amp;lt;핸콕&amp;gt;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물론 이 예상과 기대가 맞았다. 그리고 감독에 가졌던 우려와 편견은 역시 괜한 기우였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영화를 보다가, 그리고 SNS에서 이 영화에 대한 여성 관객들의 열광을 지켜보다가 문득 흥미로워졌다. &amp;lt;매드 맥스&amp;gt; 시리즈는 한국에서 그렇게까지 성공적으로 안착해 꾸준히 인기를 누렸던 프랜차이즈가 아니었다. 몇 년 전 우리 극장에서 &amp;lt;매드 맥스&amp;gt;를 35mm로 상영했을 때도 그다지 많은 관객들이 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성 관객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는 시리즈는 더 더욱 아니었다. 이 시리즈의 이미지를 축조하는 요소 세 가지를 한 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이다. 매우 마초적이고 남성적이며, 여성을 언제나 대상화하고 트로피 혹은 그루피로나 위치 짓는 서브 컬처 말이다. 그나마 한국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헤비메탈 장르는 언제나 검열의 대상이었고, 디젤펑크는 소수의 취향이었으며, 폭주족은 (기묘한 동경을 동반하면서도) 아예 경원시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amp;lt;매드 맥스&amp;gt; 시리즈는 모두 한국의 소위 ‘영화 부흥기’, 그래서 다양한 영화들(과 문화들)이 소개되고 감상과 숙고와 토론의 대상이 되었던 90년대 이전을 이미 지나쳐간 80년대의 유산이었다. 액션 영화 프랜차이즈로 성공했다지만 시리즈의 세 편 중 가장 많은 물량이 투입된, 소위 ‘할리우드 액션’으로 제작된 2편 &amp;lt;로드 워리어&amp;gt;는 여기저기 검열로 삭제된 누더기 꼴로 개봉했고, 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간신히 비디오로 제대로 소개됐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여기서 잠시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면서 변했던 문화 지형을 간단히 상기해 보자. 헤비메탈의 전성기가 시대가 지나고 도착한 90년대의 얼터너티브 락, 그리고 슈게이징/브리티시 팝은 남성성의 과시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헤비메탈의 마초적 남성성에 대한 조롱도 포함하고 있었다. 근육질의 액션 스타 실베스터 스탤론과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양분했던 액션 영화 역시 힘보다는 주로 날렵함과 잔꾀로 승부하는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브루스 윌리스와 멜 깁슨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어야 했고, 이들은 액션뿐 아니라 코미디나 멜로 같은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했다. (물론 80년대에도 이미 호리호리한 액션 스타로 해리슨 포드가 있기는 했다.) 역으로, 키애누 리브스나 톰 크루즈, 니콜라스 케이지, 지나 데이비스처럼 원래 액션이 전문 분야가 아니었던 배우들이 액션 장르로 진출해 영웅으로 활약했다. 그런 면에서 멜 깁슨과 &amp;lt;매드 맥스&amp;gt; 시리즈는 해리슨 포드와 함께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amp;lt;매드 맥스&amp;gt;의 멜 깁슨은 80년대 강한 남성성을 내세우는 액션 영화의 특징 안에서 때 이르게 90년대식 액션 영웅의 경향을 예고하고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멜 깁슨은 90년대 가장 유명한 액션 스타 중 한 명이 되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52/503/001/804a267ce913b123ca0d6449a21fb9f8.png&quot; alt=&quot;fury road.png&quot; width=&quot;610&quot; height=&quot;200&quot; /&gt;&lt;p&gt;&lt;br /&gt;&lt;/p&gt; &lt;br /&gt;&lt;/div&gt;&lt;div&gt;&lt;strong&gt;더없이 ‘남성적인 장르’ 안의 여성 주인공들&lt;/strong&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30년 만에 새로 나온 &amp;lt;분노의 도로&amp;gt;는 “폭주족, 디젤 펑크, 헤비메탈”이라는 원래 시리즈의 인장이라 할 만한 기호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영화에 누구보다도 열광하고 있는 이들은 바로 여성 관객들이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퓨리오사라는 여성 액션 영웅과 이를 연기한 샤를리즈 테론 때문이다. 주로 남자들에게 주어지는 각종 무기류와 디젤 엔진들과 격렬한 육체 액션, 그리고 영화의 중심 서사를 이끌어가는 배역의 기능을 능숙하게 해내며 주인공인 남성(기억하자, &amp;lt;매드 맥스&amp;gt;의 시리즈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미친 맥스이다)를 오히려 압도하는 여자 주인공. 하지만 단지 이것뿐인가? 남자들을 능가하는 ‘여전사’의 이미지는 그 이전에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지나 데이비스, 린다 해밀튼, 시고니 위버, 안젤리나 졸리, 미셸 로드리게스, 제시카 비엘, 케이트 베킨세일, 최근에는 소피아 부텔라까지. 그러나 샤를리즈 테론의 퓨리오사가 다른 여전사들과 다른 점은, 먼저 배우인 샤를리즈 테론이 일반적인 ‘여성 액션 영웅’들과 달리 영화에서 여린 피해자를 자주 연기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그런 그녀가 그려내는 퓨리오사가 그저 전사 중 한 명이 아니라, 아기를 낳는 노예로 전락한 여자들을 이끌고 탈주를 감행하는 ‘지도자’라는 점이다. 그녀는 홀로 싸우지 않는다. 그녀의 목표는 &amp;lt;매드 맥스&amp;gt; 시리즈가 전제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덕목인 ‘생존’이 아니라, ‘구원’이다. (그런데 그녀는 과연 구원을 ‘받고’ 싶은 것인가, ‘하고’ 싶은 것인가?) 이 리더십을 따르는 이들은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찾아내고 제 몫을 보태면서 일반적인 상하의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적 협력 관계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이 수평적 협력 관계가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영화 속의 맥스와 눅스뿐 아니라 스크린 밖 관객에게도 성공적으로 설득해낸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런데 퓨리오사는 과연, 정말로 ‘지도자’일까? 짧게 자른 머리와 잘린 팔, 그리고 이마에 묻힌 검은 기름칠에서 드러나듯 자신의 여성성을 박탈당했거나 스스로 지운 존재이다. (어찌 보면 스스로의 여성성을 지운 채 남자의 옷을 입고 활약했던 선대의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전쟁 무기와 트럭을 다루는 데 능숙한 그녀가 그 자신도 (아마도 아기를 낳기 위해) 납치된 여성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탈주가 곧 자신의 탈주이기도 하다는 점이 아니라면, 그저 용병이 될 수도 있었으며, 영화에서 실질적으로는 ‘조력자’에 더 가깝다. 그녀의 다른 위치는 다른 이들의 탈주의 이유를 ‘희망’으로, 지신의 이유를 ‘구원’으로 구분하여 꼽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위치는 그녀들의 탈주와 전복을 돕는 맥스의 위치와도 닮았으며, 그녀들과 전혀 상관이 없던 맥스를 조력자로서 중간에서 매개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퓨리오사가 맥스의 분신이라는 분석에 일부 동의한다. 그러나 자기 부족의 땅에 도착해 ‘어머니’의 ‘딸’로서 자신을 호명하는 데서, 자신이 떠나 있던 기간을 ‘햇수’가 아닌 ‘일수’로 말하는 데서, 그 누구보다 자신의 ‘여성성’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여성-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여성성을 거세한, 혹은 여성성을 박탈당해 여성-노예가 아닌 유사-남성으로 살았던 그녀가 자신의 여성성을 되찾는 과정, 어쩌면 퓨리오사에게는 그것 역시 ‘구원’의 과정인지도 모른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렇다면 그녀들의 진짜 지도자는 누구인가? 스플렌디드이다. 처음에는 그저 임모탄의 아내 중 가장 아름다운 한 명에 불과한듯 등장했던 그녀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다른 아내들-동료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이 탈주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장본인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녀는 심지어 말 한 마디로 눅스를 죽이려는 퓨리오사를 제지할 힘을 가졌다. 그녀의 죽음에 다른 여성들이 슬픔과 애도를 넘어서서 애초의 탈주 자체를 포기하려 할 정도로 절망을 느끼는 것, 그녀의 생전의 말을 ‘유지’로 되새기며 탈주의 의지를 다시 다지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도 스플렌디드의 지도자로서의 존재감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한 지도자의 죽음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임모탄 조의 바퀴에 깔리고, 그의 태중 아이와 분리되면서 죽음을 맞는다. 그렇기에 퓨리오사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스플렌디드의 사망으로 지도자와 상관을 적에게 잃은 전투 지휘관에 더 가깝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말미가 다가올수록 퓨리오사의 죽음을 예감했다면 퓨리오사의 바로 이러한 위치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거의 죽기 직전의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그 편이 일반적인 드라마터지에 좀 더 어울린다. 새로운 시타델에서 과연 그녀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인가? 임모탄 조를 대신하는 또 다른 독재자가 될 것인가? 어쩌면, “군인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정책에 의해 쫓겨나 맥스처럼 방랑의 길에 오르지는 않을까?&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52/503/001/fe2a585e2f3bccab322c2ce8ffd27df3.jpg&quot; alt=&quot;fury road 2.jpg&quot; width=&quot;750&quot; height=&quot;324&quot; /&gt;&lt;p&gt;&lt;br /&gt;&lt;/p&gt; &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strong&gt;여성을 배제해온 남성들의 서브 컬처?&lt;/strong&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앞서 나는 이 영화가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이라는 3개의 필수 요소를 여전히 강조하면서도 (시리즈의 이전 편들과 달리) 여성들의 유난한 지지와 사랑을 받는 현상에 대해 얘기했다. 그런데 과연 폭주족(으로 대변되는 바이크 문화), 디젤펑크, 헤비메탈은 여성들이 싫어하고 즐기지 않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인 서브 컬처인가? 남성성과 마초성을 과시하고 강조하는 이 서브 컬처들이 여성들 일반과 친밀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서브 컬처가 온전히 남성들의 것이라는 관념 역시 착시에 가깝지 않을까? 이 컬처들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남성들에게도 소수의 문화였다. 그리하여 다시 제대로 말하자면, 남성 향유자들에 어필하면서 그들의 팬덤을 기반으로 한 이 문화들은, 여기에 관심을 갖거나 향유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진입 장벽을 높이고, 이미 향유하고 있는 여성들은 애써 배제하거나 부정하거나, “진정한 향유자가 아닌 다른 외적인 것에 열광하는” 팬덤이라며 평가절하하거나, 그루피 혹은 숭배자의 자리만 허락하는 식으로 여성을 주변화해 왔다고 생각한다. 이는 스포츠 등 과거 남성들만의 영역인 양 향유됐던 다른 문화와 팬덤에서도 여성들의 향유를 차단하거나 평가절하하기 위해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이러한 컬처 요소가 &amp;lt;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amp;gt;에 사용되는 방식은 이중적이다. 예컨대 얼굴이 지워진 워보이 기타리스트가 만들어내는 전자 기타 사운드는 철저히 임모탄 조의 워보이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증폭되는 ‘군가’의 기능을 수행한다. 전투가 시작될 때마다 울려 퍼지는 이 사운드는, 몸이 고무줄에 고정된 기타리스트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를 이용한 맥스의 액션이 펼쳐지기도 한다)에서 “남성들이 자신들만의 것이라며 전유하려 애썼던” 어떤 풍조에 대한 조롱을 공유하는 듯 보인다. 퓨리오사 일행을 추격하는 추격대들의 차와 바이크는 디젤펑크가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들을 가장 극단적이고도 다채롭게 제시하며, 퓨리오사와 거래를 약속했던 부족의 바이크 추격 역시 우리가 ‘폭주족 바이크’라 할 때 떠올릴 수 잇는 가장 화려한 액션들을 연이어 선보인다. 거기에 워보이들이 연신 연호하는 ‘8기통!’이라는 구호, 임모탄이 자신의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 이용하는 얼굴과 성기 위의 해골 장식… 어찌 보면 이는 대단히 ‘물신화된’ 향유 방식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와 정반대편에, 직업적/기능적 필요를 위해 도난을 방지하고 자신만이 운전할 수 있도록 장치가 심어진 전투 트럭을 유능하게 모는 여성들이 있다. 영화의 후반, 드디어 퓨리오사가 조우하게 되는 그의 부족의 ‘어머니’들은, 약탈을 위한 유인책으로 여성성을 한껏 이용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바이크를 제 몸의 일부인 양 타며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룬다. 디젤엔진들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임모탄과 워보이들의 물신화된 향유와 달리 필요한 만큼 실용적으로 응용하고 이용하는 것에 가깝다. 심지어 라이플은 맥스보다 퓨리오사가 더 잘 쏘지 않았던가. 그리고 넘쳐나는 이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 코드의 이미지가 주는 쾌락의 메커니즘을, 관객들은 성별이나 이제까지의 취향과 별 위화감이나 상관 없이, 때로는 킥킥대며 때로는 압도되며 동시에 학습하며 즐긴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아니, 남성들의 전유물로 ‘고집’되던 서브 컬처들과 여성들의 활약이 하나의 화면 안에 나란히 담기며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것이 이미 90년대에 조롱을 받으며 ‘유행이 지나간 문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익이 된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비난조차도 상업적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자본주의의 위대한(!) 판단이, 30년 만에 나오는 &amp;lt;매드 맥스&amp;gt;의 새 속편에 어떻게든 여성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넣도록 강제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전세계의 열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또 한 명의 여성 영웅을 얻었고, 풍성한 서브텍스트를 가진 액션 영화를 얻었으며, 노익장의 건재를 확인했고, 이미 지나간(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어떤 문화의 코드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amp;lt;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amp;gt;는, 몇 십년 만에 재가동된 몇몇 액션 프랜차이즈 중 가장 만족할 만한 속편을 지닌 시리즈가 되었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description>
		<category>김숙현의 하위주체가 보는 세계</category>					<dc:creator>노바리</dc:cre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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