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 영화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1987년을 언급하는 서사들은 대체로 신기할 정도로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지운다. 학출과 넥타이부대가 다했다는 식, 혹은
‘일반 시민
’들이 그 혁명을 완성했다는 식이다. 사실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다. 이번 촛불정국에서도 “노동자들 자제요~”를 외치는 건 여전했으니까. 그나마 영화 <1987>에선 연희(김태리)의 죽은 아버지를 ‘투쟁하던 노동자
’로 설정해 그 흔적을 남겼다. 권영숙 선생의 표현을 빌어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연희의 아버지는 ‘체불임금 투쟁’을 했던 노동자였다. (참고: 권영숙 선생의 1987 페북글
https://www.facebook.com/youngsook.kweon/posts/1753290444681604) 그러니까 연희가 그토록 뻗대는 건 흔한 여성혐오 공식의 흔한 여성 캐릭터가 그러하듯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대생’이어서가 아니라, 이미 알 만큼 알지만 ‘모르기로 작정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실패한 투쟁이 남기는 상처와 고독을 남들보다 먼저 봐 버렸다. 실패한 투쟁은 패배의 기억만이 아니라 함께 싸우던 이들 사이의 배신 및 불신과, 좌절과 냉소와, 가족들의 고초와 생활고를 남긴다. 그리고 독재정권의 힘은 매우 강폭했다. 영화 속 박처장(김윤석)은 부검을 하겠다고 버티는 최검사(하정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자신과 자신이 신봉하는 세력의 권력을 과시하고 이 권력이 계속될 것임을 확신하는 대사이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 연희가 이 대사를 자신의 삼촌 한병용(유해진, 이 캐릭터는 실존인물 한재동과 전병용을 합친 캐릭터라 한다)과 학교 선배 이한열에게 반복한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는데요?” 워딩은 같지만 결이 다르다. 이것은 패배와 그 후유증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의 두려움의 대사이다. 사람들을 다시 잃고 싶지 않다는, 다시 그 지옥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절규이다. 그러나 그녀는 영화의 말미, 결국 대오에 함께 서게 된다.

영화는 (아마도 6.10 집회로 짐작되는) 미도파 백화점 앞 대규모 시위 장면에서 끝이 난다. 그리고 에필로그로 이한열 열사의 장례집회의 실제 장면들이 붙는다. 영화가 멈춘 그 시간 이후에도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7월부터 9월까지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끝난 뒤에 이어지는 시간들에서 그녀는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호헌철폐, 독재타도와 직선제를 외쳤던 그 인파들이, “대학생이 고문으로 죽었다”며 기사를 쏟아내던 언론들이 민주노조 건설을 외치며 7월부터 투쟁을 이어간 노동자들에게는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또 다시 배신감을 느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볼 것이다. 노동자들이 그 투쟁을 어떻게 이어 나가는지를. 어떻게 민주노조를 결성해내는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 마침내 민주노총을 건설해내는 과정을. 어쩌면 연희는 민주노총의 고위 활동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서울여성노조의 창립멤버가 됐을지도. 그래서 어쩌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한상균 위원장 석방”을 외치고 있거나, 한국여성노동자회에서 활동하며 낙태죄 폐지 시위를 기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확신하는 건, 연희의 삶은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이 이후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왔고, 영화에 등장했던 인물들 중 일부는 청와대로, 또 국회로 진출해 권력을 가진 고위 공무원이 되었다. 또 어떤 이들은 장준환 감독의 말대로 “아파트 값을 올리는 데 일조하”면서 자신보다 어린 후배 세대 혹은 자식 세대들을 착취하는 기성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연희만은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1987>은 박종철에서 시작해 이한열로 끝을 맺는 구조이고, 그 이한열 역시 “박종철을 살려내라”며 외치다 죽었다. 결국 이 영화는, 1987년을 전후로 한 무수한 투쟁과 항쟁들 중에서도 ‘박종철 사건’을 중심으로 잡은 영화라 할 수 있다. 무수한 사건 사고들을 두 시간 남짓의 시간에 묘사하면서 무엇을 취사선택하고 무엇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는 언제나 창작자들이 고심하는 문제이고, 이 과정에서 많은 것들이 생략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영화가 노동자 대투쟁까지 묘사하지는 못한 데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고 수긍하는 편이다. 또한 영화 개봉 직후 일각에서 일었던, “영화가 투쟁하는 여성들을 지웠다”는 데에 그리 동의하지 못한다. 애초 이야기 구조가 이러하고 ‘정치 스릴러’ 장르의 공식을 느슨하게 취하는 영화다. 특히 트위터에서 <1987>을 향해 일었던 비난엔 영화를 보지 않은 채 행해진 것들이 점점 확대된 경우가 너무 많고 컸다. 사실로 따지자면 오히려 <1987>은, 현대사를 다루는 근래 몇몇 영화들 중에서도 시위하는 여성들이 가장 많이 나오는 영화기도 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트위터에서 나온 각종 반박들을 황진미 영화평론가가 총집합해서 정리해 놓고 있다. (여기에는 내가 썼던 트윗들의 흔적도 슬쩍 끼워져 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했듯, 연희가 이한열을 처음 만나게 되는 명동 코리아극장 건물 앞 기습시위 장면에서도 여학생의 숫자는 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대오 제1열을 거의 차지하다시피 하고, 이는 연세대 교문 앞 시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최루탄이 터지기 전 대오 1열은 거진 여학생들이었다. 연희가 이한열을 다시 만나게 되는 ‘만화사랑’ 동아리의 비디오 상영회 장면에서도, 이 상영회를 진행하며 5.18 비디오를 소개하는 것은 여자 선배다. 영화 속에서 이한열이 그녀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아마도 그 여선배가 동아리의 회장이거나 제일 나이와 권위가 많은 선배였을 것이라 짐작 가능하다. 또한 이승한 평론가가 “
영화 ‘1987’이 ‘연희의 영화’인 이유”에서 훌륭하게 지적했듯이 이 영화의 주인공은 결과적으로 연희이며, 결국 <1987>은 연희의 영화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영화가 여성들을 배제하고 생략했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영화에 비중 높은 여성 캐릭터가 절대적으로 적기 때문일까. 보는 관객들 역시 눈에 보이는 여성을 습관적으로 생략하는 관성에 젖어 있었기 때문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뿐일까. 나는 <1987>이 여성들을 지웠다는 데 동의할 수 없지만, 이 영화가 싸우는 여성들을 잘 살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공들여 설정되고 연출되고 연기된 연희 캐릭터와 달리, 많은 다른 여성들의 캐릭터는 카메라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심지어 이름 한 번 불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는 화면에 그 어떤 다른 영화들보다도 싸우는 여성들을 많이 담고 있지만, 관객의 망각과 생략을 영화가 돕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김정남이 은신하던 절에서 탈출한 뒤 한병용이 그의 안위를 확인하며 새로 지령을 받는 전화통화 신에서,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여성 투쟁가라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그래서 그 여성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시위 신들에서 무수한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그 여성들은 그저 대중의 한 명으로 등장했다가 바삐 사라진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연세대 장면들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조연 여성 캐릭터 한 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바, 바로 이한열이 소속돼 있던 동아리 ‘만화사랑’의 여자 선배이다.
그녀는 꽤 여러 차례 화면에 등장한다. 먼저 그녀는 만화사랑 상영회를 앞에서 진행하고 5.18 비디오를 소개한다. “지금부터 만화사랑 비디오 상영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보실 영화는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입니다. 외국에서 찍은 거예요.” 그리고 비디오테크에 비디오를 꽂는다. 전두환의 호헌 담화 방송을 지켜보고 반응하는 여러 시퀀스 중 만화사랑 동아리방의 장면에서도 몇 차례 그녀의 대사가 있다. 남자 후배가 “7년을 또 해먹겠다고?”라고 반응하자 그녀는 “(단지 7년이 아니라) 체육관 선거로 ‘평생’을 해먹겠다는 것”이라고 본질을 꿰뚫는 정정을 해준다. 또한 그 옆의 후배의 뒷통수를 때리기도 한다. 그녀는 연세대 교문 앞 시위 장면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최루탄 때문에 대오가 흐트러지고 이를 본 이한열은 온몸의 힘을 끌어올려 피 끓는 구호를 외친다. 이 구호에 시위대는 다시 대오를 정비하고 이한열은 맨 앞에서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검은 현수막의 한쪽 깃대를 들며 시위대를 이끈다. 바로 그때, 다른 쪽 깃대를 드는 두 명 중 한 사람이 바로 ‘만화사랑 여선배’이다. 즉, 그녀는 이한열과 함께 시위대의 맨 앞에서 선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자주 등장하는 그녀를 ‘만화사랑 여선배’라고만 지칭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극 중에서 단 한 번도 이름이 불리지 않기 때문이다. 짧게 등장하는 연희의 친구조차 ‘정미’라는 이름이 드러나는데, 그녀의 이름은 끝내 관객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이 비판이 사소한 트집잡기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가 박종철로 시작해 이한열로 끝나는 영화, 그럼으로써 무수한 열사들 중에서도 박종철이라는 이름과 이한열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영화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그리고 ‘이름을 부르고 기억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다시 짚어본다면, 이렇게 여러 차례 중요하게 등장함에도 이름이 지워져 있다는 사실은 의아하기 짝이 없다. 더구나 그녀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장면들에서도 카메라의 포커스는 이한열에게만 맞춰져 있다. 비디오 상영회에서도 카메라는 만화사랑 여선배를 제대로 보여주기보다 이한열에 집중한다. 호헌 방송을 보는 동아리방 신에서도, 그 신은 곧 “뭐라도 해야 한다”며 등사판을 잡는 이한열을 보여주기 위한 숏이 돼 버린다. 교문 앞 시위 장면에서 그녀가 이한열과 함께 맨 앞에서 현수막을 잡고 전진했다가 또 다시 발사된 최루탄에 얼굴에 먼지를 잔뜩 얹은 채 쓰러져 있을 때, 그녀의 모습은 ‘이한열의 시선에 포착된’ 장면으로 처리된다. 그녀의 존재감이 덜한 것이 과연 이름과 얼굴이 덜 알려진 배우의 연기가 부족했던 탓일까? 아니, 그러기에 그녀의 등장 신은 오로지 이한열을 보여주기 위한 기능에 충실히 종속돼 있다. 이 영화에서 고집스럽고도 일관되게 보이는 정신, 그러니까 “모두가 주인공”이고 그렇기에 조연과 단역의 캐릭터도 섬세하고 사려깊게 다루면서 미도파 앞 대규모 집회 신을 영화의 마지막으로 삼았던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러한 처사는 의아스럽다.

나는 <1987>을 두 번 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많은 부분 한계와 아쉬움을 느꼈으며, 그 아쉬움의 상당 부분을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이 영화가 많은 고뇌의 산물이자,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선택과 집중을 매우 영악하게 했고, 그에 따른 생략을 모두 문제 삼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탁월한 연출과 연기와 미장센들에, 그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매우 높은 완성도를 성취해냈다고도 생각한다. 영화의 종결 시점 이후 이어지는 역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집회 신으로 마무리지은 것 역시 훌륭하고도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악당인 박처장의 묘사였다. 영화 전반부 ‘악의 축’이었던 그도 영화의 후반에 가면 그저 몸통을 위해 잘리고 버려지는 ‘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끔찍함을 굳이 대사로 뱉는 것은 악당 캐릭터의 존재감을 키우고 그의 악행을 합리화하거나 변명거리를 주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이 장면은 어쩌면 오히려 이 영화에 환호하는 이들을 위해 보내는 섬뜩한 경고와도 같은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이 인물처럼 역사의 괴물이자 악당일 수도 있다.”는.
그럼에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고 어정쩡함이 남는다. 이것을 그냥 무시해도 좋은 걸까. 투쟁하는 노동자의 존재가 연희 아버지의 설정을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 및 예언되는 것을, 그래도 흔적은 남았다고 만족해야 할까. 연희 캐릭터가 다른 흔한 ‘각성’ 캐릭터와 달리 내면의 갈등과 자기 스스로의 선택과 경험과 고집을 갖고 점차 성장해 가는 인물이라는 점에, 또한 지금의 관객들을 그 시대로 안내하고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진짜’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기뻐하며 다른 여성 캐릭터들이 그려지는 방식에는 눈을 감아도 좋은 걸까. 실존인물 두 명(한재동과 전병용)을 합쳐 한병용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융통성이, 왜 다른 여성 투쟁가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데까지는 발휘되지 못했을까. 다른 캐릭터들이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에 충실한 방식으로 은폐, 조작을 막아내는 데 기여했던 것과 달리, 이 한병용 캐릭터는 교도관으로서 메시지를 빼돌리는 것뿐 아니라 재야인사와의 접촉, 또한 연희와 혈연이라는 연결 고리로서 연희를 자극하는 기능까지 너무 여러 기능성을 부여받는 캐릭터가 되지 않았던가. 또한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전국 각지의 실제 집회 장면의 기록화면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투쟁의 역사가 서사화되는 과정이 또다시 ‘서울 내 명문대 남성 학생’ 및 그들의 사건 중심으로 재구성되는 데는 대하여 그저 ‘또 다른 영화’를 기약하는 것으로만 아쉬움을 달래도 좋은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1987>에만 제기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후 만들어질 ‘항쟁을 소재로 한’ 또 다른 영화들에 <1987>이 귀감이 된다면, 이 숙제들 역시 함께 물려받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