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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주체'라는 말이 '욕'의 용도로 나를 향해 발화되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이제껏 써온 글들, 앞으로 쓸 글들 모두 "말하고자 하는 하위 주체"의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을. 그 몸부림을 기록하고 축적하고자 한다.

극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영화를 보고 잡글을 쓴다. 틈 나는 대로 맥주를 마시고 춤을 춘다.

엄기호님의 글(링크: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05292059005&code=990100)과 페미디아에서 esse님이 쓰신 비판글(링크: http://femidea.com/?p=706), 그외 다양한 반응글들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거대한, 그러나 필연적인 맥락의 오독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성화의 부모님이라고 지칭된 글 속 인물들 관계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직접적인 물리적 가정 폭력을 가했다는 정황은 확실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엄기호님의 글 중간에 치료를 받던 남편이 아내에 대한 '폭력'을 인정했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그 '폭력'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에게 다소 혼란을 준 것도 같다. 마치 무수한 성희롱도, 추행도, 강간도 모두 '성폭력'이라는 단어로 포섭되지만 역으로 우리가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는 곧바로 '강간'을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처럼. 단적으로 글의 첫 문장에서 '자주 다퉜다'는 표현이 나온다. 가정폭력과 다툼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나는 엄기호님 글에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한국에 흔한 일방적이고 독선적이며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그에 매번 문제제기와 저항(한국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제기/저항은 곧장 '말대꾸'란 단어로 폄하되곤 한다)하던 어머니, 그럼으로써 다툼이 끊이지 않던 관계에서 어머니가 마침내 그들에게는 최후의 카드였을 '이혼'을 통해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고, 그 국면에서 '선택'을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로 읽었다. 이 글을 읽고 나는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찝찝함을 느끼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변화를 촉구하며 싸운 이를 통해 자신의 기득권자의 위치를 깨닫고 이 관계가 폭력적이었음을 인정하는 화답을 쟁취해낸 이야기로, 그리하여 변화를 위해 실천을 끌어낸 이와 그 실천을 행함으로써 진정한 파트너로 거듭난 드물지만 귀한 사례로 느껴졌다. 다소 위악적이고 (글의 주인공들께 무례하게)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고쳐쓰기 불가능하다는 한남충을 고쳐쓴 매우 드문 성공 사례'랄까.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 엄기호님은 트위터에서 그 글 속 가정의 '폭력'이 물리적 가정 폭력의 범주가 아니었다고 직접 밝혔다.) 내가 감동한 포인트가 '그들이 결국 이혼하지 않았다'가 아니라는 것을 굳이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79.jpg

프리다 칼로, "상처 입은 사슴"(1946)


폭력적인 관계에서 이혼을 하거나 그것도 안 되어 야밤에 아이들을 들쳐업고 도망가는 것도 투쟁이고 싸움이고 저항이다. 그리고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계속 문제 제기를 하고 다툼을 벌이고 상대를 병원에 보내는 것도 투쟁이고 싸움이고 저항이다. 물론 우리가 전자를 주로 권하는 것은 후자의 성공율이 희박하기 때문이며, 노력에 비해 성과는 미비하고 오히려 '처벌'로서의 보복이 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글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그렇게 생존자이자 싸운 여성이었고, 드물게도 싸움의 성과를 쟁취해낸 여성이다. (권명인님의 글 링크 참조: https://www.facebook.com/saramsari/posts/1007429539340132?pnref=story) 그 어머니가 가부장제의 폭력을 연장시키고 공고화시킨 여성 내지 20년 동안 맞고 살며 저항도 하지 못한 불쌍한 여성 정도로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건 매우 우려스럽다. 이 역시 여성 주체에 대한 폭력이다. 저항했던 이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그를 대상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페미디아 esse님의 비판글 역시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나는 처음에 엄기호님의 글을 읽고 혹했고 감동을 받았지만, 두 번째 다시 읽고 혼란에 빠졌다. 위에서 말했듯 감동의 한편에 석연치 않은 찝찝함이 계속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찝찝함이 esse님의 비판글을 읽고 풀린 것은 아니다. 아니, 비판글을 읽고 오히려 혼란이 더 커져버렸다... 여전히 내 찝찝함과 혼란을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는데, 그나마 내가 인지하고 말할 수 있는 혼란의 이유는 두 가지로 다음과 같다.

1) 분량이 한정된 지면에 누군가의 사례를 이야기화해서 삽입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했을 생략 때문에 이야기의 구멍이 너무 많다. 이 구멍은 '폭력'에 대한 혼란뿐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서술의 불균등 역시 포함한다. 나 역시 처음 이 글이 가정 폭력과 학대의 사례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2) 그 글에 소개된 사례가 매우매우 드물다는 냉소와 자조. 난 그 글이 실화인지조차 의심스러웠는데, 결과적으로 필자의 윤리를 함부로 의심하는 무례한 짓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던 것은 그것이 현실에서 너무나 희귀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실화라고 해도 너무 판타지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적 오독'이 과연 '폭력'이란 단어의 개개인의 혼란이 중첩되기만 한 결과일까. 그러한 오독이 '집단적'이라면, 이 집단적 오독이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여기에 더 큰 맥락이 존재했고 이 오독은 다소 필연적이라 생각한다. 이 필연적인 맥락이란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다.

나는 위에서 이 글의 아버지를 '한국에 흔한... 가부장적인 아버지'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이 '흔한'이라는 표현에서부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자기 멋대로 자신의 편안과 취향을 강제적으로 가족의 룰의 기준으로 삼고 독선적이며 가부장적인' 아버지, 그러나 '가족 구성원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는' 아버지가 흔하다고 믿고 싶어한다. 가정 폭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윤리적인 가정의 상에서 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의 현실에서는, (물리적) 가정 폭력이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가정이 그렇지 않은 가정들만큼이나 흔하다. 다만 이것은 언제나 '남의 얘기'로 혹은 '익명'에 의지해서만 발화될 뿐이다. 한국의 가정 윤리란, 집에서 맞은 것을 밖에서 입에 올리는 걸 금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해를 고발하고 증언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며, 그 용기에 대한 보상(!)이란 많은 경우 격려와 위로, 대응 방안과 예방책 대신 "집안 망신 시킨다", "제 얼굴에 침 뱉는다"는 손가락질, 나아가 '가정 교육' 운운을 빌미로 해 오히려 피해자를 향한 편견과 차별이기 쉽기 때문이다.

엄기호님의 글의 애초 의도와 상이한 반응들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기인한 부분이 크다고 생각한다. 앞서 나는 '폭력'이란 단어가 협의와 광의를 모두 아우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혼란에 대해 말했지만, '폭력'이란 단어의 혼란은 그것만이 아니다. 명백한 폭력인데도 그것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인지 부조화 현상, 즉 "때린 건 사실이지만 폭력을 가한 건 아니"라고 말하는 광범위한 현상들도 포함한다. 강자-가해자는 자신이 행한 나쁜 짓을 '나쁘다'고 가치 평가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러한 부정적 가치 평가를 저지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시적으로 폭력을 당하고 사는 이와, 매일 맞고 사는 건 아니라도 언제라도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며 사는 이와, 내가 당하는 폭력에 폭력이란 이름이 제대로 붙지 못하는 걸 상시적으로 겪는 이와, 폭력의 위협 자체를 아주 가끔씩만 느끼는 이와, 아예 위협을 느낄 일이 없는 이가 느끼고 감각하는 세계란, 슬프게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엄기호님의 글에서 발생한 혼란은, 물론 정해진 지면의 분량적 한계와 표현의 다소 모호함 같은 것들도 있겠지만, 그 글만이 아닌 모든 '글'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기반할 수밖에 없는 우리 세계에 훨씬 광범위하게 폭력이 자행되고 있고 이 폭력이 제대로 '폭력'이라 불리지도 못하거나 '남의 얘기'로 겨우 유통됐던 현실과 더 큰 관련이 있다 생각한다. 또한 상시적인 폭력을 겪는 이들의 이야기가 대체로 (함께 연대해 저항하려는 의지는 있지만) 그 폭력을 피상적으로 인지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입을 통해 겨우 발화됐던 현실도. 그 한계를 폭로한 것이 esse님의 글이라고 생각한다. esse님의 글은, 엄기호님의 글이 기반하고 있는 인식을 포함해 우리 사회의 어떤 합의의 너무나 명확한 한계를, 그리고 강요된 침묵을 폭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나는 esse님의 글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되 엄기호님 글에 대한 비판글로서는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피해의 크기가 발언권의 크기와 비례하는 경향은 매우 자연스럽지만, 그것이 언제나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국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의 피해자로서의 위치를 강조하는 것은 감춰진 폭력의 현실과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자칫하면 절대적 피해자-약자로 위치를 영구히 고착시킴으로서 생존자, 저항자로서의 이행 가능성을 오히려 저해할 위험을 동시에 품는다. 나의 피해와 투쟁을 강조하다가 의도와 상관없이, 혹은 오히려 의도와 상반되게 다른이의 피해와 투쟁을 결과적으로 폄하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나는 esse님의 글 역시 이러한 위험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우리의 입장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떤 젠더이냐 따라, 어떤 계급이냐에 따라, 직업이 무엇이냐에 따라, 작게는 여러 형제자매 중 첫째냐 막내냐에 따라서도. 그러나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설득하고 때로는 싸우면서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누군가는 상시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겪지만 누군가는 별로 겪을 일이 없는 폭력과 고통을, 이야기하고 공유하고 공감하고 연대하고 함께 싸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엄기호님의 글이 여전히 귀한 글이라 생각한다. 이 온갖 역한 인간의 본성들 앞에서도 불구하고 불의에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것, 혹은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곧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 세계를 더 낫게 만드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글의 어머니가 바로 그러한 변화를 이끌어낸, 저항하고 싸우는 사람이었다. 물론 이 신념이나 믿음은 그렇게까지 강한 것이 못 된다. 방금 전에도 나는 위에서 "그런 일은 너무 드물어서 이건 실화라 해도 판타지"라고 썼다. 이러한 냉소와 자조와 의심은 내 개인적인 피해망상이나 염세주의가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그럼에도 세상에 이런 방식 혹은 저런 방식으로 계속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 싸움들로 인해 우리의 세상이 과거보다 더 나아졌고 앞으로도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순 없다. 이 연약하고 매번 흔들리는 믿음이 조금만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해 엄기호님의 글이 쓰여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사례를 통해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것이라고. 아마 앞으로도 누군가에겐, 스스로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바로 옆 사람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용기를, 흔들리지만 다시 붙잡고자 하는 믿음과 신념을, 격려하는 글이 될 것이라고. 

댓글 '6'

사랑과삽입

2016.06.06 19:12:44

성화 어머님이 "더 이상 그런 말은 듣고있지만 않겠다"라고 '난입'하니 언론사에 다니던 애비는 "내 불찰이다"라며 사표쓰고 애비 지인들이 나서서 "너희가 아버님 말씀을 오해한 것"이라면서 방정 떠는 격.

노바리

2016.06.07 07:29:13

엄기호님 글에 등장한 '아내의 문제제기에 마침내 개심한 남편'의 서사를 '남편에게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해 마침내 원하는 걸 쟁취해낸 여성'의 서사로 굳이 다시 고쳐쓰는 과정은 '엄기호 대령 구하기'에만 목적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엄기호님의 글에 계속 느꼈던 찝찝함의 이유 하나를 더 찾은 것 같네요. :-)

소년의노래

2016.06.06 21:40:58

이렇게 꼼꼼하고 성실한 독해.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부분입니다.

노바리

2016.06.07 07:30:36

고맙습니다.

김나영

2016.06.06 23:09:23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성별 위계질서룰 이용한 가정폭력은 물리적 폭력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정서적, 성적, 경제적 폭력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라 물리적 폭력을 뜻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서 반드시 엄기호 선생님 글을 읽는 의미가 달라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을 보태 봅니다. 저는 가정폭력 생존자들을 상담하는 일을 하고 있어요. 비가시적이고 비물리적인 폭력도 때로는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폭력 만큼이나 벗어나기 힘들고 깊은 피해를 불러옵니다. 여성혐오와 성별 위계질서, 권력과 통제를 이용한다는 점은 물론 공통이지요.

노바리

2016.06.07 07:42:57

페미디아의 esse님의 비판글과 제가 접한 여러 격한 반응글들이 주로 물리적 가정 폭력을 근거로 들었고 그에 집중하다 보니 제 글도 물리적 가정 폭력 한정으로 치우치며 한계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날카롭고 좋은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경제적, 성적, 정서적, 심리적 학대와 폭력 역시 가정 폭력(그리고 연인 간이라면 데이트 폭력)에 포함되지만 눈에 보이는 상처(증거로 삼을 만한)를 즉각적으로 남기지는 않으면서 교묘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당하는 쪽에서 그것을 '폭력'으로 인지하는 것도, 여타의 경우 제3자에게 '폭력'이라 증명하는 것도 더 까다롭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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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님의 글(링크: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05292059005&code=990100)과 페미디아에서 esse님이 쓰신 비판글(링크: http://femidea.com/?p=706), 그외 다양한 반응글들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거대한, 그러나 필연적인 맥락의 오독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성화의 부모님이라고 지칭된 글 속 인물들 관계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직접적인 물리적 가정 폭력을 가했다는 정황은 확실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엄기호님의 글 중간에 치료를 받던 남편이 아내에 대한 '폭력'을 인정했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그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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