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위 주체'라는 말이 '욕'의 용도로 나를 향해 발화되는 순간 깨달았다. 내가 이제껏 써온 글들, 앞으로 쓸 글들 모두 "말하고자 하는 하위 주체"의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을. 그 몸부림을 기록하고 축적하고자 한다.

극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영화를 보고 잡글을 쓴다. 틈 나는 대로 맥주를 마시고 춤을 춘다.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의 홍보 포스터를 처음 본 순간 내 눈은 그저 샤를리즈 테론의 모습에만 고정되었다. 시리즈의 원래 연출자인 조지 밀러가 돌아왔다는 사실도, 꽤 호감을 갖고 있는 배우 톰 하디가 출연한다는 사실도 관심 밖이었다. 아니, 나는 오히려 노 감독이 왕년에 자신이 히트시켰던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되돌아온 것에 대한 일말의 편견과 걱정도 함께 갖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를 박박 깎고 얼굴에 검은 기름칠을 한 채 도전적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샤를리즈 테론의 모습을 보라. 그녀가 누군가. 사적으로 가정 폭력의 생존자였고, 도무지 인간의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미모를 지녔으며, 이 탓에 남자 주인공의 주변 배역만 주어지는 역차별을 당했었고, 그에 저항하고자 <몬스터>에서 미모를 지우고 배우로서의 야심을 온몸으로 천하에 드러냈던 사람 아닌가. 그녀라면, 아무리 옆에 ‘요즘 뜨는’ 남자 배우가 있더라도 그저 그를 빛내주는 역할은 아닐 거라고, 훨씬 중심적인 역할을 할 거라고 짐작했다. <핸콕>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물론 이 예상과 기대가 맞았다. 그리고 감독에 가졌던 우려와 편견은 역시 괜한 기우였다.

영화를 보다가, 그리고 SNS에서 이 영화에 대한 여성 관객들의 열광을 지켜보다가 문득 흥미로워졌다. <매드 맥스> 시리즈는 한국에서 그렇게까지 성공적으로 안착해 꾸준히 인기를 누렸던 프랜차이즈가 아니었다. 몇 년 전 우리 극장에서 <매드 맥스>를 35mm로 상영했을 때도 그다지 많은 관객들이 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여성 관객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는 시리즈는 더 더욱 아니었다. 이 시리즈의 이미지를 축조하는 요소 세 가지를 한 마디로 요약해 보자면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이다. 매우 마초적이고 남성적이며, 여성을 언제나 대상화하고 트로피 혹은 그루피로나 위치 짓는 서브 컬처 말이다. 그나마 한국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헤비메탈 장르는 언제나 검열의 대상이었고, 디젤펑크는 소수의 취향이었으며, 폭주족은 (기묘한 동경을 동반하면서도) 아예 경원시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매드 맥스> 시리즈는 모두 한국의 소위 ‘영화 부흥기’, 그래서 다양한 영화들(과 문화들)이 소개되고 감상과 숙고와 토론의 대상이 되었던 90년대 이전을 이미 지나쳐간 80년대의 유산이었다. 액션 영화 프랜차이즈로 성공했다지만 시리즈의 세 편 중 가장 많은 물량이 투입된, 소위 ‘할리우드 액션’으로 제작된 2편 <로드 워리어>는 여기저기 검열로 삭제된 누더기 꼴로 개봉했고, 9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간신히 비디오로 제대로 소개됐다.

여기서 잠시 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면서 변했던 문화 지형을 간단히 상기해 보자. 헤비메탈의 전성기가 시대가 지나고 도착한 90년대의 얼터너티브 락, 그리고 슈게이징/브리티시 팝은 남성성의 과시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오히려 헤비메탈의 마초적 남성성에 대한 조롱도 포함하고 있었다. 근육질의 액션 스타 실베스터 스탤론과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양분했던 액션 영화 역시 힘보다는 주로 날렵함과 잔꾀로 승부하는 마르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브루스 윌리스와 멜 깁슨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어야 했고, 이들은 액션뿐 아니라 코미디나 멜로 같은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했다. (물론 80년대에도 이미 호리호리한 액션 스타로 해리슨 포드가 있기는 했다.) 역으로, 키애누 리브스나 톰 크루즈, 니콜라스 케이지, 지나 데이비스처럼 원래 액션이 전문 분야가 아니었던 배우들이 액션 장르로 진출해 영웅으로 활약했다. 그런 면에서 멜 깁슨과 <매드 맥스> 시리즈는 해리슨 포드와 함께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매드 맥스>의 멜 깁슨은 80년대 강한 남성성을 내세우는 액션 영화의 특징 안에서 때 이르게 90년대식 액션 영웅의 경향을 예고하고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멜 깁슨은 90년대 가장 유명한 액션 스타 중 한 명이 되었다.

fury road.png



더없이 ‘남성적인 장르’ 안의 여성 주인공들

30년 만에 새로 나온 <분노의 도로>는 “폭주족, 디젤 펑크, 헤비메탈”이라는 원래 시리즈의 인장이라 할 만한 기호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영화에 누구보다도 열광하고 있는 이들은 바로 여성 관객들이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퓨리오사라는 여성 액션 영웅과 이를 연기한 샤를리즈 테론 때문이다. 주로 남자들에게 주어지는 각종 무기류와 디젤 엔진들과 격렬한 육체 액션, 그리고 영화의 중심 서사를 이끌어가는 배역의 기능을 능숙하게 해내며 주인공인 남성(기억하자, <매드 맥스>의 시리즈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미친 맥스이다)를 오히려 압도하는 여자 주인공. 하지만 단지 이것뿐인가? 남자들을 능가하는 ‘여전사’의 이미지는 그 이전에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지나 데이비스, 린다 해밀튼, 시고니 위버, 안젤리나 졸리, 미셸 로드리게스, 제시카 비엘, 케이트 베킨세일, 최근에는 소피아 부텔라까지. 그러나 샤를리즈 테론의 퓨리오사가 다른 여전사들과 다른 점은, 먼저 배우인 샤를리즈 테론이 일반적인 ‘여성 액션 영웅’들과 달리 영화에서 여린 피해자를 자주 연기했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 그런 그녀가 그려내는 퓨리오사가 그저 전사 중 한 명이 아니라, 아기를 낳는 노예로 전락한 여자들을 이끌고 탈주를 감행하는 ‘지도자’라는 점이다. 그녀는 홀로 싸우지 않는다. 그녀의 목표는 <매드 맥스> 시리즈가 전제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를 지배하는 유일한 덕목인 ‘생존’이 아니라, ‘구원’이다. (그런데 그녀는 과연 구원을 ‘받고’ 싶은 것인가, ‘하고’ 싶은 것인가?) 이 리더십을 따르는 이들은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찾아내고 제 몫을 보태면서 일반적인 상하의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적 협력 관계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이 수평적 협력 관계가 위급하고 다급한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영화 속의 맥스와 눅스뿐 아니라 스크린 밖 관객에게도 성공적으로 설득해낸다.

그런데 퓨리오사는 과연, 정말로 ‘지도자’일까? 짧게 자른 머리와 잘린 팔, 그리고 이마에 묻힌 검은 기름칠에서 드러나듯 자신의 여성성을 박탈당했거나 스스로 지운 존재이다. (어찌 보면 스스로의 여성성을 지운 채 남자의 옷을 입고 활약했던 선대의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전쟁 무기와 트럭을 다루는 데 능숙한 그녀가 그 자신도 (아마도 아기를 낳기 위해) 납치된 여성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탈주가 곧 자신의 탈주이기도 하다는 점이 아니라면, 그저 용병이 될 수도 있었으며, 영화에서 실질적으로는 ‘조력자’에 더 가깝다. 그녀의 다른 위치는 다른 이들의 탈주의 이유를 ‘희망’으로, 지신의 이유를 ‘구원’으로 구분하여 꼽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위치는 그녀들의 탈주와 전복을 돕는 맥스의 위치와도 닮았으며, 그녀들과 전혀 상관이 없던 맥스를 조력자로서 중간에서 매개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퓨리오사가 맥스의 분신이라는 분석에 일부 동의한다.  그러나 자기 부족의 땅에 도착해 ‘어머니’의 ‘딸’로서 자신을 호명하는 데서, 자신이 떠나 있던 기간을 ‘햇수’가 아닌 ‘일수’로 말하는 데서, 그 누구보다 자신의 ‘여성성’을 확고하게 지키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여성-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여성성을 거세한, 혹은 여성성을 박탈당해 여성-노예가 아닌 유사-남성으로 살았던 그녀가 자신의 여성성을 되찾는 과정, 어쩌면 퓨리오사에게는 그것 역시 ‘구원’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들의 진짜 지도자는 누구인가? 스플렌디드이다. 처음에는 그저 임모탄의 아내 중 가장 아름다운 한 명에 불과한듯 등장했던 그녀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다른 아내들-동료들의 정신적 지주였고, 이 탈주를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한 장본인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녀는 심지어 말 한 마디로 눅스를 죽이려는 퓨리오사를 제지할 힘을 가졌다. 그녀의 죽음에 다른 여성들이 슬픔과 애도를 넘어서서 애초의 탈주 자체를 포기하려 할 정도로 절망을 느끼는 것, 그녀의 생전의 말을 ‘유지’로 되새기며 탈주의 의지를 다시 다지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도 스플렌디드의 지도자로서의 존재감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한 지도자의 죽음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임모탄 조의 바퀴에 깔리고, 그의 태중 아이와 분리되면서 죽음을 맞는다. 그렇기에 퓨리오사는, 정확히 표현하자면, 스플렌디드의 사망으로 지도자와 상관을 적에게 잃은 전투 지휘관에 더 가깝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말미가 다가올수록 퓨리오사의 죽음을 예감했다면 퓨리오사의 바로 이러한 위치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거의 죽기 직전의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그 편이 일반적인 드라마터지에 좀 더 어울린다. 새로운 시타델에서 과연 그녀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인가? 임모탄 조를 대신하는 또 다른 독재자가 될 것인가? 어쩌면, “군인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정책에 의해 쫓겨나 맥스처럼 방랑의 길에 오르지는 않을까?

fury road 2.jpg




여성을 배제해온 남성들의 서브 컬처?

앞서 나는 이 영화가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이라는 3개의 필수 요소를 여전히 강조하면서도 (시리즈의 이전 편들과 달리) 여성들의 유난한 지지와 사랑을 받는 현상에 대해 얘기했다. 그런데 과연 폭주족(으로 대변되는 바이크 문화), 디젤펑크, 헤비메탈은 여성들이 싫어하고 즐기지 않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인 서브 컬처인가? 남성성과 마초성을 과시하고 강조하는 이 서브 컬처들이 여성들 일반과 친밀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서브 컬처가 온전히 남성들의 것이라는 관념 역시 착시에 가깝지 않을까? 이 컬처들은 적어도 한국에서는 남성들에게도 소수의 문화였다. 그리하여 다시 제대로 말하자면, 남성 향유자들에 어필하면서 그들의 팬덤을 기반으로 한 이 문화들은, 여기에 관심을 갖거나 향유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진입 장벽을 높이고, 이미 향유하고 있는 여성들은 애써 배제하거나 부정하거나, “진정한 향유자가 아닌 다른 외적인 것에 열광하는” 팬덤이라며 평가절하하거나, 그루피 혹은 숭배자의 자리만 허락하는 식으로 여성을 주변화해 왔다고 생각한다. 이는 스포츠 등 과거 남성들만의 영역인 양 향유됐던 다른 문화와 팬덤에서도 여성들의 향유를 차단하거나 평가절하하기 위해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컬처 요소가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에 사용되는 방식은 이중적이다. 예컨대 얼굴이 지워진 워보이 기타리스트가 만들어내는 전자 기타 사운드는 철저히 임모탄 조의 워보이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증폭되는 ‘군가’의 기능을 수행한다. 전투가 시작될 때마다 울려 퍼지는 이 사운드는, 몸이 고무줄에 고정된 기타리스트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를 이용한 맥스의 액션이 펼쳐지기도 한다)에서 “남성들이 자신들만의 것이라며 전유하려 애썼던” 어떤 풍조에 대한 조롱을 공유하는 듯 보인다. 퓨리오사 일행을 추격하는 추격대들의 차와 바이크는 디젤펑크가 보여줄 수 있는 이미지들을 가장 극단적이고도 다채롭게 제시하며, 퓨리오사와 거래를 약속했던 부족의 바이크 추격 역시 우리가 ‘폭주족 바이크’라 할 때 떠올릴 수 잇는 가장 화려한  액션들을 연이어 선보인다. 거기에 워보이들이 연신 연호하는 ‘8기통!’이라는 구호, 임모탄이 자신의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 이용하는 얼굴과 성기 위의 해골 장식… 어찌 보면 이는 대단히 ‘물신화된’ 향유 방식이다. 

그와 정반대편에, 직업적/기능적 필요를 위해 도난을 방지하고 자신만이 운전할 수 있도록 장치가 심어진 전투 트럭을 유능하게 모는 여성들이 있다. 영화의 후반, 드디어 퓨리오사가 조우하게 되는 그의 부족의 ‘어머니’들은, 약탈을 위한 유인책으로 여성성을 한껏 이용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바이크를 제 몸의 일부인 양 타며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룬다. 디젤엔진들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임모탄과 워보이들의 물신화된 향유와 달리 필요한 만큼 실용적으로 응용하고 이용하는 것에 가깝다. 심지어 라이플은 맥스보다 퓨리오사가 더 잘 쏘지 않았던가. 그리고 넘쳐나는 이 “폭주족, 디젤펑크, 헤비메탈” 코드의 이미지가 주는 쾌락의 메커니즘을, 관객들은 성별이나 이제까지의 취향과 별 위화감이나 상관 없이, 때로는 킥킥대며 때로는 압도되며  동시에 학습하며 즐긴다. 

아니, 남성들의 전유물로 ‘고집’되던 서브 컬처들과 여성들의 활약이 하나의 화면 안에 나란히 담기며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것이 이미 90년대에 조롱을 받으며 ‘유행이 지나간 문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이익이 된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비난조차도 상업적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자본주의의 위대한(!) 판단이, 30년 만에 나오는 <매드 맥스>의 새 속편에 어떻게든 여성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넣도록 강제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전세계의 열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또 한 명의 여성 영웅을 얻었고, 풍성한 서브텍스트를 가진 액션 영화를 얻었으며, 노익장의 건재를 확인했고, 이미 지나간(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어떤 문화의 코드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는, 몇 십년 만에 재가동된 몇몇 액션 프랜차이즈 중 가장 만족할 만한 속편을 지닌 시리즈가 되었다. 


댓글 '9'

와이

2015.05.27 19:25:2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퓨리오사가 지도자보다는 조력자의 위치에 가깝다는 관점에 동감합니다. 스플렌디드가 어떤 말을 해서 눅스를 죽이려던 퓨리오사를 제지했는지 등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해 주시면 저처럼 영화의 디테일이 가물가물한 독자에게 도움이 될 듯하네요^^;
이건 사소한 궁금증입니다만, 퓨리오사가 자신이 고향을 떠나 있었던 기간을 햇수가 아닌 일수로 말하는 장면이 저도 인상적이었는데 어떤 관점에서 그 부분을 '여성성을 지킨 것'으로 보신 건지요?

노바리

2015.05.27 19:54:54

1) 제 해석의 뉘앙스를 좀 덧붙여서 세게 표현해 보자면, 스플렌디드가 "얜 그저 임모탄에게 세뇌된 어린 애새끼에 불과하잖아!"라고 말하며 퓨리오사를 제지했었죠.
2) 햇수가 아닌 일수로 얘기한 건, 이 사람이 시타델에서 어떤 고난과 전사를 거쳐 시타델에 살고 있었든, 시타델에 뿌리를 내리거나 정착한 게 아니라 언제나, 매일같이, 어머니의 땅을 기억하고 그곳으로 돌아가길 꿈꾸며 날짜를 헤아렸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시타델이 여성-노예나 유사-남성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곳이었다면, 퓨리오사에게 있어 어머니의 땅은, 굳이 자신의 여성성을 거세하거나 숨기거나 위장하지 않고 인간이자 동시에 여성으로서 살 수 있는 곳이지요. 그리고 이 '7천일'이라는 일수는, 자신을 먼저 어머니의 딸로서 선언/호명한 이후에 이루어지고요. 서로 연결된 대화의 맥락에서, 저는 이 7천일이 그저 고향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박탈된, 혹은 스스로 거세한 여성성을 회복하기를 기원해온 일수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노바리

2015.05.27 21:12:31

미친해님과 지리멸렬님의 조언과 제보에 힘입어 제니퍼 비엘 -> 제시카 비엘로, 기관총 -> 라이플로 고쳤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05.29 12:00:52

퓨리오사가 여성성을 지켰다는 것, 여성성을 되찾는 과정이라는 것에 공감이 힘드네요. 여성성이라는 성질의 여부와 상관없이 'x같은 세계'에서 도망가서 새로운 세계로 가는 것으로 보이는데? 복장이나 의상이 스플렌디드와 같은 여자들과 다르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할머니들 만났을 때나 다시 스타델로 돌아갈 때 딱히 여성성을 회복한다는 느낌은 들지도 않고 과연 말하고자 하는 여성성이라는게 도대체 뭔지도 의문이고. 진짜 지도자는 스플렌디드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가 눅스 죽이려는거 말렸고 스플렌디드 죽었을 때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고........스플렌디드는 눅스 죽이는 것도 말렸지만 적이 무기를 들고 코앞까지 오는데도 총을 장전하지 못합니다.그와 같은 맥락인 것이지 진짜 지도자라서 그렇다고 보기에는 좀... 후반에는 당당히 맞섭니다만 총을 들고 쏘는게 아니라 임신한 배를 가지고 방어를 하죠. 그리고 스플렌디드가 죽고나서 슬퍼한 것이 진짜 지도자를 잃은 슬픔보다 아끼는 동료를 잃은 슬픔이 아닐런지. 탈주자체를 포기하기보다 혹시나 동료가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한 10초 정도만 요동치고 흐느끼지 맥스의 합리적인 의견제시에 퓨리오사는 그대로 계속 앞으로 갈 것을 결정합니다. 물론 슬픔을 참고요. 모든 중요한 결정은 퓨리오사가 대부분했는데 왜 진짜 지도자는 ...이런 진짜 타령이 나오는지

노바리

2015.05.29 16:01:01

스플렌디드가 진짜 지도자라고 한다고 퓨리오사의 위치와 위대함이 떨어지는 것일까요? 혹은 '가짜'가 되는 것일까요?
무기에 능하지 못하고 전투 능력이 없는 것이, 지도자의 자질에서 큰 결격사유일까요? 스플렌디드가 죽은 후에도 그들은 "총알은 죽음의 씨앗"이라던 생전의 스플렌디드의 말을 인용하기까지 합니다. 정신적 지주로서의 지도자라는 의미에서 스플렌디드의 위치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그 문단의 목적입니다만, 그 부분은 동시에, 퓨리오사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퓨리오사가 시타델에서 어떻게 예외적인 존재인지, 함께 탈주한 다른 이들과 어떻게 위치가 다른 것인지 설명하는 쪽으로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단순하게 진짜 지도자가 스플렌디드냐 퓨리오사냐, 누가 스플렌디드 편이고 누가 퓨리오사 편이냐 나누는 건 이 글의 목적이 아닙니다.

소년의노래

2015.06.08 01:15:02

오늘 영화 보고 왔습니다.

비교질하는 게 유치하다는 건 알지만...파벨라에 올라온 매드맥스 관련평 중에 이 글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여성들을 주역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잇따라 개봉함으로써 여성담론이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는데 그마만큼 사회적으로도 많은 논의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부디 이 현상이 문화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기를...

코난

2015.06.21 01:58:51

지도자가 있어야 하나요?

그들은 그냥 동반자였을 뿐이에요

이 권력욕 넘치는 분들아

노바리

2015.10.30 16:41:54

이 글의 필자는 저인데 저의 해석을 두고 '분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비난하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각자 시각도 관점도 개성도 다른 파벨라 필진의 사람들을 그냥 한무더기로 싸잡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필자로서 저의 고유성과 독립성을 부정하고 싶으신가요?
저는 이 글에서 퓨리오사와 임모탄의 아내들의 관계를 '수평적 협력관계'이며 이 수평적 협력관계가 그들의 긴박한 목적과 상황에서도 매우 잘 굴러갔으며 심지어 이를 눅스와 맥스와 관객에게까지 성공적으로 설득했다고도 썼습니다.
어떤 집단이든 공동의 목표를 위해 행동할 때 서로 분업과 협업을 합니다. 그러한 분업 중엔 '리더' 혹은 지도자의 역할도 있죠. 협업을 이끌어내고 갈등과 분쟁을 조율하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기반해 판단과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지기도 하죠. 저는 리더, 혹은 지도자는 존중의 대상이며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대상이지, 절대적 복종의 대상이라거나 저 위에 있는 존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님처럼 지도자의 위치와 역할을 무조건 수직적 위계의 정점으로만 전제하는 사고와 시각이야말로 오히려 수직적이고 권력적이며 권력욕 넘치는 사고라고 반박하겠습니다.

이힝힝

2015.10.05 02:13:12

"디젤엔진들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임모탄과 워보이들의 물신화된 향유와 달리 필요한 만큼 실용적으로 응용하고 이용하는 것에 가깝다."

이 글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영화 ‘1987’이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 file [4]

  • 2018-01-07
  • 조회 수 8017

*글에 영화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1987년을 언급하는 서사들은 대체로 신기할 정도로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지운다. 학출과 넥타이부대가 다했다는 식, 혹은 ‘일반 시민’들이 그 혁명을 완성했다는 식이다. 사실 그리 신기한 일은 아니다. 이번 촛불정국에서도 “노동자들 자제요~”를 외치는 건 여전했으니까. 그나마 영화 <1987>에선 연희(김태리)의 죽은 아버지를 ‘투쟁하던 노동자’로 설정해 그 흔적을 남겼다.‬ 권영숙 선생의 표현을 빌어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연희의 아버지는 ‘체불임금 투쟁’을 했던 노동자였다. (참고: 권...

미디어오늘 강현구 기고문 ""탈김치됐으니 축하" 그들은 왜 빈곤 청년을 혐오하나"을 읽고 file [8]

  • 2016-08-08
  • 조회 수 2218

링크: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1468 ("탈김치됐으니 축하" 그들은 왜 빈곤 청년을 혐오하나 - 강현구, 미디어오늘.) 금요일 오후 강릉행 버스 안에서 저 글을 읽었다. 스마트폰으로 긴 글을 쓰는 데에 영 익숙하지 않음에도, 독수리 타법으로 힘들게 오랜 시간을 들여 페이스북에 당시 장문의 글을 올렸는데, 이를 다시 다듬고 보완하여 올린다. (사진 설명: '민중의 소리'가 게시한, 구의역 사고사 피해 노동자 추모 집회 당시 사진. 이 추모의 집회에 참석한 건 남성만도, 비-페미니스...

엄기호님의 글 "사랑과 난입" 논란에 대하여 file [6]

  • 2016-06-06
  • 조회 수 2578

엄기호님의 글(링크: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05292059005&code=990100)과 페미디아에서 esse님이 쓰신 비판글(링크: http://femidea.com/?p=706), 그외 다양한 반응글들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거대한, 그러나 필연적인 맥락의 오독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성화의 부모님이라고 지칭된 글 속 인물들 관계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직접적인 물리적 가정 폭력을 가했다는 정황은 확실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엄기호님의 글 중간에 치료를 받던 남편이 아내에 대한 '폭력'을 인정했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그 '폭력'...

메르스의 공포와 불안에 대한 어떤 '인문학적' 성찰 file [5]

  • 2015-06-14
  • 조회 수 1860

어제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어느 아파트 단지가 있는 관할 보건소와 그 아파트 관리실에 단체로 민원이 빗발쳤다. "메르스 의심 환자가 있으니 조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민원들은 하나같이 그 아파트의 몇 동 몇 호에 사는 가족을 지목하고 있었다. 메르스 확진 판정이 나온 병원에 근무하는 이와 그의 가족이었다. 그렇게, 그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 이와 그 가족은 “메르스 의심 환자”로 찍혀 신고 대상이자 조치 요구의 대상이 되었다. 지인은 그 민원을 직접 받은 이 중 한 명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실제 얘기다. 국가 방역 ...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 감상기 file [9]

  • 2015-05-27
  • 조회 수 5414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의 홍보 포스터를 처음 본 순간 내 눈은 그저 샤를리즈 테론의 모습에만 고정되었다. 시리즈의 원래 연출자인 조지 밀러가 돌아왔다는 사실도, 꽤 호감을 갖고 있는 배우 톰 하디가 출연한다는 사실도 관심 밖이었다. 아니, 나는 오히려 노 감독이 왕년에 자신이 히트시켰던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되돌아온 것에 대한 일말의 편견과 걱정도 함께 갖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를 박박 깎고 얼굴에 검은 기름칠을 한 채 도전적으로 정면을 보고 있는 샤를리즈 테론의 모습을 보라. 그녀가 누군가. 사적으로 가정 폭력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