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title>박권일의 말자지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lang="ko" href="http://fabella.kr/xe/blog2"/>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fabella.kr/xe/blog2/atom"/>
	<updated>2026-10-27T15:35:57+09:00</updated>
	<id>http://fabella.kr/xe/blog2/atom</id>
	<generator>Rhymix</generator>
		<entry>
		<title>윤미향의 &quot;일본 민주화&quot; 발언에 대한 잡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917"/>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917#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3917</id>
		<published>2020-06-10T02:11:49+09:00</published>
		<updated>2020-06-10T09:01:11+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일본사회의 비민주성과 여성혐오 문화에 대해 사석에서 가끔 이야기한다. 대부분 한국 사건을 이야기하던 맥락에서다. 그런데 한국이 일본에 비해 더 민주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혹은 반대로 일본이 더 민주적이라 할 수 있을까? 과거 형식적 민주주의 조차 없던 군부독재 시기의 한국과 당시 일본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일본이 더 민주적인 사회라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었겠으나, 2020년 현재시점에서 ...</summary>
	<content type="html">&lt;br /&gt;&lt;div&gt;&lt;div&gt;&lt;div class=&quot;ecm0bbzt hv4rvrfc e5nlhep0 dati1w0a&quot;&gt;&lt;div class=&quot;j83agx80 cbu4d94t ew0dbk1b irj2b8pg&quot;&gt;&lt;div class=&quot;qzhwtbm6 knvmm38d&quot;&gt;&lt;span class=&quot;oi732d6d ik7dh3pa d2edcug0 qv66sw1b c1et5uql a8c37x1j muag1w35 ew0dbk1b jq4qci2q a3bd9o3v knj5qynh oo9gr5id hzawbc8m&quot;&gt;&lt;/span&gt;&lt;div class=&quot;kvgmc6g5 cxmmr5t8 oygrvhab hcukyx3x c1et5uql ii04i59q&quot;&gt;&lt;div&gt;&lt;/div&gt;&lt;div&gt;&lt;/div&gt;&lt;div&gt;&lt;img width=&quot;740&quot; height=&quot;493&quot; alt=&quot;Japan_280316_Diet_Seald_01.jpg&quot;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917/083/a410dd5556196494f62c65043e216e6d.jpg&quot; /&gt;&lt;p&gt;&lt;br /&gt;&lt;/p&gt; &lt;/div&gt;&lt;div&gt;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일본사회의 비민주성과 여성혐오 문화에 대해 사석에서 가끔 이야기한다. 대부분 한국 사건을 이야기하던 맥락에서다. 그런데 한국이 일본에 비해 더 민주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혹은 반대로 일본이 더 민주적이라 할 수 있을까? &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class=&quot;o9v6fnle cxmmr5t8 oygrvhab hcukyx3x c1et5uql ii04i59q&quot;&gt;&lt;div&gt;과거 형식적 민주주의 조차 없던 군부독재 시기의 한국과 당시 일본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일본이 더 민주적인 사회라고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었겠으나, 2020년 현재시점에서 그것을 명백히 결론짓기란 어렵다. 아마 많은 이들은 &quot;정치적으로는 한국이 더 선진국&quot;이라 말하겠지만, 그리고 왜 그리 말하는지도 알 것 같지만(&quot;위대한 촛불시위!&quot;), 그러한 우열을 엄밀히 입증하는 것은 문제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논할 일도 아니다. &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class=&quot;o9v6fnle cxmmr5t8 oygrvhab hcukyx3x c1et5uql ii04i59q&quot;&gt;&lt;div&gt;윤미향 씨가 국회의원 후보 시절 &lt;a href=&quot;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772&amp;amp;fbclid=IwAR19BJ_Xdinuqt1G17USqj8hWA-tMe_YvubvffYKEM04P982jEC-LAx0BT8&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color: rgb(255, 108, 0);&quot;&gt;통일뉴스와의 인터뷰&lt;/span&gt;&lt;/strong&gt;&lt;/a&gt;에서 &quot;일본의 민주화&quot;를 언급해서 논란이 됐다. 이게 논란이 되는 이유는 윤미향 씨가 타국의 유력한(당선이 거의 확실한) 국회의원 후보였다는 것이다. 시민운동가로서 발언이라면 몰라도 제도권 정치인으로서 발언이라면 그 자체로 내정간섭으로 비칠 수 밖에 없다. &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class=&quot;o9v6fnle cxmmr5t8 oygrvhab hcukyx3x c1et5uql ii04i59q&quot;&gt;&lt;div&gt;민주주의는 단순히 말해 인민의 자기지배 원칙이고 현재 국제법이나 관행은 그 지배력의 범위를 대체로 국가 및 연방으로 한정한다. 예외적으로 세계주의가 통용되는 것은 인간 개인이 국가나 권력으로부터 그 존엄을 심각하게 침해당해 긴급한 조력이 필요한 경우다. &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class=&quot;o9v6fnle cxmmr5t8 oygrvhab hcukyx3x c1et5uql ii04i59q&quot;&gt;&lt;div&gt;그러나 우리가 타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더 본질적인 이유는 외교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실무적인 우려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국가의 민주주의나 민주화를 말할 때 조심스러워야하는 이유는, 어떤 국가의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그곳을 자기 삶의 터로 삼아 살아가는 시민 당사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class=&quot;o9v6fnle cxmmr5t8 oygrvhab hcukyx3x c1et5uql ii04i59q&quot;&gt;&lt;div&gt;어느 자민당 의원이 &quot;한국이 민주화되어야 한다&quot;고 얘기한다면 어떨까? 많은 한국인들이 불같이 화를 내거나 &quot;너나 잘하세요&quot;라고 말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윤미향 의원 후보가 일본의 민주화 운운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의 정치인은 자국의 민주주의를 증진할 책무를 가지지만,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책임을 가지지는 않는다. 당연히 그럴 권리도 없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 class=&quot;o9v6fnle cxmmr5t8 oygrvhab hcukyx3x c1et5uql ii04i59q&quot;&gt;&lt;div&gt;물론 정치인 윤미향은 전시 성노예(&#039;위안부&#039;) 문제에 대해서 일본측에 얼마든지 문제제기할 수 있다. 그것은 자국민이 구체적 고통을 겪은 역사적 사건이고 인간존엄이 결정적으로 침해당한 보편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슈가 아니라 어떤 나라의 일반적 민주주의를 운운하는 순간 &#039;선&#039;을 넘는 것이다. 윤미향이 있는 21대 국회가 벌써부터 불안해진다.&lt;/div&gt;&lt;/div&gt;&lt;/div&gt;&lt;/div&gt;&lt;/div&gt;&lt;/div&gt;&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서평] 능력주의는 차별주의다 『능력주의는 허구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575"/>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575#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3575</id>
		<published>2018-09-13T11:01:02+09:00</published>
		<updated>2018-09-13T21:49:14+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서평] 능력주의는 차별주의다 『능력주의는 허구다』 이 책 『능력주의는 허구다』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능력주의 신화를 배반하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능력 및 노력에 비례해 보상해주는 사회 시스템을 뜻한다. 능력주의를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여겨져 왔다. “그 누구에게도 차별적 특혜를 주지 않으며,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며, 타고난 계층 배경이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575/083/54389e30af972ae5988c9c9afb0aa275.jpeg&quot; alt=&quot;xxlarge.jpeg&quot; width=&quot;480&quot; height=&quot;706&quot; /&gt;&lt;/span&gt; &lt;/font&gt;&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18px;&quot;&gt;[서평] 능력주의는 차별주의다 『능력주의는 허구다』&lt;/span&gt;&lt;/strong&gt;&lt;/span&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p&gt;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 책 『능력주의는 허구다』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능력주의 신화를 배반하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능력 및 노력에 비례해 보상해주는 사회 시스템을 뜻한다. 능력주의를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여겨져 왔다. “그 누구에게도 차별적 특혜를 주지 않으며,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며, 타고난 계층 배경이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상관없이 오로지 개인의 능력에 따라 보상을 제공한다는 논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다.”(12쪽)&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스티븐 J. 맥나미와 로버트 K. 밀러 주니어(이하 저자)는 주로 미국 사례를 들어 능력주의 신화가 왜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지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한국사회에도 부합한다. 한국 역시 미국처럼 능력주의를 일종의 사회적 당위로 여기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에서 현재 능력주의가 어떻게 오작동되고 있는지를 주로 논한다. 저자에 따르면 “지금의 능력주의 신화는 잘못된 가정을 바탕으로 부유층과 특권층은 칭송하고 저소득층과 빈곤층은 부당하게 비난하는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14쪽) 능력적 요인보다 비능력적 요인(상속 등)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능력적 요인(merit factor)’은 타고난 재능, 능력, 근면성실함, 올바른 태도, 높은 도덕성, 이상적인 자질 등이다. ‘비능력적 요인(non-merit factor)’에는 부모의 경제적 자원과 가족의 계층 배경, 부의 세습, 특권의 대물림, 우수한 교육,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행운, 차별적 특혜, 태어난 시기, 시대적‧사회적 상황 같은 요인이 있다. 저자는 비능력적 요인이 현실에서 어떻게 불평등을 생산하고 또 확대시키는지에 논의를 집중시킨다. 이런 논의들을 근거로 저자는 (미국) 사회가 능력주의를 주창하지만 실은 전혀 능력주의 사회가 아님을 보인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 책의 한계는 능력주의를 주제로 삼고 있음에도 능력주의 개념에 대한 심층 분석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의 논의는 주로 비능력적 요인이 얼마나 개인의 성공을 좌우하는지, 상속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에 집중된다. 능력주의가 현실에서 잘 작동하지 않는 신기루 같은 이념이라는 점은 물론 지적되어야 하겠으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능력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더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능력’의 모호성,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능력주의조차 그 자체로 정당화하기 어렵다는 점이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는다. 먼저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한 다음, 한계를 짚어보기로 한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특권의 매개체, 교육&lt;/strong&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교육(학교)은 성공의 열쇠인가 아니면 성공의 징표인가? 이는 교육을 계층이동의 수단으로 보느냐 계층화의 결과로 보느냐라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관점을 반영한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은 교육이 성공의 열쇠라고 믿지만, 저자에 따르면 교육은 “불평등을 대물림하는 잔인한 매개체”일 뿐이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교육이 성공의 열쇠라는 주장, 즉, 교육을 계층이동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은 그동안 다양한 이론으로 뒷받침됐다. 기능적 교육 이론, 인적 자본 이론, 지위 획득 이론 등이 그것이다. 기능적 교육 이론은 현대사회에서 교육의 사회적 기능을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필요한 훈련과 기술을 제공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기능적 교육 이론은 능력주의적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으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할당되고 개인의 능력은 모든 사회 계층에게 동등하게 분배된다고 전제한다. 따라서 이 이론에 따르면 교육의 확대는 불평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인적 자본 이론은 인간을 자원으로, 자본의 한 형태로 본다. 교육은 개인이 자신의 인적 자본에 투자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인적 자본 이론 속의 개인은 노동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는 자본가가 된다. 능력주의와 강한 친연성을 지닌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지위 획득 이론은 다변량 통계 기법을 활용해 개인이 가진 심리적 특성과 특징적 태도가 교육 수준, 직업에서 비롯된 사회적 지위, 소득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한다. 그러나 지위 획득 이론은 비능력적 요인이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산업적 기회 구조처럼 개인의 능력과 무관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다. 이런 구조적 요인은 개인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요소지만 개인의 직업 선택이나 인적 자본의 가치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런 이론들과 대조되는 이론도 있다. 대표적인 게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다. 이 이론은 교육을 성공의 열쇠가 아니라 (성공의) 징표로 보고, 계층화의 (수단이 아니라) 결과라고 주장한다. 보울스와 긴티스는 『자본주의 미국의 학교 교육』에서 학교 교육이 개인의 경제적인 성공에 미치는 영향은 부분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계층에 따라 불평등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부모의 개입, 수준별 수업, 부유한 동네냐 가난한 동네냐에 따라 차이가 나는 학교 재정 등은 세대가 바뀌어도 교육의 질과 수준이 거의 바뀌지 않는 이유가 된다. 사회적 재생산 이론은 구체적으로 어떤 메커니즘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한다.”(58쪽)&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저자는 다양한 통계와 사례를 들어 사회적 재생산 이론이 더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음을 보인다. 미국의 상위 146개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 중 74퍼센트가 부모 소득 기준 상위 25퍼센트에 속하며 소득 하위 25퍼센트에 속하는 학생은 3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그런 예들 중 하나다. 사회학자 미첼 스티븐스는 『계층을 만들다』에서 학생 개개인의 능력을 반영한다는 SAT나 ACT 등의 평가 방식은 평등한 교육 기회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오히려 계층의 특권만 재생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저자가 교육 및 학교에 관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학교는 사회에 존재하는 기존의 불평등을 오히려 더 반영하고 심화시킨다. 학교는 특권층 자녀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런 자본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런 자본들이 갖고 있는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특권층 아이들에게 더 많은 보상을 제공한다. 반면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집안 아이들에게는 별 볼일 없는 교사와 질이 떨어지는 교육 과정, 수준별 수업, 부실한 학교를 배정하고 이런요소들이 만들어내는 낮은 기대치라는 자기충족적인 예언을 강요하는 등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 아이들을 벌한다.”(80쪽)&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lt;/strong&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어서 저자는 두 개의 비능력적 요인,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으로 시선을 돌린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은 ‘누구를 알고 있는가’ 혹은 ‘당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의 가치’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인맥’이다. 기회는 사회적 자본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진다. 개인과 가족의 인맥은 교육적 경제적 기회에 접근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자본은 자기 능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대부분 부모 이전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사회적 자본에 관한 선구적인 연구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에 의해 수행되었고, 미국 사회학자 제임스 C. 콜맨도 관련 연구를 축적했다. 사회적 자본의 주요 구성 요소나 자원, 그 접근 기회 중 그 어느 것도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자원이 존재하고 그 자원에 접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사회적 자본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문화적 자본(cultural capital)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알아야할 모든 것, 규점과 가치관, 신념, 매너, 학위, 취미, 라이프 스타일 등에 관한 지식이다. 그것은 한 집단의 문화가 다른 집단의 문화보다 뛰어나다는 암묵적 인식에 기반한다. 문화적 자본은 부르디외가 아비투스(habitus, 집단습속)라고 부른 것 속에 자리잡고 있고 이를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부르디외는 또한 학교 졸업장, 즉 학력 자격증이 문화적 자본의 증거로 기능한다고 말한다.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학위를 따면 법적으로 보장되는 문화적 자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와튼 스쿨을 졸업한 MBA 소지자가 일정 금액 이상의 연봉을 보장받는 것처럼, 학력 자격증은 능력의 우월성을 보증하는 증거가 되는 동시에 자격을 갖지 않은 사람을 걸러내는 ‘여과장치’로 기능한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은 부모의 구체적이고 의도적인 실천으로 전수된다. 아네트 라루는 『불평등한 어린 시절』이라는 책에서 노동계급‧빈곤층 아이들과 중산층 아이들이 어떻게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지를 묘사한다. 라루는 중산층 부모들이 집중 양육 방식을 통해 자녀들에게 체계적이고 의식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산층 가정과 노동자 계층 가정은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되는지에 대해 각기 다른 문화적 레퍼토리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기회의 차이로 이어지는 각기 다른 사회적 역량과 문화적 역량을 갖도록 자녀들을 사회화시킨다.”(106쪽)&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오바마의 성공이 능력주의를 상징하는 사건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버락 H. 오바마는 미국의 44대 대통령이자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고 2012년 재선에도 성공했다. 오바마의 당선은 아메리칸 드림과 능력주의의 재확인이라고 칭송받았다. 조지 W. 부시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오바마의 당선이 1960~1970년대 인권운동의 정당성을 최종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오바마의 경험이 미국에서 소수 인종이나 흑인의 경험을 대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바마는 교육 수준이 높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가족 환경에서 성장하며, 어린 시절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아이비리그에서 교육받으며 자신의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을 한층 강화하며 상류층으로 공인받았다. 오바마는 물론 미국 최상류층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바마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과도한 기회와 명망 있고 영향력 있는 형태의 사회적 자본 및 문화적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특혜를 물려받는다.(124쪽)&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돈, 교양, 인맥 그리고 운&lt;/strong&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저자는 일관되게 비능력적 메커니즘이 능력을 압도한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특히 글자 그대로의 자본, 즉 돈은 교육, 사회적 자본, 문화적 자본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최강의 비능력적 요소다. 특히 저자는 소득 불평등보다 부의 격차(자산 불평등)가 더 큰 문제라고 주장한다.&lt;span style=&quot;color:rgb(255,0,0);&quot;&gt;1) &lt;/span&gt;“2010년 미국 가구 중 가장 부유한 10퍼센트가 총가계 순자산의 74.5퍼센트를 차지한 반면 하위 50퍼센트는 순자산의 1.1퍼센트를 갖고 있었다. 2007년 자료를 보면 순자산이 제로 혹은 마이너스인 가구가 24년 만의 최고치인 18.6퍼센트에 달했다. 이는 곧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 어떤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거나 혹은 소유한 자산을 능가하는 수준의 빚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129쪽)&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물질적 재산의 상속은 특권을 물려주는 절대적인 수단이다. 미국에서 세대 간 부의 이동을 살펴보면, 가장 부유한 집단과 가장 가난한 집단에서 사회적 이동은 발생하지 않는다. 중간 집단에서 작은 규모의 계층 상승과 하락이 발생할 뿐이다. 다수 미국인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의 출발점 혹은 출발점과 매우 가까운 곳에 계속 머무른다. 사회 시스템 상층부에서 엄청난 부가 세습되어왔으며 지금도 세습되고 있다. 그들의 부는 확고하며,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그 안정성이 위협받는 일은 없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부의 세습이 자녀 세대에게 주는 특혜는 단지 많은 재산 이상이다. 먼저 유년기에 누리는 ‘물질적으로 윤택한 삶’부터가 특혜다. “특권층 자녀들은 신체적‧인지적‧감정적‧사회적 발달이 좀 더 빠르고 뛰어나며, 공부를 할 준비가 좀 더 잘되어 있고, 학업 성취도도 높다. 반대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도중에 학교를 그만두고, 범죄와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좀 더 많은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 문제로 고통 받고, 많은 돈을 벌지 못하고, 가족 붕괴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139쪽)&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특권층 자녀들은 흔히 교양이라 부르는 문화적 자본과 인맥이라 부르는 사회적 자본도 함꼐 물려받는다. 그것은 물질적 재산처럼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과소평가되기 쉽지만 매우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며, 그런 비물질적 형태의 자본은 하위계층을 차단하고 배제하는 높은 허들로 작용한다. 부모가 사망하여 물려주는 재산만이 아니라, 부모가 살아생전에 자녀에게 증여하는 돈도 중요하다. 부모들은 중요한 삶의 변곡점, 이를테면 대학 진학, 결혼, 주택 구입, 출산 등의 이벤트 또는 실질, 이혼, 질병 등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자녀들에게 많은 돈을 직접 물려준다. 가족이니 당연한 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사회 전체 불평등을 고려하면, 이런 일은 상속세 한 푼도 내지 않고 부모의 재산을 자녀에게 일치감치 상속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또 하나 중대한 요소는 ‘운’, 행운이다. 경제학자 레스터 서로우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행운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복권에 당첨되거나 벼락에 맞는 것과 비슷한 확률로 벼락부자가 될 기회를 잡는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주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우는 이렇게 말한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빌 게이츠는 미국의 하위 40퍼센트에 속하는 가정이 보유한 것과 맞먹을 만큼 많은 부를 갖고 있지만 1,10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의 재능을 모두 더한 것과 똑같은 수준의 재능(IQ, 뛰어난 사업 감각,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향 등)을 갖고 있지는 않다. 빌 게이츠만큼 똑똑하고 빌 게이츠만큼 훌륭한 사업가 기질을 갖고 있으며 빌 게이츠만큼 모든 것을 잘 해내지만, 빌 게이츠처럼 많은 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엄청난 부를 얻는 것은 조건부 로또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적하다. 거기에는 반드시 행운이 필요하다.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187쪽)&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타고난 재능과 근면성실&lt;/strong&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능력주의의 중요한 전제는 타고난 재능의 차이다. 능력주의의 신봉자들은 타고난 재능의 차이는 부정할 수 없으며 그 재능에 따라 자원이 분배되는 것은 효율적인 일이므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타고난 재능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또 서로 비교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적확히 대답하기 어렵다. 과연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은 그렇게 명쾌하게 인지되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올림픽 수영 챔피언들을 오랫동안 추적하며 연구한 사회학자 대니얼 F. 챔블리스&lt;span style=&quot;color:rgb(255,0,0);&quot;&gt;2)&lt;/span&gt;에 따르면, 타고난 재능이라는 개념은 근본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실제로 성공하기 전까지는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재능을 근거로 성공과 실패를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수영선수로 성공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기초신체능력, 즉 근력과 심폐지구력의 한계치는 매우 낮으며 선수 간 차이가 그렇게 엄청나지 않다. 반면 수영선수로 성공하는 데에는 그런 차이 외에 기후가 온난한 곳에서 훈련받을 수 있는가 여부, 부모로부터 충분한 뒷바라지를 받는가 여부, 전문가로부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는가 여부가 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일반적으로 운동의 유형과 해당 종목에서 활약하는 프로 선수들의 인종과 출신 계층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 운동 실력 뿐 아니라 차별적인 기회가 재능을 펼치는 데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다. 저자는 거듭해서 강조한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타고난 재능만으로는 절대 아무 것도 안된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재능은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어야 하고, 체계적으로 ‘계발’되어야 하고, 한 단계 더 ‘발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재능이 발견되지 않으면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이는 결국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기반으로 사회적 이동성을 달성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끝나게 된다는 뜻이다.(199쪽)&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재능 외에 능력주의의 또 다른 요건은 노력, 근면성실함이다. 작가 바버라 애런라이크는 일 년 동안 웨이트리스 등 저임금 직종에 종사하며 미국 하층 노동자의 삶을 직접 경험하며 관찰한 결과를 토대를 책을 썼다. 그의 결론 중 하나는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적은 급여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잡역부, 웨이트리스, 청소부들은 매일매일 몸이 부스러질 것처럼 힘들게 일하지만 이런 힘든 노동을 추가로 더 한다고 해서 부자가 되거나 상위 계층으로 올라설 수 없다. 반면, 어떤 직업들은 이들보다 훨씬 덜 일하고 있음에도 많은 돈을 받는다. 진짜 부자들은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막대한 재산이 그 자체로 돈을 벌어들인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어떤 일을 하든 근면성실함 그 자체는 노력에 대한 대가로 가장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한 그 어떤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될 수 없다. 근면성실함은 중요하긴 하지만, 보상의 측면에서 보면 ‘무엇을 하는가’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논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사회에 엄존하는 각종 차별(인종차별, 성차별, 외모차별 등)이 부당한 특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런 차별을 철폐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부와 기회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누진세를 강화하고, 차별을 없애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강화하고, 노조가입과 노동운동을 활성화할 것을 제안하며 책을 끝맺는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능력주의라는 ‘이상’은 과연 좋은 것인가&lt;/strong&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과연 그 정도 변화로 이 극심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지만, 이 책에서 정작 아쉬운 점은 다른 데 있다. 능력주의 신화를 비판한다는 애초 취지와 달리, 상속과 세습을 비판하는 데 내용의 대부분이 할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능력주의 사회가 아니라 사실 상속주의 사회야!”&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저자는 이 문장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사례와 통계를 동원했고 그 논의들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것은 상속사회‧세습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이지 능력주의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라 할 수 없다. 능력주의를 총체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먼저 능력주의가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왜곡)되고 있는지를 비판해야 하며, 나아가 ‘진정한 능력주의’ 즉 능력주의의 이상적인 형태까지 비판해야 한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능력주의를 다루는 대다수 담론들은 상속과 세습의 악덕을 비판하며 능력주의의 미덕을 옹호하는 데 머무르고 만다. 저자는 이 책에서 능력주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지만, ‘진정한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데까지 이르지도 못한다. 저자는 어떤 부분에서 ‘진정한 능력주의’라는 것이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서술하다가 또 어떤 부분에서는 ‘진정한 능력주의’가 실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초반부와 후반부의 서술이 달라진다. 이를테면 다음 대목을 보라. “학력 자격증은 개인이 얼마나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능력주의가 위협을 받는다.”(79쪽) “진정한 기회평등을 이뤄내고 오직 능력만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다”(333쪽)&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저자가 능력주의라는 이상 자체가 문제일 수 있음을 아예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모두 잘 인정하려 들지 않는 한 가지 진실은, 진정한 기회평등이나 오직 능력만을 성공의 요인으로 인정하는 방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공정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333쪽) 단언컨대 저 대목이야말로 능력주의 담론의 핵심 중 핵심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핵심은 에필로그에서 살짝 언급될 뿐,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도 언급하다시피 그 문제의식은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을 처음으로 널리 알린 마이클 영의 미래소설 『능력주의의 출현』에 이미 담겨있었다. 영이 그려낸 ‘능력주의 유토피아’는 처음엔 매우 공평하고 공정한 시스템처럼 보였지만, 점차 잔혹한 디스토피아로 변해간다. 능력 피라미드 상층부의 인간은 저능력자들을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피라미드 아래의 사람들은 경멸당하고 착취당하면서도 저항할 능력조차 상실한 채 고통 받는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문제의식, 즉,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은 활발히 논의되지 못했을까?&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첫째, 여전히 전근대적 형태의 세습과 상속이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어서다. 이런 행태에 맞서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가장 쉽게 동원할 수 있는 것이 능력주의이다. 둘째, 능력주의를 대체할만한 대안이 합의되지 않아서다. 성과를 어떻게 보상하고 생산된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라는 첨예한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우리는 능력주의가 아닌 다른 대안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다. 또한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사회주의적 대안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힘을 잃었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strong&gt;능력주의는 민주주의를 침식한다&lt;/strong&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이 서평에서 능력주의의 개념적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하기는 어렵다.&lt;span style=&quot;color:rgb(255,0,0);&quot;&gt;3)&lt;/span&gt; 다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 불평등은 세습이나 상속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며, 능력에 따른 차별적 처우, 즉 능력주의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일견 정의로워 보이는 원칙이다. 그러나 그 내적 논리를 따져보면 그것은 고대 서구 정치철학의 자의적 정의론과 오류로 판명된 경제학 이론 등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차별적 분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lt;span style=&quot;color:rgb(255,0,0);&quot;&gt;4)&lt;/span&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사회의 경제적 혜택은 행위자의 능력 또는 생산에 대한 기여도에 비례해서 분배되어야 한다”는 응분론은 과거에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지만, 오늘날 더 이상 그렇지 않다. 클라크의 한계생산력설이 틀렸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솔로가 개척한 지식유산 이론&lt;span style=&quot;color:rgb(255,0,0);&quot;&gt;5)&lt;/span&gt;에 따르면, 개인의 특수한 재능들은 사회경제적 번영을 창출하는 데 있어서 극히 작은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한다. 반면 역사적으로 축적된 사회 전체의 지식과 문화는 번영을 창출하는 데 압도적으로 큰 기여를 한다. 쉽게 말해서, 능력주의 원칙에 의해 보상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자산을 극소수가 독식하는 것이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많은 사람들이 상속이나 세습은 신분에 따른 차별이며 불공정‧부정의라고 생각하는 반면 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틀렸다. 둘 다 불공정이고 부정의이다. 더구나 능력주의는 정의를 가장하기 때문에 노골적 부정의인 상속주의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크리스 헤이즈는 “능력주의 사회는 빈부격차에 가장 둔감한 사회일 수 있다”며 ‘능력주의의 철의 법칙(The Iron Law of Meritocracy)’을 제기한 바 있다. “부자는 자기 능력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고 하고 빈자는 자기 능력의 한계로 빈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정당화 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최근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소수자‧약자 혐오 담론에는 또렷한 특징이 하나 나타난다. 바로 능력주의다. 혐오대상이 되는 집단은 ‘능력과 자격이 되지 않는데 과분한 몫을 요구하는 자들’이다. 이주노동자, 장애인, 여성, 전라도 사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틈만 나면 소환되어 끔찍할 정도의 모멸을 뒤집어 써야 했다. 지역균등 제도로 대학을 가면 ‘지균충’, 월수입 200만 원 이하면 ‘이백충’으로 불리기도 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능력주의의 일종이다. 부정의를 개선하고 교정하는 대신 능력자가 되어 ‘초월’하라는 명령인 까닭이다. 능력은 이제 물신이 되고, 더 밀어붙이면 민주주의(democracy)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인민(demos)의 자리는 이제 능력/공로(meritum)가 차지한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어느 연구&lt;span style=&quot;color:rgb(255,0,0);&quot;&gt;6)&lt;/span&gt;를 보면, 한국 청소년 다수가 능력주의를 깊숙이 내면화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장학금을 줄 때 가정 형편보다 성적을 고려해야 한다’ 같은 문항에서 이들은 높은 수준의 능력주의 태도를 보였다. 이 성향은 계층이나 학업 성적과 크게 관계없이 고르게 나타났다. 각자의 출발선이 아무리 달라도 객관적 지표나 성적에 따라 대우받아야 한다는 이런 생각은 실질적 공정성보다 형식적 공정성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이는 최근 한국사회에서 전면화되고 있는 약자‧소수자에 대한 적극적 배려 정책(affirmative action)에 대한 집단적 적대감의 원천일 수 있을 것이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능력주의의 위험을 말하면 많은 이들이 납득하기 어려워한다. “한국사회에선 세습과 상속 같은 전근대성 탓에 능력주의가 제대로 관철되지 못하는 게 더 문제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런 전근대성은 여전히 잔존해 있고, 그것은 그것대로 직시해야할 문제다. 그러나 전근대의 문제가 일소되지 못한 것이 곧 근대의 문제를 방치해야할 이유는 될 수 없다. 근대의 계몽주의자들은 전근대성, 즉 상속주의를 해소하기 위해 능력주의를 도입했다. 그 결과 ‘신분에 따른 차별’ 원칙은 ‘능력에 따른 차별’ 원칙이 되었다. 그들은 평등을 표방했지만, 실은 차별을 반대하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을 도입했을 뿐이다. 즉, 능력주의는 차별주의이다. 이 차별주의는 형식적 공정성을 추구할 뿐, 실질적 공정성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라는 평등주의를 침식할 수밖에 없다. 능력주의를 철저히 검토해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color:rgb(255,0,0);&quot;&gt;주)&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3px;&quot;&gt;1) 『21세기 자본』에서 토마 피케티는 초장기 시계열 분석을 통해 자산 불평등의 심각성을 논한 바 있다. 그런데 소득 불평등과 자산 불평등 중 어느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인지에 관해서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나라마다 불평등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반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자산 불평등이 심각한 사회로 알려져 있다. 한국 역시 자산 불평등도가 상승하는 추세지만, 미국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사회가 소득 불평등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3px;&quot;&gt;2) 본문 199쪽에 윌리엄 챔블리스라고 표기되어 있고, 원서도 마찬가지다. 명백한 착오다. 윌리엄 챔블리스는 실존인물이며 저명한 범죄학자지만, 올림픽 수영선수를 연구한 적은 없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물은 대니얼 F. 챔블리스로 1980년대에 올림픽 수영 챔피언들을 연구한 논문과 저서를 발표했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3px;&quot;&gt;3)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한국 능력주의의 형성과 그 비판 -『고시계』 텍스트 분석을 중심으로」(2017, 성균관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제4장 및 제5장을 참고하라.&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3px;&quot;&gt;4) ‘고대 서구 정치철학의 자의적 정의론’은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비례적 정의(“동등함에도 동등하지 않은 몫을, 혹은 동등하지 않은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분배받아 갖게 되는” 것은 부정의하다는 주장)와 플라톤의 ‘아르케(arkhe) 논리(출생, 부(富), 능력에 따라 위계적으로 몫을 배분해야 한다는 논리)’를 가리킨다. 자크 랑시에르는 공동체에 고유한 몫을 설정하는 아르케 논리, 곧 불평등의 논리가 서양 정치철학의 기원에 내재하고 있음을 보이면서, 평등과 해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 아르케 논리와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오류로 판명된 경제학 이론’은 클라크의 한계생산력설로서 “모든 행위자에게 각자가 창출한 양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베블런, 로빈슨 등 여러 경제학자들에게 체계적인 비판을 받고 논파되었다. 결정적인 문제점은, 그 이론이 총생산물에서 어떤 생산요소가 얼마만큼의 비중으로 기여했는지를 전혀 밝혀내지 못하면서 마치 밝혀낸 듯이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존 롤즈는 『정의론』에서 능력주의 원칙이 왜 정의에 부합하지 못하는지를 서술하면서 한계생산력설의 오류를 주요 근거로 제시한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3px;&quot;&gt;5) 이 연구영역의 출발은 1957년 발표한 솔로의 논문이었다; Robert M. Solow, 「Technical Change and the Aggregate Production Function」, 『The Review of Economics and Statistics』, Vol. 39, No. 3, 1957&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3px;&quot;&gt;6) 김경근, 「중․고등학생의 능력주의 태도 영향 요인에 대한 구조방정식 모형 분석」, 『교육사회학 연구』 제26권 제2호, 2016&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span style=&quot;font-family:&#039;함초롬바탕&#039;;font-size:16px;&quot;&gt;출처: http://xenga.tistory.com/ [Niemandsnacht]&lt;/span&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 이글은 『시민과 세계』 제 23호에 실렸습니다.&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font face=&quot;함초롬바탕&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6px;&quot;&gt;&lt;br /&gt;&lt;/span&gt;&lt;/font&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위기의 문재인 정권, 역전의 한수는 있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560"/>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560#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3560</id>
		<published>2018-09-07T14:44:55+09:00</published>
		<updated>2018-09-07T23:57:25+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문재인 정권은 집권 2년임에도 찔끔찔끔 낡은 부동산 대책들을 재탕하고 있다. 투기세력들은 이제 신경조차 쓰지 않는 식상한 대책들이다. 특히 부동산 잡겠답시고 나온 종부세 개편안은 솜방망이를 넘어 재벌과 투기세력에 &#039;그린 라이트&#039;를 보냈다. 거기에 서울 시장의 &quot;개발&quot; 한 마디에 자고 일어나면 5천만원씩 집값이 뛰었다. 이 와중 ‘강남 사는 청와대 정책실장’이 &quot;모두가 강남 살 이유 없다&quot;는, 자해 수준의 발언을 했다. ...</summary>
	<content type="html">&lt;p style=&quot;margin:0px 0px 6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560/083/7d9f37c9c1facfd48c1d5a9b514adf42.JPG&quot; alt=&quot;423233.JPG&quot; width=&quot;986&quot; height=&quot;563&quot;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background-color:rgb(255,255,255);color:rgb(29,33,41);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quot;&gt;문재인 정권은 집권 2년임에도 찔끔찔끔 낡은 부동산 대책들을 재탕하고 있다. 투기세력들은 이제 신경조차 쓰지 않는 식상한 대책들이다. 특히 부동산 잡겠답시고 나온 종부세 개편안은 솜방망이를 넘어 재벌과 투기세력에 &#039;그린 라이트&#039;를 보냈다. 거기에 서울 시장의 &quot;개발&quot; 한 마디에 자고 일어나면 5천만원씩 집값이 뛰었다. 이 와중 ‘강남 사는 청와대 정책실장’이 &quot;모두가 강남 살 이유 없다&quot;는, 자해 수준의 발언을 했다. 수도권 그린벨트 해제 얘기까지 나오면서 상황은 혼돈으로 치닫고 있다.&lt;/span&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0px 0px 6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0px 0px 6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조중동의 비이성적, 몰사실적 정권 비판이 여론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근본적 책임과 원인은 문재인 정권에 있다. 천금 같은 시기를 김동연, 장하성 같은 자들에게 맡겨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 무슨 대단한 신념의 대립인양 김동연과 장하성의 갈등을 보도하는 각종 기사를 보고 있노라면, &#039;카레맛 똥이냐, 똥맛 카레냐&#039;를 놓고 격돌하던 소셜 미디&lt;span class=&quot;text_exposed_show&quot; style=&quot;font-family:inherit;&quot;&gt;어 논쟁을 보는 것 같다. 문 지지자 일부는 또다시 &quot;좌우협공&quot; 운운하며 정권의 책임을 조중동과 진보세력에게 떠넘기는 중이다.&lt;/span&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span class=&quot;text_exposed_show&quot; style=&quot;font-family:inherit;&quot;&gt;&lt;br /&gt;&lt;/span&gt;&lt;/p&gt; &lt;div class=&quot;text_exposed_show&quot; style=&quot;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p style=&quot;margin:0px 0px 6px;font-family:inherit;&quot;&gt;소득주도성장의 경우, 아직 판단을 유보하는 게 맞다. 그러나 부동산 등 불로소득 규제 강화는 문재인 정권이 적임자였음에도 전혀 기대에 못미쳤다. 그토록 강조하는 정의로운 사회, 혹은 &#039;혁신성장&#039;을 위해서라도 불로소득 규제는 반드시 필요한 조치다. 노동할 의욕 뿐 아니라 혁신 및 투자 동기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규제완화와 토건개발의 유혹과 압력에 굴복해 다시금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려고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0px 0px 6px;font-family:inherit;&quot;&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inherit;&quot;&gt;종부세는 이미 해봤고, 효과가 제한적이며 조세저항도 극심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럼 다른 방식을 고민해야 하는 게 맞다. 최근 국토보유세 논의가 다시 나온 데에도 다 맥락과 이유들이 있었다. 땅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에게 모두 세금을 물리자는 거다. 어마어마한 돈이지만 땅 많이 가진 사람, 어차피 극소수다. 국민 100명 중 94명이 돈을 다시 돌려받기 때문에 조세저항도 적다.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도 다시 추진해야 한다.&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inherit;&quot;&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inherit;&quot;&gt;불로소득의 명확한 규제야말로 정권의 명운을 걸어야 할, 아니 한국사회의 미래를 좌우할 절체절명의 과제다. 다양한 안들이 나올 수 있겠지만, 국토보유세 같은 세금을 통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건물주만 돈을 버는 구조를 무너뜨려가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공정한 조치일 뿐 아니라 자원의 효율적 활용이기도 하다. 실천적/정책적 결론은 결국 증세인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도 증세는 필수다. &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inherit;&quot;&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inherit;&quot;&gt;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문재인 정권이 다시 시민들의 지지를 모아낼 수 있는 건 결국, 불평등과의 정면대결 뿐이다. 가장 힘들지만 가장 절박한 과제인 경제민주화에 앞장서는 일이다. 그 핵심 중 핵심이 바로 불로소득에 대한 철저하고 단호한 규제다. 투기로 가는 돈을 차단해야만 소득이 소비와 투자로 선순환해 혁신을 자극할 수 있다. 사회적 합의는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다. 기득권 저항을 돌파하는 액션플랜은 &#039;촛불정권&#039;의 몫이다.&lt;/p&gt; &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문제는 국가의 무책임과 비겁함이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377"/>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377#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3377</id>
		<published>2018-05-29T13:23:15+09:00</published>
		<updated>2018-05-30T12:15:00+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이번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정안에 대해 짧은 글 하나를 파벨라에 썼다. 글이 올라온 다음날인 5월 28일, 최저임금 법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찬성자 160인에는 박주민 등 진보의 대표선수인양 호명되던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5월 24일 각 신문에 &quot;2018 1분기 소득격차 사상 최악&quot;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5월 28일 산입범위 개정안이 통과되며 최저임금에 대해 이런 저런 논의들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언론에 드러나는...</summary>
	<content type="html">&lt;p style=&quot;margin:0px 0px 6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377/083/cc7b8e665e7f48ee36c7f5d429ab2b79.jpg&quot; alt=&quot;photo_2018-05-29_10-59-54.jpg&quot; width=&quot;960&quot; height=&quot;540&quot;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background-color:rgb(255,255,255);color:rgb(29,33,41);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quot;&gt;이번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정안에 대해 &lt;/span&gt;&lt;a href=&quot;http://fabella.kr/xe/blog2/83294&quot; target=&quot;_blank&quot; style=&quot;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color:rgb(255,170,0);&quot;&gt;짧은 글&lt;/span&gt;&lt;/strong&gt;&lt;/a&gt;&lt;span style=&quot;background-color:rgb(255,255,255);color:rgb(29,33,41);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quot;&gt; 하나를 파벨라에 썼다. 글이 올라온 다음날인 5월 28일, 최저임금 법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찬성자 160인에는 박주민 등 진보의 대표선수인양 호명되던 이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lt;/span&gt;&lt;br /&gt;&lt;/p&gt; &lt;div class=&quot;text_exposed_show&quot; style=&quot;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p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inherit;font-size:14px;margin:0px 0px 6px;&quot;&gt;5월 24일 각 신문에 &quot;&lt;a href=&quot;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46171.html&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color:rgb(255,170,0);&quot;&gt;2018 1분기 소득격차 사상 최악&lt;/span&gt;&lt;/strong&gt;&lt;/a&gt;&quot;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그리고 5월 28일 산입범위 개정안이 통과되며 최저임금에 대해 이런 저런 논의들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언론에 드러나는 것으로만 보자면, 최저임금 이슈에 대해 크게 세 가지 입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lt;/p&gt; &lt;p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inherit;font-size:14px;margin:6px 0px;&quot;&gt;첫 번째는 &#039;부정&#039;이다. &#039;최저임금 만악근원설&#039;이라 할 수도 있겠다. 주로 재벌 및 친재벌 언론들이 이 입장을 공유한다. 그들은 &#039;뭐 소득격차가 사상최악? 이게 다 최저임금 인상 때문이라고!&#039;라며 신나게 기사를 쏟아내는 중이다. 두 번째 입장은 &#039;냉소&#039;다. 최저임금제의 한계는 명확하고 그 이슈에 그렇게까지 매몰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최저임금 이슈는 &#039;생산성 높은 고급 인재&#039;와 &#039;생산성 높은 우량 기업&#039;과는 크게 상관없으며, &#039;저생산성&#039; 알바와 &#039;저생산성&#039; 사장님의 제로섬 게임 아니냐는 것. 세 번째 입장은 &#039;방어&#039;다. 이 입장에는 최저임금에 올인하는 &#039;최저임금 환원주의&#039;와 분배기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최저임금제만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039;오죽하면&#039;이 섞여 있다. 물론 대부분 &#039;오죽하면&#039;에 가깝다.&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quot;&gt;&lt;span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inherit;font-size:14px;&quot;&gt;&quot;2018 1분기 소득격차 사상 최악&quot; 뉴스를 들여다보면, &#039;부정&#039;이나 &#039;냉소&#039;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된다. 소득 하위 20% 계층인 1분위의 가계소득은 월평균 128만6700원으로 1년 전보다 8.0% 감소했다. 2003년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후 가장 큰 감소폭이다. 1분위에서 ‘노동자가구’ 소득은 0.2% 상승한 반면 ‘노동자외가구’의 소득은 13.8% 떨어졌다. 즉, 영세자영업자가 1분기 소득 감소를 주도했다고 할 수 있는 것. 1분기 소득격차의 원인에 대해 정부 쪽에서는 &#039;고령화&#039;를, 친재벌 언론은 &#039;최저임금 상승&#039;을 꼽았는데 둘다 명쾌한 설명이라 보긴 어렵다. 고령화로 인해 1분위 소득이 낮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추세적 원인이지 갑자기 나타난 변화가 아니다. &lt;/span&gt;&lt;span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inherit;font-size:14px;&quot;&gt;그리고 1분위에는 알바조차 고용할 여력이 없는 영세 자영업자가 많기 때문에 최저임금과 관련이 크지 않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inherit;font-size:14px;margin:6px 0px;&quot;&gt;물론 최저임금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한국의 소득격차와 빈곤을 최저임금 제도가 전부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최저임금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장 그것 외에 격화되는 소득격차를 완화할 여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만든 건 누구인가? 국가다. 진짜 문제는 국가의 무책임과 비겁함이다. 국가는 이번 산입범위 개악 같은 것은 일사천리로 추진하면서 정작 필요하다못해 화급한 복지제도 개혁에는 손을 놓고 있다. 예컨대 지금보다 근로장려세제를 확대하고 기업 규모에 따라 사회보장기여금 부담을 늘려야 한다. 실제 통계를 보면 한국 기업들 사회보장 부담금 비율은 OECD 평균에 훨씬 못 미친다. 심지어 고소득층일수록 사회보장기여금 부담률이 낮아지는 역진현상까지 나타난다. 문재인 정권은 최저임금 가지고 숫자 장난이나 치지 말고, 심각한 분배/재분배 상황을 타개할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최저임금제 또한 분배/재분배 시스템 개혁의 연장선에서 검토되고 시행되어야 한다. &lt;/p&gt; &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5.25. 최저임금제 개편, 세 가지 핵심 정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294"/>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294#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3294</id>
		<published>2018-05-27T16:40:48+09:00</published>
		<updated>2018-05-28T08:07:30+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2018년 5월 2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민주당 주도 하에 각당은 정기 상여금과 복리후생비 일부를 최저임금에 새로 산입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최저임금제 개편의 특징을 알아보자. 꼽자면 더 많겠으나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안이 가져올 효과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중산층 노동자 &#039;무임승차&#039; 차단. 둘째, 빈곤 경계선 노동자에 대한 혜택 삭감. 셋째, 근로기준법의 근간 파괴. 한 마디로 문재인 정권과 민...</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294/083/b370f34ef1060787d0685b222391bd62.jpg&quot; alt=&quot;278796851_b999a033c6_z.jpg&quot; width=&quot;500&quot; height=&quot;375&quot; /&gt;&lt;p&gt;&lt;br /&gt;&lt;/p&gt;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div&gt;2018년 5월 25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민주당 주도 하에 각당은 정기 상여금과 복리후생비 일부를 최저임금에 새로 산입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최저임금제 개편의 특징을 알아보자. 꼽자면 더 많겠으나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안이 가져올 효과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중산층 노동자 &#039;무임승차&#039; 차단. 둘째, 빈곤 경계선 노동자에 대한 혜택 삭감. 셋째, 근로기준법의 근간 파괴. 한 마디로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은 노동자에게는 징벌을, 기업에게는 선물을 안겨주었다.&lt;/div&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먼저 꼽아야할 핵심은 중산층 노동자 &#039;무임승차&#039; 차단이다. 그동안 재벌 및 친재벌 언론들이 이구동성 지적하던 문제 하나가 드디어 해결됐다. 이들은 &quot;현행 제도 하에서 연봉 4천만 원에 달하는 근로자도 최저임금 인상 혜택을 받는 불공정&quot;을 줄기차게 외쳐왔다. 요컨대 그들은 &#039;무임승차자&#039;라는 것이다. 그걸 이번에 정권과 민주당이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물론 개편을 주도한 자들은 &#039;저임금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제의 혜택을 주기 위해서&#039;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취지야 좋다. 그러나 실제로 저임금 노동자에게 어느 정도 혜택이 될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2012년~2016년 최저임금 위반 사업장에 대한 처벌은 무려 0.5%였다. 5%가 아니다. 0.5%다. 한국은 임금체불 비율도 OECD 최악 수준이다. 이런 문제가 극적으로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최저임금 산입범위만 확대한다는 것은 결국, &#039;상대적 고소득자에 대한 응징&#039;이라는 성격이 도드라진단 걸 의미한다. 그 대상은 대체로 대도시 중산층일 가능성이 높다. 불공정은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정된 몫이 제대로 분배되지 못한다면 정책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둘째, 빈곤 경계선 노동자에 대한 혜택 삭감. 이 문제가 현실에서는 가장 치명적일 수 있다. 아래부터는 &amp;lt;경향신문&amp;gt; 기사 &lt;a href=&quot;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5252136005&amp;amp;code=940702&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color:rgb(255,170,0);&quot;&gt;&#039;저임금 노동자, 내년 기대 월급보다 10만원 넘게 줄어들 수도&#039;&lt;/span&gt;&lt;/strong&gt;&lt;/a&gt;에 나온 사례를 인용한다. &quot;노동자 ㄱ씨는 최저임금 수준인 157만원을 받고 식대 15만원과 교통비 10만원을 별도로 받아 세전소득이 월 182만원이다. 만일 산입범위가 바뀌지 않은 채로 내년에 최저임금이 10%가량 올라 시급이 8300원이 된다면 월 최저임금은 173만원이 되고 ㄱ씨의 월소득 총액은 198만원이 된다.하지만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내년에 시행되면 ㄱ씨의 임금 인상폭은 크게 줄어든다. 개정안에 따라 기본급과 직무수당뿐 아니라 월 최저임금 173만원의 7%를 초과하는 복리후생비 12만8900원이 최저임금을 산정할 때 포함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ㄱ씨의 사업주는 월급을 3만1100원만 올려줘도 기본급과 직무수당, 복리후생비 중 7% 초과분을 합치면 최저임금을 맞출 수 있다. ㄱ씨의 월소득 총액은 이번 최저임금법 개정으로 기대보다 12만원 가까이 줄어든 186만1100원이 된다. 최저임금이 10% 올라도 소득이 늘어나는 효과가 없는 셈이다.&quot;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셋째, 근로기준법의 근간 파괴. 이번 개편에는 사업주가 분기·반기별로 지급하던 상여금을 최저임금에 넣기 위해 월별로 쪼개서 줄 때 노조의 &#039;동의&#039;를 받지 않고 &#039;협의&#039;만 하면 가능하도록 하는 조항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가장 나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근로기준법은 사업주가 취업규칙을 노동자에게 불이익이 되게 변경하는 것에 나름 엄격한 제한을 두고 있었다. 취업규칙을 변경하려면 과반수 노조 혹은 노동자 중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상식적으로도 당연한 조항이지만, 지키지 않는 사업주가 태반이기에 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저임금제 개편안은 &#039;동의&#039;를 &#039;협의&#039;로 바꾸어 이 원칙을 아무렇지 않게 훼손하고 있다. &#039;동의&#039;와 &#039;협의&#039;는 한 글자 차이지만 법적으로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얼마나 악용될지는 명약관화하다. 흥미롭게도 &amp;lt;조선비즈&amp;gt; 조귀동은 &quot;(이번 개편에서) 실속은 노동계가 챙겼다&quot;면서 &quot;현실적으로 이렇게 취업규칙을 바꾸기 위해서는 근로자와 협의가 필요해 사업주가 일방적으로 바꾸기는 어렵다&quot;고 쓴다(&lt;a href=&quot;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5/2018052500609.html&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trong&gt;&lt;span style=&quot;color:rgb(255,170,0);&quot;&gt;&amp;lt;조선비즈&amp;gt;, 최저임금에 정기상여·숙식비 상징적 편입…실속은 노동계가 챙겼다&lt;/span&gt;&lt;/strong&gt;&lt;/a&gt;). 이런 기사를 보면 &quot;아무리 그래도 &#039;기레기&#039;라는 말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quot;라는 평소 소신이 흔들리곤 한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나는 기억한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잡 셰어링’이라며 대졸신입 연봉을 강탈했던 사건을. 이른바&#039; 2009년 대졸초임 삭감 사건&#039;이다. 기성세대-기업-국가는 신입사원 연봉을 빼앗아 비정규직과 인턴을 더 뽑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협잡을 벌였다. 그러면서 &#039;뼈를 깎는 고통분담&#039;이라고 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고통분담도 뭣도 아니었다. 그저 노조의 보호를 못받는 약자에 대한 일방적 도적질이었다. 주도한 관료, 해당 기업 임원들 중 누구도 자기 연봉은 삭감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민란이 일어날 줄 알았다. 세계에 유례없는 착취, ‘글자 그대로의 세대착취’가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대한민국은 놀랍도록 조용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 가난했던 청년들이 더 가난해졌을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 사건이 사대강 사업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에 묻는다. 무엇을 위한 한반도 평화이고 무엇을 위한 최저임금인가? 사람들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 더 고통받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것. 그런 것들 아니었나. 하루하루 버티기 힘든 노동자들에게 최저임금 산입을 둘러싼 숫자 장난은 조롱일 따름이다. 그리고 내라는 세금 내며 살아가는 중산층 노동자들을 &#039;무임승차자&#039;처럼 몰아가는 것은 모욕일 따름이다. 2009년 청와대 &#039;벙커&#039;에서 대졸초임삭감을 기획하던 이명박은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백번 양보해 그에게 일말의 선의가 있었다 치자. 그럼에도 졸속적 과정과 참혹한 결과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이 높은 지지율에 취해 있는 지금,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quot;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또 누구를 위해 그 자리에 존재하는가?&quot;&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옴마니 파드메훔 쿵...해버린 사회</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245"/>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245#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3245</id>
		<published>2018-04-18T14:13:57+09:00</published>
		<updated>2018-04-19T14:14:42+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CBS 인터뷰 : &#039;경공모&#039; 회원들 &quot;드루킹 실검 1위...드디어 예언 실현됐다&quot; 최순실을 무당이라고 욕하던 자들 중에도 무당들은 넘쳐났다. 하긴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 중 상당수가 환빠 , 황빠, 김어준빠이기도 하다. 여긴 아직 샤먼사회다. 인지적 불안, 실체적 사실 사이의 공백을 못견뎌 금세 오컬트나 음모론, 절대자(신, 사제, 대통령)에게 기대려는 이 집단적 습성을 고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일 게다. 이 습성은 이른바 종...</summary>
	<content type="html">&lt;p style=&quot;margin:0px 0px 6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245/083/f63579445e7aa89e695a1f780e926b59.jpg&quot; alt=&quot;586px-Hamatsa_shaman2.jpg&quot; width=&quot;586&quot; height=&quot;768&quot; /&gt;&lt;/p&gt; &lt;p&gt;&lt;font color=&quot;#1d2129&quot; face=&quot;Helvetica, Arial, sans-serif&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CBS 인터뷰 : &lt;a href=&quot;http://www.cbs.co.kr/radio/pgm/board.asp?pn=read&amp;amp;skey=&amp;amp;sval=&amp;amp;anum=162503&amp;amp;vnum=8357&amp;amp;bgrp=6&amp;amp;page=&amp;amp;bcd=007C059C&amp;amp;mcd=BOARD1&amp;amp;pgm=1378&quot; target=&quot;_blank&quot;&gt;&#039;경공모&#039; 회원들 &quot;드루킹 실검 1위...드디어 예언 실현됐다&quot;&lt;/a&gt;&lt;/span&gt;&lt;/font&gt;&lt;font color=&quot;#1d2129&quot; face=&quot;Helvetica, Arial, sans-serif&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a href=&quot;http://www.cbs.co.kr/radio/pgm/board.asp?pn=read&amp;amp;skey=&amp;amp;sval=&amp;amp;anum=162503&amp;amp;vnum=8357&amp;amp;bgrp=6&amp;amp;page=&amp;amp;bcd=007C059C&amp;amp;mcd=BOARD1&amp;amp;pgm=1378&quot; target=&quot;_blank&quot;&gt; &lt;/a&gt;&lt;/span&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color:rgb(29,33,41);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color:rgb(29,33,41);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color:rgb(29,33,41);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최순실을 무당이라고 욕하던 자들 중에도 무당들은 넘쳐났다. 하긴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 중 상당수가 환빠 , 황빠, 김어준빠이기도 하다. 여긴 아직 샤먼사회다. 인지적 불안, 실체적 사실 사이의 공백을 못견뎌 금세 오컬트나 음모론, 절대자(신, 사제, 대통령)에게 기대려는 이 집단적 습성을 고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일 게다.&lt;/span&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0px 0px 10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color:rgb(29,33,41);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quot;&gt;이 습성은 이른바 종교적 심성, 누멘적인 것, 이런 것과는 다른 것이다. 뛰어난 신학자는 탁월한 회의주의자였다. 또한 내면의 불안과 치열하게 격투했던 이들이었다. 충실한 신앙인들도 대체로 그러하다. 정작 종교를 얄팍하게 냉소하던 이들일수록, 자신이 똑똑하다고 착각하며 어처구니없는 음모론의 포로가 되기 일쑤다. 중세를 암흑기로 묘사하며 근대화를 역설하는 이들, &quot;미개하다&quot;를 입에 달고 다니는 자유주의자들이 대체로 이 부류에 많이 포진한다. 이들은 &#039;안아키&#039; 같은 집단을 비난하지만, 사실 이들이 세계를 보는 관점은 &#039;안아키&#039;나 &#039;드루킹&#039;과 거의 차이가 없다. &lt;/span&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0px 0px 10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color:rgb(29,33,41);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quot;&gt;언젠가 내가 칼럼(&lt;a href=&quot;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22367.html&quot; target=&quot;_blank&quot;&gt;[세상 읽기] 앎으로부터의 도피&lt;/a&gt;)&lt;/span&gt;&lt;span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quot;&gt;에서 쓴 바 있듯 오늘의 문제는 ‘계몽되지 못한 자’가 아니라 ‘계몽되지 않으려는 자’(“어디 진보언론 따위가 날 가르치려들어?”), ‘계몽 이후의 백치들’이다. 그들은 절대악과 싸우는 타격감을 즐기는 자들이지 정의와 공정이 실제로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관심을 가지면 자신의 알량한 기득권들, 이를테면 남성 젠더권력이나 고학력 수도권 중간계급의 아비투스 같은 것들을 아프게 성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찰하면 자신을 더이상 &#039;피해자-소비자&#039;로만 내세울 수 없게 되므로, 그들은 김어준 같은 &#039;사제&#039;가 정해준 프레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039;그래도 되니까.&#039; 그 프레임 속에서는 나보다 더한 괴물들을 알리바이 삼아 얼마든지 정의로울 수 있으니까. 지식과 자의식만 비대해진 사회의 반지성주의는 이런 모습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margin:0px 0px 10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font color=&quot;#1d2129&quot; face=&quot;Helvetica, Arial, sans-serif&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탈주술화 시대를 거쳐서, 이런 재주술화한 주체들이 공론장을 점령해 버렸다. 물론 이것은 민주주의다. 그리고 그 말이 절대적 당위를 의미하진 않는다. 진리에 대한 무관심에 기반하는 민주주의 너머에는 진리를 향한 열정에 기반하는 민주주의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민주주의는 회의하고 머뭇거리면서도 끝내 &#039;최종해결&#039;에 대한 욕망에 굴복하지 않는 집단지성의 실천이다.&lt;/span&gt;&lt;/font&gt;&lt;/p&gt;</content>			</entry><entry>
		<title>매스스타트, 사이클, 그리고 빙상연맹</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052"/>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3052#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3052</id>
		<published>2018-02-27T03:27:51+09:00</published>
		<updated>2018-03-07T14:57:41+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사진설명: 앞이 미켈 란다, 뒤에서 바닥 보는 선수가 크리스토퍼 프룸이다. 2017년 투르 드 프랑스의 경기 장면.) &#039;스케이트맘의 폭로…“우리 아들은 이승훈의 ‘탱크’였다”&#039; 제하의 &lt;서울신문&gt; 기사 는 금메달을 위해 다른 선수가 희생하는 스케이트 국가대표팀의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의미가 없지 않지만,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기사인지는 의문이다. 기사에서 언급한 &#039;탱크&#039; 작전은 일등 한명을 위해 나머지 선수가 헌신하...</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br /&gt;&lt;/div&gt;&lt;div&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052/083/3810381a0989d829be71f5634e2de2df.jpg&quot; alt=&quot;36124022936).jpg&quot; width=&quot;1363&quot; height=&quot;1050&quot; /&gt;&lt;p&gt;(사진설명: 앞이 미켈 란다, 뒤에서 바닥 보는 선수가 크리스토퍼 프룸이다. 2017년 투르 드 프랑스의 경기 장면.)&lt;/p&gt; &lt;p&gt; &lt;/p&gt; &lt;p&gt;&lt;br /&gt;&lt;/p&gt; &lt;/div&gt;&lt;div&gt;&#039;&lt;a href=&quot;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226500097&quot; target=&quot;_blank&quot;&gt;스케이트맘의 폭로…“우리 아들은 이승훈의 ‘탱크’였다”&#039; 제하의 &amp;lt;서울신문&amp;gt; 기사&lt;/a&gt; 는 금메달을 위해 다른 선수가 희생하는 스케이트 국가대표팀의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의미가 없지 않지만,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기사인지는 의문이다. 기사에서 언급한 &#039;탱크&#039; 작전은 일등 한명을 위해 나머지 선수가 헌신하고 희생하는 방식을 가리키는데,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는 스포츠는 매스스타트만 있는 게 아니다. &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매스스타트는 사이클 레이스와 유사하다. 많은 로드바이크 동호인들이 동계올림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건 투르드프랑스 같은 장거리 야외 경주를 가리킨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프로 스포츠 이벤트 중 하나인 월드투어 사이클 레이스에서, 선수들은 팀으로 참여해 같은 유니폼을 입고 다양한 작전을 구사하게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팀들끼리 경쟁하지만 우승자는 개인 한명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머지 팀원들이 희생하는 구도가 연출된다. 팀의 한 사람이 결승선에 제일 먼저 도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사이클 팀의 목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사이클 경기 특성상 바람, 즉 공기저항이 끼치는 영향은 ‘결정적’이다. 단적으로 말해 자전거 경주는 바람과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팀의 선수들은 에이스 앞과 옆에 붙어 ‘바람막이’가 된다. 에이스가 사고나 낙차 등으로 선두그룹이나 펠로톤(대규모로 뭉쳐서 달리는 집단)에서 뒤쳐지는 경우, 도움선수가 에이스 앞에서 끌어주며 유리한 포지션까지 에이스를 ‘배달’한다. 만약 에이스의 자전거에 문제가 생기면, 도움선수들 중 가장 가까운 이가 지체없이 자신의 자전거나 휠을 내주고, 때에 따라 보급식량과 물까지 에이스에게 전부 넘겨준다. 사이클은 헌신과 희생과 고통의 스포츠다. 그래서 더 감동적인 것이고.&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에이스의 기량이 아무리 출중해도 동료의 협력이 없으면 우승은 불가능하다. 에이스를 돕는 도움선수를 흔히 도메스티크 또는 리드아웃맨이라 부른다. 특히 리드아웃맨은 스프린트 경기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를 악물고 에이스를 끌어주다가 결승선 바로 앞에서 연료를 소진하고 장렬히 산화한다. 힘을 아끼던 에이스는 그때부터 부스터를 점화하며 치고나가 다른 팀 에이스와 우승을 다투게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사이클 역사에서 위대한 챔피언에게는 늘 위대한 도움선수가 있었다. 그리고 도움선수였다가 위대한 챔피언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크리스토퍼 프룸은 당시 영국 사이클의 자존심이던 브래들리 위긴스가 투르드프랑스에서 염원하던 우승을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도메스티크였다. 기량이 완숙해지면서 프룸은 레이스 도중 야심을 드러내며 팀 지시를 어기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에이스 위긴스와도 갈등이 생기고 팀 내부 긴장도 높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프룸은 남았지만 위긴스는 팀을 떠나야 했다. 에이스가 교체된 것이다. 이후 투르드프랑스 4회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는 등 프룸은 위긴스를 뛰어넘어 영국 역사상 최강의 선수로 성장했다. 한편 2010년대 본격화된 프룸의 전성기를 받쳐준 최대의 조력자는 미켈 란다라는 당대 최고의 도움선수였다. 란다는 최근 도메스티크가 아닌 챔피언이 되기 위해 프룸의 팀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도움선수로 만족하는 선수는 없다. 누구나 에이스, 챔피언이 되고 싶어 한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조력자로 활동했지만 만약 에이스의 기량이 예전같지 않고 내 실력이 더 낫다고 느끼게 되면 자기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기 마련이다. 팀내에서 인정받아 에이스가 교체되는 ‘평화적 정권교체’도 없지는 않지만 역시 이미 자리잡은 돌은 빼내기 쉽지 않다. 다른 팀으로 가서 실력을 증명하고 명실상부한 챔피언이자 에이스로 거듭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물론 도움선수로 일류였지만 에이스가 되어서는 끝내 챔피언이 되지 못한 사례도 허다하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실내경기라 좀 덜하단 차이는 있지만 공기저항에 영향을 받는 점에서 매스스타트나 사이클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에이스가 동료의 헌신으로 힘을 비축하고 승부처에서 단번에 결정짓는 형태의 전략이 유효하다. 따라서 매스스타트 경기에서 선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을 비난하긴 어렵다는 생각이다. 경기의 성격이 그러하기 때문에 비난하려면 경기 방식 자체를 비난해야 한다. 서울신문 기사는 그런 면에서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미켈 란다는 기꺼이 수년간 프룸의 도움선수로 희생했지만, 자신이 챔피언이 되고 싶다고 마음먹자 몸값을 높여 다른 팀으로 옮길 수 있었다. 프룸을 포함한 팀 동료들은 아쉬워하긴 했어도 미켈 란다의 선택을 따뜻하게 격려하고 응원해줬다. 그러나 특정 세력이 장악한 국가대표팀에서는 그런 장면이 불가능하다. 안현수처럼 다른 나라로 귀화하는 게 사실상 유일한 대안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다른 대다수의 경주들처럼, 사이클 레이스 역시 패자에게 가혹하다. 스폿라이트는 우승자에게 집중된다. 성적지상주의도 만연해 있고, 그에 따른 도핑 문제도 여전히 심각하다. 하지만 금메달이란 결과에만 목을 매는 한국 빙상 국대팀과는 달리, 프로 사이클 레이스는 우승자가 우승하기까지의 과정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관련단체, 선수, 업계 언론, 팬 모두가 &#039;팀 스포츠&#039;로서 도로자전거 경기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사이클은 우승 상금을 팀원 전원이 N분의 1로 공평하게 나누는 게 관례인 스포츠이고, 도메스티크에게도 명예가 확실히 주어지는 생태계다. 미켈 란다는 큰 대회 우승경력이 적지만 일류 도메스티크로 존중받았으며, 팀에서도 확고한 입지를 갖고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 못따면 선수생명을 위협받는 한국 빙상 대표팀에서는 미켈 란다 같은 선수가 나오기 어렵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사이클과 빙상 종목은 시장규모가 다르다. 그럼에도 한국 빙상 대표팀의 문제를 단지 &#039;시장의 규모&#039; 문제로 환원할 수는 없다. 사이클 레이스는 관련 산업의 크기나 유명세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영세한 스포츠다. 극소수 팀을 제외하면 일년 앞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이 열악하며, 프로 사이클팀이 어지간한 아마추어 축구팀이나 실업 야구팀보다 돈이 없는 경우도 흔하다. 사이클만으로 먹고 사는 선수도 드물다. 대개는 따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대회에 출전한다. 나는 한국 빙상 대표팀 문제가 성적지상주의&#039;에만&#039; 기인한다 보지도 않는다. 한국 양궁 국가대표팀 역시 철저한 성적지상주의로 운영되어 왔지만 빙상연맹처럼 혼탁하지는 않다(고 알고 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문제의 본질은 에이스와 희생하는 선수로 역할이 분담되는 상황이 아니라, 그 분담 과정이 공정하고 합리적인가이다. 현시점의 경기력으로 팀내 역할이 투명하게 결정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팀의 역량을 높은 상태로 유지하며 세대교체에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희생한 선수에게 어떻게 보상하고 또 에이스 도전 기회를 부여할 것인가? 우리가 고민해야 할 일은 이런 종류의 질문이 아닐까. (노파심에 덧붙여두자면, 이런 &#039;능력주의적 강박&#039;은 스포츠 영역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데엔 이유가 있다. 분명 한국 빙상연맹이란 생태계에는 특유의 조직구조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괴물이 많다고 사람 되길 포기하지는 맙시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924"/>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924#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2924</id>
		<published>2017-11-26T19:50:12+09:00</published>
		<updated>2017-11-27T07:52:44+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괴물이 많다고 사람 되길 포기하지는 맙시다 - 『한겨레』 편집권 침해 사태에 관하여 참담한 심정으로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수년간 『한겨레』 지면에 글을 쓰고 있는 필자로서 이토록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최근 벌어진 ‘『한겨레』 경영진 편집권 침해 사태’ 때문이다. 먼저 확실히 해두자. 이 사태는 『한겨레』 구성원의 내부갈등이란 층위를 넘어선, 엄연한 공적 사안이다. 정경유착 의혹 증거를 입수해 폭로한 기사에 대...</summary>
	<content type="html">&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4px;&quot;&gt;&lt;strong&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924/082/597cab958cc5d9d1f395140d376a692f.jpg&quot; alt=&quot;988076337_bCBqKQOu_1.jpg&quot; width=&quot;524&quot; height=&quot;325&quot; /&gt; &lt;/strong&gt;&lt;/span&gt;&lt;/p&gt; &lt;p&gt;&lt;strong style=&quot;font-size: 14px;&quot;&gt;괴물이 많다고 사람 되길 포기하지는 맙시다&amp;nbsp; &amp;nbsp;&amp;nbsp;&lt;/strong&gt;&lt;br /&gt;&lt;/p&gt; &lt;p&gt;- 『한겨레』 편집권 침해 사태에 관하여&lt;/p&gt; &lt;p&gt;&amp;nbsp; &amp;nbsp;&lt;/p&gt; &lt;p&gt;참담한 심정으로 키보드에 손을 올린다. 수년간 『한겨레』 지면에 글을 쓰고 있는 필자로서 이토록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최근 벌어진 ‘『한겨레』 경영진 편집권 침해 사태’ 때문이다.&amp;nbsp;&lt;br /&gt;&lt;/p&gt; &lt;p&gt;먼저 확실히 해두자. 이 사태는 『한겨레』 구성원의 내부갈등이란 층위를 넘어선, 엄연한 공적 사안이다. 정경유착 의혹 증거를 입수해 폭로한 기사에 대해, 이유나 해명이 어떠하든 언론사 경영진이 개입해 ‘압력’을 행사했다. 더구나 그 언론사는 ‘민주시민의 언론’을 자임하는 곳이다. 해당 매체의 독자나 필자가 아니더라도,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사건에 관심을 가질만하고 또 가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lt;br /&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trong&gt;사태의 전말&lt;/strong&gt;&lt;/p&gt; &lt;p&gt;『한겨레21』 제1186호 표지이야기는 ‘어떤 영수증의 고백―박근혜 정부, 재벌-보수단체 커넥션’이었다. 소위 ‘단독보도’였다. 그런데 기사화 과정에 양상우 대표이사, 김종구 편집인 등이 개입한다. 이에 『한겨레21』 기자들과 『한겨레』 노동조합이 “편집권 침해”라 문제제기하며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amp;nbsp;&lt;/p&gt; &lt;p&gt;특기할만한 부분은 『한겨레』 경영진이 개입한 시점과 양태다. 기사에 등장하는 재벌은 LG였고 취재상황을 미리 안 LG 전무가 11월 1일 『한겨레』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한겨레』 노보에 따르면, 그 전무는 『한겨레21』 팀장을 만난 뒤 김종구 편집인을 다시 만나 『한겨레21』 표지이야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김 편집인은 같은 날 양상우 사장, 고경태 출판국장을 만나 “표지이야기를 교체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밝힌다. 이튿날인 2일, 김 편집인은 『한겨레21』 길윤형 편집장에게 “표지기사가 함량미달이니 교체하라”고 요구한다. 취재 기자가 아직 최종고를 탈고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길 편집장이 거부하자 이번엔 양상우 사장이 직접 기사 초고를 출력, 지적사항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길 편집장에게 다시 전달했다. 길 편집장은 지적사항 중 일부를 반영해 해당 기사를 표지이야기로 실었다.&amp;nbsp;&lt;br /&gt;&lt;/p&gt; &lt;p&gt;사태가 알려지며 사내외에서 큰 반발이 일자 양상우 사장은 23일 입장문을 발표해 “유감”을 표명하면서도 편집권 침해를 인정하지 않았다. 같은 날 『한겨레』 구성원 78명은 성명을 내고 “편집권 침해 행위를 부인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이번 사태의 본질은 편집권 독립을 존중하고 그 가치를 수호해야 할 『한겨레』 대표이사가 기사를 직접 데스킹했다는 것”이라고 반박했다.&amp;nbsp;&lt;br /&gt;&lt;/p&gt; &lt;p&gt;경영진은 “기사품질을 높이기 위해 의견을 제시한 것뿐 편집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양상우 사장, 김종구 편집인만이 아니라 고경태 출판국장 역시 ‘기사의 질을 높이기 위해선 사장이 기사작성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요지의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amp;nbsp;&lt;br /&gt;&lt;/p&gt; &lt;p&gt;한편 『한겨레』21』 길윤형 편집장은 따로 발표한 입장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장이 기사에 대한 여러 의사 표시를 한 사실은 있지만 편집권을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선을 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상적으로 발행된 1186호 표지 이야기가 그 증거다.”“다만, 이와 비슷한 사태가 되풀이 되면, 결국 우리가 소중히 지켜온 편집권 독립이라는 원칙이 어느 순간에선가 무너져 내릴 수 있다.”&lt;br /&gt;&lt;/p&gt; &lt;p&gt;『한겨레21』 기자측은 사태를 “편집과 경영의 분리 원칙을 비롯해 자본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한겨레』의 핵심 가치를 훼손한 일”로 규정했다. 23일 성명을 발표한 『한겨레』 구성원 78명, 그리고 『한겨레』 노조 역시 편집권 침해 사실의 인정과 경영진의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lt;br /&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trong&gt;원칙을 우회하면 그건 더 이상 원칙이 아니다&lt;/strong&gt;&lt;br /&gt;&lt;/p&gt; &lt;p&gt;‘기사 품질을 높이기 위한 정당한 개입’이라는 경영진의 주장은 황당하기 짝이 없다. ‘한국인에겐 민주주의가 시기상조이니 한국식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던 그 옛날 박정희식 민주주의론이 떠오를 정도다. 기사의 ‘품질’을 높이자는 당위야 부정할 수 없겠다. 하지만 그 ‘품질향상’은 일차적으로 취재•편집 부문이 알아서 할 몫이다.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만약 경영진이 개별 기사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식음을 전폐하며 ‘빨간펜’을 휘둘러왔다면, 최소한 일관성만큼은 인정할 여지가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유독 이번에, 하필 LG라는 재벌이 엮인 사안에서 돌발적으로 과도한 개입을 하니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다. 언론사 경영진의 업무영역은 경영이다. ‘데스킹’이 아니다. 경영진이 경영을 잘해서 조직에 활력이 넘친다면, 기자들의 역량도 제고되어 경영진이 그토록 우려하던 기사의 품질 역시 좋아지리라 믿는다.&lt;/p&gt; &lt;p&gt;길윤형 『한겨레21』 편집장의 입장문도 납득 되지 않긴 매한가지다. 경영진이 표지이야기 교체를 요구한 순간, 개별기사에 일일이 수정사항을 달아 전달한 순간, 편집권 침해는 이미 발생한 것이다. 편집권 침해라는 개념 자체가 원래 그렇다. 만일 경영진 요구에 굴복해 표지이야기가 교체되었다면? 그 역시 편집권 침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사장의 ‘데스킹’으로 표지기사가 교체되는 수준이라면 이미 언론으로서 ‘막장’에 다다른 것이다. 지난 10년간 한국 언론 전체가 무참히 퇴행하면서, 사람들의 역치(threshold) 또한 전례 없이 높아진 게 사실이고 어지간히 망가지지 않으면 티도 안날 지경이 됐다. 그러나 엉망진창으로 썩어문드러지지 않았다고 해서, 표지이야기를 어쨌든 지켜냈다고 해서, 그것이 편집권 침해가 아닌 것은 아니다.&lt;/p&gt; &lt;p&gt;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 “우리, 사람 되긴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지독히 유해한 말이다. 얼핏 그 말은 우리에게 최소한의 윤리적 마지노선을 지키자고 호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말의 실제 기능은 “내 비록 인간 같지 않은 짓을 하고 있지만 최소한 괴물만 아니면 괜찮은 거지”라는 은밀한 위안을 삼투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괴물의 존재를 알리바이 삼은 준-괴물들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소소한 악행을 저지르고 또 용납하다가, 결국 진짜 괴물로 변해버릴 것이다.&amp;nbsp;&lt;/p&gt; &lt;p&gt;원칙을 입으로 외치는 건 쉽다. 다른 핑계를 대며 원칙을 우회하는 것 역시 쉽다. 그러나 원칙을 우회하면 그건 더 이상 원칙이 아니다. 양보할 수도, 타협할 수도, 우회할 수도 없기에 그것은 원칙이라 불린다. 편집권 독립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대원칙이다. 그것이 언론의 자율성 및 독립성 확보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일 뿐 아니라, 자본-권력에 독립적인 언론의 존재는 공동체가 달성할 수 있는 정의의 수준에 직결되는 까닭이다.&lt;/p&gt; &lt;p&gt;이번 사건의 경우 정황과 발언을 논리적으로 배치하고 경험칙을 적용하면 오직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질 뿐이다. 더도 덜도 아닌 편집권 침해다. 나는 『한겨레』 경영진이 명백한 악의나 비열한 의도를 가지고 구성원을 기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어가 버렸다. 그들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해서 더 큰 오류의 순환으로 빠져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lt;/p&gt; &lt;p&gt;현장에서 뛰는 『한겨레21』기자들이 사태를 가장 정확히 보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게 경영진과의 ‘끝장투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과 동료가 함께 견지해온 원칙의 회복일 터이다. 『한겨레』의 외부 필진으로서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우려한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선 기자들에게 지지와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amp;nbsp;&lt;/p&gt;</content>			</entry><entry>
		<title>레토릭, 진정성, 일관성</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555"/>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555#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2555</id>
		<published>2017-04-16T11:59:01+09:00</published>
		<updated>2017-04-17T16:00:08+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글 잘쓰고 말 잘하는 것, 정치인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특히 말을 잘하는 건 굉장한 강점이다. 정확한 발음과 발성, 적절한 비유와 제스처, 촌철살인의 요약... 어쨌든 이미지 정치의 세계다. 공개 토론회에 나가 버벅거리면 대중에게 실망을 안기고 지지자에게 불안을 주기 십상이다. 재미있는 것이, 이게 정치인의 지지율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보긴 또 어렵다는 점이다. 차밍 포인트지만 크리티컬 포인트는 아니라 할까. 안...</summary>
	<content type="html">&lt;p style=&quot;margin:0px 0px 6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555/082/aab68d910ef6a0544bfb91024e2d58a9.jpg&quot; alt=&quot;Consistency-is-the-key.jpg&quot; width=&quot;1024&quot; height=&quot;671&quot; /&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background-color:rgb(255,255,255);color:rgb(29,33,41);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quot;&gt;글 잘쓰고 말 잘하는 것, 정치인에게 중요한 덕목이다. 특히 말을 잘하는 건 굉장한 강점이다. 정확한 발음과 발성, 적절한 비유와 제스처, 촌철살인의 요약... 어쨌든 이미지 정치의 세계다. 공개 토론회에 나가 버벅거리면 대중에게 실망을 안기고 지지자에게 불안을 주기 십상이다.&lt;/span&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재미있는 것이, 이게 정치인의 지지율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보긴 또 어렵다는 점이다. 차밍 포인트지만 크리티컬 포인트는 아니라 할까. 안철수는 엄청난 눌변이고, 문재인도 달변은 아니다. 이들에 비해 유승민과 심상정의 언변은 그야말로 구름 위 용, 산중 호랑이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당선권에 있는 두 사람은 문재인과 안철수다. 사실 나는 말 잘하고 글 잘쓰는 사람이 곧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무관하다고까지 여긴다.&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토니 블레어의 연설을 몇 차례 영상으로 본 적 있는데, 정말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039;버락 오바마의 완성형&#039;이 거기 있었다. 그러나 그가 좋은 정치가였나 물으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그는 영국 노동당을 완전히 신자유주의에 굴복시킨 장본인이고 여러 정치 현안에서도 오판과 실수가 잦았다. 반면 에이브러햄 링컨은 말 못하기로 유명했지만 지금까지도 존경받고 있다. 요컨대 말과 글의 기예는, 좋은 정치인의 충분조건일지 몰라도 필요조건은 아니다.&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내 생각에 정치인의 덕목 중 으뜸은 말솜씨 따위가 아니라 &#039;일관성&#039;이다. &lt;span style=&quot;text-align:left;&quot;&gt;중심에는 지향의 일관성이 있고 그것이 정책과 태도의 일관성으로 드러나야 한다. &lt;/span&gt;자가당착을 범하지 않으며 초지일관한 공적 메시지를 전하는 것, 그것은 자체로도 가치 있지만 정치 전반의 질을 높인다는 점에서도 최고의 미덕이다. 물론 격동하는 현실정치에서 일관성을 강하게 관철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때로 모호한 입장을 보여야 하는 경우도 있다. &lt;span style=&quot;text-align:left;&quot;&gt;좋은 정치인은 그럴 때 곤궁한 처지에서 당장 벗어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 보다 유보적 표현을 선호한다. 지론과 모순되는 입장을 보이면 당면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결국 그것이 쌓여 정치인과 정치 전반의 신뢰를 깎아낸다. &lt;/span&gt;&lt;span&gt;여기서 일관성은 무조건 하나의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다. 환경과 상황이 변하면 입장을 바꿀 수도 있다(현실 정치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고). 문제는 그걸 합당하게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느냐이겠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많은 사람들이 &#039;진정성&#039; 같은 낭만적 용어로 정치인의 미덕을 표현한다. 정치 뿐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039;진정성&#039;이란 단어가 즐겨 사용되는데, 이현령 비현령 식의 이런 애매모호한 개념이 사회에 널리 안착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지독히 불투명하고 권위적이라는 의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진정성이란 기준이 일관성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본다. 저널리즘은 정치인 발언의 팩트를 체크하는 걸 넘어서 그의 과거 발언까지 전부 털어 일관성을 검증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물론 공적 사안에 한해서다. 일관성이 정치인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때, 한국 정치도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lt;span&gt;이건 정치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관성은 다양한 분야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시되어야 하며, 일관성을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은 지금보다 더욱 존중받아야 한다.&lt;/span&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 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br /&gt;&lt;/p&gt; &lt;p style=&quot;margin:6px 0px 0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rgb(29,33,41);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덧. &lt;br /&gt;현재 대선 레이스에서 이 기준을 적용했을 때 가장 일관성 있는 후보는 누구일까? 그리고 널뛰듯 입장이 표변하는 후보는 또 누구일까?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객관적으로도 충분히 검증가능할 테다.&lt;/p&gt;</content>			</entry><entry>
		<title>안철수 혹은 보수의 정상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548"/>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548#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2548</id>
		<published>2017-04-13T18:09:18+09:00</published>
		<updated>2017-04-14T21:25:42+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대선 레이스가 점입가경이다. 열흘 전과 비교해 공기가 달라졌다. 왜?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 때문이다. 최근 보름여 동안 지지율이 껑충 뛰었다. ‘문재인 독주’는 어느새 ‘문재인 대 안철수’ 구도가 됐다. 웹 커뮤니티들은 양 후보 지지자의 드잡이로 아수라장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선을 긋는다. 양자 대결이 실현되려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안철수 쪽과 단일화 내지 연대를 한다는 의미이다. ...</summary>
	<content type="html">&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548/082/4e0d2450761ba7019d99ab3bc1bdd624.JPG&quot; alt=&quot;149181764440_20170411.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800&quot;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대선 레이스가 점입가경이다. 열흘 전과 비교해 공기가 달라졌다. 왜?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 때문이다. 최근 보름여 동안 지지율이 껑충 뛰었다. ‘문재인 독주’는 어느새 ‘문재인 대 안철수’ 구도가 됐다. 웹 커뮤니티들은 양 후보 지지자의 드잡이로 아수라장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선을 긋는다. 양자 대결이 실현되려면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가 안철수 쪽과 단일화 내지 연대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 가능성이 낮고 발생해도 호남 지지자가 대거 빠져나갈 것이 분명하다.&lt;/span&gt;&lt;br /&gt;&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지금까지 ‘보수’ 세력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진정한 의미에서 한 번도 갈등을 겪지 않았다. 가장 강한 후보를 뽑고, 반석 같은 지지층을 기반으로 밀어붙이면 대개 이겼다. 박정희 이후 딱 두 번, 리버럴 세력에게 정권을 내줬을 뿐이다. 그 보수가 지금 산산조각 났다. 누굴 찍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이다. 리버럴이나 좌파한테는 익숙한 상황이지만 보수에겐 처음 겪는 혼란이다. 이들의 사고 흐름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문재인만은 절대 안 된다. 2) 문재인 당선을 막을 현실적 대안은 안철수다. 3) 그런데 안철수 뒤에는 박지원과 호남이 있다. 4) 그럴 거면 홍준표를 밀어줘야 한다. 5) 하지만 홍준표를 밀면 문재인이 당선된다. 여기서 5)는 다시 1)로 돌아가 되풀이된다.&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선거 국면 각 세력의 이합집산·합종연횡 시뮬레이션은 늘 흥미진진하다. 좀 다른 측면에서 상황을 조망해도 의미 있지 싶다. 이를테면 보수의 재편이라는 관점. ‘재편’은 정권 교체로 인한 보수 내부의 지도부 교체 내지 세대교체가 아니라 반세기 넘게 지속된 보수 헤게모니의 지각변동을 뜻한다.&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이를 논하려면 먼저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5월 대선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짚어야 한다. 말할 것 없이 박근혜 탄핵이다. 탄핵을 가능케 한 것은 거대한 촛불시위의 에너지였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우리는 이 사건의 의미를 더 명징하게 포착할 테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박정희 레짐’의 종결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점이다. 박근혜-최순실-삼성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많은 시민이 권력의 절대적 무능과 타락을 실시간 목도했다. “에이, 설마…”라고 부인할 때마다 그 온건하고 순치된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하는 보도가 터져나왔다. 어떤 환상과 수사로도 가릴 수 없는 마치 ‘실재(the real)의 출현’ 같은 사건의 연속. 비로소 우리는 박정희가 죽은 지 38년 만에 그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지 56년 만에 그의 망령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1987년의 큰 투쟁조차 박정희 레짐을 깨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달리 말하면 1987년의 그 미봉과 타협이 30년간 박정희 레짐을 존속시키는 데 일조했다. 우린 먼 길을 돌아 다시금 박정희와 결별할 기회를 잡았다.&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2016년 촛불시위에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급진적 열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가 주류였다 보긴 어렵다. 촛불시민 상당수는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석방을 촛불의 이름으로 요구하는 것에 반대했다. 정치적 발언자들을 “빨갱이” “프락치”라며 쫓아냈다. 촛불시민 다수는 ‘전복’ ‘해방’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정상’ ‘질서’를 요구했다. 그것은 보수의 가치다. 요컨대 촛불은 ‘막가는 보수’를 향한 ‘합리적 보수’의 질타였다.&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보수는 사실 극우반동 세력이다. 탄핵 국면에서 드러났듯 군사 쿠데타를 선동하고 획책하는 집단이었다. 불법, 탈법, 막말, 폭력이 일상화된 집단이 오랫동안 보수를 과대 대표해왔다. 그래서 사회 전체의 이념 스펙트럼도 왜곡되고 말았다. 이렇다보니 ‘정상적’ 민주정 국가에선 당연히 보수로 분류될 정치인, 이를테면 안철수·안희정 같은 이들이 ‘중도’나 심지어 ‘진보’로 불렸다. 이런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책과 이념에 걸맞은 정당과 지지자들 속에서 성장하고 합리적 보수로 진보좌파 정치인과 비전을 겨룰 때, 한국 정치는 명실상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이번 대선은 극우반동 세력이 도태하는 ‘보수의 정상화’의 첫 단추가 잘 꿰일지 판가름 나는 선거다. 지지 여부를 떠나 안철수 후보의 역량과 역할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lt;strong&gt;박권일 칼럼니스트&lt;/strong&gt;&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lt;strong&gt;*&amp;lt;한겨레21&amp;gt; 기고 &lt;/strong&gt;&lt;/p&gt;</content>			</entry><entry>
		<title>안희정, 갈등회피형 리더십</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412"/>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412#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2412</id>
		<published>2017-03-03T14:33:58+09:00</published>
		<updated>2017-03-04T19:47:20+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안희정 충남지사의 말 때문에 ‘난리’가 났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그분들도 선한 의지로 없는 사람과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는데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아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했다. 비난이 폭주했다. 탄핵 절차에 있는 박 대통령을 두고 “선의” 운운한 건 ‘선’을 한참 넘어갔다는 평이다. 안 지사는 ‘현장에서 반어법과 비유로 이야기했는데 기사화되면서 오해를 샀다’며 언론 탓을 했...</summary>
	<content type="html">&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412/082/713e38bac3e34c833fb88e3f1e6538a8.JPG&quot; alt=&quot;148817742108_20170228.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800&quot; /&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letter-spacing:-.32px;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quot;&gt;안희정 충남지사의 말 때문에 ‘난리’가 났다.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그분들도 선한 의지로 없는 사람과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는데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아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했다. 비난이 폭주했다. 탄핵 절차에 있는 박 대통령을 두고 “선의” 운운한 건 ‘선’을 한참 넘어갔다는 평이다. 안 지사는 ‘현장에서 반어법과 비유로 이야기했는데 기사화되면서 오해를 샀다’며 언론 탓을 했다. 설상가상 한 방송사와의 대담에서 발언을 해명하며 “통섭” 운운한 것이 구설에 올랐다. 결국 그는 사과해야 했다.&lt;/span&gt;&lt;br /&gt;&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부산대 발언, 해명, 방송사 대담 등을 살펴본 결과, 그의 발언은 전략적 수사로 보이지 않는다. 즉, 중도·보수 세력으로 외연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라기보다 안희정이라는 정치인의 본질적 면모로 보인다. 이걸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갈등회피’다.&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그가 다양한 이슈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갈등회피’라는 말로 전부 설명 가능하다. 처음에는 그가 ‘안정 희구 세력’에 어필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그런 태도를 연출한다 여겼다. 지금도 그 의구심이 해소되진 않았지만 그의 행보를 보며 차츰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정말로 갈등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다. 대연정을 언급하면서 그런 면모가 비쳤다. ‘통섭’ 같은 관념적 이야기를 하며 ‘비판적 사고는 낡은 20세기적 사고’라고 말하는 데서도 이런 모습이 강하게 배어 있다.&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안 지사의 권력의지는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자신이 권력을 가짐으로써 어떤 가치를 실현할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이런 면모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그의 대선 출마선언문이다. 예컨대 이런 대목. “경제에 관하여 저는 특별히 새로운 청사진을 내놓지 않습니다. 지난 여섯 명의 대통령이 펼친 정책을 이어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토지공개념,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전략과 금융실명제, 김대중 대통령의 IMF 극복과 IT산업 육성, 노무현 대통령의 혁신경제, 이명박 대통령의 녹색성장,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입니다.”&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노태우의 토지공개념은 구체적 정책이라기보다 원칙이다. 이를 어떤 정책으로 계승하고 강화할지가 핵심이다. 김영삼의 세계화는 신자유주의의 본격화, 김대중·노무현의 혁신경제는 일자리 없는 성장과 양극화로 이어졌다. 이명박의 녹색성장은 토건경제를 통한 생태 파괴였으며, 박근혜의 창조경제는 어느 미국 경제학자의 말처럼 그냥 “헛소리”(bullshit)다. 안 지사의 대선 출사표에는 통찰과 시대 인식은커녕 참여정부 시기 불평등 확대에 대한 일말의 성찰조차 보이지 않는다. 개천용 신화(능력주의)를 아무 의심 없이 좇겠다는 이야기를, 제로성장·탈성장 시대의 대안을 고민하는 2017년에 태연히 하고 있다.&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출마선언문은 여러모로 문제적 텍스트였다. 압권은 “공짜 밥” 발언이다. “세금을 누구에게 더 나눠주는 정치는 답이 아닙니다. 국민은 공짜 밥을 원하지 않습니다. 근로능력을 잃었을 때 인간적 품위를 지켜주는 나라를 원합니다. 시혜적 정치와 포퓰리즘은 이제 청산돼야 합니다.” 복지를 “공짜 밥”으로 묘사하는 건 극우세력과 경제신문의 단골 멘트다. 더 황당한 건 다음 문장이다. “근로능력을 잃었을 때 인간적 품위를 지켜주는 나라를 원합니다.” 종합하면 근로능력 없는 이에게도 “공짜 밥”은 없다는 얘기인데, 그럼 품위 있게 굶어 죽으라는 것인가.&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안 지사는 정책 성향 스펙트럼에서 남경필 경기지사, 유승민 의원보다 오른쪽에 있을 정도로 보수적 스탠스를 보였다. 실제 사드 배치나 재벌개혁 의제에서 우파적 발언을 거듭해왔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를 일단은 보장하는 사회이고 민주당은 원래부터 보수정당이었으니 안희정 후보의 성향을 그 자체로 문제 삼긴 어렵다. 문제는 안 후보가 우파라는 점이 아니다. 사회에 대한 비전과 이를 떠받치는 철학이 없다는 점이다.&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안희정의 “통섭”을 정치언어로 번역하면 ‘통합’ 또는 ‘포용’이다. 이건 강자의 논리다. 한국의 대통령이 아무리 ‘제왕적 대통령’이라 불린다지만 무슨 절대권력이라 착각하면 오산이다. 그 시행착오를 이미 안 지사의 정치적 스승인 노무현 전 대통령이 보여줬다. 안 지사는 다음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자본권력 같은 사회의 강자들, 기득권과 갈등하지 않고 사회를 개혁할 방법이 있는가?&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lt;br /&gt;&lt;/p&gt; &lt;p align=&quot;justify&quot; style=&quot;color:rgb(34,34,34);font-family:NanumBarunGothic, &#039;Nanum Gothic&#039;, &#039;나눔고딕&#039;, &#039;맑은 고딕&#039;, &#039;Malgun Gothic&#039;, &#039;돋움&#039;, Dotum, &#039;굴림&#039;, Gulim, Helvetica, sans-serif;font-size:16px;letter-spacing:-.32px;&quot;&gt;&lt;strong&gt;*『&lt;/strong&gt;&lt;strong style=&quot;letter-spacing:-.32px;&quot;&gt;한겨레 21&lt;/strong&gt;&lt;strong style=&quot;letter-spacing:-.32px;&quot;&gt;』 제115호에 실린 글입니다.&lt;/strong&gt;&lt;/p&gt;</content>			</entry><entry>
		<title>웰컴 투 ‘트럼프 월드’ -트럼프와 초불확실성</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368"/>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368#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2368</id>
		<published>2017-02-10T00:32:43+09:00</published>
		<updated>2017-02-11T23:24:45+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실행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취임하자마자 미국의 새 대통령은 세계를 충격과 경악에 빠뜨렸다. 1월27일 반이민 행정명령에 이어 2월1일에는 ‘책임성 있는 이민법을 통한 납세자 보호 행정명령’이란 제목의 행정명령 초안이 발표됐다. 반이민 행정명령이 이슬람권 7개국 출신자의 입국을 한시적으로 금지하는 것이라면, 이번 것은 이민자 장벽을 전체적으로 높이는 조치다. 도널드 트럼프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368/082/7c86e5617c5516c4e4aa573d272c403c.JPG&quot; alt=&quot;148635812552_20170207.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800&quot; /&gt;&lt;p&gt;&lt;br /&gt;&lt;/p&gt; &lt;/div&gt;&lt;div&gt;실행력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취임하자마자 미국의 새 대통령은 세계를 충격과 경악에 빠뜨렸다. 1월27일 반이민 행정명령에 이어 2월1일에는 ‘책임성 있는 이민법을 통한 납세자 보호 행정명령’이란 제목의 행정명령 초안이 발표됐다. 반이민 행정명령이 이슬람권 7개국 출신자의 입국을 한시적으로 금지하는 것이라면, 이번 것은 이민자 장벽을 전체적으로 높이는 조치다.&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도널드 트럼프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선언한 한편,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는 행정명령에도 서명했다. 미국 시민이나 멕시코 시민들은 물론 유엔과 교황청까지 나서서 트럼프를 만류하지만 이 사내, 막무가내다. 트럼프의 브레이크 없는 폭주는 언제까지 계속될까.&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트럼프가 인종주의자, 성차별주의자, 거짓말쟁이라는 건 사실이다. 이런 판단이 그의 행동을 멈추게 하거나 대통령 자리에서 쫓아낼 직접적 수단은 되기 어렵다. 그는 막강한 권한을 거머쥐었고 당분간 광폭 행보를 계속할 것이다. 다만 그가 가져온 혼돈이 대충돌로 점화될 가능성도 점점 커졌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특히 캘리포니아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미국 내 이민자들, 리버럴들의 세가 강한 이 지역에서는 반트럼프 봉화가 일찌감치 피어올랐다. 로스앤젤레스 연방법원은 반이민 행정명령이 집행되지 못하도록 잠정 금지했다. 트럼프는 행정명령에 따르지 않는 지역의 연방재정지원금을 끊겠다고 협박했다. 인터넷에서는 캘렉시트(Calexit) 해시태그가 번져나간다. 캘렉시트는 ‘캘리포니아’(California)와 ‘탈퇴’(Exit)를 합친 말로 캘리포니아의 연방 분리 독립을 가리킨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한국으로 치면 경상도가 분리 독립하겠다는 것인데, 비좁은 중앙집권 국가에 사는 한국인에겐 ‘상상 밖’의 사태다. 하지만 연방주의 전통이 강하고 각 주의 자치권이 존중되는 미국에서 이런 주장이 나오면 우리와는 느낌이 달라진다. 캘리포니아의 지역총생산은 세계 6위 규모다. 구글·인텔·애플 등 글로벌 정보통신 기업뿐 아니라 록히드마틴·보잉 같은 거대 군산복합 기업 역시 캘리포니아에 있다. 캘리포니아주 하나가 어지간한 선진국보다 경제 규모가 크다. 한국에선 ‘말도 안 되는 일’로 일축되겠지만 미국에선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잖아?’ 정도 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흔히 트럼프의 득세를 가리켜 금융산업에 밀착한 미국 동부 엘리트 주류 집단에 대한 반발로 해석하는데 틀린 건 아니지만 정확하다고 하기도 어렵다. 전후 미국의 가치를 만들고 지탱해온 주류는 동부만이 아니라 서부도 포괄하기 때문이다. 동부의 와스프(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가 미국의 기원을 표상한다면, 캘리포니아와 할리우드로 대변되는 서부는 아메리칸드림의 상징이다. 거칠게 말해 전후 미국 사회의 합의는 두 세력, 즉 동부 엘리트와 서부 이민자-리버럴의 연합에 기반한다. 그러나 신경제 시기를 통과해 2008년 대위기에 이르러 명확해진 것은 월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만 빼고 다 망했다는 사실이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집권에 성공한 극우 정치가의 핵심적 공통점이 있다. 계급적 불만을 국가주의 언어로 바꿔치기하는 데 천재적이라는 점이다. ‘캘리포니아적 가치’를 반트럼프의 기치로 내세우는 것은 캘리포니아 사람 입장에선 후련할지 모르겠으나 싸움의 구도에서는 그리 좋지 못한 전략이다.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캘리포니아적 가치’는 자신을 호명하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말하는 ‘아메리카 퍼스트’는 (거기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직접적으로 자신을 호명하는 말이다.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그렇다고 트럼프의 상황이 좋은 건 아니다. 특유의 뚝심과 배짱으로 밀어붙이지만 (외교적) 고립주의와 (통상정책적) 보호주의가 다른 나라로부터 강한 반발과 보복 조치를 불러올 것은 명약관화하다. 대통령 취임 직전 트럼프 지지율은 50% 아래에서 출발했다. 이는 미 대통령 당선자치고 이례적으로 낮은 수치였다. 대중적 인기에 의존하는 대통령인 만큼 지지율이 한계선 이하로 빠지면 급격히 흔들릴 가능성도 높다. 트럼프와 함께 ‘초불확실성’의 2017년이 시작했다. 미국인만이 아니라 전 지구인에게 험난한 한 해가 될 것 같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한겨레 21』1148호에 실린 글입니다.&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지도에 드리운 박정희 망령</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284"/>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284#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2284</id>
		<published>2017-01-11T15:29:52+09:00</published>
		<updated>2017-01-12T10:17:52+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국가가 또 여성들에게 모욕을 안겼다. 지난 12월 29일 행정자치부는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여기엔 지자체별 합계 출산율, 출생아 수, 가임기 여성 수가 담겨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 비난이 폭주했다. 특히 반감을 산 건 ‘가임기 여성’ 숫자였다. 지도에서 각 지자체를 클릭하면 해당 지자체에 가임기 여성이 얼마나 거주하는지 한 자리 수 단위까지 공개됐다. 인구에 따라 순위도 매겨졌다. “여성...</summary>
	<content type="html">&lt;p&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284/082/235c796f4fca60ecf36fe8ce55dc7f61.JPG&quot; alt=&quot;148394626373_20170110.JPG&quot; width=&quot;634&quot; height=&quot;845&quot; /&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국가가 또 여성들에게 모욕을 안겼다. 지난 12월 29일 행정자치부는 대한민국 출산지도를 온라인으로 공개했다. 여기엔 지자체별 합계 출산율, 출생아 수, 가임기 여성 수가 담겨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 비난이 폭주했다. 특히 반감을 산 건 ‘가임기 여성’ 숫자였다. 지도에서 각 지자체를 클릭하면 해당 지자체에 가임기 여성이 얼마나 거주하는지 한 자리 수 단위까지 공개됐다. 인구에 따라 순위도 매겨졌다. “여성을 애 낳는 기계로 본다”는 비판이 비등했다. 이 와중에 디씨인사이드 주식갤러리에는 “보X몬 고(GO)”라는 신조어가 등장한다. “수확할 보X년들이 여기저기 널렸네”“보X몬고 있으면 연령 구분해서 납치 강간 같은 게 가능한 거냐” 같은 게시물이 쏟아져 나왔다. &lt;br /&gt;&lt;/p&gt; &lt;p&gt;행자부는 지도의 취지에 대해 “출산율 저하로 인한 인구 감소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지역별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을 알기 쉽게 알려주고 지자체간 자율경쟁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라 설명했다. 하지만 그 설명이야말로 국가 스스로 여성을 출산 기계로 보고 있을 뿐 아니라 여성의 신체를 실적경쟁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자인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논란이 확산되자 정부는 황급히 출산지도를 삭제했다. 수정공지문에서 행자부는 “용어나 통계는 통계청 자료를 활용해 제공한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신들은 이미 존재하는 통계를 공개한 것뿐이라는 얘기다. 이걸 보면 정부는 여전히 뭐가 문제인지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파악할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 &lt;/p&gt; &lt;p&gt;물론 출산 관련 통계는 필요하며, 시민들은 이와 관련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별 가임기 여성 통계 역시 기초자료로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민들이 분노하는 이유는 통계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통계를 다루는 정부의 시선과 방식이다. ‘무엇(what)’이 아니라 ‘어떻게(how)’가 문제였다. 더 심각한 건 이런 사건이 계속 반복된다는 점이다. 보건복지부가 국가건강정보포털에 게시한 ‘여성의 이상적인 가슴의 조건’이라는 문서는 국가가 여성의 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문서는 쇄골 중심과 유두 간의 거리, 양쪽 유두 사이의 거리, 유륜의 직경과 색깔들을 상세히 거론하면서, 소위 “아름다운 가슴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 나라가 여자 가슴 기준까지 세워주냐”“여자가 가축인가?” 등등의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보건복지부는 2016년 8월 4일 이 문서를 삭제했다.&lt;/p&gt; &lt;p&gt;바로 이런 것들이 한국사회가 여성이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이 나라는 여성의 몸을 마치 국유재산처럼 여긴다. 가히 ‘정책적 미소지니’라 부를만한 이 경향은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시대에 뿌리를 둔다. 박정희 정권 초기인 1960년대 초부터 가족계획이 도입되면서 인구학적‧경제적 논리에 따라 여성의 육체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전례 없이 강화되었다. 또한 이때는 입양제도를 통해 ‘비정상적 출생인구’를 국외로 송출하는 것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시행했던 시기였다. 체제 재생산과 효율을 명분으로 구성원의 신체를 구속, 통제하고 때로 배제하는 박정희 체제의 생명정치적 성격은 무려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대한민국 출산지도에도 박정희주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lt;/p&gt; &lt;p&gt;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한다는 것, 그리고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 공동체가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임을 드러내는 신호다. 그저 임신가능하다고해서 출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이 살아갈만해야, 더 정확히 말해서 여성이 살아갈만해야 아이도 낳을 수 있다.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은 기꺼이 다음 세대를 낳아 기를 수 있을만한 사회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번드르르한 캠페인이나 지자체간 실적 경쟁 같은 얄팍한 수단으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lt;/p&gt; &lt;p&gt;출산율 반전에 성공한 몇몇 국가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인구학적 접근보다 사회복지 및 여성학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사회는 자국 여성이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들에 고통 받는지를 세심히 조사하고, 그들이 존엄하게 살아가도록 지원하기 위해 국가 자원을 총동원한다. 출산율은 그런 지원이 성공적으로 이뤄질 때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가임기 여성 숫자에 이토록 많은 여성들이 분노한 건 그 통계를 비밀로 덮어두어야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국가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책임을 여성들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출산지도 사태는 요컨대 국가의 무책임에 대한 분노였던 것이다. &lt;/p&gt; &lt;p&gt;&lt;br /&gt;&lt;/p&gt; &lt;p&gt;*위 글은 『한겨레21』145호에 실린 「지도에 그려진 박정희 망령」의 원본입니다.&lt;/p&gt;</content>			</entry><entry>
		<title>주갤러라는 이름의 표현대중</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159"/>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159#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2159</id>
		<published>2016-12-22T14:40:13+09:00</published>
		<updated>2016-12-26T02:15:14+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디씨인사이드 주식 갤러리를 흔히 ‘주갤’, 유저들은 ‘주갤러’라 부른다. 주식시장이란 게 세상 온갖 일에 영향을 받곤 하는지라, 주갤러들은 세상사에 관심이 많다. 물론 아는 게 많다고 주식으로 돈을 번단 보장은 없다. “주식만 빼고 다 잘하는 주갤러”란 말이 나온 이유다. 아무튼 그 주갤러가 또 한 번 주가를 올린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12월 7일 국회에서 열린 &#039;박근혜-최순실 게이트&#039; 2차 청문회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summary>
	<content type="html">&lt;div&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159/082/45712dcf62c123dfeb82b1e376d650cc.JPG&quot; alt=&quot;148213178524_20161220.JPG&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800&quot; /&gt;&lt;p&gt;&lt;br /&gt;&lt;/p&gt; &lt;p&gt;디씨인사이드 주식 갤러리를 흔히 ‘주갤’, 유저들은 ‘주갤러’라 부른다. 주식시장이란 게 세상 온갖 일에 영향을 받곤 하는지라, 주갤러들은 세상사에 관심이 많다. 물론 아는 게 많다고 주식으로 돈을 번단 보장은 없다. “주식만 빼고 다 잘하는 주갤러”란 말이 나온 이유다. 아무튼 그 주갤러가 또 한 번 주가를 올린 사건이 벌어졌다. &lt;br /&gt;&lt;/p&gt;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지난 12월 7일 국회에서 열린 &#039;박근혜-최순실 게이트&#039; 2차 청문회에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출석했다. 이 자리에서 박영선 의원이 김기춘의 위증을 밝혀냈는데 그 과정에서 주갤러의 제보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주갤러는 카카오톡 메신저를 통해 과거 한나라당 후보 검증회에서 김기춘이 최순실을 알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영상을 찾아내 알렸던 것이다. 청문회 이전부터 자신은 최순실에 대해 일체 모른다고 딱 잡아떼던 김기춘이었다. 하지만 이 제보로 인해 그는 어쩔 수 없이 “최순실이라는 이름은 이제 보니까 제가 못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고 언급하며 최순실 이름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물론 김씨가 자백한 건 최순실의 국정개입 사실 자체는 아니다. 최순실 이름은 들어봤다, 정도로 말을 바꾼 것인데 그럼에도 전국에 생중계된 그 청문회 영상의 효과는 작지 않았다. “주갤러가 해냈다”는 환호가 웹에 넘실댔다. 이후 디씨인사이드 김유식 대표는 한동안 ‘주식 갤러리’를 ‘명탐정 갤러리’로 바꿔 놓기도 했다. 박영선 의원은 주식갤러리 게시판에 ‘안녕하세요.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박영선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라는 글과 사진을 남겼다. “디씨 명탐정 갤러리 / 주갤! 여러분의 용기가 세상을 바꿉니다. 이젠 주식도 대박 나세요! 감사합니다” 주갤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행방이 묘연할 때도 ‘우병우 변장시 몽타주’ 등을 합성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lt;/div&gt;&lt;div&gt; &lt;/div&gt;&lt;div&gt;주갤러가 부각되긴 했지만 그들만 있는 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웹상에서 유사한 행동을 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미디어 수용자와는 사뭇 다른 주체다. 단지 정보를 수용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공하거나 심지어 생산해낸다. 일본의 IT비평가 우메다 모치오는 오늘날 급변한 미디어환경을 ‘총표현사회’라는 말로 요약한다. 총표현사회는 매체 환경이 일방통행에서 커뮤니케이션 지향으로 변하면서 정보의 수신자가 동시에 발신자가 되는 사회다. 우메다는 인터넷에서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대중을 전체 인구의 10분의 1 정도로 추정하면서, 이들은 우중(愚衆)이 아니라 매우 창조적이고 영리한 집단이며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축이라고 주장한다. &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우메다는 이들 집단에 특별한 이름을 붙이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국의 웹에도 이런 집단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3년 전쯤 내가 떠올린 이름은 ‘표현대중(expressive crowd)’이었다. 표현대중은 매스 미디어의 정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대중이 아니라 정보를 가공해서 확산시키거나 아예 스스로 뉴스와 정보를 생산하는 대중을 가리킨다. 표현대중에는 소위 ‘파워 블로거’니 ‘네임드 유저’ 뿐 아니라 SNS, 블로그 등을 적극적으로 운영하거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도 포함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내가 ‘표현대중’이라 부르는 집단을 우메다는 초지일관 희망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한국의 반이주노동자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 일본의 재특회 같은 극우집단 역시 표현대중의 일부다. 표현대중들이 부도덕한 개인의 신상을 털겠다며 나섰다가 생사람 잡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주류 매체들이 혐오표현과 차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주의를 기울여가는 것과 대조적으로 온라인상에서는 날이 갈수록 혐오 표현, 차별 발언이 늘어나고 있다. 표현대중들 상당수는 자신의 행위를 정치적 실천이라기보다 ‘정의구현’이라 여기는데, 이번 주갤러의 ‘쾌거’는 그들의 정의구현이 공익과 일치한 경우다. 주갤러라는 표현대중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주식 갤러리가 김치녀 혐오 담론이 가장 많이 유통됐던 커뮤니티 중 하나였단 사실 역시 기억해야 한다.&lt;/div&gt;&lt;div&gt;&lt;br /&gt;&lt;/div&gt;&lt;div&gt;원문 &lt;/div&gt;&lt;div&gt;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2827.html&lt;br /&gt;&lt;/div&gt;&lt;div&gt;&lt;br /&gt;&lt;/div&gt;</content>			</entry><entry>
		<title>&#039;시민의회&#039; 메모</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122"/>
	<link rel="replies" type="text/html" href="http://fabella.kr/xe/blog2/82122#comment"/>		<id>http://fabella.kr/xe/blog2/82122</id>
		<published>2016-12-11T15:25:57+09:00</published>
		<updated>2016-12-12T00:20:47+09:00</updated>
		<author>
			<name>박권일</name>
		</author>
		<summary type="text">시민의회라는 것을 명망가들이 제안했고, 거기에 대한 반발이 거센 모양이다. 그분들의 선의를 의심하진 않는다. 진심으로 뭔가 좋게 만들어보려고 일을 추진했을 것이다. 난 오히려 시민의회 주장보다 그 진의를 의심하는 목소리-&#039;순수시민&#039;에 대한 저 집요한 강박이 더 문제적이고 징후적이라 생각한다. 물론 시민의회 비판이 전부 진의를 의심하기에 나온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같은 형태의 시민의회에 회의적인 이유 또한 그...</summary>
	<content type="html">&lt;span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039;Helvetica Neue&#039;, 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span&gt;&lt;p&gt;&lt;span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039;Helvetica Neue&#039;, 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img src=&quot;http://fabella.kr/xe/files/attach/images/137/122/082/2fe02c7fea1ecf0e2baeceecaaa8a116.jpg&quot; alt=&quot;candle-1521246_960_720.jpg&quot; width=&quot;960&quot; height=&quot;640&quot; /&gt;&lt;/span&gt;&lt;/p&gt; &lt;p&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background-color:rgb(255,255,255);color:rgb(29,33,41);font-family:&#039;Helvetica Neue&#039;, 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quot;&gt;시민의회라는 것을 명망가들이 제안했고, 거기에 대한 반발이 거센 모양이다. 그분들의 선의를 의심하진 않는다. 진심으로 뭔가 좋게 만들어보려고 일을 추진했을 것이다. 난 오히려 시민의회 주장보다 그 진의를 의심하는 목소리-&#039;순수시민&#039;에 대한 저 집요한 강박이 더 문제적이고 징후적이라 생각한다. 물론 시민의회 비판이 전부 진의를 의심하기에 나온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같은 형태의 시민의회에 회의적인 이유 또한 그것이 &#039;불순&#039;하다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이 기성질서에 대한 순종에서 나온 발상이기 때문이다.&lt;/span&gt;&lt;br /&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039;Helvetica Neue&#039;, 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039;Helvetica Neue&#039;, 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그들은 여전히 모종의 능력과 자격으로 대표를 뽑으려 한다. 그래서는 기껏해야 의회정치의 열화복제판일 뿐이다. 국회의원 개개인이 민의를 제대로 대의하지 못하는 것이 유일한 문제라면 대표성을 개선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노력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정치는 정당정치/의회정치로 번역될 수 없으며 제도적 개선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정치란 개인 이해관계들의 조정, 갈등의 중재 등을 통한 &#039;정치적 파레토 최적&#039;, 그러니까 어떤 테크니컬한 해법(이 정치적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넘어서는 실천이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039;Helvetica Neue&#039;, 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039;Helvetica Neue&#039;, 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김제동 씨는 국민이 곧 국가라고 했지만 천만에, 인민은 늘 국가를 초과한다. 그 &#039;초과&#039;는 평균적 다수, 어떤 대단한 능력자, 고귀한 지도자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고통받는 자, 배제당해서 국민으로 호명되지도 못한 자, 그래서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존재를 걸고 싸우는 소수에 의해 현현한다. 민주주의란 다수가 그 소수에 결합할 때 비로소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민의회 같은 유사의회주의(pseudo parliamentarism)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039;Helvetica Neue&#039;, 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lt;br /&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color:rgb(29,33,41);font-family:&#039;Helvetica Neue&#039;, Helvetica, Arial, sans-serif;font-size:14px;background-color:rgb(255,255,255);&quot;&gt;촛불의 광장, 깃발의 광장에는 다양한 열망들이 모였다. 그 열망을 특정 정치인 및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로 훤원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촛불을 단순히 박근혜와 최순실에 대한 증오로 축소시키는 것에도 반대할 수밖에 없다. 분명히 광장에는 체제 정상화의 열망, 체제 수호의 의지들이 존재했다. 그것을 보수성이라 규정할 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체제 &#039;너머&#039;를 향한 열망 또한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기성세대보다 훨씬 오래 이 땅에서 살아가야할 다음 세대의 눈빛에서, 그들의 연설에서 분명히 나는 어떤 &#039;초과&#039;를 감지했다. 우리에겐 여전히 더 많은 상상이 필요하다. &lt;/span&gt;&lt;/p&gt;</content>			</entry></fe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