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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의 <여담>은 국내외의 좌파 혁신을 주제로 삼아, 당면한 정세에서 필요하지만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온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 사회운동/노동자운동을 향한 여담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사회운동의 상황을 소개하거나 논평하는 것도 포함한다.

활동가. 영화연출을 전공했으나, 돌곶이포럼과 노동조합, 사회운동단체 등에서 활동해왔으며, 사회운동과 노동자운동, 영화 등에 대한 글을 써왔다. 최근에는 중국 사회운동과 교류하며 국제연대의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 저서로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쓴 르포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가 있다.

안치영 교수님(이후 존칭 생략)의 홍콩에 대한 글에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이 있어 글을 남긴다.
일국양제는 그 출발부터 모순적인 시스템이었다. 한때 이병한 같은 사람들은 그것이 “유가 전통의 천하 관념을 복원한 것”이라고 허황되게 설명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드러난 바, 유가 전통이니 뭐니 하는 것은 일종의 구실에 불과할 뿐, 중국이 개혁개방을 거쳐 경제 성장을 구가하기 위해선 홍콩이라는 유용한 도구가 23년 간 필요했던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고도의 자치’란 부동산 자본가들과 친중 정치 엘리트들만의 ‘자치’였을 뿐, 평범한 시민들에게 ‘고도의 자치’란 주어진 적이 없다. 그것은 영국 식민지 체계를 그대로 본 딴 형태의 모순적 도시였을 뿐이다. 일국양제는 정세에 따라 규정될 수밖에 없었고, 중국-홍콩 체제가 정치적‧사회적으로 위태로워지기 시작할 때, 그것의 존립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일국양제를 보장하라!”는 홍콩 민주파의 구호는 당면한 현실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지만, 실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갈망해온 홍콩 민중의 역사를 다른 언어로 대체하고 있을 뿐이란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한데 나는 안치영의 글 하단(홍콩인들의 문제; 중국 인민들과의 연대가 아니라 서방과의 연대 선택) 내용은 매우 문제가 있는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안치영은 홍콩 항쟁 과정에서 홍콩 시민들이 “중국의 인민들과 연대한 중국 민주화의 선봉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연대한 탈중국적 경향을 거침없이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라벨까지 무리하게 덧붙인다. 하지만 이는 ‘매우 실망스럽게도’ 사회운동 주체에 대한 분석을 결여하고 있다.
일단, 740만 명의 홍콩 시민들이 어찌 단일하겠는가. 그건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여러 복잡한 층으로 나누어져 있는 만큼이나 난해하고 단순하지 않다. 홍콩에 진정한 보통선거 등의 제도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범민’(泛民)이라고 하는데, 이들 범민 역시도 단일하지 않다. 이들 중에는 그저 보통선거 정도의 개혁만을 원하는 리버럴리스트들이 있는가 하면, 사회민주주의자나 트로츠키주의자 등 마르크스주의자들, 페미니스트도 있고, 영국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하는 소수의 노인들, ‘홍콩독립’을 외치는 지역민족주의자들까지 포괄한다. 어찌 이들을 뭉뜽 그려 그중 일부의 모습을 통해 홍콩 시민의 태도를 설명할 수 있나.
홍콩 항쟁 초기의 상황을 보면 이런 복잡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알 수 있다. 가령 튄문공원(屯門公園)에서 지역 주민들은 내지(内地;중국대륙) 출신의 성매매 이주여성들을 경멸스럽게 지칭하며 공원에서 당장 나갈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는데, 이런 모습은 홍콩인 상다수가 갖고 있는 내지출신 이주자들에 대한 혐오 정서를 드러낸다. 또, 안치영이 언급한 것처럼 유니온잭을 들고 시위를 하는 일부 시위대의 모습은 제국주의 영국이 이 모순의 출발이었다고 보는 우리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홍콩의 다른 공간들에서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는데, 가령 내지인 여행객들에게 ‘홍콩 항쟁’에 연대해줄 것을 호소함으로써 펼쳐졌던 긴장도 높은 상황들이 있었고, 홍콩 항쟁에 연대하기 위해 대륙에서 온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높은 관심도 있었다. 이런 상황들은 범민의 복잡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나아가 한 사람의 정서마저도 양가성이 있음을 반영한다. 한데 홍콩 항쟁을 비판하거나 혹은 단순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런 점을 무시하고, 이 안의 차이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나는 안치영도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우리 모두 알다시피 중국 내지의 사회운동적 조건은 상당히 열악하다. 2010년 난하이-혼다 파업 이후 폭발적으로 이어졌던 신노동자(농민공)의 파업 물결은 광둥성을 비롯한 연안지역의 노동자운동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2016년 즈음부터 2019년 봄에 걸쳐 전개된 당국의 강도 높은 탄압은 이런 운동의 싹을 거의 절멸시켜버렸다. 운동 속에서 성장하고, 운동 속에서 고차원의 전망과 전략들을 모색하던 활동가들은 소리소문 없이 체포되거나 자취를 감추었다.
특히 2018년 여름부터 2019년 여름까지 1년 간 지속된 제이식 노동자 탄압은 그것에 종지부를 찍은 사건이었다. 1천 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세계의 공장 광둥성 선전에선 그 정도면 작은 공장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장에서 고작 공회(노동조합) 설립을 요구하고 싸웠다는 이유로, 또 그것에 연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의 100명의 노동자‧학생‧NGO 활동가들이 체포됐다. 이들의 핵심은 베이징대학 마르크스주의학회를 중심으로 한 청년 마오주의자 그룹인데,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홍콩대학 교수 Ngai Pun(潘毅)와 홍콩의 좌익 활동가들이다. 潘毅는 이제 더 이상 연구를 명목으로 대륙에 입경할 수 없다. 들어가는 순간 체포되어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홍콩의 지식계나 사회운동이 중국 내의 사회운동과 연결된 맥락은 결코 짧지 않다. 가령 1993년 선전의 한 인형공장에서 불이 나 그 안에서 일하던 81명의 여성 노동자(이들은 모두 이 즈음부터 폭증하기 시작한 농민공이었다)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이 끔찍한 노동 참사에 연대했던 건 홍콩의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개혁개방 이후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던 중국 도시들의 노동권에 대해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이런 연대는 최근까지도 지속됐다. 홍콩은 중국 정부가 자본 투자를 끌어들이는 통로이기도 했지만, 사회운동가들이 중국 사회운동을 조력하고자 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홍콩정부(혹은 중국정부)가 왜 홍콩 사회운동과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던 제이식 투쟁에 대한 탄압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시점에 '범죄인 송환조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는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물론 이 조력 중에는 미국의 리버럴스트도 있고, NED도 있었으며, 혹은 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마치 과거 한국 사회운동에 대한 국제연대의 스펙트럼이 다양했듯이 말이다.
그 때문에 홍콩인 ‘일부’가, “유니언잭과 성조기를 든 순간 중국인들에게 홍콩은 (…) 제국주의와 결탁한 ‘한간(漢奸)’일 뿐”이라는 안치영의 말은 중국 관료들이 홍콩에 대해 갖는 모순적이고 국가주의적인 태도에 대한 알리바이를 무비판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안치영은 “홍콩 문제를 둘러싼 서방의 압력은 (…) 제국주의의 간섭의 연속으로 중국 정부의 내부적 지지 기반을 강화시키고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막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중국 정부에게는 그렇게 부정적인 것도 아니”라고 분석한다. 물론 이는 맞는 말이지만, 여기엔 누락이 있다. 오늘날 중국의 통치 시스템에 대한 내부의 비판자들, 좁게는 비판적 지식인들, 넓게는 경제사회적 모순에 불만을 품은 농민공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논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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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안치영은 “미국의 홍콩에 대한 제재는 중국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국의 의도에서 벗어난 홍콩의 기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중국의 의도에 부합”한다고 보면서, 여기에 덧붙여 “홍콩에서의 자본의 이탈과 부유한 홍콩인들의 이탈은 홍콩 서민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주거 조건의 개선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말한다. 이는 터무니없는 예측이다. 2003년 홍콩 경제가 급속도로 추락해 불만이 폭증했을 때, 중국 정부가 택한 해결책은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메스가 아니라, 홍콩에 중국인들이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도록 제한을 풀고, 동시에 여행객을 대거 유입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홍콩의 경제지표를 개선시켰고, 홍콩 경제에 엄청난 버블을 형성시켰다. 2003년부터 2017년 사이 홍콩 GDP는 무려 93.9퍼센트 성장했고, 홍콩 주식시장에서 중국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은 3분의 2에 다다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버블 속에서 모순이 폭발했는데, 개혁개방 이후 형성된 중국의 졸부들이 홍콩의 부동산을 마구 사들였고, 동시에 여행객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오다보니 물가도 급속도로 오르고, 홍콩 도심 곳곳의 가게들 역시 문을 닫고 죄다 여행객을 위한 점포들로 바뀌었다. 오늘날 홍콩의 부동산 시장은 전 세계에서 타 도시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인데, 여기엔 중국 자본의 투기가 한몫했다. 아마도 안치영이 들었다는 광둥성의 모 대학 교수의 친구들은 이 투기 붐에 따라가지 못한, 정치에 도무지 관심이 없는 소수의 중산층들일 것인데, 그런 이들의 진지하지 않은 태도가 홍콩 시민 다수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점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홍콩 문제는 중국 내부 문제 맞다. 나아가 아시아의 문제이고, 전 세계 민중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한국 바깥의 사회를 살펴보고, 그곳의 문제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려 노력하는 이유는, 그곳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가 바로 우리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홍콩이 겪고 있는 극심한 빈부격차(홍콩의 지니계수는 0.520으로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에 충분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집값과 임대료, 40만 명에 달하는 이주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인권, 노조 할 권리가 거의 보장되어 있지 않은 노동자들(職工盟은 이에 맞서 더 많은 노조를 만들고, 코로나 시기에 추락하는 노동권을 방어하는 운동에 집중하고 있다), 부동산 재벌과 기업들의 무절제한 투기 행각, 그리고 극소수의 재벌 및 중국 통치 권력과 조우하며 공공을 위한 정치가 아닌 사적 통치행위를 일삼는 지배엘리트들의 문제 등은 한국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가 보기에도 결코 낯설지 않다.
안치영은 홍콩과 광주는 다르다고 말한다. 맞다. 홍콩과 광주는 다르다. 조슈아 웡은 “홍콩은 광주입니다”라고 말하지만, 홍콩은 광주가 아니고, 다른 모순들 속에 위치한다. 하지만 조슈아 웡 말고도 다수의 홍콩 시민들이 ‘광주’에 대해 자꾸 질문하는 이유는 둘이 같기 때문이 아니다. 광주 항쟁에서 벌어진 국가폭력에 대한 뼈저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홍콩 시민 9천 여 명이 시위 과정에서 체포됐고, 홍콩경찰의 극심한 폭력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크게 다쳤다. 17살짜리 청소년이 총을 맞았고, 15살 청소년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며, 22살 대학생이 토끼몰이에 쫓겨 도망치다가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그저 ‘다르다’고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우리는 몇 번의 고개를 넘어가야만 ‘우리’를 들여다볼 수 있지만, 홍콩에 대해선 별로 그렇지 않다. 동아시아에서의 국제연대를 더욱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때문에 나는 홍콩은 한국의 과거를 경험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한국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나쁜 미래를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회니까 모순 역시 다르게 폭발하겠지만, 타국의 문제에 대해 '다르니까 모든 것이 다를 것'이란 식으로 바라봐서는 우리가 전 세계 모든 문제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할 게 없다. 아마도 안치영이 “개인들이 홍콩인들을 동정하고 연대를 표할 수는 있지만 거기까지일 뿐”이라고 말하고, “홍콩 문제는, 그것이 부당하게 보이고, 내부인들이 부당하게 여길지라도 법적인 절차에 따른 것”이라고 무리하게 ‘위악’적 제스처를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광주 항쟁도 10년 넘게 광주 폭동이었고, 전두환도 오랫동안 적법한 대통령 중 하나였다.
홍콩 항쟁 안에는 이러한 관점으로 이 운동에 개입하고, 잘못된 경향(가령 대륙인 혐오 인종주의)에 대해 토론하면서 동참하는 운동가들이 있다. 그들은 평소에는 중국의 노동자운동 등 사회운동들과 적극 연대해왔고, 이 항쟁 속에선 모든 힘을 다 해 다른 경향을 창출하려 노력한다. 그것은 한국의 좌파들이 우리가 촛불 내의 잘못된 경향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그 운동 속에서 함께 하려 했던 것과 같다. 세상을 A냐 B냐로 봐선 대안적인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안치영이 잘못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사회운동의 모든 국제연대는 ‘동정’이나 직접적 ‘개입’을 위한 게 아니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대비하고, 다른 사회를 상상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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