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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의 <여담>은 국내외의 좌파 혁신을 주제로 삼아, 당면한 정세에서 필요하지만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어온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 사회운동/노동자운동을 향한 여담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사회운동의 상황을 소개하거나 논평하는 것도 포함한다.

활동가. 영화연출을 전공했으나, 돌곶이포럼과 노동조합, 사회운동단체 등에서 활동해왔으며, 사회운동과 노동자운동, 영화 등에 대한 글을 써왔다. 최근에는 중국 사회운동과 교류하며 국제연대의 전망을 모색하고 있다. 저서로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쓴 르포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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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의당의 '종이당원'이다. 누군가는 나 정도면 종이당원이 아니라고 말하겠지만, 한국의 진보정당이 가졌던 '진성당원제'의 의의에서 나는 종이당원으로서의 역할 이상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 사회운동단체와 노동조합 운동 경험을 거치면서 갖게 된 생각과 정세판단에서 보면, 정의당은 내 바람과는 한참 멀리 있는, ‘우경화된 진보정당’이다. 내게 있어서 이는 기분 나쁠 일도, 자조할 필요도 없는, 그저 건조한 평가 이상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정의당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현 상황이 정의당이라는 우경화된 진보정당이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상태이기도 하고, 그밖에 여러 복잡한 고민 때문이다. 이 고민은 당면한 정의당 당직 선거에 대해서도 영향을 미친다. 다소 긴 글이 되겠지만, 페친들 중 정의당 당원인 분들께서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한 명의 '사회운동좌파'로서 나는 한국의 사회운동 질서가 거의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것이 완전히 망하지 않길 바라고, 다시 일어설 있길 바란다. 심지어 국제 권역적 관점에서 생각하면, 한국의 운동이 이 정도라도 존재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는 몇 안 되는 희망과도 같은 일이다. 어쨌든 이 와해(혹은 침체) 이후, 좌파에게는 몇 가지 진단과 그에 따른 아포리아가 남았다. 우선 첫째는, 사회운동과 진보정당(정의당)의 거리가 점차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노동조합의 비정치성을 낳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정당의 사회운동으로부터의 이탈을 낳는 원심력을 더 강화한다.

노동조합이 비정치화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이 더 이상 고 김용균처럼 일하다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혹은 사람답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조건을 좀 더 개선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법적/제도적 변화 역시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운동이 진보정당운동과 협업하는 게 아니라, 집권당이 된 자유주의 정당과 협업하고자 하는 동인이 더 커졌음을 뜻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이나 계급정당을 통해 자신의 계급적 역량을 정치화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활약하는 스타정치인들에게 자기 정치의 운신을 의탁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민주노총 조합원 상다수가 김어준 팬이 되거나, 문재인 지지자가 되는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 사이 노동자운동과의 접점을 강화하기보단 멀어지는 일에 주력한 진보정당의 잘못이고, 정치방침의 좌초 속에서 방향을 상실한 민주노총의 책임이 더욱 크다.

종종 언급하곤 했던 한 기억으로부터 이야기해볼까 한다. 2013년 10월 31일 밤 나는 하나의 풍경을 목격해야 했다. 이 일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어날만한 일'이겠지만 당시 내겐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31일 늦은 오후, 삼성전자서비스 에어컨 수리기사 최종범은 한 나무 아래에 차를 세워두고 차 안에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전태일 열사와 회사의 노조 탄압을 언급한 유서를 남겨두었다. 삼성서비스지회에서 교육선전을 맡고 있던 나는 그날 곧바로 천안으로 내려갔고, 금속노조는 삼성전자서비스 천안두정센터 앞에서 긴급 집회를 열었다. 놀랍게도 그날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세 명이 집회에 왔는데, 정의당에서 온 의원은 없었다.

그날 은수미 의원이 마이크를 잡자 동료를 잃은 삼성전자서비스 하청 수리기사들은 “은수미”를 연호했다. 은수미는 그들의 절망을 일으켜세워줄 구원자 같은 것이었다. 노동조합이나, 진보정당이 아니라, 비정규직 양산의 주범이었던 민주당 소속 의원이 말이다. 물론 당시 은수미 의원은 칭찬 받기 충분할만큼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고, 노동자운동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제공했었다. 그러니 그런 환호를 받을만 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앞으로 진보정당의 자리 같은 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비록 정당 활동을 열심히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대학 입학 이래 나는 줄곧 민주노동당 당원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잘 되고, 사회운동과 함께 보폭을 맞추어야 세상을 바꾸는 운동도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위기감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문제는 진보정당 스스로 사회운동과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진보정당이 사회운동과 멀어지면, 진보정당은 거의 가치가 없어지는데도,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다시 2013년 가을로 돌아가서,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정의당을 향해 ‘빅텐트론’의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한편 정의당은 지극히 실리주의적인 노선을 밟으면서 ‘이념’을 낡고 구질구질한 것쯤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반면 노동당 등은 거의 아무런 전망이 없어보였고, 당 밖의 좌파들은 진보정당의 이런 침체에 대해 고고한 학처럼 무시로 일관했다. 이를테면 “그거 되겠어?”라거나, “개량주의적이라서…”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 이후 나는 진보정당에 훨씬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행히, 정의당은 많은 한계를 노출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기도 했고, 때때로 진보정당이 내기 어려운 수준의 논평을 내기도 하지만, 여전히 이 안에 소수의 사회운동적 진보정당론자들이 왕성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고, 또 지역의 고군분투하는 여러 활동가들 덕분에 ‘존재감’을 잃지 않고 남아있다. 게다가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은 심상정 후보를 중심으로 유의미한 존재감을 드러냈었다. 2019년 이 시점에서 대단히 유의미하게 되새길 일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그 시점에 발군의 힘을 발휘한 후보였다는 점에서 심상정 후보가 여전히 중요한 자산이라고 평가하게 됐다.

물론 정의당이 이렇게 양대 정당 바깥에서 ‘제3의 포지션’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스스로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오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 포지션은 꽤 위태롭고, 대중들로부터 확실한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기에 정의당이 민주당 내의 진보파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를뿐더러, ‘진보주의’로 버티는 한에서는 아무 이념도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위태로운 자리는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이 더 많은 불안 요소에 노출될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위기의 시대에 사람들은 난국을 타개할 새로운 대안(세력)을 찾지만, 그걸 제시하지 못 한다면, 보다 세고 포퓰리즘적인 이야기를 하는 세력에게 귀를 기울이기 쉽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서구에서 그런 풍경을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나는 이 위태로움을 타개할 수 있는 최고의 방도는 사회운동이 자신의 이념을 재장전하고, 그것을 통해 노동자운동·여성운동 등 대중운동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진보정당이 자신이 서야할 선명한 자리를 새롭게 찾고, 자신의 이념과 노선을 갱신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건 디테일에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어물쩍 거대한 이야기만 하고, 디테일에 있어선 쥐뿔도 없다면 신뢰받을 세력이 될 리 없다. 그러니 ‘이념’과 ‘현실’이라는 것은 대당되는 개념이 될 수 없다. 한데 내가 아이러니한 것은 정의당의 이번 당직 선거가 마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대결’인 것처럼 묘사된다는 사실이다. 내 생각엔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만약 철저하게 현실주의적이라면, 정의당 자신의 정치적 포지션을 재검토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교섭단체도 만들 수 있고, 집권도 꿈 꿀 수 있다는 게 명확하다. 그런데 속류적인 현실주의, 속류 실리주의에 빠져 있으면, 지금까지의 현실들을 편의적으로 대입해서, 이념의 갱신이나 사회운동적 강화를 논하는 목소리에 대해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라는 레테르를 붙인다. 가당치 않다.

그렇다면 점진적 개혁론자와 대담한 변혁론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단정할 수도 없다. 대담한 변혁이든 점진적 개혁이든 죄다 상대적일뿐이라서, 누군가가 보기엔 대담한 것도 소심해보이고, 개혁도 혁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한쪽을 지지하고 있다면, 죄다 주관에 따라 수식을 붙일 수 있을 뿐이지, 분명한 판단 기준이 되진 못 한다.

이틀 후면 마무리되면 이번 정의당 당직 선거의 주요 쟁점 중 하나는 내년 총선에서 후보를 뽑을 때 개방형 경선을 하겠다는 심상정 후보의 공약이다. 이것이 정의당을 더 위태롭게 하고 지역을 소외시킬 뿐이라는 비판에 대해 옹호론자들은 왜 그렇게 소심하게 생각하냐고 반박한다. 하지만 내 생각엔 여러 함정이 있다. 일단, 지난 시기 심상정 후보가 자의적으로 데려온 몇 명의 사람들이 정의당의 비례 국회의원들이 되었지만, 나는 이들 대부분이 훌륭한 정치인임을 증명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6명 중 심상정 후보가 데려온 분들은 김종대 의원과 추혜선 의원인데, 안타깝게도 내 생각엔 하나같이 함량미달이었다. 김종대 의원은 잇따른 실언으로 정치적 발언권을 상실했고, 추혜선 의원은 이렇다 할 존재감을 보여준 적조차 없다. 내년에도 심상정 후보는 자신이 점찍어둔 분들을 데려오려고 하겠지만, 실패할 게 빤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실패에 대해 어떤 반성이야 있으셨겠지만, 나는 대체로 “내가 하면 잘 돼”라고 말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내 생각에 심상정 후보가 잘 하는 것은 정개특위와 같은 공간에서 공격수로 플레이하거나, TV토론에 나가 선수로 뛰는 것이다. 즉, 심상정 후보는 훌륭한 스트라이커이지 유능한 감독은 아니다. 그는 팀을 자꾸만 자신이 원하는 방향, 자신이 꽂힌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방향은 팀을 망가뜨릴 뿐이다. 심상정이 지금껏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에 90의 기여와 10의 실패를 했다고 한다면, (심상정이 싫으신 분은 50대50이라고 보셔도 좋다.) 10의 실패는 죄다 그가 정당이라는 조직을 잘못 이끌어온 것에 맞춰져 있다. 그가 화려한 조직가로 뛰었던 구로동맹파업이나 금속연맹의 경험조차 이제는 그가 이념적으로 폐기한 “낡은 이념”(그 스스로 당대의 노동자운동을 이렇게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의 시기의 경험에 맞춰져 있지 않은가.

나는 얼마 전 어떤 이유 때문에 심상정이 쓴 모든 책들을 읽어보게 되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최장집류의 이념을 십분 수용해서 노동운동은 신념윤리가 책임윤리보다 앞서지만, ‘진보정치인’에게는 신념윤리보다는 책임윤리가 앞선다고 양분하는 것이었다. 그쯤 되니 그가 왜 지금껏 이렇게 말해왔는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자신의 이념을 잘못 소화해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 나는 우선 신념윤리와 책임윤리가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 양분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념과 책임이라는 화두가 투쟁들의 갈등적 순간에 다다랐을 때 떠오를 순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운동가(정치가)의 윤리는 신념이나 책임 따위의 도덕주의적 개념이 아니라, 대중이데올로기와 정세분석이 되어야 한다. 한데 신념윤리니 책임윤리니 나누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몰정세적 관점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박된 시선을 도덕주의의 자리에 내주고 말았다. 당연히도 이는 정치적 실리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런 막스 베버의 그 이분법적 구분을 얼마든 수용해서 말하더라도, 나는 심상정 후보의 두 번째 구분을 동의하지 않는다. 노동자운동 역시 신념윤리보다는 책임윤리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신념을 폐기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그 정세와 조직의 조건 속에서 책임을 다 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지, 신념을 더 우선에 두고 전술전략을 택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당 내의 자칭 다원주의자(혹은 실리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이 논리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논리가 정세 판단의 기준이 된다면, 개별적인 사안에 대한 일부 대응들은 잠시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정당이라는 거대한 조직이나 한국 사회 전체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실패하기 쉽다.

이런 측면에서 양경규 후보는 그가 노동조합 운동 안에서는 소위 '중앙파'로 분류되고 있어, 다른 '좌파'들에 비해 오른쪽에 위치한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심상정의 이념’과는 다른 이념을 갖고 있다. 그는 사회운동을 우선시하고, 진보정당의 이념과 가치가 바로 서야 디테일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보다는 팀, 성과를 개인화하는 것보다는 성과를 조직의 것으로 하는 것에 익숙하고, 그런 운동을 해왔다고도 생각한다. 그런 사회운동적/조직적 관점은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을 구축해온 건강한 밑거름이었다.

사실 나는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구호엔 아무 관심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민주적 사회주의든, 사회주의민주든, 사회민주주의든 ‘민주’랑 ‘사회’가 섞여 있는 모든 것들에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역사적 쟁점들이 뒤섞여 있다. 이 오랜 슬로건이 3주라는 짧은 선거운동 기간 안에 해결될리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을 정의당 당원들의 화두에 올려주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념이 실종된 시대에, 논쟁이 죽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애매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지만, 가까운 중국의 민간사회주의자들이 가졌던 ‘사회주의민주’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공히 돌파해야 하는 아포리아가 이렇게 많고, 그걸 많은 사람들이 확인했다는 점에서 이 선거는 의의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양경규 후보를 지지한다. 그 개인이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 그가 얼마나 화려한 언변을 지녔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고, 지역의 여러 활동가들이 좋은 얘기를 워낙 많이 하고 있으니, 굳이 나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운동의 침체 이후 완전히 순수한 땅 위에서 '순수하게' 좌파적인 사람들을 모아서 정치운동을 할 것인지, 아니면 진흙탕 위에서 지극히 다양하고 순수하지 않은 이들과 함께 무언가 해볼 것인지 판단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나는 진흙탕 안에서 지지고 볶는 걸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최소한, ‘에너지’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을 믿고, 우리가 가진 이념과 가치의 방향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하고 있다면, 이 진흙탕 속에서 꽃이 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내기를 걸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에너지가 없으면 시동도 안 걸리지 않나. 소리가 지저분하지만 시동이라도 걸리는 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나는 세상에 ‘바깥’이란 건 없다고 생각한다. 진보정당도 한국 사회의 역사와 이데올로기 안에 존재하고, 한국의 진보주의자, 사회주의자, 사민주의자, 페미니스트, 공산주의자들도 이 지저분한 진흙탕 안에서 존재할 뿐 결코 독야청청하게 존재할 수 없다. 사무실이라는 청정 공간에서 오염되지 않은 순도100퍼센트 천연암반수만으로 뭔가 해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자리에서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개입할 수 없다. 그냥 모든 사건이 지나간 후 뒷북 치면서 평가만 할 수 있을 뿐인데, 그런 건 역사가들이 할 일이다. 그러니 정의당 당원들 중 이 피폐한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그 속에서 변화를 만들고, 꽃 한 송이를 피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양경규 후보에게 한 표 던져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 한 표가 1보 전진을 만드는 에너지다. 양경규  혹은 심상정이라는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고, 정의당 당원들이 1표를 던지는 사유의 경로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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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당 당직선거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해 file 홍명교 2019-07-12 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