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지젝은 평소에 “서로를 사용하는 것이 진짜 친구다”고 말하곤 한다. 파벨라의 지젝 월드는 이런 취지에서 그를 사용하기 위한 한국 친구들의 화답이다. 한국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진 이 당대의 석학이 앞으로 좀 더 깊숙하게 한국 사회에 개입하기 위해 특유의 사유를 펼쳐 보일 예정이다. 그의 세계를 통해 우리의 세계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파벨라 동인 일동

의제자본과 인격적 지배의 귀환*

조회 수 1700 추천 수 0 2018.06.09 15:56:20

-번역 : 정용택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4234234.JPG

맑스가 자본주의적 재생산에 대한 능가할 수 없는 분석을 제공한다 해도, 그의 실수는 그가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와해에 대한 전망을 확신했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자본주의가 강화된 각각의 위기에서 벗어나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볼트강 슈트렉에 의해 정밀한 용어로 기술된 바, 맑스주의는 우리가 오늘날 명백히 진입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최후 위기”에 대해선 옳았지만, 이러한 위기는 다만 쇠퇴 및 붕괴의 장기화된 과정이며, 헤겔적 지양Aufhebung 역시 쉽게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쇠퇴에 긍정적인 급변을 가하고, 그것을 어떤 더욱 고차적 수준의 사회적 조직화를 향한 통로로 변형시키는 행위주체도 없을 뿐이다.

새로운, 더 나은 사회가 시야에 나타나고, 혁명적 주체가 인류의 진보를 위하여 그것을 실행에 옮길 준비가 될 때만 역사적 시대로서의 자본주의가 종언을 고할 것이라는 것은 맑스주의적—아니 보다 적당히는 현대주의적modernist—편견이다. 이것은 우리가 집단적 행위주체성의 파괴 이후 꿈조차도 꿀 수 없는 우리의 공통의 운명에 대한 정치적 통제, 사실은 신자유주의적 지구주의적 혁명에서, 그것에 관한 희망을 전제로 한다.1)

슈트렉은 이러한 쇠퇴의 다른 징후를 열거한다. 낮아진 이윤율, 부패와 폭력의 증가, 금융화(가치 생산에 기생하는 금융적 거래로부터의 이윤). 미국과 유럽연합의 금융정치의 역설은 의제자본의 운영에서 그것들이 대부분 사라지기 때문에 화폐의 거대한 투입이 생산을 발생시키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부채를 복지국가의 비용 때문으로 보는 표준적인 자유주의적 하이에크적 해석을 거부해야하는가의 이유이다. 데이터는 그것의 대부분이 금융자본과 그 이윤을 공급하는 쪽으로 간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러한 쇠퇴의 예기치 않은 또 다른 결과가 존재한다. 레베카 카슨2)은 최근에 어떻게 자본의 금융화—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력의 가치증식valorization(Verwertung)을 통한 우회 없이, M-M′(화폐–화폐′)에서 가장 많은 이윤이 발생되는 곳—가 역설적으로 직접적인 인격적 지배 관계의 귀환으로 이어지는지를 논의했다. 맑스가 강조했듯이, M-M′은 자본의 가장 인격적이고 추상적인 자본이라는 점에서, 이는 너무나 의외다. 여기서 핵심은 세 가지 요소들, 즉 의제자본fictitious capital, 인격적 지배personal domination, 그리고 노동력labor-power의 사회적 재생산social reproduction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가치증식이라는 사실에 앞서서 금융투기가 이루어진다. 금융투기는 주로 화폐가 아직 생산에 쓰이지 않은 신용 운영과 투기적 투자금으로 이루어진다. 신용은 부채를 의미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운영의 주체들 또는 담지자들(단지 개인들뿐만 아니라 화폐를 관리하는 은행과 기관 역시)은 단지 가치형태에만 종속되는 것으로서 그 과정에 연루되지 않는다. 그들은 또한 채권자이고 채무자이며, 그래서 추상적 지배의 상품화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 관계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여신업무(신용운영)에 관련된 특정한 권력 관계는 추상적 지배와 차별화된 인격적 차원의 종속 상태를 갖는다(신용-부채). 하지만, 여신업무(신용운영)의 사회적 관계는 가치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므로, 이러한 인격적 권력 관계는 완벽하게 비인격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서 맑스에 의해 추상적으로 기술되는 교환 과정 자체에 의해 성립된다. 그러므로 의제자본으로 인해 가치증식의 일시중지suspension의 방식으로 표면화되는 인격적 형태의 종속의 현상은 추상적 형태의 지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3)

의제자본에 내포된 권력의 동역학은 행위주체들 사이의 직접적인 이분법은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규정상 인격적 지배가 직접적인 상호작용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반면에, 채무자는 주로 개인들이 아니라 미래 생산에 관해 시세를 예측하여 주식을 사고 파는 하는 은행과 헤지펀드들이다. 그리고 사실상, 의제자본의 운영은 갈수록 더 직접적 개입 없이도, 즉 단순히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작동하는 컴퓨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러한 운영은 어쨌든 대인적 관계로 재번역되어야만 하고, 거기서 추상은 대면적 지배로서 나타난다.

직접적인 상품화에 종속되어 있지 않지만 노동력의 재생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그들은 또한 의제자본의 유통에 의해 개방되기를 가정된 미래의 가치증식에 점증하는 의존에 의해 또한 영향을 받는다. 그러한 자본은 장래에 가치 증식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에 의해 지지되기 때문에, 노동력 재생산은 현재 노동에 종사하고 있지 않은 이들이 미래에 노동을 할 준비를 갖추도록 압박을 받는다. 이것이 교육이라는 주제가 왜 오늘날 너무나 중요하며, 또한 부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의 이유이다. 학생은 그/그녀의 교육에 대한 비용을 빚지게 되며, 이러한 부채는 빚진 학생이 직장을 잡았을 때 자아-상품화를 통해 상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교육은 또한 어떤 방식으로 난민들을 처리할 것인가에서—따라서,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유용한 노동 인구로 만들 것인가—에서 주된 의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유로운 선택이 최상의 가치로 고양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통제와 지배는 더 이상 주체들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서 나타날 순 없게 마련이다. 대신에, 통제와 지배는 자유로서의 개인들의 그야말로 자기-경험(에 의해 지탱되는 것)처럼 보여야만 한다. 그 정반대의 것을 가장하여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부자유의 다양한 형태들이 존재한다. 보편적 보건진료를 우리가 박탈당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선택의 자유, 즉 우리의 보건진료 제공자를 선택할 자유가 주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가 더 이상 장기고용에 의존할 수 없을 때, 매 2년마다 새로운 불안정한 지위를 찾도록 강요당할 때, 우리는 우리자신들을 재발명할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리고 우리의 인성 속에 숨어 있는 새로운, 뜻밖의, 창조적인 잠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우리의 자녀의 교육비를 지불해야만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소유한(또는 빌려왔던) 재산을 어떤 방식으로—교육, 건강, 여행 등에—투자할지를 자유롭게 선택해야만 하는 자본가처럼 행동하는, 우리도 “자아의 기업가entrepreneurs of the self”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강제된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끊임없이 폭격당하고, 우리 대부분이 심지어 적절하게 자격을 갖고 있지도, 충분한 정보를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 결정을 내리도록 강요당하면서, 사실상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자유를 우리에게서 변화의 진정한 선택을 빼앗아가는 짐으로서 경험하는 중이다.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사회는 계급 차이에 의해서만 분할된 시장 주체들로서 모든 개인들을 평등하게 하면서, 카스트와 다른 위계질서를 제거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자생적인spontaneous” 이데올로기를 지닌, 오늘날의 후기자본주의는 우리들 사이의 차이는 단지 양적인 것으로(거대 자본가는 투자를 위해 수억 달러를 빌리고, 가난한 노동자는 보충 교육을 위해 몇 천 달러를 빌린다), 우리 모두를 “자기-기업가”로 자격화하는 방식으로, 계급 분할 자체를 제거하려 노력하고 있다.

많은 찬사를 받았던 “협력적 공유사회Collaborative Commons” 역시 여기서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맑스는 항상 노동자들이 상품으로서의 그들의 노동력의 충분한 가치를 (규칙으로서) 지불받게 된다는 의미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교환은 “공정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선 어떠한 직접적인 “착취”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팔고 있는 상품의 가치를 모두 지불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시장 경제에서, 나는 사실상 여전히 의존적으로 남아 있을지라도, 이러한 의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예속 또는 심지어 물리적 강제의 형식 대신에,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시장 교환의 형태로 벌어지는 것으로, “문명화”되었다. [유대인 러시아계 미국인 우익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에인 랜드(Ayn Rand)를 조롱하는 것은 쉽지만, 그녀의 소설 『아틀라스Atlas Shrugged』에서 유명한 “화폐에 대한 찬송”에는 티끌만한 진리가 존재한다.

화폐가 모든 선의 근원이라는 것을 당신이 깨닫지 못하는 한, 당신은 당신 자신의 파멸을 빌고 있는 셈이다. 화폐가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수단이 되기를 그칠 때, 인간은 다른 인간의 도구가 되고 만다. 피, 채찍, 그리고 총, 또는 달러. 선택하라. 다른 선택은 없다.4)

맑스는 상품들의 세계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는 것인지에 대한 그의 유명한 정식에서 비슷한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았던가? 시장경제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는 상호 인정된 자유와 평등의 관계로서 나타날 수 있다. 지배는 더 이상 직접적으로 시행되지 않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시적이지도 않다. 20세기에 실제로 존재한 사회주의는 시장-소외의 극복이 “소외된” 자유를 폐지하며, 그것으로 자유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를 “소외되지 않은” 직접적인 지배 관계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협력적 공유사회는 어느 정도까지 동일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까? 그들은 협업의 바로 그 매개물을 통제하고, 그 결과 직접적 지배를 행사하는 규제기관 없이도 생존할 수 있을까?

예상된 결과는 다른 분할과 위계질서가 출현한다는 것이다. 전문가와 비전문가, 완전한 시민과 배제된 자, 종교적, 성적, 그리고 다른 소수자들. 따라서 난민들과 “악당 국가들”의 시민들에 이르는, 가치증식의 과정 안으로 아직 통합되지 않은 모든 집단들은 난민 캠프 조직에서 잠재적 위법자로 간주되는 이들에 대한 사법적 통제에 이르기까지 점차적으로 인격적 지배—우리 사회 안으로 난민들의 부드러운 “통합”을 용이하게 하도록 의도된 사회서비스처럼 인간의 얼굴을 취하는 경향이 있는 지배—의 형태로 포섭된다.

왜 이러한 직접적 권위(비민주적인)가 부활하고 있는 것인가? 문화적 차이에 더하여, 문화적 차이를 넘어, 오늘날의 자본주의의 논리 자체에 이러한 부활의 내적인 필요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중심적 문제는 “지적 노동intellectual labor”의 후기자본주의적 우세가 객관적인 조건의 주관적인 재전유로서 혁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객관적인 조건으로부터 노동의 분리에 대한 맑스의 기본적인 책략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월드와이드웹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와 같은 영역에서, 생산, 교환, 그리고 소비consummation은 밀접하게 서로 뒤얽혀 있고, 잠재적으로 동일시되기까지 한다. 나의 생산물은 즉시 전달되며, 다른 사람에 의해 소비된다.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의 형태를 취한다는 상품 물신주의에 대한 맑스의 고전적인 관념은 따라서 급진적으로 다시 사유되어야만 한다. “비물질적 노동”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는 “객관성의 겉치장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의 일상적 착취의 소재이다.”5)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고전적인 루카치적 의미에서 “물화(物化)”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비가시적이기는커녕, 사회적 관계성은 바로 그 유동성에서 직접적으로 마케팅과 교환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문화적 자본주의”에선, 문화적이거나 감정적인 경험을 “가져오는” 대상들을 더 이상 판매(하고 구입)하지 않는다. 대신에 직접적으로 그런 경험을 판매(하고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성이 직접적으로 시장에서 판매되므로, 이는 지배의 인격적 관계 역시 직접적으로 시장에서 판매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종으로서 행동하도록 돈을 지불한다. 이러한 자유의 위반을 은폐하고 잘못된 균형을 복원하기 위해 많은 최고 경영자들이 그들에 대한 자기비하의 자학음란증적masochistic 게임을 진행해줄 매춘부들에게 돈을 지불하고 있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 모든 복잡한 결합은 우리로 하여금 노동이 가치의 기원이라는 핵심적 사실을 은폐하는 단순한 외양으로서, 교환 내지는 가치의 구성에서 그 역할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서 결코 독해될 수 없는, 이른바 “노동가치론”을 다시 사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만일 우리가 화폐를 그것의 표현에 앞서 상품에서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가치의 표현의 부차적 형태로서—즉, 만일 화폐가 우리에게 단순히 부차적인 자원, 교환을 수월하게 하는 실용적 수단이라—간주한다면, 그 문은 좌파-리카도주의자들이 굴복했던 환영(幻影)을 다시 불러들일 여지가 있다. 마치 이러한 직접적 “노동 화폐work money”를 사용하여 모든 “물신주의fetishism”를 피할 수 있고 각각의 노동자는 그들의 “충분한 가치”를 지불받는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담지자에 의해 수행된 작업량을 명시하는, 그리고 그 또는 그녀에게 사회적 생산물의 상응하는 부분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는 단순한 증서[시간 전표]로 화폐를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그런 환영인 셈이다. 그러나 맑스의 분석의 요점은 이러한 기획이 물신주의를 필연적 효과로 만드는 화폐의 형식적 결정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맑스가 교환가치를 가치의 현상appearance의 양식으로 규정할 때, 여기서 본질과 현상의 대립이라는 전반적으로 헤겔적인 중요성을 동원해야 한다. 본질은 오직 그것이 현상되는 한에서만 존재하며, 그 현상에 대하여 선재하지 않는다. 똑같은 방식으로, 상품의 가치 역시 교환에서 가치의 현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그것의 본래적인 고유성이 아니다.

이것이 또한 왜 우리가 모든 종류의 노동이 가치의 원천으로서 인정되도록 가치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하는지의 이유이다. 여기선 1970년대부터 가사노동(요리부터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를 돌보기까지)을 가치 생산적인 것으로서 합법화하려는 위대한 페미니스트적 요구, 아니면 물, 공기, 숲, 그리고 다른 모든 공통적인 것의 비용을 결정하려는 시도를 통해 가치 생산 안으로 “자연의 자유로운 선물들”을 일부 통합하려는 일부 동시대의 생태-자본주의적 요구를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모든 제안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자연에 대한 그것의(그리고 우리의) 소외된 관계의 헤게모니에 대한 치열한 공격이 장착될 수 있는 공간의 상품화와 세련된 녹색분칠green-washing에 지나지 않는다.” “공정”해지고, 적어도 착취를 제거하거나 억제하려는 그들의 시도에서, 그러한 시도들은 훨씬 더 강력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상품화를 단지 강요한다. 그들이 내용의 수준에서 “공정”해지려고 시도한다 해도, 그들은 상품화의 형식 자체를 문제화하는 데 실패한다. 그들은 가치가 비가치non-value와의 변증법적 긴장에서 다루어져야 한다—즉, 가사노동이나 “자유로운” 문화적‧과학적 작업과 같이 그들의 결정적 역할에서 (시장) 가치의 생산에 포획되지 않는 영역을 주장하고 확장하기 위해—는 결론을 단념한다. 가치 생산은 그것이 가치의 내재적 부정, (시장) 가치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는 창조적 작업—규정상 그것은 가치에 기생하고 있다—을 병합하는 경우에만 번창할 수 있다. 그래서 예외들을 상품화하고, 그것들을 가치증식 과정에 포함하는 대신에, 그것들을 [가치의] 외부에 남겨두어야 하고, 가치증식에 관해 그것들의 지위를 열등하게 만드는 틀을 파괴해야 한다. 의제자본이 가진 문제는 그것이 가치증식의 관할외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도래할 가치증식이라는 허구에 기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에 대한 그 이상의 도전은 우리로 하여금 “물화”와 “상품 물신주의”에 대한 표준적인 맑스주의적 설명을, 이러한 의제가 여전히 그 안정적인 현존이 그것의 사회적 매개를 은폐하는 견고한 대상으로서 물신에 대한 관념에 의존하는 한에서, 철저하게 재정식화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화폐의 폭증하는 가상화virtualization로부터 비롯된다. 역설적으로, 물신주의는 정확히 물신(物神) 그 자체가 유동적인 “비물질적” 가상적 실체로 바뀌면서 “탈물질화”될 때, 그 절정에 도달한다. 화폐 물신주의는 화폐의 물질성이 최후 흔적이 소멸할 때인, 화폐의 전자적 형태로의 이행과 더불어 정점을 이룬다. 전자 화폐는 직접적으로 그 가치를 구현하는 ‘실질’화폐(‘real’ money) (금, 은)와 어떠한 본래적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은 “단순한 기호”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가치의 물질적 실존을 고수하는 종이 화폐를 잇는 제3의 [화폐] 형태이다. 그리고 화폐가 마침내 파괴불가능한 유령적 현존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오직 이 단계, 즉 화폐가 순수하게 가상적인 참조점이 될 때이다. 나는 당신에게 1000달러를 빚지고 있는데, 내가 아무리 많은 물질적 증서를 불태우더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에게 1000달러를 빚지고 있는 것이다. 부채는 가상의 디지털 공간 어딘가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딘가는 오직 이러한 철저한 “탈물질화”를 통해서 『공산주의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에 나오는 맑스의 유명한 옛 테제, 즉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는 테제가 맑스가 염두에 두었던 것보다 훨씬 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획득하는 곳이자, 우리의 물질적인 사회적 현실이 단지 유령적/투기적 자본의 운동에 의해 지배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현실 그 자체가 점차적으로 “유령화되는” 곳이다. 데리다가 자본주의의 유령적 측면이라고 불렀던 것이 완전히 현실화되는 것이 오직 이 지점에서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낡은 ‘자기동일적 주체self-identical Subject’ 대신에 ‘변화무쌍한 자아Protean Self’, 즉 소유한 대상들의 안정성 대신에 그 경험의 파악하기 어려운 유동성을 갖게 된다. 요컨대 견고한 물질적 대상들과 유동적인 이념들 사이의 평범한 관계성이 뒤집어지고, 대상들은 점차적으로 유동적인 경험들 속에서 용해되는 반면에 안정적인 사물들로 남아 있는 것은 오직 가상의 상징적 의무들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확인했듯이, 물신의 그러한 유령화spectralization는 그 정반대의 것의 씨앗, 즉 그것의 자기부정을 담고 있다. 바로 직접적인 인격적 지배의 관계의 예기치 않은 귀환이다. 자본주의가 인격적 자유(시장 교환의 조건으로서)를 내포하고 촉진하는 경제적 체계로 자신을 합법화하는 반면에, 자본주의 고유의 동역학은 노예제의 부흥을 초래한다. 중세 말기에 노예제가 거의 사라졌다 해도, 초기 근대성에서부터 미국 시민전쟁까지 유럽 식민지들에서 그것은 다시 폭발적으로 증가했었다.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신기원이 열리면서, 새로운 노예제 시대 역시 밝아오고 있다. 노예화된 개인의 직접적인 법적 신분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해도, 노예제는 다양한 새로운 형태들을 획득하고 있다. 예컨대, 기초적인 시민권 및 자유를 박탈당한 사우디 반도의 수백만 이주 노동자들이 있으며, 아시아의 노동착취공장에서 수백만 노동자들에 대한 총체적 통제가 종종 직접적으로 강제 수용소와 같이 조직되고 있고, 중앙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콩고 등)에선 자연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강제 노동을 대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이러한 국가들까지 주시하지 않아도 된다. 2013년 12월 1일, 피렌체 중심부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프라토의 이탈리아 마을의 산업지대에 있는 중국인 소유 의류공장이 노예에 가까운 조건에서 살아가고 일하면서, 내부에 갇혀 있었던 7명의 노동자들을 죽이고 불에 타서 무너졌다. 그래서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상하이(또는 두바이와 카타르) 교외지역에서 새로운 노예의 비참한 삶을 바라보며, 그들을 수용하는 국가들을 위선적으로 비판하는 사치스러움을 우리들 자신에게 허용할 수 없다. 노예제는 바로 이곳, 우리의 집 내부에 존재할 수도 있는 반면에, 우리는 단지 그것을 보지 않거나 아니면 오히려 그것을 보지 않는 척하고 있다. 이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이 수없이 다양한 형태의 실질적인 노예제의 새로운 체계적 폭증은 비참한 사고가 아니라 오늘날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적 필연성이다.

* Slavoj Žižek, “Fictitious Capital and the Return of Personal Domination,” The Philosophical Salon, 2017.6.19.

http://thephilosophicalsalon.com/fictitious-capital-and-the-return-of-personal-domination/

1) Wolfgang Streeck, How Will Capitalism End?, London: Verso Books 2016, p.57.

2) See Rebecca Carson, “Fictitious Capital, Personal Power and Social Reproduction” (manuscript, 2017). Marx’s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and the Global Crisis Today: On the 150th Anniversary of the Publication of Capital.[그 글은 이후에 다음과 같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Rebecca Carson, “Fictitious Capital and the Re-emergence of Personal Forms of Domination,” Continental Thought and Theory: A Journal of Intellectual Freedom, Volume 1, Issue 4, October 2017, pp.566-586.]

3) Quoted from Carson, op. cit.

4) Ayn Rand, Atlas Shrugged, London: Penguin Books 2007, p.871.

5) Nina Power, “Dissing,” Radical Philosophy 154, p.55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오늘날의 맑스 : 종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가까이 와 있다 file

  • 2018-06-10
  • 조회 수 2732

의제자본과 인격적 지배의 귀환* file

  • 2018-06-09
  • 조회 수 1700

르윈스키와 무슬림 근본주의자의 기묘한 거울상 file

  • 2018-03-21
  • 조회 수 1905

성적 자유, 1968년 그리고 2018년 file

  • 2018-03-08
  • 조회 수 7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