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을 아카이빙만 하면 된다는 말에 홀랑 넘어왔다. 어떡하지.

찰랑이는 머릿결, 용솟음치는 꽃무늬 셔츠의 사나이.

rose.jpg



노동당의 총선 패배를 바라보며 (손이상) http://fabella.kr/xe/blog10/80929

진보정당의 정체성 아노미? (박권일) http://fabella.kr/xe/blog2/80947


박권일 선생은 내가 앞서 쓴 글의 "대립관계" 개념의 불명확성을 지적하며,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집단들을 대변하는 정당은 불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타당한 질문이었지만, 대립관계를 궁극적으로 따져나가다보면 한국의 정당은 모두 1인정당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이르자, 나는 내 글의 마지막 문단에 보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앞서 수도권의 룸펜, 재개발에 밀려나는 영세 자영업자, 울산 등 지방도시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대립관계'라는 단어로 설명하며 그 중 하나는 '버려야 한다'고 쓴 바 있다. '대립관계'란 물론 '적대'가 아니며 종종 서로 이해관계가 상충된다는 뜻이다.


질문에 답부터 하자면, 대립적인 집단들을 함께 대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다른 당에 투표하는 알바노동자와 자영업자는 대립관계가 아니다. 투표장 안에 들어서면 계급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특정 계급이 아니라 같은 여권/야권 성향, 같은 영남/호남 사람, 같은 애국자, 같은 민주주의자, 같은 세대, 같은 종교인, 같은 정치인의 팬 등이 된다. 그러나 노동당에 투표하는 알바노동자와 자영업자는 대립관계다. 노동당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다.


노동당의 주요 정책 중 하나인 '최저임금 1만원'은 한 집단의 이득을 대변하는 한편 다른 집단에게는 가시적인 위협 또는 불안의 요인이 된다. 자영업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그렇다. 최저임금 1만원을 연봉으로 환산하면 2천 5백만원 정도다. 이미 그 정도의 수입이 있거나 그 이상을 벌어들이는 노동자에게는 의미 없는 정책이다. 그보다 적게 벌어들이는 노동자에게는 뻔히 예상되는 해고 위협의 증가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저임금 노동자에겐 아예 '북진통일'과 같은 급이다.


따라서 그들의 표심은 어지간해선 노동당을 향해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이 노동당에 투표한다면 그 까닭은 자기 집단의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은 채 "그래, 다른 선진국들처럼 최저임금이 1만원은 되어야겠지"라는 당위에 따랐기 때문이다. 훌륭하다. 그러나 당위로만 투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간단히 알 수 있다. 노동당은 10만 표도 얻지 못했다. 선거에서는 가장 높은 계급을 제외하면 아래로 내려갈 수록 더욱 이해관계에 민감해진다. 사소한 차이가 삶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거 정책은 당위가 아닌 집단들의 이해관계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최저임금 1만원' 뿐 아니라 노동당이 앞세운 정책들 중 일부는 한 집단엔 이득이 되지만 노동당과 연계된 다른 집단엔 의미가 없거나 해가 된다. 단순히 정책을 제시하고 알아서 따라오기만을 바란 거다.


박권일 선생에 따르면 "일반적인 현대 정당은 신분, 계급, 정체성의 '동일성'으로 묶이는 조직이 아니다". 백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노동당도 '일반적인 현대 정당'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이런 말을 할 때 나는 노동당원인 주변의 활동가들에게 몹시 미안함을 느끼지만 정치정당, 노동자정당, 대중정당 등은 노동당이 스스로 '상상하는 자아'이지 '실제의 자아'가 아니라고 본다. 사회적 대립관계인 서로 다른 집단들을 조직하는 것이 정당의 역할이라면, 노동당은 그것과 정반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박 선생은 내가 악의적으로 정당정치에 대한 무지를 가장한다고 썼지만, 내가 보기엔 실태를 무시하고 현재의 노동당을 정당정치의 틀에서 파악하는 것이 진짜 문제다.


과거 진보신당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프레임만 설정하면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집단이 둘 다 저절로 따라올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당이 쪼개지고 나서야 두 노동자 집단이 처한 환경이 무진장 다르며, 서로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수도 있고, 그런 경우 선거에서 표를 얻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룸펜 청년들,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의 처지가 비슷하다고 한다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일 따름이다. 실수를 되풀이하는 이유는 "다 일하는 사람들이고, 그렇다면 우린 다 같은 노동자고, 우린 노동자 정당이니까..."라는 상상을 현실로 굳게 믿기 때문이다. 진짜 현실에 있는 물질적·문화적·계급적 차이를 보지 않는다.


나는 앞선 글에서 '버리는 패' 운운하는 얘길 했다. 불충분한 표현이었지만 내가 그런 방법을 지지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노동당의 정치는 '패를 버리는' 정치다. 한 집단의 이득을 전면적으로 도모하는 대신 다른 집단들에겐 불안을 상쇄할 만한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목소리를 반영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그 정책이 다른 집단들에겐 의미가 없거나 해가 된다는 걸 이해하기 싫어한다. 이건 현실을 보고 이론을 세우는 대신 이론 자체가 현실이라고 믿는 한 고쳐지지 않을 고질적 문제다. 진보신당 때부터 비슷한 비판이 계속되어왔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어차피 고쳐지지 않을 문제라면 차라리 정치공학적 선택을 하는 것이 낫다. 지금은 하나를 취하기 위해 둘을 버리는 상황이다. 적어도 둘을 취하고 하나만 버리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게 내 의견인 것이다. 노동당은 물론 의회진출을 노리는 정당들 가운데 가장 급진적이며 가장 낮은 곳에 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따라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대의는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대의는 그저 대의이고 저만치 멀리 떠있는 구름이다. 노동 계급 전체의 이해를 바라본다는 관념을 현실로 믿어선 곤란하다. 현실의 노동당은 그런 적이 없었고(이 문장을 쓰면서 가슴이 아프다) 지금으로선 그럴 역량도 없다.


박권일 선생은 드물게도 내 글에서 조롱의 뉘앙스를 느낀 독자다. 그는 내 글이 '0.38% 지지율의 동호회 정당'을 마음껏 조롱하고 싶은 이들에게 핑계가 될 것을 염려했다. 그러나 나는 조롱의 의도가 없었으며 내 글을 핑계로 노동당을 조롱하는 사람도 전혀 보지 못했다. 호된 질책은 고맙지만 조롱이란 그런 게 아니다. 노동당은 이번 총선에서 홍대 주변의 상가 임대차 문제를 들고 나왔다. 거기까진 좋다. 다른 정당이 거의 침묵하는 이슈에 먼저 발 벗고 나섰으니. 그런데 장사하는 자영업자들을 향해서도 '최저임금 1만원'과 '재벌 증세를 통한 기본소득', '대형마트 규제를 통한 골목상권 보호' 등을 말했다. 그들은 그게 어떻게 '의미되는지'를 몰랐겠지만, 그게 바로 조롱이다.


댓글 '2'

여름바람

2016.04.23 14:04:41

"최저임금 1만원을 연봉으로 환산하면 2천 5백만원 정도다. 이미 그 정도의 수입이 있거나 그 이상을 벌어들이는 노동자에게는 의미 없는 정책이다"

-> 최저임금 인상이 전체적인 임금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는 거 모르십니까. 의미없다고 오해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죠.

여름바람

2016.04.23 14:07:20

선거에서는 가장 높은 계급을 제외하면 아래로 내려갈 수록 더욱 이해관계에 민감해진다. 사소한 차이가 삶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 이해관계에 가장 민감한 계급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높은 중산층 및 부유층 아니었습니까. 빈곤한 전라도 및 경상도 유권자가 이해관계에 따라 투표하였습니까.

밑바닥 계급일수록 선거로 인한 사소한 차이를 실감하기가 어렵습니다. 괜히 하위 계급일수록 선거율이 낮을까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아랫글의 보충 (박권일 선생의 질문에 답하여) file [2]

  • 2016-04-23
  • 조회 수 4395

노동당의 총선 패배를 바라보며 (손이상) http://fabella.kr/xe/blog10/80929 진보정당의 정체성 아노미? (박권일) http://fabella.kr/xe/blog2/80947 박권일 선생은 내가 앞서 쓴 글의 "대립관계" 개념의 불명확성을 지적하며,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집단들을 대변하는 정당은 불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타당한 질문이었지만, 대립관계를 궁극적으로 따져나가다보면 한국의 정당은 모두 1인정당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이르자, 나는 내 글의 마지막 문단에 보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앞서 수도권의 룸펜, 재개발에 밀려나는 영세 ...

노동당의 총선 패배를 바라보며 file

  • 2016-04-22
  • 조회 수 1552

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노동당의 실패는 단순히 선거 전략을 잘못 세웠기 때문이 아니다. 이번 선거에 뛰어든 사람들은 전략이 일관되지 않다는 걸 몰랐을까? 알았을 거다. 알면서도 떠밀려 갈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됐나? 제일 큰 이유는 노동당은 자신들의 상상과는 달리 노동자 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상상하는 자아와 현실의 자아 사이에 어마어마한 괴리가 있다. 그런데도 거울단계의 이미지를 진짜 자기자신이라고 강하게 믿는다. 이건 노동당 뿐 아니라 한국 정치의 아주 특징적인 부분이다.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할머니의 기억

  • 2016-03-23
  • 조회 수 515

화창하지만 누구도 화창하다고 말하지 않는 날이었을 거다. 죽은 사람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마침 그 옆을 지나던 여자는 시체를 뜯어먹던 앙상하게 마른 개와 눈을 마주쳤다. 여자는 수색까지 걸어가 높게 자란 갈대를 베어가지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당시 서울 바깥에 멀리 떨어진 수색은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이자 서대문을 빠져나와 가난하고 위험한 사람들이 사는 신촌과 마포를 지나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아주 잠시동안 여자를 노려보며 눈을 빛내던 개는, 이내 제 몫의 먹이를 다시 씹기 시작했다. 둘이 만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