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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아카이빙만 하면 된다는 말에 홀랑 넘어왔다. 어떡하지.

찰랑이는 머릿결, 용솟음치는 꽃무늬 셔츠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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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냥 내 생각인데 노동당의 실패는 단순히 선거 전략을 잘못 세웠기 때문이 아니다. 이번 선거에 뛰어든 사람들은 전략이 일관되지 않다는 걸 몰랐을까? 알았을 거다. 알면서도 떠밀려 갈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됐나? 제일 큰 이유는 노동당은 자신들의 상상과는 달리 노동자 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상상하는 자아와 현실의 자아 사이에 어마어마한 괴리가 있다. 그런데도 거울단계의 이미지를 진짜 자기자신이라고 강하게 믿는다.


이건 노동당 뿐 아니라 한국 정치의 아주 특징적인 부분이다.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칭하는 집단이 박정희 식의 개발 독재를 지지한다든지, 국가/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집단이 시장의 파괴적인 확장을 부추긴다든지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건 우익이 특히 사기꾼이어서가 아니다.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개발 독재를 지지하고 권위에 기대면서도 '진짜로' 자신들이 미국의 리버럴과 비슷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저쪽 뿐 아니라 이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번 선거를 통해 보건대 그나마 정의당은 자신들이 중산층 정당이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심상정만 빼고 말이다. 정의당의 주요 구성원은 세월호 리본을 달고 다니기는 하지만 당장의 고민거리는 주택 할부금과 자동차 보험료인 계급이다.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읽지만 중학생인 아이를 밤 10시까지 학원에서 굴리지 않을 수 없는 계급이다. 타겟층이 비교적 분명하니 일관되게 전략을 짤 수 있다. 그 당의 유일한 문제는 그 전략에 맞지 않는 심상정이나 노회찬이 없으면 당이 안 굴러간다는 거다.


그럼 노동당은? 수도권 룸펜 정당이다. 룸펜은 줄어들지 않는 학자금 대출과 원룸 월세가 고민인 계급이다. 집에서 혼자 즉석식품 먹으면서 미국드라마 다운받아 보는 계급이다. 비정기적으로 알바를 하긴 하는데 그게 자신의 계급성을 만들지는 않는다. 이게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당의 정체성을 잘못 알고 있으니 당의 구성원과 지지자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을 억누르고 '상상으로' 원하는 것을 선거에 들고 나온다. 일 하는 사람이면 다 노동자라는 말은 웃기는 소리다. 90년대 초반까지는 그런 말이 먹혔을 지도 모른다. 그 때는 사회 구조가 어느 정도는 실제로 그랬으니까. 지금은 전혀 안 그렇다. 그 시절에 고착된 아저씨들만 그런 얘길 한다.


물론 울산시당이라든지 몇몇 지역당은 (대부분 비정규직인) 노동자로 채워져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은 조직도 약하고 중앙당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노동당이 민주적이었던 적은 맨 처음 당명을 정할 때 뿐이었다. 사공이 많은 배가 민주적이라는 건 착각이다. 리더십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안 돌아간다. 사회에서 뺨 맞고 당에 와서 화풀이 하는 것도 발언이랍시고 열어놓고 있으면 먼 지역에 사는 당원들의 발언 기회가 그만큼 줄어드는 거다. 쓰레기 같은 포스팅을 계속 구독하면 읽고 싶은 포스팅이 밀려나는 페이스북 타임라인과 같다.


노동당이 살아남으려면 자기 정체성이 뭔지를 계속 살피면서 대대적으로 재편하거나(이 경우 재개발에 밀려나는 자영업자라는 패는 버려야 한다. 대립관계다), 아니면 지방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훨씬 더 힘을 실어주거나(이 경우 수도권의 청년활동가들이라는 패는 버려야 한다. 대립관계다), 아니면 빈곤한 대학생들을 데리고 노동계급화하거나(말이 안 된다), 아니면 누가 쿠데타 수준으로 들고 일어나서 당권을 혼자 틀어쥐어야 한다(그럴 인물이 없다). 넷 다 무지 어려워 보인다. 뭐라도 해낸다면 나는 노선이 다르더라도 노동당 실무자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지금은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독박을 쓰고 고통받아야 하나 하면서 안쓰러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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