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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아카이빙만 하면 된다는 말에 홀랑 넘어왔다. 어떡하지.

찰랑이는 머릿결, 용솟음치는 꽃무늬 셔츠의 사나이.

할머니의 기억

조회 수 515 추천 수 0 2016.03.23 16:22:10
화창하지만 누구도 화창하다고 말하지 않는 날이었을 거다. 죽은 사람의 시체가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마침 그 옆을 지나던 여자는 시체를 뜯어먹던 앙상하게 마른 개와 눈을 마주쳤다. 여자는 수색까지 걸어가 높게 자란 갈대를 베어가지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당시 서울 바깥에 멀리 떨어진 수색은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이자 서대문을 빠져나와 가난하고 위험한 사람들이 사는 신촌과 마포를 지나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아주 잠시동안 여자를 노려보며 눈을 빛내던 개는, 이내 제 몫의 먹이를 다시 씹기 시작했다. 둘이 만난 시간은 아주 짧았지만, 그들은 서로의 눈동자 속에서 세계가 무너지는 풍경을 보았을 거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창문 바깥으로 한 무리의 남루한 여자들이 무리지어 걷는 모습을 보았다. "이모, 저 여자들은 왜 저렇게 머리를 풀어헤치고 걷나요?" - 이모는 그녀에게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죽었기 때문이란다. 가족이 죽으면 입관(入棺)할 때까지 머리를 풀어야 한단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죽음은 창문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또한 끓인 갈대만을 먹어온 지가 오래였다. 거리를 떠도는 저승귀신이 언제 집 안으로 들이닥쳐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거다. 그 겨울을 버티기 위해 가구와 서적들도 모두 태워야 했다. 가문의 조상들이 임금에게 받은 교지와 상훈들도 모두 태웠다. 이제 집 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몸뚱아리들, 그리고 텅 빈 미래 뿐이었다.

미 3사단이 구리에서 서진하여 아차산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언 땅은 녹았지만 더이상 피울 꽃이 없던 3월의 일이었다. 그날 밤, 퇴각하는 인민군은 서대문 형무소 앞에 쌀과 보리를 아차산보다 높이 쌓아두고 불을 질렀다. 그 피어오르는 불빛이 어찌나 환했던지, 달빛조차 없는 밤중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인민군이 수탈한 식량은 국군 15연대가 태극기를 들고 종로를 행진해 들어올 때까지 타올랐다. 불이 꺼진 잿더미 사이를 헤집던 굶주린 군중 가운데 그 여자도 있었다. 시꺼먼 잿먼지를 파헤치다보면 반쯤은 타서 그을리고 반쯤은 익어 밥이 된 곡식이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고 한다. 겨울 내내 말라있던 눈물이 그제서야 터져나왔다.

150만명이었던 서울 사람 가운데 남아있는 사람은 20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저마다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이 지옥을 떠나갔다. 그러나 전쟁은 그 날로부터도 2년 반 동안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죽지 않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부러워하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곡을 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난 후 3명의 아들을 낳았다. 유달리 온후하고 경건했던 둘째아들에 의해 기독교에 귀의했다. 지금 그녀는 지팡이 없인 걷기조차 힘든 할머니가 되었지만 하루도 기도를 거르지 않는다. 나는 그녀, 내 할머니가 화를 내거나 남을 비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하루는 젊은 여자들이 머리를 묶지 않고 다니는 것을 보고 빨갱이 세상이 되었다고 안절부절하는 것이었다. "할머니, 왜 그렇게 불안해하세요?" 이 이야기는 내 물음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다.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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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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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의 총선 패배를 바라보며 (손이상) http://fabella.kr/xe/blog10/80929 진보정당의 정체성 아노미? (박권일) http://fabella.kr/xe/blog2/80947 박권일 선생은 내가 앞서 쓴 글의 "대립관계" 개념의 불명확성을 지적하며,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집단들을 대변하는 정당은 불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타당한 질문이었지만, 대립관계를 궁극적으로 따져나가다보면 한국의 정당은 모두 1인정당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이르자, 나는 내 글의 마지막 문단에 보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앞서 수도권의 룸펜, 재개발에 밀려나는 영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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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기억

  • 201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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