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트럼프는 무엇의 이름인가

조회 수 1846 추천 수 0 2016.11.10 18:26:56

25953705015_ab4197d265_b.jpg

도널드 트럼프가 미 대선에서 승리했다. 클린턴의 승리를 예상했던 이들에게 혼란과 절망을 안긴 결과였다. 클린턴 지지자였던 폴 크루그먼은 트위터에서 생뚱맞게 샌더스 때문에 클린턴이 패배했다고 개탄하다가 나오미 클라인에게 반박을 당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지 않은가. 노무현 정부가 가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던 무렵에 벌어졌던 일들과 겹쳐지는 장면들이다.  오바마 정부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노무현 정부와 비슷한 정부였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과 오바마는 대통령으로서 훌륭했을지 몰라도, 그들의 정부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거대한 포퓰리즘의 반동을 막아내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의 출현으로 반공과 유신의 잔재들이 사라지고 극우는 퇴출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를 거쳐 마침내 보수의 반동은 극우주의와 결합해서 박근혜 정부를 낳았다.  이전 정부가 실시했던 리버럴한 정책들은 보수-극우 정치 연합의 표적이 되었다.  주디스 버틀러가 트럼프 당선을 두고 "반여성주의와 인종주의가 끝났다는 선언은 성급했다"고 진단했지만 이런 주장은 반쪽의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논리는 자칫 페미니즘적이고 반인종주의적인 리버럴한 정책 때문에 극우가 힘을 받았다는 오류 판단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진실은 정반대이다. 

극우가 준동하기 시작하면서 페미니즘과 반인종주의에 대한 보수의 관용도 협소해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문제는 극우의 부상인 셈인데, 이번 선거 결과가 보여주듯이,  전통적으로 리버럴 성향으로 분류되었던 '교육 받은 백인 엘리트'가 여기에 가담하게 된 것이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백인 엘리트'는 남녀 불문이었다. 클린턴이 여성후보였기에 트럼프보다 불리했다는 말은 정당한 분석이지만, 극우주의와 트럼프 현상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미소지니는 말 그대로 상수이다. 힐러리 지지자들 중에 미소지니스트가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여성이라고 해서 극우주의에 적대적이라는 법도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히틀러의 나치즘을 추동한 한 축이 백인 중산층 여성이었다는 것은 이번 미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한 '백인 여성'의 존재를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미소지니가 주변적인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미소지니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로서 '정상성'의 규범을 형성하는 이데올로기의 요소이다. 트럼프는 이 '정상성'의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입지에 맞게 이용했고, 클린턴은 여기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왜 여성인 클린턴이 자신의 필드에서 고전을 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이라는 측면보다 '기득권'(establishment)이라는 측면이 더 강하게 부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클린턴이 정체성 정치에 힘을 쏟을 때, 역설적으로 트럼프가 계급정치의 논리를 구사한 셈이다. 물론 이런 편견은 클린턴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편견 강화 전략에 맞선 대응에서 보여준 모습은 분명 실망스러웠다. 전문가들은 백인 엘리트와 백인 노동자의 연대가 여성과 소수인종의 연대를 압도했다고 진단하지만, 이런 분석에서 빠진 것은 아예 투표 자체를 포기하는 저소득층 노동자들의 존재이다. 트럼프 당선을 미소지니나 인종주의라는 단일 원인으로 수렴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이들 중에 일부는 공화당 골수팬이지만, 대다수는 어떤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말 그대로 미국 정치 자체에 낙담한 유권자들이다. 이들을 불러내기 위해 트럼프는 "헬-미국"을 외쳤고, 클린턴은 "웰-미국"을 외쳤다. 트럼프의 외침에 백인 엘리트까지 호응하면서 지지세는 급물살을 탔다고 할 수 있다. 팩트만 따지자면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 이후 사정이 나아진 것은 자본가들이었지 노동자들이 아니었다. 트럼프와 힐러리가 똑 같은 '기득권'으로 보인다면, 현재의 미국을 '헬'이라고 부르면서 파격적 제스처를 취하는 정치인이 더 공감을 얻을 수밖에 없다. 무엇인가 변화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헬조선"을 이야기해온 우리들에게 익숙한 현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힐러리의 패배는 '미국의 종언'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종언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백인 엘리트와 백인 노동자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다. 

한 없이 관대하던 미국 백인들이 트럼프에게 세뇌된 것도, 갑자기 미쳐버린 것도 아니다. 대의제는 기본적으로 '합리적 선택'을 위한 장치이고, 이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맞춰 유리한 후보에게 투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트럼프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 없이 이들은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이 추진해온 정책과 클린턴 후보의 전망이 자신들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을 것이다. 문제는 수많은 모순을 봉합하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합리성'이다.  익히 박근혜 정부를 통해 확인되었듯이, 이런 '합리성'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이다. 

트럼프의 출현은 '미국의 유럽화'를 보여주는 예증일 수도 있다. 분명 미국은 일국적 이해관계에 연연했던 전후 유럽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세계경찰이라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미국은 전후 자본주의 경제를 살려내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국가였다.  이것을 '전후 체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후에 케인즈주의와 쌍을 이루었던 미국의 "뉴리버럴리즘"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수용한 급진주의적 가치를 발전시켰다. 이런 가치를 뒷받침한 것은 국제적 노동분업에 기초한 전후 경제성장이었다.  이런 전후 경제성장은 로버트 고든이 명명하는 "미국적 성장모델"의 연장이자 확산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래 개선되지 않은 불평등의 심화와 교육 정체, 그리고 노령 인구와 청년 세대의 부채 증가는 이런 "미국적 성장모델"에 빨간 불이 켜졌음을 의미했다.  트럼프라는 이름은 이렇게 오랜 시간 누적된 미국 경제의 위기를 해결하고 과거의 '공화국'을 돌려달라는 백인 엘리트와 백인 노동자들의 열망이 투사된 것이다.  고립주의는 이런 '전후체제'의 종언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당선에서 보듯, 위기의 국면은 극우주의로 더 쉽게 수렴된다. 지금 트럼프가 서 있는 자리에 클린턴이 있을 수는 없다. 클린턴은 트럼프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트럼프를 막을 수 있는 길은 변화를 갈구하면서 그에게 표를 던지려는 이들에게 더 근본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샌더스가 아닌 클린턴을 선택함으로써 민주당은 더 왼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물론 이런 민주당의 타협이 급진주의 자체의 폐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의제는 정치를 관리하기 위한 장치이지 정치 자체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노동계급으로 정치화할 수 있는 방안이 고민되어야하는 지점이다. 당연히 이런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투표를 포기하고 파편화되어 있는 개별 노동자들을 조직화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을 이번 미 대선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리버럴의 실패가 좌파에게 유리한 국면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 당선을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하는 이유이다. 



댓글 '2'

소년의노래

2016.11.11 02:13:38

다른 걸 떠나서 '차악인 힐러리보다 최악인 트럼프가 낫다'는 일부 좌파들의 '파국론'' 따위에 택광님마저 젖어들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쓰신 글에는 공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베를린

2016.11.11 09:05:48

저는 '차악인 힐러리보다 최악인 트럼프가 낫다'라는 말이 성립하는지도 의문입니다.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을 통해서 보여진 수 많은 범죄혐의들 중 전쟁범죄 가담 혐의들을 보세요. 어떻게 힐러리가 트럼프보다 나은지를 다시 생각해봐야할 정도입니다.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샌지가 힐러리에 대해 폭로를 이어가자 힐러리가 그 유명한 말을 남겼죠 "Can't we just drone this guy?(우리 그냥 어샌지를 드론으로 공격하면 안될까?)"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조국 말고 검찰에 요구해야할 것 file

  • 2019-09-07
  • 조회 수 692

정치만큼 묘한 생물이 어디에 있을까. 말 많고 탈 많던 조국 후보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청문회 이전까지는 이 세상이 한국당과 민주당 둘만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청문회가 끝나고 나자 반전이 일어났다. 한국당과 민주당이 펼치던 쇼 무대에 갑자기 검찰이 난입한 것이다. 기성 정치진영을 대표하던 두 당 사이에 끼어든 이 생뚱 맞은 검찰의 출현은 '국민'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국민의 의혹'을 해소한다는 명분으로 행정부 국정을 담당하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무위원 후보의 부인이 ...

“기생충”을 보다 file [1]

  • 2019-07-04
  • 조회 수 1791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영화 <기생충>을 이제야 보았다. 바쁜 일정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덕분에 이 영화에 대한 많은 정보를 미리 알고 볼 수 있었다. ‘스포일러 공포’가 횡행했지만, 이 영화는 줄거리를 다 알고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다. 영화 <명량>을 보고 “이순신 장군 죽는다”는 사실을 알렸다고 스포일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여하튼 칸의 수상 덕분인지 이런 “스포일러 마케팅” 덕분인지 영화의 흥행은 성공했지만, 만일 이 둘이 없었더라도 이 영화가 이토록 관심을 끌 수 있었을지 ...

예술과 증언

  • 2019-03-24
  • 조회 수 5898

런던에 있는 영국 국립 미술관에 가면, <아르놀피니의 초상>이라는 그림이 있다. 지금 이 그림의 제목은 <초상>이지만 내가 맨 처음 이 미술관을 찾았을 때는 <아르놀피니의 결혼>이었다. 1434년 네덜란드 화가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의 주제에 대한 논란은 많은데, 플랑드르 브루제에 살던 이탈리아 상인 아르놀피니의 결혼을 그렸을 것이라는 주장이 한동안 우세했지만, 1997년 아르놀피니가 실제로 1434년에 결혼하지 않았고, 반 에이크가 죽은 지 6년이나 지나 결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발생했다. 제목이...

박항서 매직 file

  • 2019-02-22
  • 조회 수 168

‘박항서 매직’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베트남 국가대표 축구팀을 이끌고 있는 박항서 감독은 10년 만에 사상 두 번째로 스즈키컵 우승을 이끌고, 베트남 A매치 16경기 무패 ‘세계신기록’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 축구를 FIFA 랭킹 역대 최고로 끌어올렸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을 이끈 히딩크 감독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흥미롭게도 박항서 감독의 말에 따르면,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과 함께 수석 코치를 하면서 지도자로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박항서 매직’의 비결이 무엇인지 묻는 ...

인문학자의 빙하기 file

  • 2018-12-21
  • 조회 수 221

'인문학자'라는 말은 참으로 이상한 한국식 명칭이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인문학을 일컬어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풀이해놓고 있으니 '인문학자'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자"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이 풀이에 따르면, "언어, 문학, 역사, 철학"을 모두 아울러 뭔가를 하고 있는 나도 '인문학자'임에 틀림없다.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지식>이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 인문학이란 말이 일반 교양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렇듯 인문학과 일반 교양을...

랑시에르를 만나다 file

  • 2018-04-23
  • 조회 수 2313

자택 문이 열리자 자크 랑시에르는 변함없이 보랏빛 스웨터를 입고 나를 맞이했다. 처음부터 인터뷰를 기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 학술행사가 있어서 들른 차에 잠깐 찾아뵙고자 했던 것인데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길어져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도 청탁할 것이 있었고, 또한 다른 부탁도 이메일을 통해 주고 받고 있던 참이었다.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고 앉은 거실도 변함없었다. 아담한 살굿빛 소파가 놓여 있는 정경은 몇 년 전에 찾았던 기억을 되살려주었다. 지난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특강 때문...

미투 운동과 한국의 진보주의 file

  • 2018-03-17
  • 조회 수 4028

미투(#MeToo)라는 말이 처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폭발적인 운동으로 번져갈 것이라는 예상을 누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1월 서지현 검사의 폭로 이후 들불처럼 퍼져나간 미투는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중이다. 누구는 이렇게 한국 사회에 성범죄가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터져야할 문제가 지금에야 터진 것이라는 반응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성범죄, 특히 남성이 저지르는 성 관련 범죄는 거의 먼지처럼 일상에 퍼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비트코인 신드롬 file [1]

  • 2018-01-27
  • 조회 수 2951

가히 비트코인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하다. 빌 모러가 2015년 <어떻게 결제하시겠습니까?>라는 책을 쓸 때만 해도 비트코인은 기술발전이 가져올 화폐의 미래 중 하나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암호화폐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비트코인은 갑자기 ‘투기’의 대상으로 비난 받게 되었다. 유시민 같은 이들이 앞장서서 비트코인 신드롬을 ‘광풍’으로 진단하면서 투기를 조장하는 ‘작전세력들’을 비난했다. 이런 비난은 비트코인에 대한 다소 과도한 우려를 반영한 것이지만, 유시민 같은 이들의 주장을 문제 삼기 위해...

자코메티 file

  • 2017-12-09
  • 조회 수 1647

“나는 예술에도 관심 있지만, 본능적으로 진리에 더 관심이 많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말이다. 여기에 덧붙여 그는 “작업을 하면 할수록 더 다르게 본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진리’는 그러므로 ’다르게 보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자코메티는 ”미술은 보기의 일종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예술은 어떤 신비감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얼마 전 도쿄에 가서 봤던 자코메티 전은 띄엄띄엄 마주쳤던 자코메티의 조각상들을 일별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전시를 둘러보면서 종종 ‘현대인의 고독’을 표...

청문회와 '문자폭탄' file

  • 2017-07-20
  • 조회 수 1174

최근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알렌카 주판치치는 자신의 짧은 에세이에서 이탈로 스베보의 소설 <제노의 양심>에 등장하는 애연가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애연가는 언제든지 담배를 끊을 수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계속 담배를 피운다. 애연가의 ‘양심’에 비추어본다면, “담배를 끊는다”는 그의 진술은 담배를 끊지 못하고 계속 피우는 행동에 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애연가는 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모순적인 진술과 행동을 지속하는 것일까. 달리 묻자면 이 애연가는 왜 서로 충돌하는 것이 빤한 자신의 진술과 행동...

탄핵, 잔치는 끝났다 file [6]

  • 2017-04-05
  • 조회 수 14103

박근혜 대통령이 끝내 탄핵되었다. 이로써 박근혜라는 이름 석 자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탄핵 당한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다. 매주 20차에 걸쳐 대통령 탄핵을 요구했던 광화문 촛불집회는 승리의 기억으로 각인된 것처럼 보인다. 2008년 촛불집회가 ‘명박산성’을 넘지 못했던 것과 달리, 이번 경우는 청와대 앞 100미터까지 진입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초창기에 폭력이니 비폭력이니 논쟁이 잠깐 일었지만, 청와대 바로 앞까지 촛불이 ‘합법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자 유야무야되었다. 여기에서 어렵지 않게 2008년 촛불집회와 2017년 ...

한병철과 헬조선 file [3]

  • 2017-03-21
  • 조회 수 4340

한병철 교수의 특강이 모종의 '퍼포먼스'였던 모양이다. (▶참고 글) 이 문제에 대해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린 평가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철학자의 객기" 정도였는데, 이를 두고 벌어지는 풍경이 자못 심각해서 짧게 몇 마디 보태고자 한다. 참석한 관객들의 '증언'과 이후 알려진 정보들에 따르면, 저자는 출판사를 철저히 무시하고 본인의 강연을 그런 식으로 진행하고자 했던 것 같다. 피아노를 미리 주문해놓은 것을 봐도 무엇인가 특별한 계획이 그에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과가 성공적이었다기보다는 일종의 해프닝...

차기 대통령의 딜레마: '큰 정치'의 전망을 기대한다 file [2]

  • 2017-02-05
  • 조회 수 6031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려야할 시기는 격동이라는 한 단어로 담아내기에 너무도 거대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전후 세계 질서를 구축했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퇴조하고 보호무역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국제질서가 태동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제일주의’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트럼프라는 개인이 원인 제공자처럼 비쳐지고 있지만, 사실상 전후 세계 질서가 표방했던 개방주의는 2008년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점차 폐기되어 갔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한국이야말로 개방주의를 기치로 내건 전후 세계 질서에 가장 잘 적응해온 아시...

트럼프와 촛불, 두 개의 공화국 file [3]

  • 2017-01-30
  • 조회 수 1440

“트럼프도 박근혜처럼 임기 중에 탄핵당했으면 좋겠다.” 힐러리 지지자였던 미국의 지인이 내게 보낸 메시지이다. 그만큼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의 당선은 많은 힐러리 지지자들에게 충격을 안긴 사건이었다. 트럼프의 당선이 한반도의 정세에 미칠 영향도 만만치 않을 것이지만,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역시 트럼프 당선 못지않게 극적인 것이다.  이 상황은 어떻게 극적인가? 2012년을 상기해보자. 박근혜 정부의 출현은 보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상화’를 의미했다. 이 ‘정상화’를 다른 용어로 번역하면 ‘정치...

이 세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트럼프 현상을 다시 생각하자 [2]

  • 2016-12-25
  • 조회 수 1834

트럼프가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백인’의 타락에서 기인했다기보다, 역설적으로 ‘미국의 가치’를 만들어낸 전후 자유주의가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조적인 배경으로 인해 트럼프 정권의 성공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미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는 미디어의 생리를 정확히 꿰뚫어 오바마 정부와 민주당에 대한 기층의 불만을 결집하는 데 성공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경악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만큼 미국답지 않은 선택이라는 뜻일...

거기 '내가 있었다': 소셜미디어와 체감의 정치 file [1]

  • 2016-11-28
  • 조회 수 852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에게 문자는 인간을 게으르게 만드는 기술이었다. 문자로 무엇인가를 표기해놓으면 주객이 전도되어서 그 문자를 해석하느라 갑론을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문자에 담긴 이데아를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악명 높은 ‘시인추방론’과 일맥상통하는 논리인 셈이다.  그러나 인류 중에서 살아남은 우리 사피엔스는 플라톤의 우려와 달리 “돌에 정보를 새기는 능력” 덕분에 사회를 이루고 이렇게 지구 환경 자체를 변화시키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었다.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 이 문자야말로 괴테가...

100만 인파의 의미 file

  • 2016-11-16
  • 조회 수 4243

100만의 인파가 서울 광화문에 모여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서울이라는 장소성을 넘어선 ‘시민들’의 집결이었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된 집회는 인터넷은 물론 지상파 방송을 타고 생중계되었다. 누구는 봉기라고 했고, 누구는 거대한 콘서트 같다고도 했고, 누구는 엄청난 인파에도 폭력 없이 평화롭게 끝난 시위에서 대한민국의 힘을 느꼈다고도 했다. 여하튼 언론들은 100만이라는 숫자와 질서정연하게 끝난 비폭력 평화시위를 강조했다. 이렇게 100만 명의 인파가 청와대를 ‘포위’한 듯 연출한 보도사진이 지면을 장식했다. 장관은 SN...

트럼프는 무엇의 이름인가 file [2]

  • 2016-11-10
  • 조회 수 1846

도널드 트럼프가 미 대선에서 승리했다. 클린턴의 승리를 예상했던 이들에게 혼란과 절망을 안긴 결과였다. 클린턴 지지자였던 폴 크루그먼은 트위터에서 생뚱맞게 샌더스 때문에 클린턴이 패배했다고 개탄하다가 나오미 클라인에게 반박을 당했다.  이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하지 않은가. 노무현 정부가 가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던 무렵에 벌어졌던 일들과 겹쳐지는 장면들이다.  오바마 정부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노무현 정부와 비슷한 정부였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과 오바마는 대통령으로서 훌륭했을지 몰라도, 그...

최순실이라는 균열 file

  • 2016-10-27
  • 조회 수 870

박근혜 정부는 인기를 잃어버린 보수가 극우의 포퓰리즘을 포섭하면서 탄생한 정부이다. 이 정점에 박근혜라는 이름이 있다. 박근혜라는 이름은 특정한 개인의 호명이라기보다 보수와 극우의 간극을 지우는 '국민'의 대리물이었다. 그러나 꽉찬 것처럼 보이던 이 이름이 사실은 텅 비어 있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폭로되었다.  이처럼 너무도 견고해보였던 보수-극우 연합전선에 결정적인 균열을 초래한 원인은 최순실이라는 변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상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균열을 이끌어낸 최초의 계기가 이대 투쟁이었다는 사실이...

강남역 사건과 여성혐오 file [2]

  • 2016-05-26
  • 조회 수 4997

강남역에서 발생한 여성 살인 사건은 그 동안 한국 사회에 잠재해 있던 뇌관 하나를 터트렸다. 이 뇌관은 엄연히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 되었던 문제를 수면으로 띄워 올렸다. 바로 그것은 여성차별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문제는 ‘여성혐오’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속내를 파고들어 가보면 더 복잡한 층위들을 감추고 있다는 판단이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처음에 ‘여혐’에 근거한 증오범죄인지 아닌지 여부를 놓고 논쟁이 불타올랐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증오범죄보다는 조현병의 망상에 따른 ‘묻지마 살인’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