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인기를 잃어버린 보수가 극우의 포퓰리즘을 포섭하면서 탄생한 정부이다. 이 정점에 박근혜라는 이름이 있다. 박근혜라는 이름은 특정한 개인의 호명이라기보다 보수와 극우의 간극을 지우는 '국민'의 대리물이었다. 그러나 꽉찬 것처럼 보이던 이 이름이 사실은 텅 비어 있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폭로되었다.
이처럼 너무도 견고해보였던 보수-극우 연합전선에 결정적인 균열을 초래한 원인은 최순실이라는 변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상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균열을 이끌어낸 최초의 계기가 이대 투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이기적'으로 비치던 이화대학교 여학생들이 '고구마 줄기를 캐다가 무녕왕릉을 발견'했다. 이 사실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듯이 정치는 윤리적 판단 너머에서 작동한다. 이것이 '정치'의 우발성이라고 한다면, 이 우발성을 '정향'하는 것이 운동의 이념이다. 보수-극우 연합전선이 굳게 걸어잠궜던 정치의 빗장이 풀리고 있지만 이 이념이 무엇인지 아직은 명확하지 않다. 이것이 이번 균열이 서둘러 타협지점을 찾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짚어볼 문제가 있다. 결과적으로 지난 박근혜 정부는 실질적인 정부의 부재 상태였다는 것. 국가는 최순실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 국가의 기능을 해체하는 국가의 존재이유라는 자유주의의 이상이 우스꽝스럽게 구현된 결과가 바로 이번 사태라고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 사태는 분명 뜻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체제(87체제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겠다)를 위험에 빠트릴 정도는 아니다. 아마도 기성정치권과 시민사회는 이 균열을 시급하게 봉합하기 위해 협력할 것이다. 국가는 여전히 서로 이반하려는 부분집합의 갈등을 하나로 재현하기 위해 다시 불려나올 것이다.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개탄은 실질적으로 '없는 국가'를 부르는 초혼제이다.
사실 중요한 국면은 이 협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여전히 균열이 방치될 경우에 출현할 것이다. 이 때에 비로소 진정한 체제의 위기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그 위기가 무엇일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만, 그 알고 있는 상상력 너머에서 이화대학교의 여학생들이 자신의 한계 내에서 한계 너머의 것을 끄집어냈던 그 방식으로 도래할 때, 비로소 위기는 실현될 것이다. 모두가 탄핵과 하야를 외치지만, 여기에서 박근혜-최순실은 이 위기의 도래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체제 포획자들'의 존재를 가리는 스펙터클일 뿐이다. 과연 우리는 박근혜가 무엇의 이름인지 몰랐던 것일까. 오히려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최순실의 귀환으로 환하게 드러나버린 '담합의 실체'에 이토록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위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위기 없이 박근혜의 자리에 다른 이름을 갖다 놓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