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비밀은 이 “국민 프로듀서”라는 말에 감춰져 있다. 겉으로 보면 이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등장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이런 유사성은 형식의 측면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정작 이 프로그램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논리를 배반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은 근본적으로 오디션을 통해 평가의 기준에 맞는 대상을 선발하는 ‘전문가’를 전제한다. 말하자면, 오디션 프로그램은 ‘평가자’와 ‘피평가자’라는 위계구조에 근거해서 진행된다.
물론 ‘한국형’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평가자’로서 ‘전문가’는 반쪽의 역할만을 담당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런 구조에서 시청자의 투표는 ‘평가자’의 판단을 뒤흔들어놓는 변수였다. <프로듀스 101>은 이런 ‘한국형’ 오디션 프로그램의 구조에서 ‘전문가’의 자리를 지워버린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 마디로 이 프로그램에서 ‘전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녀들’은 오직 시청자의 지지를 받아 ‘서바이벌’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평가나 조언을 해줄 ‘전문가’는 없다. 다만 ‘소녀들’은 보이지 않는 익명의 다수로부터 주어지는 ‘표’를 받는다.
도대체 이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분명 이 프로그램은 “당신의 소녀에게 투표하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소녀들’은 연습생들이다. 아직은 ‘걸 그룹’이라는 상품으로 교환되지 않는 ‘산업 예비군’인 셈이다. 이 투표의 본질은 ‘나의 소녀’를 만들어내기 위한 ‘혹독한 훈련’에 가깝다. 투표라는 의사표현행위는 사실상 ‘소녀들’에 대한 훈육이다. 득표 경쟁에서 밀려난 ‘소녀들’은 가차 없이 낙오자로 찍혀서 무대에서 사라진다. 마치 컴퓨터 게임의 가상현실 같아 보이지만 지금 텔레비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실제상황이다.
많은 이들이 이미 경쟁주의에 기초한 이 프로그램의 비인간성에 대해 지적을 했다. 당연히 이 프로그램은 비인간적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문제 삼으려는 것은 이렇게 비인간적인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이 재미를 느낀다는 사실이다. ‘나의 소녀’에 감정이입한 관중들은 피켓을 들고 열렬하게 응원한다. 무대 위에 서 있는 ‘소녀들’도 이런 상황에 아낌없이 호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이 프로그램이 비인간적인 경쟁주의를 조장한다고 해도 이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즐거움은 비인간적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즐거움은 부도덕하다. 자신이 은밀하게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남에게 들켰을 때, 돌연 죄책감을 느끼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내가 즐기고 있는 것을 남이 즐기지 않을 때, 화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남이 나의 즐거움에 동의하지 않을 때, 우리는 대체로 그 사람이 나 몰래 무엇인가를 즐긴다고 느끼기에 분노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듀스 101>의 즐거움은 비인간적인 경쟁주의 때문이라기보다, 어떤 부도덕한 것 때문이다. 그 부도덕은 무엇일까. 내 생각에 ‘국민 투표’야말로 이 부도덕의 실체이고 즐거움을 주는 외설성의 구조 자체이다.
‘나의 소녀’를 선택한다는 은밀한 행위는 ‘국민 투표’를 통해 만인의 행위로 바뀐다. 마치 투표하지 않은 유권자가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나쁜 국민’인 것처럼, ‘나의 소녀’를 선택해서 ‘걸 그룹’으로 데뷔시키지 않는 시청자는 ‘나쁜 국민 프로듀서’가 된다. 익명의 시청자 개인을 ‘국민 프로듀서’로 호명함으로써 이 프로그램은 하루하루를 노동자로서 살아가야하는 시청자에게 ‘국민’이라는 일체감을 선사한다. ‘소녀들’은 이런 ‘일체의 국민-되기’를 위해 바쳐지는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놀라운 희생제의는 이제 전통적인 국가를 통해 재현할 수 없는 ‘국민’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연료 삼아 불타오르는 쾌락의 번제를 올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이 프로그램에서 ‘부당한 노동’과 ‘가혹한 경쟁’을 발견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프로듀스 101>이야말로 그 ‘부당한 노동’과 ‘가혹한 경쟁’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떠받드는 것과 달리, 이 노동과 경쟁은 결코 합리적인 ‘자본의 논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노동과 경쟁은 그 ‘자본의 논리’를 외부에서 강제하는 어떤 힘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힘을 스피노자 식으로 코나투스라고 부르든, 헤겔 식으로 모순이라고 부르든,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문제가 자본주의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갈등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번 총선의 '이변'에서도 어렴풋하게 드러났듯이, 이 갈등이야말로 바로 정치의 원천일 것이고, '국민'은 바로 이 정치를 포획하는 하나의 그물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듀스 101>는 자본주의와 정치의 문제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욕망의 거울인 셈이다.
댓글 '8'
ㅇㅇ
핵폐기물
그런 반응의 경우 상대가 잘난척을 한 다고 생각해서, 즉 자신을 바보취급 한다고 생각해서 나르시시즘 기제가 (나는 똑똑해) 발동해 화를 내는 것이거나 (가령 저는 여자 아이돌을 보며 얼굴 품평을 하고 화보 사진을 즐기는 애들에게 "이런 걸 즐기는 문화 시장이 커질수록 보통사람들이 받는 외모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가 더 커질 거다" 라고 말했을 때 다들 짜증을 냈었습니다), 혹은 마치 내가 못된 짓을 하는 것 처럼 얘기하니까 역시 마찬가지로 나르시시즘 (나는 착해) 이 공격받았다고 느껴 그에대한 반응으로 공격성이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경우에도 제 경험을 얘기하자면 옜날에 청계천 너무 좋다고 말 하는 사람에게 "하지만 이걸 만드느라고 삶의 터전을 포기하거나 옮겨야만 했던 사람도 많아" 라고 말했다가 그런 반응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상대가 나 몰래 뭔가를 즐긴다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것' 이라고 생각하려니 뭔가 잘 와닿지가 않습니다. ㅡ.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