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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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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상 '표절 논쟁'이었지만, 2015년에 일어난 '신경숙 표절 문제'는 두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신경숙의 표절 여부이고, 두 번째 문제는 신경숙 자체이다. 둘은 서로 다른 사안이지만, 이른바 '표절 논쟁'을 경과하면서 서로 겹쳐 보이게 되었다. 이런 착종이 곧 증상이라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이 증상은 여러 가지 진실을 말해준다. 메시지를 읽을 것이 아니라, 이 증상의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문제, 그러니까 신경숙의 표절 여부는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석연찮은 논리이긴 했지만, 본인도 표절 여부를 시인했고, 표절의 판단 기준에 정확하게 부합한다는 점에서 신경숙과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에 동일성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문제만을 놓고 본다면, 너무도 사안이 확연해서 애초에 '표절 논쟁'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첫 번째 문제에서 끝날 수 있는 사안은 두 번째 문제로 번졌다. 그리고 마치 두 번째 문제를 해명하면, 첫 번째 문제도 같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착시현상을 낳았다.

한때 시끄러웠고, 여전히 불씨를 안고 있는 이 문제는 이제 단순 표절 문제라기보다 신경숙이라는 작가의 가치 문제로 확대되었다. 신경숙이 과연 훌륭한 작가인가 아닌가 이 문제가 표절 문제를 압도하게 된 것이다. 일부 평론가들이나 출판사들이 필사적으로 신경숙을 방어할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 필사의 구출작전이 너무도 자명한 표절을 '표절 시비'로 만들고, 신경숙의 표절을 문학일반론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결론인 것 같다.

신경숙을 '한국문학의 대표주자'로 간주해온 분위기에서 이런 논리적 귀결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이 '한국문학'은 출판산업과 떼려야뗄 수 없게 되었고, 이 출판산업은 한때 '민주화운동'이라고 불렸던 일련의 사회운동에 속하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출판산업 자체이기도 한 출판사는 '업자'라기보다 '한국문학'을 배양하고 발전시켜온 당사자로 부각되어 왔다. 이들의 이윤추구는 '선한 기업가' 또는 '도덕적 부르주아'의 범주로 얼마든지 수용 가능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신경숙의 '문학성'에 문제제기를 하는 비판의 목소리는 결론적으로 이런 출판사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셈이다. 

신경숙의 표절 문제는 결국 신경숙이라는 작가의 자질, 또는 문학성에 대한 진단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신경숙을 '비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출판사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신경숙을 위한 변명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서 표절 논란은 의미를 상실했음에도 여전히 '신경숙 구하기 작전''문학적 표절'을 특수화하면서 표절 일반론에 저항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문학의 장은 세속의 장과 다르다는 주장까지 등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한때 '한국문학'은 순수참여논쟁으로 뜨거웠고, '민주화과정'을 통과하면서 참여문학은 일종의 규범으로 정립되었다. 그런데 신경숙 문제는 이런 '한국문학'의 규범을 당사자들 스스로 전복시키게 만들고 있다. 특히 참여문학의 선두에 서 있던 집단으로 간주되었던 창작과비평(이라고 쓰고 백낙청이라고 읽는다)이 이 규범을 누구보다 앞장 서서 무장해제시키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를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도덕적 해이로 환원시키는 것은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하다고 본다. 다만 이 일련의 사태가 그 동안 '한국문학'을 지배해왔던 특정한 문학적 규범의 종언을 암시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한 마디로 이 문학적 규범이 이제 '시장의 규범'으로 대체되어버린 상태에서 불거져나온 것이 신경숙이라는 작가를 둘러싼 논쟁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더 이상 논란의 중심은 표절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신경숙이라는 '한국문학의 대표주자'가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판단이다. 작가가 표절을 했다고 해서 작가의 생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들에 대한 표절 시비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위대한 작가가 아니라고 규정하진 않는다. 설령 표절 행위가 있었더라도 신경숙의 문학성 모두가 훼손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신경숙 구하기 작전'을 수행하는 일군의 평론가들이나 출판사는 지속적으로 신경숙의 표절 판정이 마치 그의 문학성 자체에 대한 거부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증상이다. 증상은 쾌락의 원천이고 누구든 증상을 계속 즐기려고 한다. 증상이 더 이상 즐거움을 주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증상에서 즐거움을 얻고자 노력한다. 신경숙이라는 증상에서 우리는 어떤 즐거움을 얻고 있을까. 나는 이 문제가 신경숙의 문제라기보다 한국에서 발현된 근대문학의 문제라고 본다. 가라타니 고진의 '상습적 종언론'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한국 문단의 태도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사석에서 나는 이번 신경숙 논란을 작가들이 반기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는데, 한마디로 신경숙에 대한 '표절작가' 딱지가 '한국문학' 자체에 대한 독자(라고 쓰고 소비자라고 읽는다)의 신뢰를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이 또한 사소하지만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고 본다. 앞서 지적한 '시장의 규범'이 '문학의 규범'을 대체한 상태를 암시하는 예시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전형적으로 증상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자기 분석을 회피하는 경향이다. 

이 상황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한때 운동으로 존재했던 문학이 이제 종언을 고했다는 뜻이라고 나는 받아들인다. 한국에서 문학은 상징계를 뒤흔드는 운동이기를 그치고 얌전한 쾌락원칙의 증상으로 '제도화'되었다. '문학권력'이라는 것은 사실상 이 '제도화'의 다른 명칭이다. 이 증상이 무엇인지 분석해야할 시간이 되었다고 본다. 표절과 신경숙이라는 두 층위를 가로질러 증상으로 작동하게 된 '한국문학'은 무엇인지 솔직히 물어야할 시기가 바야흐로 도래했다


댓글 '6'

발뒤꿈치

2015.12.13 22:50:22

이택광 선생님의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엔 필요이상으로 많은 문제의 원인을 시장에서 찾으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단의 대표격 명성에 올라있는 경우 집단을 위해 그 사람을 보호하려는 경향은 국가의 출현 이래로 인류 역사에 늘 있어왔던 일이 아닐까요? 전에 쓰셨던 집밥 역시 계층화 되어있지않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집안에서 집밥에 계층이 매겨지던 시대도 있었지요.

이택광

2015.12.14 01:10:12

원인을 시장에서 찾는다기보다, 시장의 '규범'에서 찾는다고 보시는 게 더 정확하겠습니다. 이로 인한 문제는 앞서 작성한 글 '규범화의 덫'에서 미흡하나마 일부 제시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시장이나 계급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시장의 '규범'이 인간 삶을 관통하는 가치의 기준으로 작동하면서 계급격차를 공고하게 만드는 것은 요즘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어떤 사람이 집단에서 명성을 얻는 것은 분명 일반원리이겠지만, 그 명성을 얻는 방법은 체제마다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그 명성에 대한 보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 명성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방어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게 이 글을 쓴 목적입니다.

발뒤꿈치

2015.12.14 10:07:12

시장의 규범이 지배적인 가치기준으로 기능하게 되었다는 문제제기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두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1. 시장이 만든 계급격차가 이전에 관습이나 종교로 이어지던 계급격차보다 어떤점에서 더 공고한지요?
2. 신경숙의 명성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것을 방어하는 방식에 시장의 규범 특유의 현상은 무엇인지요? 제시된 글로 보아서는 특별히 시장의 규범때문에 신경숙이 보호받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신경숙이 대표자가 된 과정에는 물론 책이 많이 팔렸다는 점이 빠질 수 없겠지만 그를 보호하는 사람들이 책이 안팔릴까봐 보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신경숙이 단지 많이 팔린 저자일 뿐만 아니라 실력있는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에 명예의 실추를 우려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택광

2015.12.14 14:02:18

1. 그 계급의 격차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제 '시장'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장'은 공정하다고 포장되어 왔지만, 사실상 친자본적인 권력을 통해 통제 유지되어 왔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2. 문인이 '실력'으로 평가 받는다는 그 생각 자체에 대해 한번 고민해보시길. 카프카는 과연 당대에 '실력 있는 문인'으로 평가 받았을까요. 지금 신경숙이 '실력 있는 문인'이라고 해서 후대에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도대체 신경숙의 '실력'은 누가 어떻게 인정해준 걸까요. 그것이 바로 운동을 통해 권위를 획득한 출판사들이 만들어놓은 '규범'입니다. 자본주의에서 시장이란 사실상 기업입니다. '문학시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출판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복하자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장은 조건이자 토대라서 그것을 벗어난 문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신경숙이 시장주의적이라서 문제라는 게 아니라, 그를 '실력 있는 작가'로 인준한 것이 창비나 문동, 또는 문지 같은 출판사였는데, 이번 표절논쟁으로 이런 담합구조가 드러났고, 그것을 황급히 봉합하는 과정에서 '표절 일반론' 같은 궤변이 등장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발뒤꿈치

2015.12.14 17:18:24

답변 감사드립니다.

1. 예전엔 관습으로 유지되던 계급이 지금은 시장으로 생성되고 유지된다는 뜻이라면 이해를 했습니다.
2. 저는 문학이나 그 권위가 시장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시장은 여러 가지 조건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현상들은 시장의 논리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더 복잡한 조건들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신경숙을 실력있는 문인으로 인정한 것이 출판사가 만들어놓은 규범이라고해도 그것이 순수 시장적인 조건만을 가진 규범인지요? 출판사가 신경숙을 시장에서 팔기 위해 굳이 실력있는 문인으로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하는 다른 작가를 내세우는 것이 책 파는데는 더 도움이 됩니다. 즉 신경숙사태에는 자본과 시장의 논리 이외의 다른 요소가 개입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시장의 논리가 가장 중심적인 원인이라고 생각을 하시니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쭤본 것이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이택광

2015.12.15 00:03:02

저는 신경숙을 만든 게 시장의 논리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처음에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미학을 실천하고자 했던 '운동'으로 시작한 '한국문학'이 시장의 규범화로 귀결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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