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집필되지도 않은 교과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두고 더 이상 왜곡과 혼란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대통령은 시정연설에서 말했다.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말은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의 핵심을 관통하는 진실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이번 교과서 논란의 핵심은 “집필되지도 않은 교과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대해 미리 염려하는 것도 본질이 아니다. 바로 ‘국정화’ 자체가 이번 논란의 쟁점인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향후 집필할 교과서에 ‘어떤 내용’이 담길 것인지에 대한 추측이 아니라, 바로 왜 ‘국정화’를 하려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한 해명이다. 사실 여기에 대한 명쾌한 해명은 현행 검정교과서제도에 문제제기를 한 대통령이나 자유경제원의 이데올로그들이 해야 한다. 검정교과서제도라는 것은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자연스럽게 좋은 교과서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시장주의를 전제하는 것이다. 이런 ‘낙관’에 필수불가결한 전제는 ‘경쟁’이다. 여러 종류의 교과서를 경쟁시키면 진화의 법칙에 따라 질적으로 나은 ‘적자’(the fittest)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검정교과서제도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국정화’라는 것은 이런 시장주의의 기조를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정부는 시장주의를 거부하고 ‘국가주의’의 길로 가고 있는가. ‘국정화’를 반대하는 입장 중에서 이런 자가당착을 지적하는 보수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자가당착이야말로 시장주의의 딜레마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흥미로워진다. 정부도 무분별하게 ‘국정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른바 ‘좌파’가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국정화’를 단행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정부의 말처럼 진짜 ‘좌파’가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팩트 체크'가 아니다. 한국에서 '좌파'는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고, 이런 의미에서 누가 '좌파'인지 엄밀하게 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팩트'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확인해야할 것은 그렇게 ‘좌파’든 뭐든 시장의 기능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들면, ‘국정화’라는 국가의 개입을 허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른바 시장주의자들이 자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소에 국가의 개입 없는 완전한 자유 시장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던 이들의 말들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이번 ‘국정화’ 논란은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와 스탈린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의 계획경제에 대항해서 오스트리아 학파를 필두로 등장한 ‘경쟁주의' 경제이론은 시장을 진화론적인 자연환경과 동일시하면서 국가의 개입 없는 완전한 시장만이 자본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는 손쉽게 이런 오스트리아 경제학파를 케인즈주의의 반대편에 놓지만 실상 이들은 케인즈의 라이벌로서 전후 자본주의 경제학을 이끌어온 두 흐름 중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생뚱맞게 출현한 것이 아니라,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신자유주의는 케인즈주의와 경쟁하다가 보수의 정치 공세로 복지주의가 쇠퇴하자 서서히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우파는 이런 자유주의를 다양한 방식으로 흡수해서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자유주의를 덜 발전된 자유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한국의 상황은 역설적으로 자본주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불일치하는 자유주의의 딜레마를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다. 시장을 절대시하는 자유주의는 이런 의미에서 특정한 이론이나 이념이라고 보기 어렵다. 역설적으로 자유주의는 경험적 실천에 따라 서로 모순된 진술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 ‘국정화’ 논란은 특별히 박근혜 정부가 이상해서 그렇다기보다, 이런 자유주의의 딜레마를 그대로 폭로하는 사례에 가깝다.
유사시에 국가의 개입을 저지할 어떤 명분이나 수단도 이른바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준비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사실은 분명 자유주의자에게는 불편한 진실이겠지만, 참으로 공고하게 보이는 이 체제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인지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고 하겠다. ‘국정화’ 논란은 그람시의 ‘변형주의’라는 관점에서 보면, 파워엘리트 모두를 만족시키는 ‘떡밥’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은 총선을 겨냥해서 집안단속과 명분을 동시에 얻었고, 여당은 노동개혁의 의제를 은폐할 수 있었다. 야당 또한 친일논쟁을 다시 부활시켜 껄끄러운 노동개혁 문제를 피해가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재차 부각시킬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가장 큰 피해자는 새로운 교과서로 입시를 준비해야할 수험생들이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