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그동안 온라인상에서 페미니즘 논쟁이 뜨거웠지만, 그렇게 생산적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본격 거론되고, 한국 사회와 관련한 문제가 여성의 관점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성문제는 사회를 구성하는 근본문제 중 하니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여성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정치적 차원을 열어내는 의제라는 사실이 거듭 확인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여전히 여성문제는 사회적 쟁점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최근에도 영화 <해리 포터>에 출연했던 엠마 왓슨이 페미니즘 발언으로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 개최된 오스카상은 정당한 여성의 몫을 주장하는 여배우들의 수상소감으로 뜨겁게 달아 오르기도 했다. 때맞춰 영국의 출판사 버소는 페미니즘 분야에서 고전으로 꼽히는 줄리엣 미첼의 <여성의 지위>를 비롯한 다양한 책들을 재출간했다. 그러나 현실은 표면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확산과 달리 갑갑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붐이 일어나는 것과 대조적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하게 표출하는 여성혐오도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지위 상승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쓴 여성혐오의 문제는 단순하게 여성 자체에 대한 반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반복해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 문제는 '저임금 노동력'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는 일상에서 여성혐오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여성차별주의적 사고방식을 통해 확대재생산되는 측면이 강하다. 이런 까닭에 일상적 차원에서 여성차별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이론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구조의 문제를 비판하는 것이 서로 결합할 때 비로소 여성혐오의 문제는 종합적인 관점을 획득하고 유의미한 논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이래로 여성차별을 극복하고자 했던 숱한 노력들은 상당한 결실을 맺긴 했지만, 또한 그만큼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다. 윤리적 측면에 국한한다면, 사회적인 여성차별의 문제는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예속>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여성을 남성에게 예속시키는 것은 인류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입장 정도만 수용해도 상당 부분 개선할 수 있다. 밀과 같은 관점은 전형적인 공리주의적 태도이기도 한데,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은 근대적인 패러다임에서 보더라도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공리주의라는 것은 사회적 구성원에게 최대한 동등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만들어야한다는 사상이다. 그래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전이 근대의 정언명령이라면, 사회 구성원 모두 평등한 권리를 실현하는 것은 무한한 성장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에게 동등한 임금을 지급해야한다는 생각도 이런 발상에서 본다면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다. 이렇듯 최초로 여성차별을 문제 삼은 사상은 자유주의였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여성운동은 이런 자유주의 사상의 한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면 여성차별이 사라질 것이라고 봤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의 사회진출이 가속화하고, 여성운동의 성과가 일정하게 축적되는 과정에서 이런 전제 또한 지극히 남성 위주로 여성 문제를 바라본 관점일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옹호하는 여성의 권리라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회에서 인정을 받은 여성에 한해서 보호 받을 수 있다는 통념을 낳는다.
시민권이라는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민’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여성만이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페미니즘의 보편성은 자격을 갖춘 '시민권'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에 속하는 문제였다. 여성해방이 결코 여성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 인류의 평등-자유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뜻이다. 당연히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은 '시민권'이 설정한 제한적 영역을 넘어서 보편성으로 나아갔다. 이 문제는 개인의 해방에서 출발한 자유주의의 가치를 '상황에 참여'하는 사건의 주체라는 보편성으로 확대해야한다는 당위명제와 같은 것이다.
자유주의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던가. 내가 다른 글에서 이미 지적했던 것처럼,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가 존 로크는 노예무역에 투자하면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다. 말하자면, 로크가 자신의 정치철학을 위해 전제했던 자유와 평등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유럽의 백인을 의미했을 뿐이다. 자유와 평등을 옹호했던 로크조차도 노예를 경제적 재화로 생각했기 때문에 유럽이 아닌 곳에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다른 인간들이 살고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자유주의가 자연스럽게 전제하는 그 '인간'의 범주에 해당하는 현실적인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념적으로 본다면,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인간'을 하나로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유주의이지만, 현실에서 그 자유주의는 그 '인간'을 나누어 위계화하고 자격이나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그 '인간'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이른바 자기계발의 명목으로 한국에서 불어닥치고 있는 '능력주의'와 '경쟁주의'가 바로 이런 자유주의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문제가 있다고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가치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자유주의에 입각한다면, 인류 보편의 평등-자유라는 관점에서 자유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적 가치에 근거해서 '진정한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한계를 넘어가려는 정치운동이기도 한 셈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자유주의가 무의식적으로 전제했던 ‘백인 여성만의 권리’를 비판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면서 동시에 필연적이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노예여성의 권리도 백인 여성과 동일하게 보장되어야한다는 생각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면, 사회적 소수약자와 연대하는 여성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여성운동에 단초를 제공한 페미니즘은 참정권 운동부터 가부장제 비판까지 다양한 분화를 거쳤다. 가부장제에 지배당하는 가족주의에 대항해서 여성의 분리를 주장하는 급진 페미니즘과 계급을 비롯한 사회적 구조의 변화가 없이 여성해방도 있을 수 없다고 믿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 서로 논쟁하면서 발전해온 것은 이런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공리주의는 절대 다수의 최대 행복,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상 아닌가요?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