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치와 비정치로 나뉘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정치라는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세상읽기.
경희대에서 문화학을 가르치고 다양한 매체에서 문화비평을 수행해왔다. 아시아적 근대성을 통해 서구이론의 문제의식을 재구성하는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박근혜는 무엇의 이름인가><인생론><마녀 프레임><이것이 문화비평이다><한국 문화의 음란한 판타지><무례한 복음> 등이 있다.
과거에 어린이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어린이라는 말 자체가 근대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할 것이다. 어린이에 대한 정의는 발명된 것이지 처음부터 존재했던 무엇이 아니다. 서양에서 어린이는 사람이지만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는 ‘말하지 못하는 생명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하는 ‘괴물’이 어린이였다. 어린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상속이라는 경제적인 문제가 대두한 이후였다.
경제체제가 바뀌고, 상속을 통해 사유재산이 승계되는 과정에서 어린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이 사실에서 명쾌하게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당수의 상식들은 근대적인 산물이다. 비록 전통의 모양새를 하고 있더라도 실제로 역사적인 맥락을 따져보면 생소한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에서도 어린이라는 말은 ‘인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도입과 무관하지 않다.
어린이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인권’을 누릴 수 있다는 자각은 근대적인 것의 핵심사상이다. 이런 사상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사실상 동등하다는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딜레마는 여기에서도 반복된다.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극단은 방임주의이고, 민주주의에 찬성하는 이들조차도 무엇 하나 제대로 결정할 수 없는 무정부상태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못한다.
‘잔혹동시’라는 규정 역시 방임주의에 대한 경계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지만 민주주의도 거부할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잔혹동시’ 논란에 숨어 있다. 어린이는 평등하지만, 그렇다고 어른과 똑 같은 존재는 아니라는 속내가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어린이가 그런 시를 썼다는 것이 문제다’라는 생각에서 ‘어른이 그런 시를 출판하도록 방조했다’는 생각까지 숨어 있는 마음의 표현은 다양했다. 그러나 이 분열은 결과적으로 어린이에 대한 이중적 태도, 더 나아가서 어린이라는 존재를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상일 뿐이다.
어린이가 그런 시를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거나, 그런 시를 동시라고 부를 수 없다는 생각은 어린이에게 절대적 표현의 자유를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딜레마는 더욱 깊어진다. 이런 생각에 찬동한다면, 결과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존재에게 허락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 결과에 동의한다면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라는 범주에 문제가 생긴다. 정말 이 논리가 옳다면 표현의 자유는 자의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고 인정해버리는 꼴이다.
‘잔혹동시’ 논란은 이처럼 단순히 어린이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옹호되었던 표현의 자유는 ‘잔혹동시’ 논란에서 자취를 감춘다. 장동민의 성희롱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표현의 자유가 모든 발언에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소수약자에 대한 혐오 발언을 표현의 자유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린이가 쓴 ‘잔혹동시’는 어떤가. 과연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것인가. 이런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도전에 직면하는 것이고, 자유의 문제를 근본에서 질문하는 다양한 도전에 맞서 적절한 기준을 마련해야하는 것이다. 이 기준은 어떻게 갖춰질 수 있을까.
말할 것도 없이 공론을 통해 가능하다. 이렇게 표현의 자유에 대한 도전이 발생하고 절대적 믿음에 대한 위기가 도래했을 때, 황급히 그것을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에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가 되는 시집을 전량 수거해서 폐기해버리거나,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되풀이하면서 소나기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거나, 내부의 적을 만들어내어서 모든 문제를 덮어씌우는 것으로 공론을 대신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내가 보기에 이런 상황이야말로 ‘잔혹동시’보다도 더 잔혹한 현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진정 우리에게 위험한 것은 10살 어린이가 썼다는 ‘잔혹동시’라기보다, 이렇게 공론을 회피하고 위기상황을 초래한 문제를 재빨리 덮어버리려는 시도이다. 원인을 짚어서 해결책을 도모하기보다, 내 아이에게 피해를 초래할 것 같아서, 또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규범을 위협하는 것이어서 사건의 당사자를 비난하고 공격하기에 여념이 없는 상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태도는 특정한 규범만을 정상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만들어 그렇지 않은 것을 없애버리는 행위를 정당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손쉬운 배제의 논리가 어떤 비극을 초래했는지 인류의 역사는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정상적인 것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과거에 정상적이지 않던 것들이 후일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미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달랐듯이, 정상성을 결정하는 규범도 시대마다 다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치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개방적 태도야말로 특정 사안에 대한 불편부당한 판단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미덕이 아니겠는가.